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북부에 있는 국가로 공식 명칭은 핀란드 공화국(Republic of Finland). 동쪽은 러시아, 북쪽은 노르웨이, 북서쪽은 스웨덴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 발트 해 보스니아 만과 핀란드 만에 접해 있다. 면적은 338,145k㎡이고, 인구는 5,190,000명(2003)이며, 수도는 헬싱키(Helsinki)이다. 주민은 핀계(93%)와 스웨덴계(6%)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수의 랩계, 집시계, 타타르계 및 러시아계 사람들이 있다. 종교는 복음주의 루터교가 89%, 정교회가 1%이고 가톨릭 신자수는 전체 인구수의 0.01%에 불과하다. 공용어로 핀란드어(핀어)와 스웨덴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의 핀란드인은 기원전 4000년경 현재의 핀란드 지역에 정착한 핀-우그르인과 이후 정착한 발트계, 게르 만계 그리고 발트-핀계 사람들이 흡수되어 형성되었다. 핀란드는 역사적으로 초기 중세 시대부터 서쪽의 스웨덴 과 동쪽의 러시아 세력이 대치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놓이게 되어 12세기에는 남서 지역이 스웨덴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어 1323년 조약에 따라 서부와 남부는 스웨덴의 지배하에, 동부는 노브고로트(Novgorod, 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1809년에는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어 자치 대공국이 되었고,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12월 6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듬해 좌파와 우파 간의 시민 전쟁에서 우파가 승리하였고, 1919년 공화제를 실시하여 처음으로 독립된 통일 국가를 이룩하였다. 핀란드는 소련의 국토 할양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일어난 겨울 전쟁(1939~1940)에서 패하게 되어 동남부 지역을 소련에 양도하게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동안 독일과 협력하여 소련에 대항하였으나 패하였고, 국토는 현재의 국경선을 경계로 확정되었으며 혹독한 전쟁 복구비를 소련에 배상해야 하였다. 이후 중도 좌파가 중심이 된 내각들은 국제 관계에 있어 친선, 협력, 상호지원 협약을 체결한 소련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되 철저한 중립 정책을 추구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1990년대 초반 소련 해체 후 핀란드 경제를 견인하던 소련 특수가 퇴조하게 됨으로써 금융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정보 사회 전략으로 극복하여 최근 수년간 국제 경쟁력 지수와 국가 투명 지수 세계 1위를 차지하는 강소국(强小國)으로 발전하였으며 1995년에는 유럽 연합(EU)에 가입하였다.
〔가톨릭의 역사〕 핀란드의 가톨릭 역사는 12세기 스웨덴의 침공과 함께 시작되었다. 1155년 스웨덴의 왕 에리 크 9세(1150~1160)이 가톨릭 교회의 전파를 위해 수행한 성전(holy war)과 이후 두 차례의 원정에 의해 남동부 지역이 스웨덴에 병합되면서 가톨릭이 전래되었다. 에리크의 성전에 동행한 스웨덴 읍살라(Uppsala) 교구의 성 헨리코(Henricus, ?~1156) 주교(후에 핀란드의 수호 성인이 됨)는 성전 이후에도 핀란드에 남아 선교를 하다가 핀란드인 개종자에 의해 순교하였다. 14세기에는 프란치스코회가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445년에는 비르지타회 (Birgittini)로 알려진 '지극히 거룩한 구세주 수도회' 가 난탈리(Naantali)에 수도원을 세웠다. 교회는 14~15세기 동안 유럽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많은 학생들이 파리의 대학에 유학하게 되면서 탁월한 주교들이 배출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투르쿠(Turku) 성당과 100여 개에 달하는 중세 교회들이 이 시기 동안에 융성하였던 가톨릭 교회 문화를 잘 증거하고 있다. 그 후 핀란드 교회는 스웨덴이 덴마크, 이어 러시아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교회의 지위는 점차 약해져 갔다.
