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뢰리, 클로드 Fleury, Claude(640~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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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플뢰리.

클로드 플뢰리.

교회사가. 사제이며 수도원장. 교육자. 법률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교회사의 포괄적인 기술을 시도한 새로운 방법의 대두에 자극과 영향을 준 두 형태, 즉 갈리아주의(Gallicanismus)와 교황 지상주의(Ultramontanismus) 중 전자의 노선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교회사 저술가이다.
[생애와 활동] 1640년 12월 6일 파리에서 노르망디(Normandie) 출신인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클레르 몽(Clermont)의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법학을 공부하여 18세 무렵부터 법정에서 활동하면서 시민법과 교회법, 역사, 문학과 고고학 서적들을 섭렵하였다. 초대 파리 고등법원장인 라무아뇽의 기욤(Guilaume de Lamoignon)이 주재한 모임에서 만난 보쉬에(J.B. Bossuet, 1627~1704)의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이후 플뢰리는 파리의 여러 저명 인사들과 친분 관계를 맺었다.
1669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보쉬에의 소개로 프랑스 궁정에 알려진 후, 생애 대부분을 궁정 중심으로 활약하 였다. 루이 14세(1643~1715)가 도팽(Dauphin,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과 왕자들의 교육을 그에게 맡기고 싶어하였기 때문에 1672년에 콩티(Conti)의 왕자들의 가정 교사가 되었다. 이 임무가 1680년에 끝나자, 그는 루이 14세와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Louise de La Vallière)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자인 어린 백작의 가정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어린 백작이 1684년에 사망하자, 왕은 플뢰리를 로데즈(Rodez) 교구에 있는 록디외(Loc-Dieu) 수도원의 아빠스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그는 1689년까지 모(Meaux)의 교구장이 된 보쉬에의 교구 업무를 보좌하였다. 그 후페늘롱(Francois de Salignac de La Mothe Fénelon, 1651~1715)을 통해 궁정으로 소환되어, 루이 14세의 손자들 즉 부르고뉴(Bourgogne)와 앙주(Anjou) 그리고 베리(Berry)의 어린 대공들을 가르쳤다. 플뢰리는 16년 동안 이 직책을 수행하였으며, 1706년에는 아르장퇴유의 노트르담(Notre-Dame d'Argentuil)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조용하고 영성이 깊었던 그는 논쟁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포르루아얄 수녀원(Por-Royal des Champs)의 얀센주의(Jansenismus) 문제에서도 한걸음 물러서 있었으며, 정적주의(quietismus)를 둘러싸고 보쉬에와 페늘롱 사이에논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양쪽 모두와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다. 1691년에 라 브뤼에르(Jean de La Bruyère)를 계승하여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 되었으며, 1723년 7월14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저 술] 플뢰리는 법정 활동을 시작하며 프랑스 여러 저명 인사들과 교분을 쌓아 갈 무렵에 《프랑스 법률사》 (L'Histoire du droit frangais)와 《교회법 제정》(L'institution au droit ecclesiastique)을 저술하였다. 하지만 그 출판이 늦어져 전자는 1674년에, 후자는 1677년에 간행되었다. 그는 포르루아얄과 오라토리오회(Oratoriani)의 정신과 관련된 작품 여러 편을 저술하였는데, 그중에는 스페인어, 독일어, 이탈리아로 번역되고 파리에서만도 여덟 차례나 출판된 《연구의 선택과 방법에 대한 논고》(Traité du choix et de la méthode des études, 1686)도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관습》(Les Moeurs des Israélites, 1681)은 국가의 예절과 관습을 다룬 볼테르(Voltaire, 1694~1778)의 접근보다 한발 앞선 작품으로 《그리스도교의 관습》(Les moeurs des chrétien, 1681)과 《교리사》(敎理史, Catéchisme historique, 1683)로 이어졌다.
플뢰리의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저술은 총 20권으로 된 《교회사》(Histoire ecclésiastique, 1690~1720)이다. 18세기를 대표하는 서적으로 간주되는 이 저서는 그리스도교의 기원부터 1414년까지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서, 그의 갈리아주의적인 경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보다 더 갈리아주의적인 경향이 명백히 드러나는 작품으로는 1680년에 이미 저술되었으나 간행이 늦어진 《갈리아 교회의 자유에 대한 담론》(Discours sur les libertés del'Eglise gallicane, 1724)이 있다.
[의 의] 플뢰리의 《교회사》는 마비용(J. Mabillon, 1632~1707)과 티몽(L.S. le Nain de Tillemont, 1637~1698)의 영향을 받았으며, 수려한 문체로 작성되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교회사 서술이 이루어졌는데, 《교회사》도 갈리아주의와 교황 지상주의 사이의 대립과 그에 상응하여 프랑스에서 형성된 새로운 정세에 영향을 받은 결과물로서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교회사학 ; 보쉬에, 자크 베니뉴 ; 얀센주의 ; 정적주의 ; 페늘롱, 프랑수아 드 살리낙 드라 모트)
※ 참고문헌  M.M. Barry, 《NCE》 5, 2003, p. 7621 C. Constantin, (DTC) 6.1, pp. 21~241 J. Calvet, 《Cath》4, pp. 1343~1344. 重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