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숑, 레옹 Pichon, León(1893~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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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염산리 본당 도리 학습원 학생들과 피송 신부( 1925. 2. 6).

이천 염산리 본당 도리 학습원 학생들과 피송 신부( 1925. 2. 6).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레오. 한국명은 송세흥(宋世興).
〔생 애〕 1893년 4월 10일 프랑스 브르타뉴(Bretagne) 지방의 서부에 있는 피니스테르(Finistère) 주에 속한 플루달메조(Ploudalmezeau)에서 출생하였으며, 1910년 9월 17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을 전후하여 6년 동안(1913~1919) 군복무를 한 그는, 제대 후 다시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돌아와 1921년 9월 24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는 선교사 성소가 계속 감소되어 선교지에 파견할 새로운 선교사가 어느 때보다도 태부족한 시기였기에 피숑 신부는 임명 직후 11월 28일 배편으로 출발하여 이듬해인 1922년 1월 24일 부산에 도착, 급행 열차로 그날 저녁 즉시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 대목구 측에서는 피숑 신부가 8년 만에 맞는 28세의 젊은 선교사였기 때문에, 그의 도착은 오랜만의 경사였다.
조선 입국과 활동 : 피숑 신부는 이전의 선교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울의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한국 말과 관습을 익혔다. 그런데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Archives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에서 2004년에 발행한 《외방전교회 회원 총람》(Répertoire des membres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Etrangères, 1659~2004)에 따르면, 피숑 신부는 1922년 공세리 본당에 배속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 측 문헌으로는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시기의 서울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의 일기로 피숑 신부의 동정을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다. 《위텔 주교 일기》에 의하면 피숑 신부는 1922년 1월 말 서울에 도착한 후 이듬해인 1923년 6월 초까지 용산의 신학교 신부들과 함께 세 차례 동작이(현 서울 동작동)에 갔었고, 또 제물포에 성무를 돕기 위해 두 차례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서울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직후 서울을 떠나기는 하였으나 그곳이 어디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한편 당시 공세리 본당의 주임인 드비즈(E.P. Devise, 成一論) 신부는 1923년 1월 15일 일본의 고베(神戶)로 건너가서 배편으로 어느 섬으로 휴양하러 갔다가 그해 10월 26일 공세리로 돌아왔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피숑 신부가 1923년 6월 초부터 10월 26일까지 공세리 본당에 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1922년이 아니고 1923년의 일이고, 또 공세리 본당 신부의 휴양 기간 중 성무를 대행하러 간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임시 조치는 아마 구두 임명에 그치고 기록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피숑 신부의 첫 임지는 공세리가 아니라 이천(伊川)으로 보는 것이 옳다.
피숑 신부가 강원도의 이천(당시는 望沓) 본당 주임 신부로 임명된 것은 1923년 9월이었다. 이천은 강원도의 산간벽지이지만 박해 시기에는 선교사와 신자들이 숨어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에, 1892년부터 선교사가 정착한 초기 본당 중 하나였다. 1909년에는 이미 신자수가 2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의 큰 본당으로 발전하였고, 그래서인지 이천 포내(浦內)에 또 하나의 본당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목적인 이유보다는 선교사 2명을 같은 지역에 체류시켜 영육간에 서로 도우며 외롭지 않게 지내도록 하려는 교구장의 특별 배려였을 것이다. 피숑 신부는 이 지역의 본당 신부로 1927년까지 4년간 머물렀다.
한국 천주교회사의 연구와 집필 : 1927년 9월 피숑 신부는 용산에 있는 대신학교의 교수로 전임되어 성서와 교 회사를 가르쳤다. 세계 교회사를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 교회사를 가르친 것만은 분명하다.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애용한 수택본(手澤本)으로 달레(C.C. Dallet, 1829~1878)의 《한국 천주교회사》(Histoire de I'Eglise de Corée)의 원서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에는 페이지마다 여백에 그의 메모가 적혀 있고, 메모로 가득찬 백지 한두 장도 삽입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볼 때 피숑 신부가 얼마나 교회사 연구에 열중했으며 지칠 줄 모르는 노 력가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때문이었는지 한국에 오기 전에 앓았던 눈병이 악화되었고,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2년 동안(1931~1933) 체류하면서 눈병을 완전히 고쳤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부에 있는 고문서고에서 한국 교회사에 관한 자료, 특히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을 비롯하여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주교의 서한과 수기 등 원사료들을 복사해 오는 이중의 성과를 거두고 1933년 5월 한국에 돌아왔다.
