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베트남과 마주보며 대만과 인도네시아의 중간 위치, 북위 5도에서 22도까지에 있는 약 7,100개의 섬들로 구성된 국가.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1556~1598)가 왕자이던 1534년에 그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으로 명명되었으며, 지정학상 북부의 루손(Luzon) 섬, 중부의 비사야 군도(Bisayas), 그리고 남부의 민다나오(Mindanao) 섬으로 구분된다. '북쪽의 닻 이라 할 수 있는 루손 섬이 총 육지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두 번째로 큰 섬인 민다나오는 '남쪽의 닻' 을 이루고 있다. 공식 명칭은 필리핀 공화국(Republic of the Philippines)이며, 면적은 300,400k㎡, 인구는 8,785만 명(2005), 수도는 루손 섬에 위치한 마닐라(Manila)이다. 타갈로그어(Tagalog)를 기초로 한 필리핀어와 영어가 대표적인 공용어이나 그 외에도 비사야어(Bisaya) 등 중요한 방언만 87종이나 된다. 필리핀의 종교 문화권은 루손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83%) 및 프로테스탄트(9%)의 그리스도교 문화권, 민다나오 지역의 이슬람(5%) 문화권, 북부 내륙 고지대 소수 민족 사회의 애니미즘 문화권으로 대별된다.
필리핀 군도에 가장 먼저 정착한 인종은 네그리토인(Negritos)인데, 그 일부는 오늘날에도 루손 등지의 고산지대에 살고 있다. 그들은 기원전 1500년경 바다를 건너온 프로토 말레이인(Proto Malay)들에 의해 산악 지대로 밀려났다. 그 후 보르네오와 말루쿠 제도(Maluku, 일명 향료 제도), 그리고 동남 아시아에서 건너온 두테로 말레이인(Deutero Malay)의 이주가 2,000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중 가장 큰 일파가 오늘날 중부의 도서 지방에 살고 있는 비사야족이다. 이 부족은 필리핀 군도 주민의 다수를 형성하면서 해양 지향성 문화를 발전시켰다.
필리핀에 민족적 통일을 가져다준 것은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 지배 체제였다. 따라서 토착 문화 위에 스페인과 미국 문화의 영향이 깊이 뿌리박혀 특이한 복합 문화가 성립되어 도시인, 그중에서도 엘리트층의 생활이나 행동 양식은 서구적이다. 스페인이 전파한 그리스도교는 필리핀을 아시아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었기에 광장에 있는 성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연중 행사 등 도시의 생활 관습에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짙게 풍긴다. 필리핀은 동남 아시아의 주변부에 위치하였다는 지리적 문제로, 스페인의 식민 통치 이전에는 주민들이 다른 지역의 정치 문화와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종족적 · 문화적 동질성의 결여로 필리핀의 북부와 중부에 대한 스페인의 정복은 거의 무혈로 손쉽게 이루어졌으나, 남부에서는 가톨릭과 이슬람 사이에 심각한 투쟁이 발생하여 항구적인 교착 상태에 빠짐으로써 동화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스페인 통치 시대에 수도회 소속 선교사들에게 종교적 · 정치적 개종의 임무를 부여하였던 교회-국가의 관계가 필리핀의 정복과 동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전래와 정착〕 15세기 중반 필리핀에 대한 스페인의 식민 지배 이전의 주민들에게 가장 강력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이슬람이었다. 말레이와 아라비아의 무역상들과 포교사들이 말라카(Malacca)로부터 수마트라(Sumatra)와 자바(Java)를 거쳐 1500년까지는 술루(Sulu) 소군도에 이슬람을 정착시켰으며, 다시 민다나오까지 이슬람을 전파하였다. 또한 1565년에 이르러 이슬람이 루손까지 전파되고 있었던 상황으로 볼 때, 필리핀 군도 전체의 이슬람화를 저지한 것은 스페인인들의 도래였다.
