플라톤주의

- 主義

[라]Platonismus · [영]Plat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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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 그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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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과 그 제자들.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의 철학을 직접적으로 수용한 철학. 또는 그 학풍을 계승 · 부흥 · 개조한 철학 학파들, 즉 고(古)아카데메이아 학파, 신(新)아카데메이아 학파, 신(新)플라톤주의, 르네상스의 여러 아카데미, 케임브리지 플라톤파 등의 철학.
플라톤류(流)의 철학과 그 해석, 이데아적 철학, 이상의, 특히 이데아(계)와 현상계, 이성과 감정, 가치와 존재, 영과 육을 준별하고 전자를 우위에 두는 이원론에 가까운 사변. 종종 아리스토텔레스(Aristolels, 기원전 384/383~322/321)는 철학을 현실주의적 · 경험론적으로 일원론에 가까운 것으로 보지만, 그 또한 플라톤주의자이기에 경험론이나 유물론 등에 대립하는 모든 철학적 경향을 플라톤주의적 이라고 한다. 사상사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주의는 모든 '이데아적 철학' 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반(反)유물론적 철학이다.
〔의 미〕 플라톤의 철학과 인간성은 오랜 세월 인류의 정신적 삶과 철학의 발전 및 진보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 플라톤 이전에도 인식(학문)과 철학이 빛을 보았지만, 플라톤은 철학, 인식과 정신적인 삶 전반의 발전과 형성 과정에 새로운 출발점을 이룩하였다. 아카데메이아 학파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요학파(Peripatetism)는 물론이거니와, 에피쿠로스 학파(Epicureanism), 견유학파(Cynicus) 등 플라톤의 이론들이나 이해들에서 유래하지 않은 학설들도 플라톤의 철학의 직 · 간접적인 영향 아래 이론들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서기 3세기에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발전시켰으며, 플라톤 철학 이외에는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소크라데스(Socrates, 기원전 470/469~399)의 철학과는 상이한 철학적 방향을 띤 학파들이 소크라테스적인 개념, 즉 이론적 · 실천적 견해에 연관되거나 소크라테스적인 경향 또는 그 성격을 가지고 생겨난 것처럼, 플라톤의 철학으로부터도 아카데메이아 학파나 아리스토텔레스 및 소요학파를 통해서 다양한 학설들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이론들은 신비주의나 플라톤의 변증법에 동기를 부여받아 성립되었다. 대화편의 《티마이오스》(Timaios)에 의하면, 아카데메이아에서는 처음부터 신비주의와 종교 신학적인 견해들 혹은 신화적 형태에 의한 형이상학적인 이론들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서양 철학사 전체에 일관적으로 영향을 미친 이데아(idea) 역사의 근원이다. 플라톤은 참된 존재이자 절대적 존재인 이데아계와 이의 모상(模像)인 현상계를 구별하였다. 상대적으로 존재할 뿐인 감각적 현상계는 인식의 자료가 되며, 다(多)의 구제가 바로 철학이다. 이러한 절대적 존재와 상대적 존재의 구별은 그 후 많은 철학자들의 기본적인 사고 방식이 되어, 때때로 스스로 있는 존재와 다른 것에 의존해 있는 존재로 구분되기도 한, 실체 개념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서양의 존재론적 이원론의 출발점이었다. 보편 타당성과 논리적 합리성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데아는 변신해 오고 있다. 플라톤은 모든 대상들이, 인식을 통하여 얻은 이데아에 근거하여 이데아를 그 존재 원인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닮은 여러 가지 대상들[多]이 인식을 통하여 하나의 닮음인 이데아로 가는 것은, 그것이 좋기 때문이다. 여러 인식들은 하나의 '좋음[善]의 이데아' 로 간다. 존재의 원인은 선(善)이다. 인식은 좋아서 한다. 인식의 원인도 선이다. 인식은 중성적인 것만은 아니다. 존재하는 것이 좋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아들은 최고의 이데아인 '좋음의 이데아' 를 그 존재 원인으로 가진다. 이러한 존재 이유를 생각하는 사고 방식과 그 최종, 최고 세계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는 사고 방식은 후세에 항상 반복되었으며, 특히 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신이 세계의 존재 이유인 동시에 세계의 의미(혹은 목적)라고 보는 해석은 플라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좋음의 이데아' 에서 이데아로, 그리고 다시 사물들과그림자로 이어지는 존재의 전개는 곧 신이 세계에 전개되어 있다고 보는 사고 방식의 근원이 되었다. 가장 완전한 존재자의 개념이 플라톤에게서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선의 이데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화이트
