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자유(1886)를 얻게 된 이후인 19세기 말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가사(天主歌辭) 동양 전통의 수신(修身) 덕목인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앞세워 천주교 교리를 노래하고 있는 가사로, 주체를 천주학에 두고 우리의 전통과 민속을 활용하여 생활 속에서의 믿음을 제시함으로써 전래사 속에서 박해 이후의 성숙된 신앙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피악수선가>는 1975년 김진소(金眞召, 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소개한 이래 《홍방지거본》 이외에 대략 7~8종의 필사본이 〈수선가〉(修善歌) 혹은 <수신가>(修身歌), <피죄수신가>(避罪修身歌), <피악수신가>(避惡修身歌) 등의 제목으로 전하여진다.
〔시대적 특징과 이본〕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丙寅迫害)가 10여 년 지속되는 동안 교우촌과 공소를 비롯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조직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교회 지도층은 체포되거나 순교하였으며, 신자들은 신앙을 버리거나 여기저기 흩어져근근이 생명을 유지하였다.
1876년 블랑(G.M.J. Blanc, 白圭三) ·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鎮) 신부 등이 입국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새로운 장을 열고 그 역사를 이어 나가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 교회의 재건을 위해 가장 먼저 '회장' (會長, catechista) 제도를 부활시켰고, 회장들은 박해로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선교의 일선에서 그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전의 교회 서적이 모두 압수되거나 없어진 상황에서 교회 재건을 위한 교리 교육은 책자를 통해서보다는 전통적인 구전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많은 신자들이 암송하고 다니던 천주가사가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많은 작품들이 복원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천주가사의 필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많은 이본(異本)들이 출현하였으며, 교리 교육과 선교의 연장 선상에서 새로운 천주가사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피악수선가>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전사된 이본에 주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언양성당본》 : 부산교구의 언양 성당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로, 15.5cm×20.0cm의 크기이며 표지 를 포함하여 모두 5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 표지는 전체의 4분의 1 정도가 떨어져 나갔고, 표지 내면에 '사향가' (思鄉歌)라고 쓰여져 있다. 두 번째 장에는 '경주'라는 지명과 '김문효' 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수록 작품은 <사향가>와 <슈선가> 두 편이다. 책 끝의 '임진 원월'(壬辰 元月)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892년에 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② 《남경지본》 : 마백락(馬白樂, 글레멘스) 선생이 발굴한 이본으로, 22cm×18cm의 크기이며 한지에 모필(毛筆)로 기록되어 있다. 앞부분이 일부 낙장되었고, 겉표지에 '사향가, 피악슈션가 , 속표지에는 '삼시대례 피약수신가 사향가와 경자 이월' 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삼시대례>, <피악수선가>, <사향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으며, 마지막에는 서툰 글씨로 '가상칠은' 이 기록되어 있다. <삼시대례> 끝에 '임인 원월 책주 남경지' (壬寅 元月 冊主 南敬止), <피악수선가> 뒤에는 '경자 삼월일 책주 남 원션시오' (庚子 三月 日 冊主 南 원션시오)라는 기 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각각 1900, 1902년에 남경지(빈천시오)가 필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③ 《고로가본》 : 천안 성거산 순교 성지의 최병기 옹이 소장한 자료로 김동억(金東億, 바오로) 신부가 발굴하여 《생활성서》(통권 제186호, 1999. 2)에 소개한 바 있는 이본이다. 크기는 14.20m×18.2m이며 상하 각각 6구씩 모필로 한지에 단정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이본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 번째 특징은 부수적인 기록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앞 표지 내면에 있는 '천주강생 일천구백일년 임실' , '전라남도 무안 목항천주당 서실 등' 의 기록을 통해 필사 시기, 장소뿐만 아니라 천주교에서 공식적으로 천주가사 필사본을 제작하였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또한 <피악수선가> 뒤의 '경상우도 상주 중뮤 이생원 저술(李生員著述)' , <언문 뒤풀이> 뒤의 '충청좌도 제천 남승지 저술' 이라는 작가에 대한 기록과, 뒤표지 내면의 '충북 진천 백곡면 성대 고로가책' 이라는 소장자에 대한 정보를 볼 수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는 순교자의 집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내력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소장자 최병기 옹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최천녀 · 종녀의 5대 손으로, 소장자의 할아버지가 진천에 있는 것을 가져다 전남 무안 목항 성당에서 필사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④ 《성교회가》 :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가첩으로 크기는 14.2cm×18.5cm이다. 