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압박으로 위험에 처한 동로마 제국이서유럽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로마 교회와 동방 교회의 일치를 모색하면서 공의회 우위설(Conciliarismus)을 주장하는 이들이 득세하였던 바젤 공의회(1431~1437)를 반대한 교황 에우제니오 4세(1431~1447)가 페라라(Ferrara,1438. 1~1439. 1), 피렌체(Firenze, 1439~1443) 로마(1443~1445) 등지로 이전하면서 개최한 공의회.
[페라라 회기]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 공의회 의장으로 임명받은 알베르가티(Niccolo Albergati, 1375~1443) 추기경은 1438년 1월 8일 페라라의 산 조르조 주교좌성당에서 장엄하게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에서 온 대주교 4명, 주교 20명이 참석하였을 뿐이나, 알베르가티 추기경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지지를 얻어 바젤에서 페라라로 옮겨온 이 공의회가 합법적임을 선언하였다.
총 일곱 번의 회의 중 1월 10일에 개최된 세 번째 회의에서는 바젤 공의회에 반대하는 교령이 공포되었고, 1월 27일 교황이 도착한 이후 2월 8일에도 같은 취지의 교령이 다시 공포되었다. 참석자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하여 2월 11일에는 5명의 추기경, 4명의 대주교와 36명의 주교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더구나 2월 8일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한 8세(1425~1448)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셉 2세, 그리고 20여 명의 동방 교회 주교들이 베네치아(Venezia)에 도착하여 페라라로 즉시 사절을 파견하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던 서방 지역의 사절들, 즉 포르토(Porto)의 안토니오 주교, 디뉴(Digne)의 베드로 주교, 코론(Coron)의 크리스토폴 주교만이 아니라 쿠사의 니콜라오(Nicolaus Cusanus, 1401~1464)도 공의회에 참석하여 3월 1일에는 동방 교회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하여 의논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는 바젤 공의회 다수파의 강력한 반대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3월 8일에 교황과 반목 관계에 있던 바젤 공의회의 의장 체사리니(Giuliano Cesarini) 추기경이 페라라에 도착하여 더 이상 바젤의 결정에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 페라라에서 공의회를 개최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3월 4일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도착하고 나흘 뒤인 8일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니체아 · 에페소 · 키예프의 수도 대주교들, 그리고 동방의 세 총대주교(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대리인들을 포함한 동방 교회 전역의 장상들과 함께 도착하였다. 동 · 서방 교회의 대표들이 함께한 첫 회기는 교황의 참석하에 4월 9 일에 산 조르조 주교좌 성당에서 장엄하게 개최되었으며, 곧 이 공의회가 보편 공의회임을 승인하는 교령이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작성되어 반포되었다. 제2 회기는 10월 9일에 개최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공의회에 새롭게 초청된 서방의 제후들과 바젤 공의회론자들에 대한 동로마 제국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회기의 공백이 길어 연옥 교리와 기타 연관된 몇몇 문제들만 다루어졌다.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사이의 교리에 대한 의견 차이는, 위원회들에서 동방 교회 측의 인사가 서방 교회의 관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이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의회가 성과를 내기도 전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공의회 장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공의회에 참석한 동방 교회 인사들의 생활비를 부담하고 있던 교황의 입장으로서는, 그 재정상의 부담을 덜어 주겠다는 피렌체의 제안을 외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피렌체 회기]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9년 1월 16일 페라라를 떠나 피렌체로 향하였다. 1월 26일 페라라를 출발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셉도 2월 13일 피렌체에 도착하여 그곳 성직자들과 시민들로부터 환대를 받았으며, 그 다음날에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피렌체에 도착하여 페루치(Peruzzi) 궁전에 머물렀다. 2월 26일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첫 회기가 개최되면서, 동서 교회의 치열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서방 교회의 대표는 도미니코 수도회(Ordo Fratrum Praedicatorum)의 관구장 몬테네로(Montenero)의 요한이었고 동방 교회 측의 대표는 에페소의 수도 대주교인 에우제니코(Marco Eugenico)였다. 몬테네로의 요한은 성서, 라틴 교부들과 그리스 교부들, 보편 공의회 그리고 톨레도 교회 회의 등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또한 동방 교회 수도원 제도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바실리오(Basilius Magnus, 329~379)의 저서인 《에우노미우스 논박》(Adversus Eunominum)의 친저성에 대한 오랜 논쟁이 벌어졌고, 성삼위의 본성과 위격 그리고 본질에 대한 개념 및 그 기원에 대한 더 명확한 해석이 요구되었다. 몬테네로의 요한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의 신학에서 보여 준 사상들을 바탕으로 설명하였다. 1439년 3월 말의 제8 회기에서는 성령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졌다. 특히 '필리오궤' (Filioque, 성자로부터) 문제가 가장 격렬하고 오랫동안 토론되어, 3월 30일부터 시작된 토론은 6월 27일에 가서야 성체 문제(누룩 없는 빵의 사용)와 신경에 '필리오궤' 를 삽입하는 문제, 연옥에 대한 정의 그리고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내용들만을 확정지은채 서서히 마무리지어졌다.
