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합덕 본당
舊合德本堂
글자 크기
2권

1 / 10
성당 내부 모습.
충청도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현 대전교구 소속.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275 소재. 1890년에 설립되었으 며, 주보는 성가정. 관할 구역은 당진군 합덕읍의 동쪽 (합덕리, 신촌리, 점원리, 상흑리, 하흑리, 하운리, 성동리, 세거 리, 도리, 신리, 옥금리, 대합덕리), 우강면(우강리), 예산군 고덕면(양촌리, 상리) 등이며, 관할 공소는 신리 · 양촌· 세거리 등 13개소. 설립 이후 현재까지 본당에서 배출한 성직자는 1920년에 서품된 신인식(申仁植, 바오로) 신 부를 비롯하여 32명에 이르며, 수도자는 모두 60여 명 에 이른다. 〔교 세〕 1891년 1,800명, 1902년 2,162명, 1912년 2,060명, 1924 2,138명, 1954년 2,851명, 1964년 2,161명, 1974년 2,449명, 1984년 2,219명, 1993년 1,642명. 〔역대 신부〕 초대 퀴를리에(L. Curlier, 南一良) 레오(1890. 8~1904. 5), 2대 홍병철(洪秉喆) 루가 (1904. 5~1906. 5), 3대 크렘프(H. Krempff, 慶元善) 헨리 (1906. 5~1914.9), 4대 라리보(A.J.Larribeau, 元亨根) 아드 리아노(1914. 9~1917. 4), 5대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1917. 9~1919. 10), 6대 크렘프(1919. 10~1921. 5), 7대 페랭 (P. Perrin, 白文弼) 필립보(1921.5~1950. 8), 8대 박노열(朴 魯烈) 바오로(1950. 9~1961.6), 9대 유성숙(偸性淑) 루도 비코(1961. 6~1963), 10대 제제구(R. Jézégou, 최세구) 로 베르토(1963~1968) , 11대 윤여홍(尹汝鴻) 바오로 (1968~1971. 2) , 12대 이종대(李鍾大) 요셉(1971. 2~ 1971), 13대 김병재(金丙宰) 바오로(1971~1974.2 14대 조성옥(趙成玉) 요한(1974. 2~1974. 9), 임시 유영소(留永 昭) 블라시오(1974. 9~1974. 11), 15대 여충구(呂忠九) 마 르코(1974. 11~1980. 8), 16대 블랑(J. Blanc, 白) 요한 (1980. 8~1986), 17대 윤종학(尹鍾學) 베르나르도(1986. 4~1991.8), 18대 권태웅(權泰雄) 안셀모(1991. 8~현재). 〔전 사〕 구합덕 본당이 위치한 내포(內浦) 지역은 충 청도 복음 전파의 요람지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1784년 이후 '내포의 사도' 라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이 전교 활동의 터전으로 삼은 곳이다. 이후 내포 공동체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언제나 주목을 받는 곳이 되었고,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이후 1868년의 무진박해(戊辰迫害) 때까지 박해가 있을 때마 다 어느 곳보다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초기 교회사 에서 유명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집안도 이곳에서 복음을 받아 들였으며, 박해를 피해 가며 전교 활동을 편 선교사들도 이곳에서 활동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중 이 지 역을 가장 먼저 담당한 선교사는 1836년 초 최초로 조 선에 입국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였다. 또 1845년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éol, 高)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 1849년에 귀국한 최양업 신부도 합덕 일대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으며, 1861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가 전국을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눈 이후 이 지역을 담당 하게 된 선교사는 랑드르(Landre, 洪) 신부였다. 그러나 랑드르 신부가 황무실(현 예산군 고덕면 好音里)에서 병사 한 뒤에는 여러 선교사들이 이 일대에서 활동하였고, 그 결과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다블뤼 주교가 신 리(현 당진군 합덕읍 新里)에서, 위앵(Huin, 闕) 신부가 쇠 재(현 예산군 봉산면 金峙里)에서,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가 거더리(현 예산군 고덕면 上宮里)에서 각각 체포되 었다. 박해가 끝나자 합덕 인근 지역에는 다시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1881년부터 내 포 지역을 담당하게 된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는 이 들 공동체를 방문하고 각처에 공소를 설립하였다. 그는 이후 7~8년 동안 합덕과 그 인근 지역인 고덕면 · 신암 면 · 예산읍 · 당진읍 등에서 매년 수백 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줄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간양골(현 예산군 예 산읍 間良里), 드르니(현 예산군 예산읍 新禮院里), 여사울(현 예산군 신암면 新宗里), 진말(현 예산군 신암면 桂村里), 양촌 (현 예산군 고덕면 上宮里)의 신자 공동체는 아주 주목을 받을 만한 곳이었다. 