펜으로 쓰여져 있으며, 쪽당 3단으로 각 단은 12구의 귀글체로 되어 있다. 앞부분이 많이 훼손되어 표지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보존하는 과정에서 새로 표지를 붙이고 '성교회가' 로 명명한 듯이 보인다. <.향가>의 중간부터 시작되어 <보셰만민가>, <신덕>, <인덕>, <졔셩>, <십계>, <령셰>, <견진>, <고히>, <셩테>, <죵부>, <신픔>, <혼비>, <칠규>, <졔셩>, <힝션>, <옥중졔셩>, <예수 부활 찬양가>, <신년 츅하>, <피죄수신가>, <셩셩식 경츅가>, <셩탄 찬양가>등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향가> 끝에는 '김베두루 져슐'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맨 마지막 장에 '텬쥬강 생후 일천구백십년 류월 이습사일 음력오월륙일' 이라는 기록이 보이나, <셩셩식 경츅가>, <셩탄 찬양가>가 각각 1911년 10월과 12월 《경향잡지》에 발표된 것으로 보아 1912년 이후에 재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⑤ 《홍방지거본》 : 이 가첩은 크기가 15.5cm×18.5cm로, 표지를 포함하여 총 15장으로 되어 있다. 겉표지에 순서대로 '성당가(聖堂歌), 텬쥬강싱 일쳔구백삼년, 셩당가, 피악수션가 라는 기록이 있고 표지 내면에는 대한 광무칠년 계묘 라는 필사기가 보인다. 수록 작품은 <성당가>와 <피악수션가>, <피지수션가> 등이고, 이어 잡가가 1편 부기되어 있다. 가첩의 말미에 '텬쥬강 일천구백 삼년 계묘 이월초팔일(二月初八日) 전사(田士)' 라는 기록과 <삼세대의>의 일부가 있고, 마지막 장에 '계묘 이월 이십팔일(二十八日) 홍방지거 셔' 라고 쓰여 있다.
⑥ 《김지완본》 : 《사주구령가》(事主救歌)라고도 불린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한 이 암브로시오가 수집한 가사들을 그의 손녀 사위 김지완(金址完)이 1917년에 전사하여 한데 묶었으며, 이때 가사집의 이름을 《사주구령가》 즉 '주님을 섬기면서 영혼의 구원을 희구한 노래' 라고 붙였다. 전사본의 분량은 1면당 16행으로 모두 202면이고, 크기는 21cm×16cm이며, 원본은 현재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도 3~4종 이상의 이본이 있는데, 소개하지 않은 이본들은 심하게 훼손되어 전편을 파악하기 어렵거나 원본을 확인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피악수선가>의 이본들은 이본 간 변개가 큰 <사향가>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필사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 앞뒤 뒤바뀜, 오자, 탈자를 제외하고는 그 편차가 큰 편은 아니다. 이는 이 작품의 창작 시기와 필사본의 출현 시기가 같거나 아주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향가>처럼 오랫동안 구전된 작품이 아니고 널리 퍼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따라서 <피악수선가>는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맞이하여 신앙 고백과 선교를 목적으로 새롭게 창작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조선 후기 시가 문학의 변화에 직면하여 근대 시가로 이어지는 시기에 창작된 조선 후기 가사 문학의 마지막 작품으로 분류될 수 있다.
〔작가와 창작 시기〕 작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과거 공부를 하던 낙방거사가 천주교에 귀의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학식이 있는 지식인이 창작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
천주가사의 작가는 많은 작품에서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박동헌본》이나 《서종웅본》 등 일부 이본의 기록에 근거한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 의해서 <삼세대의>와 <옥중제성>의 작가가 각각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 이문우(李文祐, 요한) 성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실질적인 접근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천주가사의 작가가 최양업 신부로 알려진 것은 어떤 유식한 신자가 지은 뒤 성직자의 이름으로 배포하는 교회의 관행에서 유래된, 다분히 심정적인 주장이다.
<피악수선가>도 발굴 초기에는 최양업의 저작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사향가>나 <삼세대의>, <옥중제성> 등 이전 박해 시대의 작품에 비해 절박함이나 위급함이 나타나지 않으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의 신앙과 선교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살펴본다면 작가에 대해 성급히 단정하기에는 문제가 많다.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의 분위기나 흐름이 최양업 신부가 활동하던 시기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성당가>를 지은 김기호(金起浩, 요한)가 이 작품의 작가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의 자서전 <봉교자술>(奉教自述)에서 진술한 생애가 <피악수선가>에 나와 있는 주인공의 삶과 흡사하며, 이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홍방지거본》에 <성당가>와 <피악수선가>가 나란히 수록되어 있다는 점 등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김기호의 손자 김재환은, <성당가>는 들어 본 적이 있으나 <피악수선가>에 대해서는 기억이 없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7~8종이나 되는 이본에 김기호가 작가라는 근거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으로 보아 더 심도 있는 논의가 요망된다.