스페인 국왕의 지원을 받은 포르투갈인 마젤란(Fermao de Magalhães, 1480?~1521)은 향료 군도에 이르는 서쪽 항로를 찾아 태평양을 횡단하는 긴 항해 끝에 1521년 3월 16일 필리핀 중부의 사마르(Samar) 섬에 발을 믿었다. 그 후 세부(Cebu) 섬에 도착하여 그 지방의 지배자와 고위층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 식품 재보급을 위한 마젤란의 필리핀 군도 방문은 훗날 '발견자의 권리' 에 입각하여 스페인이 필리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스페인은 향료 제도에 이르는 항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1526년, 1527년 그리고 1542년에 필리핀에 영구적인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러나 멕시코에서 필리핀 군도까지의 항해는 태평양 횡단 무역의 타당성을 확인시켜 주었으며, 중국의 항구들이 유럽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필리핀 군도는 중국의 비단과 멕시코의 은을 교환하는 중개지로 지목되었다. 더욱이 1556년 즉위한 펠리페 2세는 필리핀을 그리스도교 전파를 위한 최적지로 여기고 1564년에 뉴스페인(New Spain) , 즉 멕시코의 레가즈피(Miguel López de Legazpi, 1524~1572) 제독을 사령관으로 하는 새로운 원정군을 필리핀 군도에 파견하여 1565년 4월 최초의 스페인 정착지를 세부에 건설하였다. 1571년 레가즈피는 무슬림의 저항을 무찌르고 탈취한 루손의 마닐라로 식민지 경영의 중심지를 옮겼다. 당시 루손의 중부와 북부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은 미미한 상태였다.
그러나 스페인의 정복이 수십 년 늦어졌다면, 레가즈피의 성공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남부의 모로(Moro)—이 단어의 어원은 1492년 스페인에서 완전히 추방된 무슬림인 무어인(Moor) 이다—라고 불린 무슬림들은 1876년 술루 왕국이 스페인의 무적 함대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자신들의 이슬람 왕국을 보전하기 위해 스페인과 '300년 전쟁' 을 치렀다. 모로인들의 저항은 스페인인들이 극복하기에 너무 강력하였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토착 지배자들의 막강한 세력과 무슬림들의 종교적 · 정치적 동질성으로 인한 굳은 단결 때문이었다. 따라서 스페인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모로인들의 저항은 내부적 안정에 가장 결정적이고 지속적인 위협이었다. 모로인들의 단결을 가능하게 하였던 요인은 초승달(이슬람교)과 십자가(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적대 관계는 물론, 일부는 국제적 인정까지 받을 정도로 막강하였던 이슬람의 라자(Raja)와 술탄(Sultan)이 체현하는 정치적 · 종교적 · 군사적 권위 때문이었다. 스페인이 1637년 민다나오의 모로인 요새를 탈취하고 이듬해에 술루 소군도의 졸로(Jolo) 섬에 있는 모로인들의 본부를 점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후 1세기 동안 스페인은 모로인들의 끊임없는 습격으로부터 중부의 비사야 제도를 보호하기 위해 해안 수비대들을 설치하였을 뿐이다.
1718년에 스페인은 민다나오의 삼보앙가(Zamboanga)를 다시 점령하였고, 졸로의 술탄은 1744년에 자신의 영역 내에서 가톨릭 교회의 활동을 허용하는 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20년 후 영국의 마닐라 점령으로 스페인의 군사적 위신이 무너져 모로인들의 약탈이 심해지자, 1878년 마침내 졸로의 술탄이 스페인의 지배를 수락하였고 스페인의 모로인들에 대한 평정이 재개되었다. 한편 스페인 국왕은 필리핀의 선교를 아우구스티노회(1565), 프란치스코회(1576), 예수회(1581), 도미니코회(1587), 아우구스티노 은수사회(1606) 등의 수도회에 맡겼다. 이와는 별도로 이미 정착된 지역에는 주교좌가 설정되었다. 이들 중 수도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스페인의 통치에 가장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들은 필리핀인들에게 정신적 권위는 물론 현세적 권위의 원천이었으며, 식민지 정부의 하급 관리와 세금 징수자에게 시달릴 때 마다 의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상이었다.
