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셔, 존 Fisher, John(1469~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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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피셔.

존 피셔.

성인. 순교자. 추기경. 영국 로체스터(Rochester)의 주교.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 라틴어식 이름은 요한 피셔
(Joannes Fisher)이며, 로체스터의 요한(Joannes Roffensis, John of Rochester)이라고도 불린다. 축일은 6월 22일.
교황과 가톨릭 교회에 헌신적이었던 피셔는 루터(M. Luther, 1483~1546)의 개혁을 논박하며 가톨릭의 정통 교의를 옹호하였고, 이에 바탕을 둔 인문주의적 입장에서영국의 교회와 대학을 개혁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교회 수장권을 주장하면서 교황이 영국 교회에 관여하는 것을 반대한 헨리 8세(1509~1547)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1886년 교황 레오 13세(1878~1903)에 의하여 시복되었으며 1935년에 교황 비오 11세(1922~1939)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교황 바오로 6세(1963~1978)가 그의 축일을 6월 22일로 정하였다.
[생애와 활동] 1469년 영국 요크셔(Yorkshire)의 베벌리(Beverley)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그곳의 소신학 교에서 공부한 뒤, 1483년 케임브리지(Cambridge) 성 미카엘 신학교에 입학하여 멜턴(William Melton)의 지도로 신학 공부를 하였다. 1491년 문학사를 취득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뒤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494년 교장 (proctor)이 되었으며, 1501년 박사 학위를 받고 멜턴의 후임 부총장이 되어 대학 개혁을 단행하였다. 1504년에는 총장이 되었으며, 같은 해에 로체스터의 주교가 되었다. 피셔는 헨리 7세(1485~1509)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드(Margaret Beaufort, +1509) 여왕의 고해 신부로서 그녀를 설득하여 케임브리지에 그리스도 신학교를 설립 1505년에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신학 연구를 하기 위해 영국으로 온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D.Erasmus, 1466/1469?~1536)와 친분을 맺었다. 1511년 여왕에게서 받은 부지에 성 요한 신학교를 세우고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강좌를 개설하였으며, 1516년에는 에라스무스가 이 학교에서 그리스어를 가르치도록 주선하였다. 1519년에는 웨이크필드(Robert Wakefield)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 피셔는 정통 가톨릭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문화에 접근하여 그 문화를 쇄신하려는 입장을 고수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였다. 폭넓은 철학적 소양을 지녔지만 끊임없이 성서를 묵상하면서 가톨릭 정통 교의에 바탕을 둔 관용과 개방성으로 종교의 오 · 남용을 타파하고 개혁을 이루려는 입장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순수한 종교인이었으며, 세련된 지성과 의식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또한 영국 교회의 설교 수준을 높이는 데에 관심을 가져 자신이 세운 대학에서 12명의 사제를 임명한 뒤 그들이 각 지역에서 설교할 수 있는 권한을 교황청으로부터 받았다.
1508년에 그가 펴낸 속죄에 관한 시편 설교집은 현재도 영국의 고전 문학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헨리 7세 와 마거릿 여왕의 장례 미사 강론은 이듬해 런던에서 인쇄 · 출판되었다. 프랑스 인문주의자인 르페브르(Jacques Lefevre d'Étaples, 1455?~1536)가 주장한 성서에 등장하는 3명의 막달레나에 대한 이론을 반박하기 위하여 1519년에 논문 <하나의 막달레나>(De unica Magdalena)를 발표하여 당시의 정통 가톨릭 교의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또한 1521~1527년에는 루터와 당시 종교 개혁가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여러 편의 라틴어 저서를 저술하였다. 당시에는 독일에서 나온 루터주의자들의 저서가 영국의 대학을 통하여 널리 유포되어 루터주의와 위클리프주의가 확산되고 있었으며, 1525년 이전에 이미 소수의 루터주의자들이 영국 내에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 왕실은 1521년 5월에 울지(Thomas Wolsey, 1475?~1530)추기경에게 세인트 폴 주교좌 성당 앞에서 종교 개혁가들의 저서들을 불태우도록 하였는데, 이때 피셔는 종교 개혁가들을 반박하는 설교를 하였다. 1522년에는 종교 개혁가들에 대한 논박서를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이 외에도 여러 편의 논박서를 저술하였다. 그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종교 개혁가들의 저서를 불태울 때 발표하였던 설교문과 1526년 아우구스티노회 바르네(Robert Barnes)수사의 신앙 포기 선서에 대한 논박문 그리고 1527년에 저술한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 오이콜람파디우스(John Oecolampadius, 1482~1531)의 개혁 신학에 대한 논박서 등이다.