헤드(A.N. Whitehead, 1861~1947)가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각주(해설)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서양 철학에서의 플라톤 철학의 영향력은 크다. 그리고 서양 철학의 모든 문제는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논하고 문제삼았던 것들의 범위 안에 제한되어 있다. 그리하여 플라톤의 철학은 서양 이데아적 이상론의 비조로,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와 함께 철학사에서 쌍벽을 이루고, 아카데메이아 학파와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철학사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역 사〕 플라톤주의는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플라톤을 주축으로 이데아-개념-논리적 합리성-보편 타당성 등으로 이루어진 사상적 체계를 의미한다. 플라톤이 죽은 후에 아카데메이아 원장을 계승한 그리스의 철학자 스페우시포스(Speusippos, 기원전 407?~339/338)와 크세노크라테스(Xenocrates, 기원전 396?~314)는 스승이 만년에 가르쳐 준 수학적 사변과 결부된 형이상학설-이데아 수(數)의 설-을 체계화하여 지엽적인 사변(思辨)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플라톤이 철학을 수학(주의)으로 만들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난한 것은 그들에 대해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중기 플라톤주의까지 : 아리스토텔레스는 밀레토스 학파 이후의 철학자들이 전개해 온 만물의 원리 추구의 역사를 검토하고,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기원전 460?~370?)까지의 자연 철학자(自然哲學者)들이 사물의 주요한 원인으로 본 질료(質料, 근본 물질)와 엘레아 학파(Eleaticism)의 이성적인 운동인(運動因)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발견하였다. 또한 자연 철학자에게 잘 드러나지 않았던 만물의 질료의 더 중요한 원인은, 그 질료가 질료이도록 하는 일정한 사물로 만들어 주는 원리로서의 형상(dioc)이라는 것을 플라톤의 이데아설에서 배웠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데아를 질료에서 분리되어 존재하는 추상적 · 초월적 실재로 본 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을 질료 속에 내재하는 본질, 즉 실체로 보았다. 또 그는 질료를 형상 실현의 가능성으로 보고, 더욱이 구체적 · 내재론적 · 변증법적 · 일원론적(一元論的)으로 모든 존재를 질료와 형상의 뗄 수 없는 결합, 모든 생성 과정을 현실성(형상)으로의 가능성(질료)의 전화(轉化) 발전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설명 방법을 천계(天界)에서 기상계(氣象界), 생물계, 인간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에 적용하여 고대 최대의 학문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자연주의적 · 경험론적 · 현실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질료보다도 형상을, 육체보다도 영혼을 존중하는 플라톤주의를 버리지 못하고(Metaphysics 1028), 그가 설명한 최후의 장(章)에서는 질료에서 완전히 분리된 순수 형상, 순수 현실태(現實態)를, 예컨대 천체 운행의 제1 원인으로서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즉 신(神)을, 또는 육체와 결합된 수동적 이성의 사고 작용을 현실화하는 것으로서 불멸의 비수동적 이성(非受動的 理性)-후세에서 말하는 이른바 능동적 이성(能動的 理性)-을 인정하였다. 또 플라톤보다 더 이론적 생활을 존중하고 실천적 · 제작(생산)적인 생활을 평가 절하하였기 때문에, 그의 '현실성' 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비현실적 · 비실천적이 되어 버렸다. 따라서 그의 강한 영향 아래 후세의 제철학(諸哲學)이 관념론적, 비현실적인 것들이 되었다. 학원 가로수길(Peripatos)을 산책하면서 가르쳤기 때문에 소요학파라고 불린 그의 제자로는 소요학파의 제2대 지도자인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 기원전 372?~287?), 제3대 지도자인 스트라톤 Straton, 기원전 ?~270?)이 유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철학에도 불구하고 플라톤 학파는 여전히 폴레몬 Polemon, 기원전 ?~270?), 크세토파네스 등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성하였으며, 이들을 고(古)아카데메이아 학파라고 한다.