〔수도회와 교구의 관계〕 교황은 서인도 및 동인도 지역의 신설 교회를 위해 스페인 국왕에게 '보호권' (patronatereal)을 줌으로써 사실상 교회와 국가를 통합시켰다. 18세기 초에는 대주교의 권위가 절정에 이르러 마닐라 대주교의 권위는 총독에 이어 제2 인자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의 상호 결합 관계가 이상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만족스러운 권위의 분담은 아니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선교사들은 복음의 전파뿐만 아니라 스페인 주권의 확장을 위한 주요 수단이었다. 그로 인하여 역할의 중복을 초래하였으며, 최악의 경우 세속 관료들은 성직자들을 자신의 권한을 침해하는 존재로 간주하였다. 식민지 정부와 교회 지도층 사이의 갈등은 치열하였지만, 교구 관할을 둘러싸고 수도회들과 대주교가 벌인 지속적인 투쟁은 그것을 능가하였다. 영성 생활에 대해서는 대부분 수도회의 수사들이 관할하였는데, 이러한 권한은 세속 권력에 맞먹는 것이었다. 각 주(州)에서 스페인의 권위 유지가 수사들에게 달려 있음을 인식하게된 식민 당국은 수도회들이 대주교의 관할권에서 사실상 독립하는 것을 묵인하였다.
한편 수도회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필리핀인들에 대한 서품 확대를 반대하였고, 이 논쟁의 정치적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즉 수도회들이 필리핀인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기본적 시각이 문제가 된 것이다. 유럽에서의 정치적인 이유로 1768년 예수회가 필리핀에서 추방되었을 때 이 문제는 전면으로 부상하였다. 대주교와 총독은 교구의 공석을 필리핀인 사제들로 충원하였으나, 그들 중 일부는 그 직위에 필요한 교육과 훈련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수사들을 격분시켰고, 필리핀인에게 성직자의 권위와 책임을 부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그들의 주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결국 필리핀인 사제들은 수도회의 수사 신부를 보좌하도록 격하됨으로써 종전의 상태가 복원되었으며, 이 논쟁의 인종주의적 측면은 19세기 필리핀의 민족주의를 일으키는 요소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반스페인 민족주의와 성직자〕 선교사들이 스페인어로 교육을 하였기에, 필리핀은 동남 아시아의 다른 지역보다 더 확고하게 서구 문명이 정착되었고 근대 유럽의 민족주의 이념이 수용되었다. 유럽 세력이 도래하기 이전의 동남 아시아에서 통일이 가장 덜 이루어진 지역이었던 필리핀이, 역설적으로 제국주의 세력을 거슬러 반란을 일으키고 민족 국가의 수립을 요구한 최초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필리핀 민족주의가 처음으로 태동된 것은 1841년 오폴리나리오(Opolinario de la la Cruz) 신부가 수도회 입회를 거부당하자 콜로룸(Colorum)이라는 수도회를 설립하면서 유럽인 수사들에 대한 현지인 성직자들의 투쟁을 주도하였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스페인과 반메스티조를 표방하는 수도회였던 콜로룸은 스페인 점령 이전의 관념들까지 수용하였고 이러한 이단적 행위로 오폴리나리오 신부는 스페인 병사들의 추적을 받아 살해되었다. 이에 항거하여 현지인 성직자들은 1843년에 일련의 반란을 일으켜, 콜로룸의 이름을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수도회들의 인종주의에 대한 그들의 격분은 지주인 수도자들을 비난하고 있던 채무 노예 상태의 루손 소작 농민들의 팽배한 불만과도 맞물려 있었다. 유럽인들과 그 제도 및 관행에 대한 이러한 대중적 반감에는 유럽식 교육을 받은 필리핀인들, 즉 부유한 가문과 대지주들로 구성된 일루스트라도(Ilustrado) 계급에 대한 반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와중에 1872년 마닐라 부근의 카비테(Cavite) 병기고에서 병사들이 일으킨 소규모 반란에 연관되었던 부르고스(J. Burgos), 고메스(M.Gómez), 사모라(J. Zamora) 등 3명의 필리핀 신부들이 처형되었다.
한편 19~20세기 필리핀 민족주의의 대표적 인물 리살(José Rizal y Alonso, 1861~1896) 박사는 개량주의적 단체인 '라 리가 필리피나' (La Liga Filipina)를 설립하였다. 이 때문에 민다나오 북부 지방으로 유형을 간 그는 스페인 식민지 체제를 무력으로 타도하고 모든 필리핀인들을 하나의 민족 국가로 통합한다는 목적의 '카티푸난'(Katipunan)이라는 비밀 혁명 단체를 조직한 보니파시오(Andres Bonifacio)와 하신토(Emilio Jacinto)와 합세하였다. 1896년 8월 카티푸난의 봉기 계획이 스페인 당국에 포착되자 리살은 '반란, 폭동 교사 및 불법 조직' 혐의로 체포되어 그해 12월 30일 공개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대중의 감정에 불을 당겨 봉기를 야기시켰지만 군사적 압력에 못이긴 반군들은 결국 스페인에 투항하였다.
