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핀 3세 (714~768)

- 三世

Pippin 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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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핀 3세.

피핀 3세.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一 왕조(Carolingian dynasty, 750~887)의 초대 왕(751~768) . 별칭은 '단신왕(短身王) 피핀' (Pippin der Kurze)
〔배 경〕 프랑크족(Frank) 출신의 클로비스 1세(481~511)는 갈리아 전 지역을 통합하는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고 메로빙거 왕조(Merovingian dynasty, 476~750)를 개창하였으나, 511년 그가 사망한 이후 프랑크 왕국은 네 개의 소왕국으로 분열되어 상호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메로빙거 왕조하의 2세기 반 동안,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하나의 권력 아래 통합되었던 기간은 단지 72년에 불과하였다. 실제적으로 메로빙거 왕조는 왕국의 통합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왕국을 메로빙거 왕조의 개인적 재산으로 간주하여 빈번히 분할 상속하였으며, 미약한 행정 체계와 미비한 조세원 때문에 나날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국왕은 대귀족과 전사들에게 영지를 분배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왕실의 세습 재산은 격감하여, 8세기에 이르자 결국 국왕보다 부유한 귀족 가문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생 애〕 유력 가문들 중 하나인 피핀 가문은 피핀 2세(687~714) 이후 프랑크 왕국의 동부 지방에 있는 소왕국인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궁재직(宮宰職)을 장악하였다. 그의 서자인 카를 마르텔(715~741)은 프랑크 왕국의 통합을 달성하고, 741년 사망하기 전에 메로빙거 왕조의 왕을 배제한 채 왕국을 자신 의 두 아들 인 카를만(741~747)과 피핀 3세에게 상속하였다. 비록 743년 반란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메로빙거 왕조의 힐데리히 3세(743~751)를 인정하였지만, 747년 카를만이 통치를 단념하고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수도자가 되자 피핀 3세는 유일한 궁재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셉티마니아(Septimania, Septimanie)에서 무슬림인 무어족에게 승리를 거두고 그 지역을 프랑크 왕국의 통제하에 두었다.
피핀은 무능한 메로빙거 왕조를 폐지하고 새로운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획의 정당성을 인정받기를 원하였으며, 나아가 궁재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영적 도유로 보충받아 보다 높은 권위를 가지려 하였다. 그는 독일의 사도인 보니파시오(Bonifatius, 675?~754) 때부터 명성과 세력이 높아진 교황만이 그러한 자격이 있는 권위자라고 판단하고, 751년 교황 자카리아(741~752)에게 왕의 칭호를 받을 만한 자가 권력을 지닌 궁재인지 그렇지 못한 메로빙거의 왕인지 질문하였다. 당시 롬바르드족(Lombards)로부터 위협을 받아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던 교황은 프랑크 왕국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피핀에게 유리한 결론을 내렸으며, 이로써 그리스도교적 제왕 사상의 토대가 놓여 졌다. 최고의 영적 권위의 보호를 받게 된 피핀은 수아송(Soissons) 왕국 의회(751~752)에서 프랑크 왕으로 선출된 후 힐데리히 3세를 수도원에 감금시키고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다. 교황은 프랑크족 출신의 대주교에게 피핀을 왕으로 도유하도록 권한을 위임하였는데, 그 대주교가 보니파시오였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보니파시오의 개혁 및 개혁적인 교회 회의에서 시작되어 피핀에 의해 지속적으로 추진된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과의 긴밀한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교황청 역시 동로마 제국의 간섭과 롬바르드족의 군사적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러한 관계가 중요하였다. 지속적인 긴장 관계 속에서도 동로마 제국을 의식하고 지향할 수밖에 없었던 교황권은, 이제 프랑크 왕국으로 대표되는 유럽으로 완전히 방향을 선회하였다. 이는 '유럽사의 획기적인 전환' 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753년 여름, 롬바르드족이 재차 로마(Roma)를 위협하였으나 당시 동로마 제국은 아랍인들과 아바르족(Avar)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어 지원군을 보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는 피핀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특히 교황은 피핀과의 개인적 협상을 위해 프랑크 왕국을 방문할 것을 제의하였고, 피핀은 이에 응하였다. 이는 피핀이 교황권에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그가 획득한 그리스도교적 왕권을 확고하게 정착시키는 시험이기도 하였다. 피핀은 교회의 수호를 위하여 정치적 · 군사적 힘을 사용하는 종교적 · 윤리적 임무를 왕권과 결합시키려 하였다. 737년에 롬바르드족의 왕인 리우트프란트(Liutprand, 712~744)의 궁정에 서 생활하면서 그의 양자로 살았던 경험이 있던 피핀이었지만, 롬바르드족과의 관계 단절보다는 교황청과의 협조가 훨씬 더 중요하였다. 753년 10월 로마를 떠나면서 시작된 교황의 프랑크 왕국 방문은 '비잔틴 · 로마 제국으로부터 교황권의 이탈과 그 역사가 비잔틴 시기에서 프랑크 시대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754년 1월 샬롱쉬르마른(Chalons-sur-Marne) 남쪽의 폰티옹(Ponthion) 왕궁에서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 사이의 우호 동맹이 체결되었다.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제공한다는 약속과 그들이 점거하였던 지역, 특히 라벤나(Ravenna)의 반환을 약속하였다. 