기원전 270년에 학원을 계승한 아르케실라오스(Aresilaos, 기원전 316/315~241?)는, 궁극적인 지혜는 문자로는 전달할 수 없고 애지(愛知, 철학)는 애지자 간에 교환되는 진리의 대화 탐구(對話探究)로써만 구현된다고 한 플라톤 학설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진리는 발견되지 않고 탐구될 뿐이다' 는 회의론을 제창하였다. 그 후 아카데
메이아 학파는 회의론을 대표하여 일정한 주장(dogma)를 제창한 스토아 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와 대립하였다. 이를 신(新)아카데메이아 학파라고 한다. 기원전 2세기에는 카르네아데스(Carneades, 기원전 214~129)가 대표적이었으나, 기원전 2세기 말 필론(Philon of Larissaios, 기원전 160?~80)와 안티오코스(Antiochos of Ascalon, 기원전 120?~68)가 회의론을 버림으로써 신아카데메이아 학파는 끝났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서 배운 치체로(M.T. Cicero, 기원전 106~43)의 책을 통해서 회의론은 후에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편 광의로는 플라톤주의 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 일정한 학파를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1~2세기경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주로 플라톤 철학의 종교적 경향을 강조한 사상가들을 중기 플라톤주의자라고 총칭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46?~119?)가 있으며,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한 여러 학파의 영향을 현저히 받았기 때문에 절충파로 불리기도 하였다. 2세기의 대표적인 플라톤주의자로는 가이우스(Gaius, ?~?), 알비누스(Albinus), 헤로데스 아티코스(Herodes Atticos, 101?~177), 그리고 아파메아의 누메니오스(Numenios of Apamea, ?~?)가 있다. 중기 플라톤주의는 유대 문화에도 영향을 미쳐, 구약성서에 근거하여 철학 체계를 세우려 하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n Alexandrinus, 기원전 20?~서기 50?)에게 그리스 철학의 지식을 제공하였다.
신플라톤주의 : 3세기에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에 의해 시작된 신플라톤주의도 광의로는 플라톤 학파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신플라톤주의는 고대 이교 철학의 마지막 결정체였으나, 아우구스티노의 사고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철학의 시작이었다. 그렇지만 신플라톤주의가 플라톤의 철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플로티노스의
미학 이론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플로티누스는 '미(美)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사물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고쳐 답변하였다. 스토아 학파는 미가 좋은 비례(good proportion)의 문제이며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의 조화에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플로티누스는 이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지적하면서, 비례는 수적인 것일 뿐 그것이 반드시 질적인 미를 가져온다고 하기는 힘들다고 하였다. 게다가 비례는 복합체들을 전제로 하지만, 단순체들도 많다. 그런데 '사유가 아름답다고 한다면, 사유가 어떻게 다른 사유와 좋은 비례라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이 서로 동의해서 그렇다면, 나쁜 사유들 사이에서도 일치와 합의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아름다움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덕(德)이 어떻게 비례가 잘 되었다고 하겠는가? 덕은 크기나 수와 같지 않다. 영혼의 부분을 인정하였으나, 그 모양이나 결합의 구조는 무엇인가? 사유의 부분은? 지성의 아름다움이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가?' 미는 비례가 아니고 형상이다. 자연 속의 형상이며, 예술가의 활동에 의하여 나타날 수도 있다. 예술가는 미의 형상에 참여하고, 자연의 형상은 더 높은 형상에 참여하고, 급기야 형상들의 형상 그 자체로 향한다. 플로티노스는 미의 철학을 전개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가시적 · 비가시적인 미들을 이끌어내어 모든 미의 원천, 즉 선(Good)으로 비약 · 상승하려 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인간 정신이 신을 향해 여행하게 되며 황홀경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자연, 예를 들어 돌에도 미가 있으며, 예술가에 의하여 그 위에 형상이 추가될 수 있다. 모든 사물과 예술품들은 각자가 미의 형상에 개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변한다 는 경험 자체만으로는 미가 구성되어 나오지 않는다. 그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자가 있어야 한다. 이 각각의 미의 형상들을 다시 집약, 즉 하나로 묶는 것은 선의 이데아이 다. 이것이 원제작자(original maker)이며 일자(一者)이 다. 이 일자는 자기 자신이 움직이지 않고 충족된 자이 나, 하위의 다른 형상들에 관계하기 위하여 분할되어야 한다는 어려움을 안 플로티노스는 일자 자체의 충족된 힘에 의하여 샘물에서 흘러나오듯이 분출되어 나온다고 하였다.