헨리 8세와 수장령 : 당시 영국과 교황청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국가 교회와 영주 교회가 상당히 확산되어 있 었으며, 급진적인 인문주의자들은 어느 정도 종교 개혁의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이 가톨릭 교회에서 이탈하게 된 것은 사실상 신앙의 분열이 아니라 정치적 · 경제적 요인들이 더 강하게 작용하였다. 영국이 교황과의 관계에서 벗어나도록 만든 주역은 국왕인 헨리 8세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국가 이익의 증대와 왕권 강화를 위한 수도원 재산의 활용 외에 직접적인 동기가 된 개인적인 문제, 즉 왕비 아라곤의 카타리나(Catarina de Aragon, 1485~1536)와의 이혼 및 궁녀인 앤 불린(Ann Boleyn, 15077~1536)과의 재혼 문제였다.
이에 대한 교황 글레멘스 7세(1523~1534)의 결정이 지체되자 헨리 8세는 1529년에 의회를 소집하고 교황으로 부터 영국 교회를 분리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영국 의회는 1532년에 수장령(首長令, Act of Royal Supremacy)을 공포하여 헨리 8세가 영국 교회의 유일한 최고 수장이며 주교 임명과 영국 교회의 모든 이교 문제 등에 대한 결정권과 개혁의 권한을 갖는다고 선포하였다. 대부분의 영국 국민들은 왕의 이러한 조치에 반대하지 않았다. 첫째 이유는 교리나 전례상에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죽을 때까지 영국 교회의 교리나 전례 를 거의 근본적으로 가톨릭 교회와 같이하였다. 둘째 이유는 교황과 로마에 대한 반감이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민족주의가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의 개혁 조치에 서약하지 않은 성직자 및 수도자들과 학자들도 많았다. 헨리 8세는 이들을 10여 년 동안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처형하였는데, 우선적인 탄압 대상은 수도자들이었다. 수도원을 차례로 해산시키고 그 토지와 재산을 몰수한 헨리 8세는 수도원 재산을 근대적인 절대주의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국가 재원으로 사용하는 한편, 측근과 공로자들에게 분배하였다. 또한 가까운 시일 내에 왕이 파멸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턴(Elizabeth Barton, 1506?~1534)을 처형시켰다.
저항과 처형 : 영국의 이교는 오래 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국가 교회주의를 따르고 있었고, 여러 가지로 속화되어 있던 성직자들 대부분이 황제 교황주의(caesaropapism)에 굴복하고 있었다. 단지 소수만이 반항할 용기를 갖고 왕에 대한 종교적 지상권의 선서(Oath of Sapremary)를 거부하였는데, 피셔도 1531년에 이 선서를 거부하여 체포 · 감금된 바 있었다. 그 후 그는 카타리나 왕비의 고해 신부이자 선생으로서 헨리 8세의 카타리나와의 결혼 무효 서약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반대하고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카타리나와 왕의 결혼은 합법한 것임을 주장하면서 이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에 헨리 8세는 그에게 반역죄 혐의를 씌우기 위하여 바턴의 환시를 모두 보고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1533년에 피셔를 다시 체포하였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았으므로 헨리 8세는 문서상으로 자신의 이혼이 합법적이라는 것과 자신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라는 내용의 선서문에 서약하도록 강요한 후 그를 벌금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피셔는 끝까지 서약을 거부하였다.
1534년 4월에는 8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로마 교회로부터의 영국 교회 독립을 반대하고 수장령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여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와 함께 반역 죄인으로 런던 탑에 감금되었다. 두 사람은 재판도 받지 않고 이듬해 6월까지 이곳에 감금되었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전 재산을 몰수당하였다. 그 동안 피셔는 수장령을 받아들이도록 몇 차례 요구받았지만 침묵으로 거절하였으며, 사제로서 사적인 질문에 대답하여야 할 때에는 "신법에 의하여 왕은 최고의 우두머리가 아니며, 될 수도 없다" 라고 응답하였다.