그 과정에서는 라벤나 지역을 공식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 황제권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직 성 베드로에 대한 언급만이 있었다. 이는 프랑크 왕국이 전투를 벌이는 이유가 동로마 제국 황제가 아닌 성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을 위해서라는 점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754년 4월 프랑크 왕국 의회는 퀴에르지(Quiery)에서 우호 동맹의 약속을 재확인하였으며, 롬바르드족에게서 빼앗은 토스카나(Toscana), 라벤나, 베네치아(Venetia) 이스트리아(Istia) 및 스폴레토와 베네벤토의 공작령을 교황청에 증여할 것을 약속하는 문서를 남겼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교황령 형성의 기초를 마련한 문서이다. 그해 여름 프랑크 왕국에게 패하여 그동안 점령하였던 지역을 인계하고 물러나야 하였던 롬바르드족은 2년 후 다시 봉기하여 로마를 위협하였으나, 프랑크 왕국이 출정하자 물러나야 하였다. 피핀은 증여 약속과는 달리 정복한 모든 지역을 교황에게 인도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동로마 제국은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의 동맹을 배신으로 간주하며, 로마와 라벤나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이탈리아 전체를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요구하였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은 프랑크 왕국이 교황청에 새로운 영토를 증여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과정에서 이른바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 (Donatio Constantini)가 위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754년 7월 28일,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생드니(Saint-Denis) 수도원에서 피핀과 그의 두 아들인 카를 대제(768~814)와 카를만(751~771)에게 왕위 도유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프랑크 왕국에 도입된 로마 전례는 장엄한 교황청 전례였으며, 이후 더욱 엄숙하고 화려해졌다. 교황은 도유식을 거행한 후 그들에게 동로마 제국 황제만이 수여할 수 있었던 '로마의 최고 귀족' (Patricius Romanorum)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이는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 전설에 근거하여 황제의 통치권이 교황권에 귀속되어 있음을 시위적으로 천명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 도유식은 프랑크 왕국의 왕이 최초로 교황에게 축성받은 사건이었으며, 카롤링거 왕조와 교황청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피핀에 대한 복종은 종교적 의무로 격상되었으며, 프랑크 왕국에게는 교회를 수호하는 권력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피핀은 군대를 이끌고 교황과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알프스에서 아이스툴프(Aistulf, 749~756)가 거느린 롬바르드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아이스툴프가 파비아(Pavia)로 도망치자, 피핀의 군대는 그 주변을 약탈하였다. 결국 아이스툴프가 라벤나를 비롯하여, 교황이 권리를 주장하는 로마의 재산을 돌려 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물러갔다가,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피핀은 756년에 다시 이탈리아로 출정하였다. 그러나 아이스툴프는 그해 12월 말에서 떨어져 죽었으며, 피핀 또한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키던 아키텐(Aquitaine) 지역을 정벌하고 돌아오던 중 768년 9월 24일 생드니에서 사망하였다.
〔평 가〕 교회와의 관계를 둘러싼 피핀의 행동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으나, 일반적으로 교회를 개혁하고 옹호하려 시도하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7세기에 강력한 지방 가문들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주교들을 통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권한을 교회 및 수도원들에까지 확대하려 하였지만, 피핀은 이러한 상황을 개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들은 그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였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즉 피핀은 교회의 개혁을 장려하는 한편 자신의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유 때문에 교회가 재산을 증대시키는 것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조직적으로 대가문들과 귀족 출신의 주교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하고 귀족의 지배를 받던 수도원을 왕이 직접 지배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이는 카롤링거 왕조가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는 초석이 되었다. 결국 개혁을 위한 피핀의 노력은 그의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교회와 왕국에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 대한 왕의 영향력, 개혁을 위한 노력, 교황청과의 긴밀한 관계는 이후 피핀의 후계자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 교황령 ; 스테파노 2세 ; 자카리아 ; 카를 대제 ; 카를 마르텔 ; 콘스탄틴의 증여 문서 ; 클로비스 1세 ; 프랑크 왕국)
※ 참고문헌  Daniel Rivière, 최갑수 역, 《프랑스의 역사》, 까치, 1995/ August Franzen,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출판사, 2001/ J. Wreglesworth, 《NCE》 11, 2003, pp. 108~112.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