서방 교회의 성인들과 교부들은 성령의 '성부와 성자에게서' 라는 발출을 말한 반면, 그리스 교부들은 '성자를 통하여' 라는 용어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사실 모든 성인들은 성령의 거느리심을 받았기에 그들의 신앙은 일치함이 분명하며 서로 다른 말로 동일한 사실을 가리켰을 뿐이라는, 몬테네로의 요한이 제시하고 니체아의 베사리온(Bessarion) 수도 대주교가 받아들인 이러한 논증에 동방 교회 측 인사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스콜라 신학의 삼단 논법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 사유에 부응한 이러한 논증에 납득하여, 결국 '필리오궤' 문제에서 상대방 입장의 정통 신앙성을 서로 인정하게 되었다. 반면 수위권 문제는 상대적으로 토론할 시간이 부족하였다. 동방 교회 측에서는 로마 주교좌를 5개 총대주교좌의 첫 자리로만 인정하려고 하였으며, 다른 총대주교들의 권한에 의한 교황권의 제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결국 다음과 같은 내용이 만들어졌다. "거룩한 사도좌와 로마 주교는 온 세계에 대한 수위권을 보유한다. 로마 주교는 거룩한 사도들의 우두머리 베드로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참된 대리자, 전체 교회의 수장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요 스승이다. 로마 주교에게는 거룩한 베드로 안에서 전체 교회를 양육하고 이끌고 지배하는 충만한 권력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주어져 있는 바, 이 사실은 보편 공의회들의 문서들과 거룩한 법령들에도 나타나 있다."
또한 동방 교회 인사들은 성찬 축성문에 대한 용어도 공적으로 표명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결국 동 · 서방 교회의 일치에 대한 공포를 위하여 통일된 문헌을 작성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7월 4일 교회 일치를 위한 교령 <레텐투르 첼리>(Laetentur coeli)가 반포되었다. 이틀 뒤인 7월 6일에는 이를 축하하는 미사가 양측의 참석하에 교황의 주례로 거행되었으며 라틴어로 작성된 교령은 체사리니 추기경에 의하여, 그리스어로 작성된 교령은 니체아의 베사리온 수도 대주교에 의하여 낭독되었다. 이교령에는 서방 교회의 115명, 동방 교회에서는 황제를 비롯한 33명의 서명이 들어 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2일, <엑술타테 데오>(Exsultate Deo)가 반포되어 아르메니아 교회가 로마 교회에 일치하게 되었음이 알려졌다. 이를 위한 준비는 1433년부터 제노바 출신 카파(Caffa)에 의하여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총대주교인 콘스탄티누스 5세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 일치의 칙서를 1439년 12월 15일에 받아들였다. 교황청과 공의회는 동방 교회와 일치한 후 즉시 프란치스코회 소속 사르테아노(Sareano) 출신의 알베르토를 특사 자격으로 콥트 교회(Copic church)와 에티오피아 정회(Ethiopian Orthodox Church)로 파견하였다. 알베르토는 1440년 11월 9일에 교황과 콥트의 총대주교 요한 11세에게 교회 일치를 위하여 서신을 보냈던 예루살렘의 아비시니아(Abyssinaia) 수도원장 니코데모와 대화를 나눈 후, 1441년 여름 콥트 총대주교 대리와 예루살렘의 에티오피아 수도원장과 함께 피렌체로 돌아왔다. 2명의 동방 사절은 같은 해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공의회에 참석하여 신앙과 성사들에 대해 토론하였다. 그리고 1442년 2월 4일 칙서를 통하여 그리스도 단성설을 따르던 콥트 교회와의 일치를 반포하였다. 그때 콥트 교회의 수도원장이며 사절인 안드레아는 공의회에서 교황에 대한 충성을 표명하였다. 한편 바젤 공의회에서 야기된 공의회 우위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황은 1441년 4월 대칙서 <에스티 논 두비테무스>(Esti non dubitemus)를 통하여 교황권이 공의회의 결정보다 우위에 있음을 선포하고 바젤 공의회의 공의회 우위설을 따르는 이들을 이단으로 파문하였다.