종교 개혁 : 중세 말에 이르러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나타난 루터교 개혁자들은 급속하게 군주, 귀족과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갔다. 핀란드의 종교 개혁은 스웨덴과 유사하지만 좀 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는데 핀란드 최초의 루터교 설교자는 비텐베르크(Wittenberg)에서 공부한 수도회 참사회원 페테르 새르킬락스(Peter Särkilax)였다. 1538년에는 투르쿠 성당에서 개정된 의식으로 스웨덴어 미사가 거행되었다. 투르쿠의 루터교 주교 미카엘 올라비 아그리콜라(Michael Olavi Agricola, 1508~1557)는1538년 최초의 핀란드어 《 교회 편람》(Church handbook)을 출판하였고, 이어서 핀어판 신약성서(1548)와 미사집(1549)을 발간하였다. 아그리콜라 주교는 고해성사 등 전통적 가르침을 용인한 온건론자였으며, 핀란드 루터교 교회는 16세기 말까지 성모 승천 대축일 같은 축일을 기념하였고 성화들도 용인하였다. 이런 온건한 변화로 인해 핀란드에서는 스웨덴 농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종교적 소요를 피할 수 있었다. 1593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Confessio Augustana, 1530)이 수용되었으며, 그로부터 2년 후에는 핀란드에서 가톨릭이 금지되었다.
스웨덴의 왕 요한 3세(1568~1592)와 그의 아들 지그문트 3세(1592~1599)의 재위 기간 동안 가톨릭 부흥의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지그문트 3세의 숙부이자 프로테스탄트인 쇠더만란트(Södermanland) 공작이 후에 카를 9세(1604~161)로 즉위하면서 종교 개혁은 승리하였고, 루터교 교리에 바탕을 둔 교회가 구축되었다. 1640년에 는 성서 전체의 핀란드어 번역본이 인쇄되었으며, 경건주의와 계몽주의가 널리 전파되었다. 1781년 스웨덴의 지배하에서 핀란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나, 선교나 개종은 금지되었다.
동방 정교의 전래와 가톨릭 교회 : 14세기 동카렐리아(East Karelia) 지역이 노브고로트에 통합되면서 러시아 정교회가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이어 이 지역이 1580~1617년 스웨덴-핀란드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정교회 신자들은 혹독한 종교 박해에 직면하였다. 1721년 동카렐리아는 다시 러시아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1809년에는 핀란드 전체가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면서 정교회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한편 가톨릭 교회의 경우 1905년 크리스티어손(W. Christierson, ?~1945)이 파리에서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종교 개혁 이후 최초로 현지인 사제가 탄생하였다. 독립 2년 후인 1920년 핀란디아(Finlandia) 대목구가 설립되었고, 1923년에는 독일군의 지원 아래 러시아 주둔 세력과 치른 시민 전쟁에서 승리한 뒤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주축국이 패배함으로써 카렐리아 지역을 다시 빼앗기게 되었고, 4개의 본당 가운데 2개를 잃게 되었다. 가톨릭 교회는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 공동체로서 존경을 받고 있으나, 1923년 발효된 종교 자유법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의 설립은 금지되고 있다. 1955년에는 헬싱키 교구가 설립되었으며, 교회는 다양한 조직과 공동체를 통해 교육 사업에 투신하고 있다. 1967년 신부 협의회(The priests' council, 1974년 교구 목자 협의회(The diocesan pastoral council)가 결성되었고, 1983년에는 북헬싱키 교구 센터인 스텔라 마리아(Stella Maria)가 건립되었다.
2003년 현재 신자수는 약 8,000명이며, 교구 1, 본당 7개에, 주교 1, 신부 19(교구 소속 6, 수도회 소속 13), 종 신 부제 2, 수녀 52명이 있다.(→ 스웨덴 ; 헨리코)
※ 참고문헌 M. Lacko, 《NCE》 5, 2003, pp. 731~735/ 2004 Catholic Almanac, Our Sunday Visitor Publishing Division, p. 302. 〔宋享根〕
핀란드
〔영〕Fin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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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싱키 성당과 투르쿠 성당( 오른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