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Symbolum Nicaeno-Cons-tantinopolitanum)의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라는 구절에, '성자에게서' (Filioque)라는 단어를 삽입함으로써 벌어진 논쟁. 성령과 관련된 이 단어는 본래 니체아 신경(Symbolum Nicaenum)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에, 이 구절에 대한 이해를 달리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
〔역 사〕 아리우스주의(Arianismus) 논쟁을 종식시키고 성령의 신성을 부정한 마체도니우스파(Macedoniani)에 대항하여 정통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소집된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는 공의회 교부들의 신앙 고백과 당시 이단들을 단죄하는 내용을 담은 교서를 작성하였다. 이 교서의 내용은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382) 서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교부들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본체(οὐσια)임을 주장하면서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고백하였다. 또한 공의회 교부들은 본래 예루살렘 교회의 세례 때 사용한 신앙 고백문에 성령에 관한 표현을 첨가한 신경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디모테오 1세(511~518)에 의해 6세기에 처음 미사에 도입되었으며, 이어 스페인의 제3차 톨레도 교회 회의(589)에서도 사용되었다. 이 회의는 레카레도(586~601) 왕이 스페인과 나르보넨시스(Gallia Narbonensis)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개최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왕은 신앙 고백 중에 성령의 발출(發出, processio) 문제에서 '성자로부터'라는 의미의 '필리오궤' 를 첨가하였으며,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이 단어를 넣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이미 그 이전부터 스페인의 문서들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황 다마소 1세(366~384)가 발표한 '다마소 신경' (Fides Damasi)과 교황의 저술에는 이 용어가 언급되지 않았다. 반면 사라고사(Zaragoza) 교회 회의(380)에서 신비주의적인 금욕주의 운동이며 이단인 프리실리아누스주의(Priscillianismus)를 단죄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팔렌시아(Palencia)의 주교 파스토레(Pastore)가 작성한 《신경 형식에 관한 소책자》(Libellus in modum symboli, 447)에서도 나타난다. 그로 인해 이 용어가 지닌 반(反)프리실리아누스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삽입되는 것이 인정되었다. 또한 신경을 바탕으로 한 신학 체계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서방 세계에 널리 퍼지면서 성령은 한 본체로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한다는 기원을 설명하는 교의 형식이 되었다.
한편 '필리오궤' 가 삽입된 신경은 589년경 스페인 모자라베(Mozarabic, 아랍화된 그리스도교) 전례에서 주님의 기도 앞에 도입되어 결정적으로 공용화되었다. 이처럼 이 용어는 스페인에서 최초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미사 중 신경을 노래할 때 첨가되어 찬송되었으며, 세례 때에도 사용되었다. 이후 이 용어는 스페인의 영향하에 있었던 갈리아(현 프랑스)의 나르본(Narbonne)을 거쳐 갈리아 전역과 게르만(현 독일) 지역에서도 사용되었으며, 11세기경에는 비록 적지 않은 어려움과 강한 반대가 있었지만 로마 교회에서도 사용되었다.
로마 교회의 입장 : '필리오궤' 라는 용어에 대해 로마 교회는 다양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교황 레오 1세(440~461)는 교서 <괌 라우다빌리테르>(Quam Laudabiliter, 447)를 통해 '필리오궤' 를 교의로 고백하였으며, 신경안에 이 표현을 사용하는 관습이 점차 라틴 교회 안에 받아들여졌다. 장티(Gentily) 교회 회의(767)와 《카롤링거의 책》(Libri Carolini, 790?~792)에서는 '필리오궤' 의 사용을 옹호하였다. 반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타라시오(Tarasius, +806)는 서방 세계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던 '필리오궤' 라는 표현 대신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발한다' (qui ex Patre per Filium)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반대하였다. 한편 교황 하드리아노 1세(772~795)는동방 교회에서 초기에 사용하던 신경과 차별을 두기 위해 신경에 '필리오궤' 를 첨가시켰다. 뿐만 아니라 오를레앙의 주교 테오둘포(Theodulphus, 750?~821)는 카를 대제(768~814)의 후원을 받아 《성령에 관하여》(De Spiritu Sancto)라는 단편을 집필하면서 '필리오궤' 를 옹호하였다. 