이런 플로티노스의 존재론이 맞닥뜨린 어려움을, 아우 구스티노는 창조자의 창조로 보아 손쉽게 해소하였다. 그리스도의 중개로 상위계와 하위계의 관계에 대한 어려 움이 모두 해결되며, 차원을 달리하는 아름다움의 원천 이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범주 안에, 조건을 달리하면 악과 죽음과 고통과 죄도 모두 그곳에 들어가는 그런 미 학이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의 미관은 플로티노스에 게서 구한 것이 확실하다.
그리스도교 플라톤주의 : 그리스도교 플라톤주의자들
은 플라톤 철학이 성서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2세기 중엽부터 그리스 철 학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던 교부들은 중기 플라톤주의 의 용어로 신앙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 최초의 교부는 다신교를 부정하기 위하여 플라톤의 종교 철학을 수용한 유스티노(Justinus, 100/110~165)였으며, 오리제네스(Origenes, 185~253)는 이 전통을 이어받아 그리스도교 신앙과 중기 플라톤주의를 결합시켰다.
반면 라틴 교부들은 교회의 조직과 통치 등 실질적인 문제에서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그리스 교부들에게 대항할 만한 사변적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다만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가 3권으로 된 《성직자들의 직무론》(De officiis ministrorum, 391)을 저술하여 그리스도교 도덕론을 말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 후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아우구스티노가 나타나 심오하고 광활한 사색과 풍부하고 열렬한 감정으로써 본격적으로 참 다운 그리스도교적 신학 체계를 세워 라틴 교부들의 면목이 일신되었다.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Confessiones, 397~401)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상적 편력(遍歷)을 거친 후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오의 설교와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의 저서에서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395년 이후 북아프리카 히포의 주교로 활동하였다. 그는 내적 경험의 성찰에서 출발, 신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을 개조하여 중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그리스도교의 이데아론적 세계관을 창출하였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은 충만한 존재로서 절대적 선이며, 스스로 갖추고 있는 이데아를 원형으로 세계를 창조하였다. 6세기 초의 인물로 여겨지는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Dionysius Areopagita)는 프로클로스(Proklos, 410?~485)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우주의 위계 질서에 관한 체계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순교자인 보에시우스(A.M.T.S. Boetius, 470/475?~524)는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ne Philosophiae)에서 플라톤의 일신론과 도덕론을 재현하였다.
하느님의 창조에 관한 견해와 인간의 의무 및 운명에 관한 견해를 지닌 일신론은 12세기 샤르트르 학파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플라톤주의자인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은 중세에도 지속적으로 미쳤는데,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이는 하느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을 한 캔터베리의 안셀모(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였으며, 에리우제나(J.S. Eriugena, 800/815?~877?)는 니사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yssenus, 335?~395?),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 막시모 콘페소르(Maximus Confessor, 580~662)에 의하여 발전된 그리스도교 플라톤주의 전통을 서유럽에 전파하였다. 에리우제나의 사상은 서유럽의 신비주의와 13세기 스콜라 철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콜라 철학은 처음에는 플라톤, 특히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는데, 13~14세기에 전성 시대를 이 루었다. 대표적 철학자는 보나벤투라(Bonaventua, 1217?~1274)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 스코투스(J.D. Scotus, 1265/1266~1308)이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초자연적 · 신적 세계에 관하여서는 신플라톤주의적, 아우구스티노적 신비주의를 취하고 자연의 세계에 관하여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최상의 권위로 보아, 《이교도 논박 대전》(Summa contra Gentiles, 1261~1264)에서 대규모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을 수립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보편(普遍)은 실체적 형상으로서는 개물(個物) 속에 있으며 추상 개념(抽象概念)으로서는 개물의 뒤에 있지만, 신의 사상(이데아)으로서는 개물보다 앞에 실재한다. 토마스의 신학과 세계관은 현대에도 신토마스주의(Neothomism)로 살아 있다. 