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순교자. 신부. 카푸친 작은 형제회 회원. 법률가와 지크마링겐의 수호 성인. 축일은 4월 24일.
1578년 10월 독일 슈바벤(Schwaben) 지역의 지크마링겐(Sigmaringen)에서 태어났다. 정치 · 종교적인 혼란 때문에 지역 자료가 보존되어 있지 않아 어린 시절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부친은 플랑드르계였고 피델리스의 원래 이름은 마르쿠스 로이(Markus Roy)였다고 한다. 1603년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Frei- burg im Breisgau)의 프라이부르크 알브레히트 루트비히 대학교(Freiburg Albrecht-Ludwigs-Universitat)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스토트칭겐(Stotzingen) 백작가의 가정 교사가 되어 1604~1610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를 여행하였다. 여행 기간 동안 그는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였는데, 동행하였던 백작의 어린 아들은 스승의 이런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1611년에 교회법과 시민법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법조계의 공공연한 부패상에 실망하여 법률가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카푸친 작은 형제회 입회를 결심, 1612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그해 10월 4일 프라이부르크에 있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이때 받은 수도명이 지크마링겐의 피델리스이다. 그는 수련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당시 그의 영적 성숙에 대하여 기록한 책은 훗날 해체나우어(M. Hetzenauer) 신부에 의하여 편집되었다.
피델리스는 1613년 10월 4일 첫 서약을 하고 콘스탄츠(Konstanz)와 프라우엔펠트(Frauenfeld)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며, 1617년부터 설교를 시작하였다. 라인펠트(Rheinfeld, 1618~1619), 펠트키르히(Feldkirch, 1619~1620), 프라이부르크(1620~1621)의 수도원장을 차례로 역임하고 1621년부터 다시 펠트키르히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는 첫 설교를 시작하였을 때부터 강론과 글을 통해 가톨릭 교회에서 벗어난 이들을 회유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익명으로 칼뱅주의와 츠빙글리파에 관해 많은 팸플릿을 작성하였으나, 그 글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1621년 11월 13일, 펠트키르히 수도원장이던 피델리스는 라이티아(Ratia) 지역의 사람들을 다시 가톨릭 교회로 개종시킬 임무를 수도회로부터 위임받았다. 이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 칼뱅주의자가 된 이유 중 하나는 사제들의 무지와 열정의 부족이었다. 피델리스는 이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사죄(死罪) 중에 죽지 않게, 그리고 신앙을 위해서 죽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꾸준히 기도하였다. 또한 철저한 청빈 속에서 하루의 삶을 지탱해 주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으며 오직 십자가, 성서, 시간 전례서와 수도회의 회칙만을 지니고 다녔다. 피델리스는 1608년부터 이미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그라우빌덴(Graubunden) 주의 마이엔펠트(Maienfeld)에 도착하여 설교와 교리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강한 반대에 부딪혔고 위협과 모욕을 당하였으나,
성당이나 거리에서만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집회 장소에서도 거침없이 설교를 하였다. 하루에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설교를 한 적도 많았다. 밤늦도록 관리나 시민들과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던 치저스(Zizes)에서 는 결국 유력 인사인 루돌프 데 살리스(Rudolph de Salis)를 필두로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처럼 피델리스의 노력이 큰 성공을 거두자, 위협을 느끼게 된 프로테스탄트 설교가들은 피델리스의 선교가 종교 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 그 지방을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두려는 준비 과정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 려 주민들을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1622년의 사순 시기 동안 피델리스는 정열적으로 설교를 하고, 펠트키르히로 돌아가 수도회의 참사회에 참 석하여 몇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재설립된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에서 그라우빌덴 지방 선교의 공식 책임자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피델리스는 자신을 비롯한 선교사들이 곧 순교하게 될 것이라고 예감하였으며, 펠트키르히에서의 작별 강론은 그런 생각이담긴 것이었다.
돌아가는 길 곳곳에서 들려오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수사들을 죽여라!' 라는 외침을 무시하면서 그라우빈덴 의 프뢰티가우(Prattigau)에 있는 세비스(Seewis)로 돌아온 피델리스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강론을 시작하였지만 교회 안팎의 소란 때문에 결국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성당 문을 지키던 몇 명의 오스트리아 병사가 살해당하자 칼뱅주의자 한 사람이 그를 안전한 장소로 안내하겠다고 하였지만, 피델리스는 자신의 목숨은 하느님의 손에 달 려 있다고 말하며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하고 성당 밖으로 나왔다. 성난 군중에게 에워싸인 상태에서 이를 지켜 보던 칼뱅주의자가 배교를 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나는 이단을 뿌리 뽑으려고 여기에 온 것이지, 이단의 일원이 되려고 온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군중은 피델리스를 공격하였으며, 1622년 4월 24일 그는 포교성성 설립 후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그해 11월에 오스트리아가 그 지역을 정복한 후, 그의 유해는 펠트키르히 수도회 성당에 안치되었으나 머리와 왼팔은 쿠어(Chur) 주교좌 성당에 남겨 졌다. 1729년 3월 12일에 시복되고 1746년 6월 26일 시성되었으며, 성화는 대부분 머리에 상처를 입고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으로 묘사되며, 문장은 곤봉 모양이다. (→ 카푸친 작 은 형제회)
※ 참고문헌 F.D.S. Boran, 5, 2003, p. 713/ P. Willibrord De Paris, 4, pp. 1262~1264/ D. Farmer,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96, p. 179. [宋炯萬]
피델리스, 지크마링겐의 Fidelis a Sigmaringa(1578~1622)
글자 크기
12권

피델리스 성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