[로마 회기] 동방 교회 측 참석자들이 떠난 후 1443년 3월 7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5명의 추기경들과 함 께 피렌체를 떠나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에서의 첫 회기는 1443년 10월 14일 라테란 대성전에서 거행되었다. 공의회 도중인 1444년 1월 10일에는 동로마 제국의 교황 대사인 체사리니가 십자군이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을 전해 옴에 따라 이를 축하하는 장엄 행렬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9월 30일에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지역에 있는 시리아 정교회(Syrian Jacobite Church)와의 일치를 선언하고 성령 문제와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에 대해서도 일치를 보았다. 뿐만 아니라 1445년 8월 7일에는 칼데아 교회(Chaldean Church) 및 키프로스(Kipros)와 레바논(Lebanon) 지역의 말론파 교회와도 일치를 선언하면서, 교황은 그들의 이단성에 대한 견해를 철회하고 그 지역의 수도 대주교좌를 인정하였다. 공의회 후반기에는 보스니아(Bosia)의 이단 교회에서도 사절을 보내 왔다.
[결과 및 평가] 피렌체 공의회를 통하여 교회가 교의적 · 신학적 · 역사적 · 교회법적 · 문화적 효과를 보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 공의회에서 반포된 여러 칙서들과 공문서들만 보아도 그 결과가 어떠하였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인문주의자들은 여러 해 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동 · 서방 교회가 지속적으로 만난 사건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다. 비록 동방 교회의 주교들이 교황에게 지속적으로 순명하지는 않았지만 일치에 관한 칙서에 서명을 하였다는 점에서, 이 공의회는 역사적인 관점으로 동 · 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이 공의회를 통하여 2명의 동방 교회 추기경(Bessarione, Isidoro di Kiev) 그리고 3명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들-요셉 2세, 메트로파네(Metrofane), 그레고리오 맘마스(Gregorio Mammas)-ol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크레타 섬과 키프로스 섬 그리고 그리스의 여러 지역들이 가톨릭 교회와 일치하는 성과를 보았다. 또한 1475년 터키인들이 아르메니아를 정복할 때까지 아르메니아 교회와의 일치도 지속되었으며, 1450년대까지 롭트 교회가 로마 교회에 일치하였음을 보여 주는 문헌도 있다. 아울러 교황 갈리스도 3세(1455~1458)와 비오 2세 (1458~1464)는 피렌체 공의회의 일치 결정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으며, 동방 교회에서도 호감을 나타내었다.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와의 일치에 대한 교령은 후에 루테니아 정교회(Ruthenian Orthodox Church), 루마니아 정교회(Romanian Orthodox Church) 그리고 멜키트파(Melchitae)와 일치하는 교의적 규범이 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도 이 교령을 활용하였으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성서의 경전 선정 문제에 대하여 콥트 교회와 맺은 일치 교령에 나타난 내용을 활용하였다. 아르메니아 정교회와의 일치 교령은 특히 칠성사에 대한 가톨릭 신학자들의 이해 부족으로 예민하게 대립되었으나, 1947년 11월 30일에 교황 비오 12세(1939~1958)가 <사크라멘툼 오르디니스>(Sacramentum Ordinis)를 반포하여 이 교령의 신학적 가치를 논하고, 피렌체 공의회에서 그리스 정교회가 성직 수품에 있어서 어떤 절차도 없이 단지 안수로 성품(聖品)되는 그들의 전통을 그대로 고수하여도 로마 교회와 일치된다고 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피렌체 공의회를 통하여 이루어진 동 · 서방 교회의 일치 선언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 의하 여 함락됨으로써 그 효력이 크게 상실되었다. 그러나 동방의 다른 전례를 허용하는 조건하에서 신앙의 일치 원 칙은 이후의 재일치 노력에 계속 반영되었으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 페라라 공의회 ; → 공의회 우위설 ; 교회 일치 운동 ; 바젤 공의회 ; 수위권 ; 에우제니오 4세)
※ 참고문헌 L. Petit, Documents relatifs au Concile de Florence, 2 fasc., Pargi, 1920~1923, Patrologia Orientalis 16.I 17.2/ G. Hofmann, Papato, conciliarismo, patriarcato, in Miscellanea historiae pantificie, Ⅱ, 2, Roma, 1940/ J. Gill, The Sources of the "Acta" of the Council of Florence, Orientalia Christiana Peridoica 14, 1948, PP. 43~791 -, The "Acta" and the Memoir of Syropoulos as History, ibid., pp. 305~355/ G. Hofmann, Die Konzilsarbeit in Ferrara, Orientalia Christiana Periodica 3, 1937, pp. 110~140, 403~455/ 一, Formulae praeviae ad definitionem Concilii Florentini de processione Spiritus sancti, Acta Academiae Velehradensis 13, 1937, PP. 81~105, 237~260/ V. Chiaroni, Lo scisma greco e il Concilio di Firenze, Firenze, 1938/ E. Candal, Bessarion Nicaenus in Concilio Florentino, Orientalia Christiana Periodica 6, 1940, PP. 417~466/ G. Hofmann, Kopten und Aethiopier auf dem Konzil von Fiorenz, Orientalia Christiana Periodica 8, 1942, PP. 5~39. [全壽洪]
피렌체 공의회 - 公議會
[라]Concilium Florentinum · [영]Council ofFlo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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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공의회를 개최한 피렌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