또한 카를 대제는 아헨(Aachen) 교회 회의에서 필리오궤' 를 동 · 서방 교회가 모두 인정하고 있는 니체아 신경에 삽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하드리아노 1세의 뒤를 이은 교황 레오 3세(795~816)는 서한들을 통해 '성령은 성부와 성자 양쪽으로부터 발한다' 라는 가톨릭 신앙을 항상 고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방 교회와의 불목을 고려하여 신경에 이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당시 예루살렘 근처 올리브 산에서 생활하던 프랑크인 수도자들이 이 용어를 이미 사용해 왔으니 신경에도 계속 사용하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허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필리오궤' 가 없는 원래의 신경을 베드로의 묘지에 기탁된 두 개의 은제 탁자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새겨 넣도록 하였다. 카를 대제를 비롯한 프랑크인들이 교회 회의를 통해 저항하였으나, 교황 레오 3세는 810년 베드로 대성전에서 프랑크 사절들에게 필리오궤' 라는 용어가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로마뿐만 아니라 갈리아에서도 통용된다는 자신의 뜻을 프랑크 궁정에 알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필리오궤' 를 인정하고 신경에 삽입하려는 서방 교회의 대세적인 움직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포시우스(Photius, 801?~897)가 반발하였고, 마침내 '필리오궤' 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동 · 서방 교회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그 후 이 문제는 그 적법성과 분별의 어려움으로 인해 제기되지 않다가 1014년에 교황 베네딕도 8세(1012~1024)가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2세(1002~1024)의 조언을 받아들여 로마 교회의 경우 신경에 '필리오궤' 를 사용하도록 허용하였다. 그런데 이때 견해의 차이가 생겼다. 즉 동방 교회는 성령의 발출을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a Patre per Filium) 발한다' 고 받아들였다. 반면 서방에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a Patre Filioque) 발한다' 고 이해하였다. 서방에서는 '필리오궤' 의 첨가를 해석의 확대가 아니라 다만 하나의 해석으로 생각하였으나 동방에서는 이를 신경의 변조라고 하며 서방교회에 이단의 죄를 씌웠다. 결국 '필리오궤' 는 1054년 동방 이교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일치를 위한 노력 : '필리오궤' 를 지지하는 이론이 캔터베리의 안셀모(Anselmus Catuariensis, 1033~1109)와 베드로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095~1160)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 후 중세 서방 교회의 신학과 체제를 정리한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는 베드로 롬바르두스의 견해를 따라 삼위 일체론과 성령론을 확정짓고, '필리오궤' 를 신경에 삽입하는 것을 재확인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는 동방 교회와의 재일치를 목적으로 제2차 리용 공의회(1274)를 소집하였는데, 동방 교회의 대표자들은 7월 6일의 제4차 회의에서 '필리오궤' 가 삽입된 신경을 미사 중에 고백하였다. 또한 "성령이 영원으로부터 성부와 성자에게서, 그러나 두 개의 원리가 아닌 하나의 원리에서 좇아 난다고 굳건히 고백하는 바이다" (DS 850)라고 신앙 고백을 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단죄를 받는다고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 일치는 존속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미카엘 8세(1261~1282)가 정치적 동기로 추진한 것이라며 동방 교회의 주교들이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교황 마르티노 4세(1281~1285)가 나폴리 왕의 동방 정벌 계획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1439년에 개최된 피렌체 공의회에서 가장 격렬하고 오랫동안 토론된 것이 '필리오궤' 문제였다. 니체아 수도 대주교인 베사리온(Bessarion)과 에페소 수도 대주교인 에우제니코(Marco Eugenico)가 대표적으로 성삼위에 대한 로마 교회의 견해를 반대하였다. 성령의 기원에 대한 '필리오궤' 문제는 제8 회기까지 다루어지지 않았으나 그 이후부터 이에 대한 일치의 길이 모색되었다. 3월 30일부터 시작된 토론들은 6월 27일에 이르러 신경에 '필리오궤' 용어를 삽입하는 문제 및 다른 여러 문제들에 대한 내용을 확정지었다. 그 결과 '필리오궤' 문제에서 상대방의 정통 신앙성을 서로 인정하게 되었다. 동방교회에서 이 용어를 신경에 삽입할 이유는 없으나 그 정통 신앙성은 인정하여,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하였다는 내용이 교의로 선포되었다. "성령께서는 그 본질과 존재를 성부와 성자에게서 동시에 받으시며, 유일한 근원이신 한 위와 또 다른 위에게서, 유일한 발출(spiratio)을 통하여 영원히 나오신다. ··그리고 성부께서는 아버지로서 외아들을 낳으시고, 당신의 존재만을 제외하고는 당신께 있는 모든 것을 외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자에게서 나오신 성령의 이 발출도 영원으로부터 성자를 낳으신 성부에게서 영원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DS 1300~1301).
'필리오궤' 의 첨가는 어떤 금지 조항이나 성서 그리고 어떤 공의회 결정에도 대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에페소 공의회(431)와 칼체돈 공의회(451)의 교령들에서 제시하는 내용에 근거할 때,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물론 니체아 신경도 파기될 수 없는 사실들이라고 공언하고 있으며 신경의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이들의 교의적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도 금지하기 때문이다.