작가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을 받는 이본은 최근 발견된 《고로가본》이다. 이 이본은 1901년이라는 필사 연도
와 필사 장소 등 서책의 앞뒤 기록과 작품 뒤에 부기된 작가에 대한 기록 등 신빙성이 높으며, 순교자 집안에 소
장되어 왔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이본에 수록되어 있는 <피악수선가> 뒤에 경상우도 상주 즁뮤 이 생원 저 술 이라는 기록이 있어 더욱 주목된다.
<피악수선가>의 저작 시기 역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다음 두 가지를 근거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피악수선가>가 수록되어 있는 이본의 필사 시기이다. 각 필사본에 나타난 여러 가지 기록을 중심으로 필사 시기를 파악한 결과 《언양성당본》(1892), 《홍방지거본》(1903), 《남경지본》(1902), 《고로가본》(1901), 《성교회가》(1911), 《김지완본》(1917) 등의 순이었다. 이로 보아 이 작품의 창작 시기는 필사 시기가 1892년인 《언양성당본》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창작 시기 추정의 두 번째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은 <피악수선가>의 내용이다. <피악수선가>에는 박해시대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절박함이나 공포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내밀한 신앙으로 영혼이 성숙해지며 아름답고 깨끗한 영혼의 응결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향가>나 <옥중제성>, <삼세대의> 등 이전의 작품에 비해 여유가 느껴지며, 일상성으로 확대된 신앙의 성숙함이 감지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피악수선가>의 창작 시기는 1886년 신교의 자유 이후부터 1892년 《언양성당본》이 나오기 직전으로 파악할 수 있다.
〔형식 및 내용〕 조선 후기 평민 가사의 율조 그대로 4·4조, 4음보격이고, 이본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총 170구 내외의 장편 가사이다. <사향가>가 3 · 4조와 4 · 4조가 혼재되어 있고 때로는 그 이상의 변화도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피악수선가>는 4 · 4조의 균일성을 지니고 있어 <사향가>보다 훨씬 후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가사는 노래로 향유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장편화되고 산문화되면서 그 향유 방식이 음영(吟詠)으로 바뀌었고, 율조도 4 · 4조로 고착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피악수선가>의 형식은 이후 나타나는 개화 가사에 앞서 가사 문학의 형식이 고착화되는 마지막 시기에 있으며, 이후 가사 문학 양식의 변화를 예고한다고 하겠다.
내용은 젊은 시절 과거를 보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세월만 보내고 편히 쉴 집 한 칸 없는 작가의 허무한 인생을 노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쉰이 넘어 느끼는 생애의 허무함은 곧 신앙으로 극복되어 신앙 생활의 기쁨과 진솔함으로 표출된다. 또한 유학과 천주학 사상이 교묘히 접목되어 뿌리를 내리는 과정도 보인다. 내용은 대략 흐름에 따라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제1 단락은 작가의 한평생에 담긴 허무함, 즉 젊어서는 과거를 위해 세월만 보내고 이제 나이 쉰을 넘긴 상황에서 느끼는 인생사의 허무함을 노래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극심한 가난으로 쉴 집 한 칸 없다는 허무함이 문자 그대로 감상으로만 끝났다면 이 작품은 큰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이다. 초로에 느끼는 삶의 무상함은 곧 제2 단락으로 넘어오면서 신앙으로 극복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터를 빌세 터를 빌세/ 천주 대전 터를 빌세/ 집을 짓세 집을 짓세/ 천당 따라 집을 짓세"로 시작되는 제2 단락에서는 삶의 터전을 천주교 신앙에 바탕하여 마련하고 있다. 따라서 작가의 지향이 현세 중심에서 신앙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집을 짓는 과정에서 우리의 민속이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옥의 일상적인 구조를 신앙에 비유하고 있으며, 이러한 한옥에 대한 용어 자체가 당시의 일상어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생활 속에서의 신앙이 노래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그 결과 천주교로 집을 지은 작가는 "세속에 없던 부모/ 여기 오니 새로 있네/ 세속에 없던 형제/ 여기 오니 무수하고"라고 노래함으로써 신앙에 기인한 공동체적 삶에서 오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제3 단락에서는 2단락에서의 신앙적 실천과 평화, 기쁨의 삶을 승화시켜 영혼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 세속 마귀의 삼구(三仇)와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는 칠죄종(七罪宗) 즉 교오(驕傲), 간린(慳吝), 미색(迷色), 분노(忿怒), 탐도(貪饕), 해태(懈怠), 질투(嫉妬)를 이겨낼 것을 노래하고 있다. 그 방법으로 "서로서로 권면하여/ 피악수선 열심하세"라고 하여 자신을 닦는 전통의 수기지학(修己學)인 유학과 신앙을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제4 단락에서는 영혼을 구원하시는 천주와 성모를 찬양하며 천당 진복을 노래하고 있다. "본향 찾아 진복 얻어/ 좋을시고 기쁠시고/ 본향 들어 진복 얻어/ 기쁠시고 좋을시고/ 좋고 깊고 우리 얼이/ 아름답고 조찰하다" 라고 노래함으로써 지고지순한 영혼을 지향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희구하는 열렬한 신앙을 보이고 있다.
