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히테, 요한 고틀리프 (762~1814)

Fichte, Johann Gotli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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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

피히테.

독일 관념론에 속하는 철학자.
〔생 애〕 피히테는 1762년 5월 19일 오벌라우지츠(Oberlausitz)의 람메나우(Rammenau)라는 작은 도시에서 자녀가 많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우연히 그의 재능을 발견한 한 귀족의 도움으로 초등 교육을 마치고, 1780년부터 예나(Jena) 비텐베르크(Wittenberg),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교에서 4년간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법학 공부를 하던 중 후원자가 사망하자 다시 극심한 물질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경제 사정이 어렵고 또 목사직에 대해서도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여 졸업 시험도 치르지 않고 가정 교사로 일하였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절망에 빠져 자살 직전까지 갔으나, 다행히 새로운 가정 교사 자리를 얻게 되어 1788년부터 2년간 취리히(Zürich)에서 지내다가 라이프치히로 돌아왔다. 1790년 한 학생의 요청으로 우연히 읽기 시작한 칸트(I. Kant, 1724~1804)의 저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고 1791년 바르샤바(Warzawa)를 여행하던 중 쾨니히스베르크(Köni
gsbarg, 현 Kaliningrad)에 있는 칸트를 만나러 가기도 하였으며, 그의 관심을 끌 목적으로 집필한 첫 번째 저서《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도》(Versuch einer Kritik aller Offenbarung)가 1792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이 익명으로 출판되자 칸트의 네 번째 비판서로 오인받았지만, 칸트가 자신이 추천한 책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피히테는 일약 유명 인사가 되었다.
1794년 예나 대학교의 교수가 된 피히테는 정열적으로 《지식학》(Wissesnectaftslehre)을 저술하였다. 강의들도 성과가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그의 정치관과 종교관 때문에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1798년 《철학 잡지》(Das Philosophische Journal)에 실린 논문 <신(神)의 세계 통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근거에 대하여>(Über den Grund unseres Glaubens an eine göttliche Weltregierung)가 그의 사상을 둘러싼 무신론 논쟁을 일으킨 것이다. 하느님을 도덕적 세계 질서와 동일시한 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하여 결국 피히테는 1799년에 예나 대학교를 떠나게 되었으며, 1800년에 베를린(Berlin)을 새로운 정착지로 삼고 이때부터 온 정열을 쏟아 프로이센에 헌신하였다. 베를린에서 슐라이어마허(F.E.D. Schleiermacher, 1768~1834) 슐레겔(F. von Schlegel, 1772~1829) , 티크(L. Tieck, 1773~1853) 등의 낭만주의자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폐쇄적 상업 국가》(Der geschlossene Handelsstaat, 1800), 《인간의 운명에 관하여》(Über die Bestimmung des Menschen, 1800), 《복된 삶으로의 안내》(Anweisung zum seligen Leben, 1806) 및 그의 주저 《지식학》에 대한 새로운 글과 서론을 저술하였다. 1806년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항복하자 그는 국왕을 따라 쾨니히스베르크로 갔다가, 1807년 나폴레옹(B. Napoléon, 1762~1821)의 군대에 의해 점령된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와 국민적인 저항 운동의 선두에 섰다. 1807~1808년에 《독일 민족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을 저술하여, 스스로도 열광하였던 프랑스 혁명에 대한 실망과 독일인의 도덕적 · 문화적 사명을 역설하였다. 이는 당시 깨어나던 민족 감정과 결부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였다. 1810년 베를린 대학교가 설립되면서 초대 총장으로 부임한 그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실패(1812) 후 프랑스에 대한 해방 전쟁이 일어나자 제자들을 군에 입대시켰고, 그 자신도 정훈 장교로서 종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종군 간호원으로 일하던 아내 요한나로부터 장티푸스가 전염되어 1814년 1월 27일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 상〕 피히테는 칸트의 유산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저작을 완성하는 것을 자신의 관심사로 여겼다. 그는 칸트를 추종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의 사상을 뛰어넘었다. 피히테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철학을 체계화하
려는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업은 이미 라인홀트(K.L. Reinhold, 1758~1823)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피히테에게는 흡족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피히테는 총체적 철학을 위해 통일된 기본 원칙을 찾고자 하였고, 그 원칙을 실천 이성에서 발견하였다. 이를 위해 피히테는 칸트의 두 가지 관점을 조합하였다. 즉 한편으로 체계는 '이성'의 체계여야 한다. 왜냐하면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은 통일과 연관으로의 추구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칸트의 '자유' 개념을 극단적 '자기 규정' (Selbstbestimmung)으로 대체하였다. 이 자기 규정이 바로 실천 이성의 자기 규정인 것이다.