타교파들의 입장 : '필리오궤' 에 대한 논쟁이 다시 시작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종교 개혁 당시에는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으며, 단지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와 캔터베리의 안셀모의 삼위 일체론을 답습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에 대한 교의를 선포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의 결정에 반대하여 갈라져 나간 가톨릭교(Altkatholizismus)는 동방 교회와 접촉하였으며, 1874~1875년 독일 본(Bonn)에서 구가톨릭교, 영국 성공회,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의 대표들이 참석한 연합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를 통해 서방 교회 쪽에서 일방적으로 '필리오궤' 를 첨가한 것은 위법이라는 데 동의하였으며, 구가톨릭교는 최초로 '필리오궤' 가 없는 본문을 회복하였다.
이런 논의는 동방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러시아 정교회는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 교회 회의(1892)의 결과로, 오직 "성부에게서 발한다"를 교리로 선언하였다. 이에 1898년 러시아의 교회사가 보리스 볼로토프(Boris Bolotov)가 《국제 신학지》(Revue Internationale de théologie)에 <필리오궤에 대한 명제들>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들과 그리스 정교회 신학자들 간에 논쟁이 있었지만, 볼로토프는 이 논문을 통하여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성령이 오직 '성부에게서' 나온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성부와 매우 가까이 있는 성자는 성령이 성부로부터 나오는 데 대한 논리적인 '전제' 와 사실적인 '조건' 이 된다고 하였다. 볼로토프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동 · 서방 교회가 서로 일치할 수 있는 신학적인 노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1년 영국 성공회와 동방 교회의 연합 교리위원회는 '필리오궤' 를 일치를 위한 형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재확인하였다. 또한 영국 성공회와 모스크바의 러시아 정교회 사이에 이루어진 1973~1976년까지의 위원회를 통해 '모스크바 합의 성명' 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여러 가지 신학적인 내용에 대한 합의였지만, 신경에 '필리오궤' 를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평 가〕 필리오궤 논쟁은 현재도 진행 중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상 여러 차례 일치를 위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필리오궤' 를 포함시키는 것은 현재도 동방 교회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 문제는 다분히 성서의 본문이나 최종적인 권위로 인정받는 역사적 전통에 호소한다고 해서 결정될 사항이 아니며, 삼위 일체론에 대한 해석학적 문제이다. 주요 난제는 동방과 서방 교회가 5세기 이후 아주 미묘하지만 상당한 차이를 보여 왔다는 점이다. 필리오궤' 는 서방 교회의 사고 속에 비교적 잘 적응하였지만 동방 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하였으며,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에까지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바르트(K. Barth, 1886~1968)는 '필리오궤' 를 모든 종류의 자연 신학에 대항하는 필수적인 보루라고 주장하며 반론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필리오궤 논쟁은 결코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부에게서 나오는 성령이나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는 성령은 동일하게 고백하는 신비의 실재를 믿는 신앙의 단일성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신학적인 합의를 어느 정도 이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 동방 이교 ; 리용 공의회 ; 서구 대이교 ; 성령 ; 테오둘포 ; 톨레도 교회 회의 ; 포시우스 ; 피렌체 공의회)
※ 참고문헌 A. Palmieri, 《DTC》 5, pp. 2309~2343/ J. Gill · B.L. Marthaler, 《NCE》 5, 2003, pp. 719~722/ La questione morale nella controversia del Filioque, Civiltà Cattolica Ⅲ, 1929, pp. 199~210/ La questione storica della controversia del Filioque, Civiltà Cattolica Ⅲ, 1929, pp. 495~508/ M. Gordillo, Compendium theologiae orientalis, Roma, 1939, pp. 126~133/ E. Candal, Filioque nei Concili di Toledo, Incontro ai Fratelli separati di Oriente, Roma, 1945, pp. 217~229/ E.Candal, L'aggiunta del Filioque al Simbolo, Incontro ai Fratelli separati di Oriente, Roma, 1945, pp. 231~245/ M. Jugie, De prpcessione Spiritus Sanctis exfontibus revelationis etc., Roma, 1936/ H. Jedin, 최석우 역, 《세계 공의회사》, 신학 텍스트 총서 2.3, 분도출판사, 2005. 〔全壽洪〕
필리오궤 논쟁
— 論爭
〔라〕Controversia de Filioque · 〔영〕Filioque Controver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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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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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시우스가 '필리오궤' 를 인정하고 신경에 삽입하려는 서방 교회의 대세적인 움직임에 반발하자, '필리오궤' 에 대한 동 · 서방 교회의 갈등은 극으로 치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