마지막인 제5 단락은 주변 사람들에게 수선(修善)을 통한 신앙을 권고함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 여기서는 당시 신앙의 핵심인, 천당과 지옥의 교리와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소박한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당대의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지녀 왔던 심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는 가톨릭 신앙의 변모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작가는 피악수선의 궁극적인 목표를 천주와 성모의 찬양을 통한 본향 진복에 두고 있다. 현세는 인간이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잠세(暫世)이고, 천국만이 인간의 영혼이 돌아가야 할 영원한 세계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말을 우습게 듣지 말라고 권하며 천주 신앙을 권고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피악수선가>는 존재적 치열함을 노래한 박해 시대의 천주가사와는 사뭇 다른 면을 보여 주는, 우리 민족의 신앙 성숙 과정을 잘 반영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의 의〕 한국 가톨릭의 전래사에서 천주가사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대하다. 그러나 천주가사가 시종일관 같은 모습과 지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크게 보면 모든 종교 가사나 천주가사 자체의 기본적인 지향은 같다고 할 수 있으나, 생소한 서구 사상을 신앙으로까지 발전시키고 자기화하는 데 있어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천주가사도 구체적인 개별 작품을 볼 때 각각에 반영된 사상사 및 우리의 민속이나 전통의 수용과 조화에 있어서는 큰 편차가 감지된다.
이와 관련하여 <피악수선가>의 위상은 주목할 만하며 그 의의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생소한 서구 문화와 우리 문화가 만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의의이다. 새로운 내용(교리)과 수용자의 입장에서 볼때, 천주가사는 교리의 직접적인 해설이 나타난 작품군(<칠성사가> 등), 자기화되는 과정이 제시된 작품군(<사향가>, <피악수선가> 등), 완전히 자기화된 작품군(<이별가>등)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특히 천주가사에 반영된 토착화 양상이 심화되는 과정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내용 뿐만 아니라 민속 예술의 갈래 양상과의 영향 관계, 작품의 담화 구조 등에서 그 차이를 찾을 수 있다. 이를테면 평면적인 교리 기술이 나타나 있는 <칠성사가>에 비해, <사향가>는 다양한 대화 기법의 극화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우리 고유의 판소리와 흡사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또 <피악수선가>는 일상 속에서 자기화된 체험을 통해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앙에 기본하여 집을 짓는 표현은 가사 <권선지로가>, <안택가>, <궐리가(궐리사)> 등이나 성주굿에서 구송되는 <성주풀이(성조가, 성조신가, 성주본가) 무가>, <당금애기 무가>, 판소리, 봉산 탈춤의 해당 내용과 상당히 유사하여 전통과 조화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 의의는 사상사를 넘어 문화사적 측면으로 볼 때, 천주교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민속과 전통이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는 천주학이 신앙으로 발전하면서 천주교의 교리를 유학의 경전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인유론적(引儒論的) 입장이 제시된다. 물론 이러한 인유론적 입장도 박해 시대의 작품에 비해서는 그렇게 강조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넓은 의미의 인유론적 인식에 바탕한 것이며, 동시에 토착화의 구체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피악수선가〉는 기나긴 박해를 넘어선 한국 가톨릭 신앙의 참된 모습과 하느님을 향한 참된 열정, 나아가 우리 의 민속과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가사' 라는 형식에서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천주교 신앙의 토착화를 성공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사향가> ; <삼세대의> ; 천주가사 ; 최양업)
※ 참고문헌 김진소, <피악수선가>, 《신학 전망》 28호, 광주 가톨릭대학교, 1975/ 하성래, <피악수선가에 나타난 천주학 사상>, 《한국 그리스도 사상》 5집,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 출판부, 1997/ -, 《천주가사 연구》, 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김영수, <천주가사 연구의 성과와 전망>, 《천주가사 자료집》 하,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0/ -, <필사본 천주가사집 출현의 배경과 의의>, 《한국 근 · 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 교회》, 가톨릭 판사, 2003. 〔金榮洙〕
<피악수선가>
避惡修善歌
글자 크기
12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