피히테가 실천 이성에 중심을 둔 것은 전통적 의미의 이론적 바탕에 의한 것이었다. 피히테는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 이래로 근대 철학을 관통한 문제인 '인식' 의 토대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면서 이 문제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공하였다. 즉 인식의 첫 번째 원칙은 라인홀트가 그랬던 것과 같이 주어진 어떤 것, 즉 사실(事實, Tatsache) 안에서는 인식이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로 주어진 것은 늘 그 배경을 더 찾 아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의식(BewuBtsein)의 문제로, 의식은 사실을 주어진 것으로 '설정' (setzen)함으 로써 주어진다. 이처럼 주어진 것의 배후에는 행위(Tätigkeit, Handlung)가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것은 행위이고, 이 행위를 통하여 주어진 객체(Objekt)는 설정되는 것이다. 이를 사행(事行, Tathandlung)이라 한다. 이성이 인식하는 것인 한 이론 이성은 늘 실천적인 것이거나 행위하는 것이다.
피히테의 철학은 '선험적 관념론' (transzendentaler Idealismus)이다. 이는 인식의 토대에 대해서 묻고, 그 대답을 자아(自我, Ich)의 창조적 행위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아는 개별적 자아가 아니라 절대적 자아를 의미한다. 이는 개별 인간의 행위들이 세상의 근본적 형식을 전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배후에 있는 것이다. 개인은 이미 인간 행위가 가능하도록 형성된 세상 안에서 행위하는 것이라는 착상이다. 그래서 피히테의 철학 을 '윤리적 관념론' (ethischer Idealismus)이라고도 부른다. 절대적이고 창조적인 행위는 '실천적' 인 것으로, 이 는 인간 행위를 위한 '관습적' 세상의 형성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피히테의 철학에 있어서 '지식학' 은 지식의 토대를 찾는 학문을 넘어서서 윤리나 법철학, 국가 철학, 종교 철학, 나아가 정신 철학으로 확장된다. 이 모든 것의 근본에는 동일한 원칙, 즉 자아 혹은 실천 이성이 깔려 있다. 실천 이성은 비자아(非自我, Nicht-Ich)라는 형식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는 힘이다. 이 비자아는 자아와 대립하고 있는 타자(他者, das Andere), 즉 자연(die Natur)이다. 이러한 사상은 스피노자(B. de Spinoza, 1632~1677)가 그랬던 것처럼 한 실체나 사물을 절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근본적으로 형식을 부여하는 행위로 보는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생겨난 세상은 일차적으로 사물의 세상이 아니라 행위의 세상이다.
피히테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의하여 표현된다. 인간은 '자아' 로서 사물이 아니라, 행위하고 형성하는 본질인 것이다. 이런 규정이 가능한 것은 자유 때문이다. 자유는 주어져 있는 상황이 아니고, 의무이고 '당위' (Sollen)이다. 행위는 자기 규정적인 것에 한하여,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다. 왜냐하면 행위는 자유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무는 무한히 남는 것이고, 포기할 수 없는 추구(Streben)가 된다. 이런 추구 속에 또한 자유가 실현되는 목적(Ziel)이 놓여 있다.
스스로 '자아' 라고 말할 수 있는 본질로서의 인간은 근본적으로 비매개적으로 자기 의식적이다. 그래서 피히테는 자기 의식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면서 몇 가지 난관에 봉착하였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연관됨으로써 자유롭고 자기 규정적인데, 동시에 다른 것을 통해서만 자신과 연관될 수 있다. 이 타자(他者)가 바로 규정할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게 해 주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 근본적 자유에 인간은 단지 다른 것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셀링(F.W.J. von Schelling, 1775~1854)처럼 피히테도 이 문제로부터 종교 철학을 시작하였다. 이런 사상적 전환은 1800년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피히테의 후기 사상에 해당된다. 인간이 스스로와 연관되게 하는 타자가 곧 신이다. 이런 종교 철학적 소재를 피히테는 칸트를 따라서, 무엇보다도 윤리적인 것과 결합시켰다. 그러나 차츰 이 윤리적인 것을 종교적인 것으로 전환시켜 가고 그 안에서 번성시키며, 인간이 신과 갖는 관계는 윤리적인 인간 공동체, 즉 사랑 안에서 전개되어 간다. 이제는 이 절대적인 것이 더 이상 자아가 아닌 신으로서 규정되고, 포괄적 동일성으로 또한 이성 즉 로고스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후기의 피히테가 자기 사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였던, 신과 인간을 로고스 안에서 통일하는 요한 복음에 나오는 개념들의 영향이었다.
그러나 이런 피히테의 후기 사상은 독일 관념론의 발전 과정에서 거의 주목 받지 못하고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셀링은 피히테의 초기 저술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사상적 출발점으로 삼고, 피히테의 절대적 자아는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주체라는 한 축으로 몰아내는 것일 뿐 그 이원성(二元性, Zweiheit)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객체를 살려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헤겔(G.W.F. Hegel, 1770~1831)은 절대자의 자기 전개 과정 속에서 주체와 객체가 변증법적 운동과 상호 규정을 통하여 해명 된다고 보았다. → 독일 관념론 ; 종교 철학 ; 헤겔)
※ 참고문헌  H.M. BaumgartnerㆍW.G. Jacobs, J.G. Fichte. Bibliographie, Stuttgart-Bad Cannstatt, 1968/ E. Coreth, Vom Ich zum absoluten Sein, Zeitschrift für Katholische Theologie 79, 1957, pp. 257~303/ W. Janke, Fichte. Sein und Reflexion. Grundlagen der kritischen Vermunft, Berlin, 1970/ M. Oesch hg., Aus der Frühzeit des deutschen Idealismus. Texte zur Wissenschaftslehre Fichtes 1794~1804, Wiirzburg, 1987/ I. Schüssler, Die Auseinandersetzung von Idealismus und Realismus in Fichtes Wissenschaftslehre, Köln, 1969/ W. Weischedel, Der zwiespalt im Denken Fichtes, Berlin, 1962/ W. Widmann, Die Grundstruktur des tranzendentalen Wissens nach J. G. Fichtes Wissenschaffslehre 1804, Hamburg, 1977. 〔李敬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