플라톤주의가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르네상스~현대 : 중세의 정치적 사회적 질서가 가장 일찍 해체된 곳은 이탈리아였다. 그리스 정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1431년에 개최된 바젤 공의회는 1439년 장소를 피렌체(Firenze)로 옮겼고, 동로마 제국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황제 요한 8세(1425~1448)를 비롯한 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참석하였다. 이를 계기로 피렌체는 세계에서 가장 문명화된 도시로 르네상스의 발상지 중 한 곳이 되었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자 많은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피난을 와, 그로 인해 먼저 부흥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세력으로 오랫동안 압제를 받던 플라톤 철학이었다. 당시의 철학자로는 게미스투스 플레톤(G. Gemistus Plethon, 1355?~1450/1452), , 그의 제자로 나중에 추기경이 된 베사리온(J. Bessarion, 1403~1472) , 피치노(M. Ficino, 1433~1499) 등이 있다. 특히 피치노는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의 후원을 받아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설립하였으며, 최초로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저술을 라틴어로 완역하였다. 물론 피렌체에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도 있었으나 여러 파로 나누어져 플라톤주의자들에 비해 불리하였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먼저 일어났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프로테스탄티즘(Protestantism)에 대하여 보수적이었고, 독일은 종교 개혁으로 정치적 분열을 일으켜 30년 전쟁을 겪게 되면서 철학을 연구할 여유가 없 었다. 그러므로 근대 철학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먼저 발전되었다. 이탈리아의 자연 철학과 독일의 신비주의는 중세 사상을 떠나 새로운 세계관적 입장에 서게 되었으나, 예리한 개념을 구성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근대 철학의 출발은 영국의 베이컨(F. Bacon, 1561~1626)이 주장한 경험 철학과 프랑스의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가 주장한 이성론에서 시작된다. 플라톤 철학의 상반신과 하반신을 떼어내어 어느 한쪽을 더욱 강조하는 철학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베이컨은, 당시 학문의 전통적인 체계로 인정받아 온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체계는 비생산적이기 때문에 새로운 기초가 필요하며, 그것을 "가장 근원적인 원리로부터의 대건설" (Instauratio magna ab imis fundamentis)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저서인 《학문의 신기관론》(Novum Organum Scientiarum, 1620)에서는 귀납법을 새로운 논리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인식 방법을 제창하였다. 이 방법에 의하면 인간의 지식은 전래의 스콜라적인 의견, 습관, 언어 독단으로부터 오는 '이돌라' (idola, 우상, 환상)를 극복하여, 감각으로부터 출발하고 실험에 근거하여 귀납적(歸納的)으로 자연 법칙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처럼 경험을 중시하는 인식론은 흡스(T. Hobbes, 1588~1679)의 유물론적 경험론, 로크(J. Locke, 1632~1704)의 경험 인식론, 버클리(G. Berkeley, 1685~1753)의 지각 존재론, 급기야 흄(D. Hume, 1711~1776)의 회의론적 경험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은 경험에서 어떻게 지식과 인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자세히 논하지는 못하였다.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Theaetetos) 편에서 이미 이것을 지적한 바 있다.
비슷한 연대에 수학적 인식의 확실성을 기반으로 철학을 정립한 이가 데카르트이다. 수학자, 철학자, 해석 기하학의 창시자이며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스콜라적 교육을 받고 후에 수학, 자연학을 연구하였다. 스콜라 철학에 대한 불만에서 직관(直觀)과 연역(演繹)에 의한 새로운 철학 방법을 제창하였으며, 확실한 단서를 찾기 위하여 먼저 일체를 의심하고(방법론적 회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를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삼았다. "명석, 판명지(判明知)는 진(眞)이다"라는 원리와 '생득관념' (生得觀念)에 의하여 정신과 물체를 서로 독립적인 실체로 보는 이원론(二元論)을 세웠다.
본유 관념적 방법에서 유래하는 철학은 스피노자(B. de Spinoza, 1632~1677)의 실체 논쟁이나 라이프니츠(G.W. von Leibniz, 1646~1716)의 실체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계 · 현상계의 문제와 동일한 문제가 드러나자 이 두 경향을 종합하려는 철학 사조가 나타난 것이다. 근대 초기의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정신의 부활이었고, 17세기의 철학은 수학적이고 체계적이었으며, 18세기의 철학은 깊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근대 철학은 18세기 계몽사조의 완성자이며 극복자였던 칸트(I. Kant, 1724~1804)에 이르러서야 그 특색을 나타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독일 관념론의 창시자로, 그 이후 독일 철학은 낭만주의의 관념론으로 발전하여 형이상학적 유심론의 체계를 이루었다.