이에 1890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의 사망으로 임시 교구장을 맡게 된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는 두세 신부의 건의를 받 아들여 이 지역에 본당 중심지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본당 설립과 정착〕 코스트 신부는 1890년 8월, 전해 6월 21일에 입국한 퀴를리에(레오) 신부와 10월 3일에 입국한 파스키에(Pasquier, 朱若瑟) 신부를 내포 지역에 파견하였다. 이때 퀴를리에 신부는 양촌에 거처하면서 충청도의 남쪽과 동쪽을 관할하였고, 파스키에 신부는 간양골에 거처하면서 북쪽과 서쪽을 관할하였다. 이로써 내포 지역에는 1866년 이래 24년 만에 다시 2개의 본당 이 설립되었다. 이 중 구합덕 본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 는 '양촌 본당' (陽村本堂)의 퀴를리에 신부는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인해 '간양골 본당' 이 폐지되면서 이 지역을 통합 · 관할하게 되었으며, 이듬해부터 충청도 지역의 본당들을 분리해 나갔다. 즉 1895년 6월에 아산 의 공세리 본당(貢稅里本堂)을, 1901년에 부여의 금사 리 본당(金寺里本堂)을 독립시켰고, 여기에서 다시 많은 자본당들이 분리되어 나갔다. 반면에 퀴를리에 신부는 여러 차례의 교안(敎案) 사건 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는데, 특히 1895년에는 지방민들이 사제관을 습격하여 건물 일부를 파괴하고 집 기들을 탈취해 간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동안 그는 양촌이 본당의 중심지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한 끝에 1898년 합덕지(合 德池) 이웃의 창말(倉里, 현재의 성당 자리)에 있는 언덕 을 매입하여 한옥의 사제관 겸 성당을 건립하기 시작하 였다. 그리고 이듬해 이들을 완성하고 이전함과 동시에 본당 명칭을 '합덕 본당' 으로 개칭하였다. 또 교리 학교 를 세우고 성신회(聖神會)를 설립하였으며, 특히 전교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퀴를리에 신부가 양촌에 부임한 이듬해 27개 공소에 1,800명이었던 신자 수가, 그 동안의 본당 분할에도 불구하고 1910년에는 22개 공소에 1,930명을 기록하게 되었다. 1904년 5월 퀴를리에 신부가 공주 본당으로 이임하면 서 합덕에 부임한 홍병철(루가) 신부는 2년 만에 신설된 옥천 본당(沃川本堂)으로 전임되고, 1906년 5월 크렘프 (헨리) 신부가 제3대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크렘프 신부는 우선 부임 이듬해 9월 '매괴학교' 를 설립하였고, 1908년에는 결성(結城)의 수곡 본당(水谷本堂, 현 서산 본당의 전신)을 분리시켰다. 또 교회 운영비 조달과 전교 활동을 위해 성당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였으며, 1914년에는 아산 · 예산 · 서산 · 당진 등 4개 지역에 서만 25개 공소를 설립하여 신자수를 2,200여 명으로 증가시켰다. 그중에서도 교리 교육과 일반 교육을 동시 에 가르친 매괴학교는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도 점차 성장하여 1918년에 남 · 여 학교로 분할되었지만, 1928 년에 폐교되고 말았다. 〔성장과 변모〕 합덕 본당은 1921년 제7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50년 8월 공산군에 납치되기까지 29년 간 활동한 페랭(필립보) 신부 재임기에 많은 성장을 보게 되었다. 비록 일제 치하라는 시대적 배경 아래서 파생되 는 여러 문제들이 사목 활동에 장애가 되었고, 1920년 대 사회주의 사상 침투와 공산당의 활동이 교회의 발전 을 저해하였지만, 페랭 신부는 성실하고 유능한 회장들 을 선발하여 공소 신자들의 회합과 교리 교육에 활용하 였으며, 성영회(聖嬰會) 사업, 자선 사업 등을 통해 지역 사회로부터 신임을 얻었고, 가톨릭 청년회와 안나회 등 을 조직하여 본당의 활동을 이끌어 가도록 하였다. 그 결 과 교세가 크게 확대되어 1928년 5월에 예산 본당(禮山 本堂)을, 1939년 5월에 당진 본당(唐津本堂)을 각각 분 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성당 신축에 노력 하여 1929년 10월 9일에는 2개의 종탑을 지닌 로마네 스크 양식의 현 성당 건물을 완공, 낙성식을 가졌으며, 1927년 7월 18일 신리 사적지를 매입하였고, 1946년 6 월 4일에는 솔뫼 사적지 내에 김대건 신부 기념비를 건 립하였다. 또 1947년 7월 21일 성가 수녀회 분원을 개 설하여 고아들을 돌보게 하는 한편, 이 활동을 위해 1949년 1월에는 소화 보육원 건물을 건립(1969년에 폐 원)하였다. 이어 제8대 박노열(바오로) 신부 재임기에 와서도 본 당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우선 1953년 9월 8일에 는 파티마 성모상 봉안식을 가졌으며, 1954년 5월 2일 에는 루르드 성모상 제막식을 거행하였고, 1960년 6월 15일에는 매산리(현 당진군 신평면 梅山里) 공소에 강당을 마련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 18일에는 운산리(雲山里) 에 여섯번째 자본당인 신합덕 본당(新合德本堂)을 신설 분리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사목 관할 구역을 갖게 되었 다. 이때 본당의 명칭이 '구합덕 본당' 으로 개칭되었고, 솔뫼 사적지가 신합덕 본당 관할로 이관되었다. 이후에 도 본당에서는 1969년 4월 30일 신리 공소에 병인 순교 복자 5위의 기념비를 제막하였고, 강당(1977), 사제관 (1985), 수녀원(1986)을 각각 신축했다. (→ 대전교구 ; 합덕 본당)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가톨릭 사전》 천주교 대전교구, 《대전교구 30년》, 1988/ 천주교 구합덕 교회, 《구합덕 본당 100년사 자료집》, 1990/ 車基眞, <충청도 교회와 본당 廢置에 대한 연구>, 《韓 國 가톨릭 文化 活動과 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천주교 대 전교구,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