한편 교황 바오로 3세(1534~1549)는 영국 왕과 피셔의 반목을 자세히 알지 못한 채, 피셔를 구하기 위하여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이러한 교황의 처사에 더욱 분노하여 피셔를 반역죄로 처형하도 록 하였다. 피셔는 사형 선고를 받은 후 1535년 6월 22일에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하루 종일 처형대에 그대 로 방치되었고 잘린 머리는 런던 다리에 매달려 있다가 모든 성인(AII Hallow) 성당 뜰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그 후 그를 공경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훗날 그의 동료 토마스 모어와 나란히 '빈쿨라의 성 베드로 (St. Peter-ad-Vincula) 성당에 재매장되었다.
[평 가] 피셔는 영국 교회의 내적 쇄신을 위하여 노력한 영국의 소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또 케임브리지의 학문 활동을 활성화시킨 인문주의자로서 에라스무스나 토마스 모어 등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과 함께 언급되곤 한다. 그는 '인문주의' 라는 당시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뜬 사람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 사상이나 스코투스(J. D. Scotus, 1265/1266~1308) 사상 또는 십자군 이념이 몸에 밴 중세적인 신앙을 지닌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철저히 정통 가톨릭적인 신앙 위에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교회의 내적인 개혁을 바랐던 사람이기도 하였다.
설교가이자 저술가였던 피셔는 이교와의 논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으며,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쓴 신학적인 저서들로 유럽 신학자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상과 저서들은 후에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고귀한 인품과 높은 도덕성을 지닌 인물이었으며,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하며 수도자적인 삶을 살면서 자신의 교구를 쇄신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학자적인 탁월함이나 관할 교구에 대한 헌신적인 책임감 못지않게 죽음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용기와 불굴의 신념 또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피셔는 그의 동료 토마스 모어와 함께 영국 왕의 이교에 저항하고 가톨릭 교회의 정통성을 수호한 순교자로 공경받고 있는데, 토마스 모어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탁월함에 찬사를 보낸 바 있다. "나는 지혜와 학식과 오래 단련된 덕행에 있어서 그와 비견될 만한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그리스도교 인문주의 ; 모어, 토마스 ; 수장령 ; 에라스무스, 데시데리우스 ; 영국 ; 헨리 8세)
※ 참고문헌  Daniel Rops, L'Église de la Renaissance et de la Réforme, Librairie Arthème Fayard, 1955, pp. 504~521/J. Rouschausse, 《Dsp》 8, pp. 511~516/ A. Mandouze, Storia Dei Santi E Della Santità Cristiana, vol. 7, Grolier Hachette International, 1991, p. 2791 E.F. Reynolds, 5, pp. 946~9471 《ODCC》, pp. 614~615/ P. Janelle, 《cath》 6, pp. 460~462/ H.C. Porter, 《TRE》 11, pp. 204~206/ E. Iserloh, 《LThK》 4, pp. 158~159/ David Hugh Farmer, The Oxford Dictionary of Saints, Oxford Univ. Press, 1988, pp. 163~164/ A. Humbert, 10, PP. 2555~2561/ Les Bénédictins de Ramsgate réd., Dix Mille Saints. Dictionnaire hagiographique, Brepols, 1991, p. 276/ Donald Attwater, The Penguin Dictionary of Saints, The Penguin Group, 1983, pp. 195~196/ Enzo Lodi, trans. by Jordan Aumann, OP, Saints of The Roman Calendar, Society of St. Paul, 1992, pp. 156~158/ 차하순, 《서양사 총론》, 탐구당, 1982, pp. 257, 302~304/ 민석홍, 《서 양사 개론》, 삼영사, 1995, pp. 388~389/ Karl Bihlmeyer · Hermann Tiichle, 대건신학대학 교회사 연구회 편역, 《교회의 역사》, 고려문화사, 1984, pp. 586~590/ A.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梁蕙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