칸트는 독일 계몽기 비판 정신을 대표함과 동시에, 헤겔(G.W.F. Hegel, 1770~1831)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고전 철학의 기점을 이룬 철학자이다. 라이프니츠와 볼프(F. von Wolff, 1679~1754)의 합리주의를 배운 후, 흄 등 영국 경험론에서 영향을 받아 영혼, 우주, 신, 자유 등에 관한 라이프니츠와 볼프의 형이상학에 의혹을 품고 학문적 인식의 범위를 경험의 세계에 한정시켰다. 그에 의하면 경험의 세계는 초개인적인 주관〔意識一般〕 형식으로서의 시간, 공간, 범주에 의하여 형성되고, 이 세계 이외의 초경험적인 것은 신앙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이 할 일은 이와 같은 한계를 명확히 하여 과학적(수학적 물리학적) 인식, 도덕적 양심, 미적(美的) 판단의 성립 조건을 구명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칸트는 현상의 배후에 잠재해 있는 불가지의 '물자체' (物自體)의 상징을 설명하지 못하였다. 플라톤도 경험적 재료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물자체가 그 존재를 알 수 없는 이데아라고한 것은 같지만, 칸트는 무리하게 한정시켰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누스(이성)를 통해서 얻는 실재라고 본 것이다. 칸트에서 시작한 독일 고전 철학은 피히테(J.G. Fichte, 1762~1814)의 절대적 자아(칸트의 의식 일반의 강화), 셀링(F.W.J. von Schelling, 1775~1854)의 주객 동일화의 동일 철학을 거쳐 헤겔에 이르렀다. 헤겔은, 진리와 이데아는 하나이며 동일하다고 하였다. 즉 한 사물에 이데아가 있으면 진리는 존재하는 것이며, 이데아는 개념과 객관성의 통일성(일자성)이다 헤겔은 플라톤의 변증법의 발전 과정을 프로클로스의 변증법과 구별하였다.
현대 철학 사상에서도 플라톤주의는 살아 있다. 실용주의 내지 분석 철학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영국 경험론이 그 전통을 이어 가고 있으며, 생철학(Lebensphilosophie)은 플라톤의 생명 철학을 제한적으로 재현시켰다고 여겨진다. 디오니소스(Dionysos)와 아플론(Apollon)의 대립이나 엔트로피(entropy) 사상 또한 계속된다. 플라톤은 우주를 살아 있는 유기체로 관찰하였다. 실존 철학에서 생(生)의 밑바닥에 허무가 있다는 것은, 삶을 의미 있 게 살아야 한다(음미되지 않는 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플라톤의 죽음의 연습을 재현하는 듯하다. 꼭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라톤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현상 구제에 있다. 20세기 실존주 의의 대표자인 하이데거(M. Heidegger, 1889~1976)는 전통 철학과 형이상학을 극복하기 위하여 표상 철학을 극복하였다고 하지만, 사유 자체와 그 진술 자체가 표상을 떠나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보완적인 측면은 있 겠으나 플라톤에게는 더 큰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있었다. (← 베이컨 ; 보나벤투라 ; 신플라톤주의 ; → 독일 관념론 ; 생의 철학 ; 소크라테스 ; 스콜라학 ; 스토아 학파 ; 신플라톤주의 ; 실존 철학 ; 아리스토텔레스 ; 에피쿠로스 ; 철학 ; 칸트 ; 토마스 아퀴나스 ; 플라톤)
※ 참고문헌  P. Shorey, What Plato said, Chicago, 1933/ G.C. Field, Plato and his contemparies, London, 1930/ F. Solmsen, Plato's Theology, Ithica, N.Y, 19421 A.E. Taylor, Plato, London, 1926/ J. Burnet, Platonism, Univ. of California Press, 1928/ G.M.A. Grube, Plato's Thought, London, 1935/ W.K.C. Guthrie,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6 vols., Cambridge Univ. Press, 1961~1981. [金完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