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나텔리, 주세페 마리아 Pignatelli, Giuseppe Maria(1737~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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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스페인의 예수회원. 축일은 11월 28일.
1737년 12월 27일에 스페인 북동부의 사라고사(Zaragoz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돈 안토니오(Don Antonio Pignatelli)는 칼라브리아(Calobia)의 몬텔레오네(Monteleone) 공작 가문 출신이며 어머니 마르케사 프란치스 카(Marquesa Francisca Moncayo)는 스페인의 푸엔테(Fuente) 백작 가문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피나텔리가 다섯 살 때, 아버지는 그 4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피나텔리와 막내 동생인 니콜라스(Nicholas)는 결혼한 누이인 아체라(Acerra) 백작 부인의 집에서 잠시 살다가, 사라고사에 있던 예수회원들의 배려로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였
다. 피나텔리는 16세가 되던 해에 귀족의 수도회 입회에 필요한 왕의 허가를 받은 후 1753년 5월 8일 타라고나 (Tarragona)의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칼라튜드(Calatyud, 1756~1759)와 사라고사(1760~1763) 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리며 공부에 매진하였으나, 이후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히던 결핵에 걸린다. 1762년 사제 서품을 받고 공부를 마친 그는 사라고사에서 가르치며, 감옥에서 죄수 담당 신부로 활동하였다. 특히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들 을 자애롭게 돌보아 '사형수들의 아버지' 라고 불렸다.
1766년의 기근으로 사라고사와 마드리드(Madrid)에서 군중 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피나텔리가 방화와 살육 을 자행하는 군중들을 설득하자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3세(1759~1788)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그러나 재상 아란다(P.P. Aranda, 1718~1798)는 피나텔리가 봉기를 선동한 인물이라고 모함하였을 뿐 아니라, 왕권 강화를 위하여 1767년 스페인의 예수회원 6,000명에 대해 전격적인 추방령을 내렸다. 사라고사의 예수회 원장 솔데비야(Soldevilla) 신부는 스스로에게 이러한 위기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피나텔리에게 원장직을 넘겼다. 피나텔리는 동생 니콜라스 신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해 주겠다는 왕의 제의를 거절하였고, 결국 아라곤(Arag6n) 관구에 속한 모든 예수회원들이 타라고나 항구에 모였다. 4월 3일에 '위기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관구 회의의 권한을 피나텔리 신부에게 위임한다는 결정이 내려진 후, 피나텔리 신부의 지휘 아래 600명의 예수회원들은 13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이탈리아의 치비타베키아(Civitavecchia)로 갔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가 보장한 상륙 허가가 없다는 이유로 상륙을 거부당하고 코르시카(Corsica) 섬으로 뱃머리를 돌렸으나, 섬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무려 18일 동안 배에서 기다리다가 결국 서쪽 해안의 항구 도시 아작시오(Ajaccio)의 예수회 신학원과 프란치스코회의 집 그리고 일부는 비어 있는 집들에 잠시 머물렀다. 3주 뒤 다시 섬의 최남단인 보니파시오(Bonifacio)로 가서 머물렀으나, 11개월 뒤에 코르시카가 프랑스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이미 1762년 예수회를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하였기에, 일행은 제노바 근처의 해안으로 쫓겨 갔다. 이곳에서 피나텔리는, 예수회 일행 이 치비타베키아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지만 예수회의 해체 요구를 수용하지는 않았던 교황 글레멘스 13세(1758-1769)가 페라라(Ferara)에 거처를 제공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와 예수회원 일행은 페라라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멕시코와 페루의 선교지에서 쫓겨난 예수회원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1773년 7월 21일 교황 글레멘스 14세(1769-1774)가 스페인의 강력한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회의 해체를 선언 하는 짧은 교서를 발표하자, 페라라의 예수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피나텔리는 볼로냐(Bologna)에 은거하였 다. 그는 성무를 금지당한 이 기간 동안 기도와 공부, 책 수집, 그리고 예수회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몰두하였으 며 당시 3,000여 권의 책을 모았고 볼로냐에 모인 옛 예수회원들이 일자리를 찾도록 도왔다. 그런데 교황의 선
언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과 러시아에서는 학교 운영을 위해 예수회를 해체시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파나텔 리는 교황 비오 6세(1775~1799)로부터 그곳의 예수회에 입회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지만, 건강상의 문제와 동생 에 대한 염려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788년에 파르마(Parma)의 페르디난도(Ferdinando) 공작이 교황 비오 6세로부터, 파르마 공국에 벨로루시 (Belarus, 백러시아) 소속의 준관구 설립 승인을 받자, 1797년 7월 6일 피나텔리는 파르마에서 다시 장엄 서약 을 하고 예수회에 재입회하였다. 후에 페르디난도 공작은 예수회의 적들에게 독살을 당해 피나텔리 신부의 팔에 안겨 죽었다.
1798년 2월 20일 교황 비오 6세는 로마에서 프랑스 군인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시에나(Siena)로 이송되었다 가 피렌체(Firenze)의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병약해진 교황은 들것에 실려 프랑스의 발랑스 (Valence)로 끌려갔다. 교황이 피렌체에 머물 무렵, 피나텔리는 파르마에서 수련자를 받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수련장으로서 새 회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803년 5월 7일에는 수련소를 콜로르노(Colomo)로 옮겼다. 그리 고 이탈리아 관구장에 임명한다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 총장의 연락을 받은 후, 남쪽으로 의 진출을 꾀하였다. 1804년 12월 3일 그는 교황 비오 7세(1800~1823)의 허락을 받아 나폴리의 공동체를 거점 으로 예수회를 재건하였다. 이때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아메리카 등 각국 출신의 옛 회원 들 170명이 재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806년 3월 30일 프랑스의 황제인 나폴레옹 1세(1804~1814/1815)가 다시 칙령을 반포하고 나폴리 (Napoli)가 프랑스에 재점령되자 회원들은 또다시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로마로 간 피나텔리에게 교황 비오 7 세는 예수 성당과 로마 신학원을 돌려주었다. 피나텔리는 콜로세움(Colosseum) 뒤편에 버려진 집 한 채를 사서 거처로 삼고, 로마를 점령 중인 나폴레옹 군대의 눈을 피해 숨어 지냈다. 이곳에서 그는 사르데냐(Sardegna) 예수 회의 재건(1807)과 로마, 오르비에토(Orvieto), 티볼리(Tivoli)의 예수회 신학원 개원을 지휘하였다. 그러던 중 지병인 결핵이 악화되어 1811년 10월 15일 마지막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죽음을 맞을 때까지 매일 봉성체를 하다 가 1811년 11월 11일 로마의 산 판탈레오네(San Pantaleone)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그렇게도 원하고 또 노력하였던 예수회의 재건은, 교황 비오 7세에 의해 1814년 8월 7일 교서로 발표되었다. 피나텔리 신부는 1933년 교황 비오 11세(1922~1939)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4년 교황 비오 12세(1939-1958)에 의해 시성되었다. (→ 스페인 ; 예수회)
※ 참고문헌  R.F. Copeland, 11, 2003, Pp. 337~338/ J. Wrba, 《LThK》 8, 1999, p. 235/ J. Dehergne, 6, pp. 1021~1022. [宋炯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