1933년 6월에 월간지 《가톨릭 청년》이 창간되자, 피숑 신부는 이 잡지에 한국 교회사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는 '송세흥' 이라는 한국명으로 4호인 9월호를 시작으로, 1934년 10월에서 1935년 8월까지 신설된 덕정리(德亭里)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된 초기 10개월 동안을 제외하면 1936년 12월 폐간되기까지 거의 매호에 기고하였다. 그의 논문들은 16~17세기의 전사(前史)부터 시작하여 기해박해까지의 통사적인 것이었다(1933. 9~1934. 4). 전사에 관한 연구는 다블뤼 주교의《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Notes pour I'history des Martyrs de Corée)에 언급된 "천주교는 이벽의 교리 연구회가 개최되기 근 200년 전에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 라는 정 약용(丁若鏞, 요한)의 말에 착안하여 시작한 것으로, 이에 관한 학문적인 연구는 피숑 신부에게서 비롯되었다, 1934년 6월호부터, 통사의 부록으로 특수사(特殊史)인 김대건 신부의 약력을 서술하고(1934. 6~8), 9월 '김신부 특집호' 에서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들을 중심으로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전기를 자세히 서술하였다.
그는 덕정리 본당 부임 직후인 11월에 가을 판공 성사를 주기 위해 공소 방문을 강행하였다. 당시 덕정리 본당의 공소는 20개, 신자수는 1,148명이었다. 그 후에도 본당에 사제관이나 성당이 없었기에, 그는 덕정리에 정착하지 못하고 주교관에 거처하면서 덕정리까지 매일 왕래해야만 하였다. 덕정리는 서울에서 50리 정도 떨어진 비교적 먼 거리였지만, 경원선 기차역이 있었고 성당은 역에서 5분 거리여서 매일 출퇴근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피숑 신부가 언제 덕정리 본당에 정착했는지 정확히 알수 없으나, 1935년 《가톨릭 청년》 9월호부터 다시 기고를 시작한 점으로 미루어 늦어도 이 당시에는 덕정리 본당의 사제관에서 생활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당은 1936년에 완공되었으며, 성당 수호 성인은 그의 고향인 브르타뉴 지방에서 공경받는 성녀 안나였다. 이후 그는 본당 사목과 학문 연구를 병행하였는데, 이는 이상적인 사제상이긴 하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본당이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두 임무에 어느 정도 충실할 수 있었을 테지만 피숑 신부가 50여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은 틀림없이 과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톨릭 청년》에 기고를 재개한 피숑 신부는 1935년 10월에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주교 선종 100주
년, 1936년 1월에는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신부의 조선 입국 100주년, 4월에는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전후하여 펴낸 각 특집호에서 <조선 가톨릭교회 은인 소주교>라는 제목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는 처음으로 조선 입국에 성공한 모방 신부의 일생을 상술하였다. 그리고 '정다산 특집호' 에서는, 그의 신앙 여부와 한국 교회 초기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왕성했던 활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피숑 신부는 특히 정약용에 관한 논문 두 편을 통하여 그가 위대한 학자인 동시에 깊은 신앙인이었음을 처음으로 교회 내외에 밝혔다.
1936년 7월호부터는 그동안 중단했던 통사를, 1842년의 페레올(J.J.-J.-B. Ferréol, 高) 주교 시대부터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 시대인 1865년까지, 즉 1866년의 병인박해 직전까지 다루었다(1936. 7~12). 그러나 이 호를 마지막으로 《가톨릭 청년》은 교회의 출판물 통합을 위해 자진 폐간하였다.
《조선성교사료) : 비록 발표의 장(場)은 사라졌지만 피숑 신부의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1938년에 그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들을 묶어 서울 대목구 인쇄소에서 《조선성교사료》(Pro Corea Documenta)라는 단행본으로, 그 불어판(Pour la Corée Documents)은 분책으로 간행하였다. 라틴어 표제나 한자 표제는 '조선 성교 사료집' 이지만 그 내용은 김대건 신부의 서한집인 것으로 보아, 피숑 신부는 한국 교회사에 관한 사료집을 시리즈로 간행할 계획을 갖고 제1집을 '김대건 신부 서한집' 으로 택한 것이 분명하다. 라틴어 서한집의 판형은 국판, 면수는 화보까지 포함하여 180쪽에 달한다. 서한에 앞서 참고 자료로 메스트르(J.A. Maistre) 신부가 쓴 김대건 신부의 약전과 이력서 및 1857년의 시복 수속에서 김 신부의 순교에 대한 신빙성 조사 담당 검사의 변호문이 실려 있고, 본문 서한편에는 풍부한 각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는 16편의 서한이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서한들 외에도 김 신부가 서술한 약 31명의 순교자 약전과 함께 한국 교회 약사, 형벌에 관한 김 신부의 스케치를 겸한 설명이 추가되어 있다. 불어판 분책에 김 신부의 서한 몇 편이 불역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피숑 신부가 추가한 것으로, 그중 김 신부의 신학생 시절 필리핀에서의 피난 생활, 에리곤(Erigone) 군함을 타게 된 동기 등에 관한 선교사들의 미공개 서한들은 매우 흥미로운 자료들이다. 특히 한글 서한은 피숑 신부가 처음으로 찾아낸 것으로, 그 출처에 대하여 그는 "1885년 실행한 순교자 조사 문적 중에서 발견된 것으로, 비록 원본은 아닐지라도 여러 가지로 대조한 결과 원본을 등사한 것으로 추측된다"라는 역사가다운 각주를 덧붙였다.
이러한 통사적인 논문들과 특수사적인 연구 결과에 대하여 간단히 평가한다면, 통사적인 논문들은 일반적으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의 반복에 지나지 않기에 특기할 만한 것은 못된다. 그렇지만 전사에 관한 논문은 다르 다. 그 논문는 1934년 프랑스의 《선교 역사지》(Revue de I'histoire des Missions)에 '코레아누스' (Coreanus)라는 가명으로 발표되었고, 1944년에는 일본의 센다이(仙台) 교구장인 우라가와 와사부로(浦川和三郞) 주교의 《조선 순교사》에 거의 그 전문이 번역 수록될 정도로 당시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수사에 관한 논문들, 예컨대 김대건 신부, 브뤼기에르 주교, 모방 신부 등에 관한 연구들은 그들의 생애를 그들 자신이 남긴 제1차 사료인 서한들을 중심으로, 또 그것에 의거해서만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말년의 활동 : 피숑 신부는 한국 교회사 연구의 기초가 되는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철저히 검토하며 연구하였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원고인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와, 다블뤼 주교가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에 관해 대부분의 사실을 인용한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히 달레가 집필한 초기 교회사에 관한 부분을 한국 측 자료로 확인하고 고치거나 또는 보완하기 위해 자료의 수집과 답사를 병행하였으며, 잊혀진 순교자들의 묘소를 찾아내기 위해 그 후손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이러한 끈질긴 노력으로 1927년 구산(龜山)에서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의 묘소 발견을 시작으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의 묘, 그리고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과 그 일가 5명의 묘소를 잇달아 찾아냈다.
1945년 초 봄 판공을 위해 공소를 순회하던 중 티푸스에 걸린 피숑 신부는 즉시 상경하여 성모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병은 날로 악화되어 결국 2월 25일 주일 새벽 2시 반경에 선종하였다. 한국 신자들을 사랑한 나머지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희생한 그는, 한국민들과 해방의 기쁨을 나누지 못한 채 수난의 선교 생활 24년을 마감하였다. 2월 26일 서울 대목구장 라리보 주교의 집전으로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고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평 가〕 피숑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선구자적이고 개척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원사료에 의한 연구의 선구자로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역사서가 아니라 자료집으로 간주하고 그 일차적인 원사료들을 확인하려 노력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38년 김대건 신부의 라틴어 서한집 간행이다. 또 그는 사진 자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00여 점에 이르는 귀중한 사진들을 수집하여 유리원판으로 만들어 남겼다. 라리보 주교가 장례 미사에서 말한 것처럼, 그는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하려면 2~3년은 걸릴 거라며 한탄하다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그 일은 우리의 과제로 남겨졌다. (⇦ 《조선성교사료》 ; → 《조선복음전래사》 ; 《조선순교사》 ;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 참고문헌  《가톨릭靑年》, 통권 4~43호(1933. 6~1936. 12)/ Coreanus, La préhistoire de I'Eglise de Corée, Revue de l'histoire des Missions, tome XI, 1934, pp. 203~220/ 《Pro Corea Documenta, collecta a R.P. Pichon, 朝鮮聖教史料》 Missione Seoul, 1938/ 《Pour la Corée Documents, 조선성교사료》, 1938/ 浦川和三郎, 《朝鮮殉教史》, 大阪, 1944/ 오기선, <은사 송세흥 네오 피숑 신부>, 《새벽》 74~75호(1982. 5~6), 서울대교구 사목국/ Gérard Moussay et Brigitte Appavou, Répertoire des membres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Etrangères 1659~2004, Archives des Missions Etrangères, Paris, 2004.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