〔미국의 지배〕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식민 통치의 주체가 미국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필리핀 남부의 풍부한 천연 자원에 큰 관심을 기울여 1910년까지 민다나오 섬에는 대규모의 열대 작물 농장이나 그 생산물을 가공하는 미국의 대기업체가 97개소나 운영되고 있었다. 미 군정 당국은 생산성을 높이면서 효과적인 식민 통치를 하기 위해 무슬림들에게 미국식 교육 정책을 펴나갔다. 1935년에 총독제하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서 필리핀의 남북 관계에 새로운 시기가 도래하였다. 마닐라의 연방 정부는 '무소유주 토지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부유한 북부의 그리스도인들이 남부의 비옥한 땅을 개간하도록 유도하였다. 토지 대장에 등재되어 있지 않던 토지는 모두 국유지나 군용지로 둔갑하였는데, 이는 각종 법령과 군사력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이로써 모로인들은 영문도 모른채 생활 터전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몰렸다. 모로인들의 소규모 영농 방식은 자본주의 경제 방식과 경쟁이 될 수 없었기에, 모로인들은 심각한 생존 위협에 빠지게 되었다.
필리핀 교회의 이교 : 1902년에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필리핀 독립 교회' (Philippine Independent Church)가 설립되었다. 아글리파이 교회(Aglipayan Church)로도 불리는 이 교회의 지도자는, 1899년 필리핀 혁명에 참여하였다가 파문당한 그레고리오 아글리파이(Gregorio Aglipay) 신부였다. 그는 스페인 성직자들이 필리핀의 가톨릭 교회를 담당하는 것과 지배자로 행세하는 것에 반대하여 독립적인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 교회의 전례는 가톨릭 교회의 것을 그대로 따랐지만 교리는 유니테리언주의(Unitaianismus)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설립 이후 필리핀 독립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고, 1946년 유니테리언주의자들이 떠난 다음 해에 삼위 일체 교리에 입각한 새로운 신조를 채택하였으며, 미국의 감리 교회에서 1948년 필리핀 독립 교회의 주교 3명을 축성한 이후 두 교파는 협력하고 있다. 케손(Quezon) 시에 있는 세인트 앤드루 신학교(St. Andrew's Theological Seminary)가 현재의 연합 기구이며 두 교파의 성직자들을 훈련시키고있다. 현재 필리핀 독립 교회에는 약 150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있으며, 수십 개의 교구와 약 40명의 주교들이있다.
골롬반회의 활동 : 1905년 이후 필리핀에 진출하는 선교회는 계속 증가하였다. 아일랜드의 구속주회(1905) 밀힐 외방전교회(1906) 신언회(1908), 메리놀회(1926), 골롬반회(1929) 등이 이 시기에 진출하였다. 특히 설립 후 중국 선교에 모든 힘을 쏟던 골롬반회는, 중국 선교에 참여하는 신부수가 증가하자 필리핀과 한국 등지로도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골롬반회 신부들은 1929년 마닐라 중동부에 위치한 말라테(Malate)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필리핀 각지로 흩어져 선교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하면서 말라테에 있던 신부 중 5명이 퇴각하는 일본 군대에 살해당하였고, 1명은 진주하는 미군의 폭탄에 목숨을 잃었다. 이때 마닐라는 바르샤바(Warzawa) 다음으로 최대의 피해를 입은 도시였으며 필리핀 전체가 황폐화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골롬반회 신부들은 필리핀으로 더 많이 진출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골롬반회 신부들이 투옥되거나 추방되었기 때문이다. 추방된 골롬반회 신부들은 필리핀으로 왔으며, 그들의 활동 영역은 네그로스(Negros) 섬에까지 확장되었다.
〔1941~1965년까지의 교회〕 미국은 필리핀을 미국식 정치 제도의 시범장으로 육성하였지만, 실상은 미국의 패권주의를 합리화한 것이었다. 1935년 필리핀 연방이 수립되어 케손(M. Quezon, 1878~1944)이 그 책임을 맡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정치적 · 경제적 독립은 지연되었다. 1941년 12월에 일본 의 침공을 받고. 3년 후인 1944년 맥아더(D. MacArther, 1880~1964) 장군의 지휘 아래 필리핀에 상륙한 연합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전쟁으로 교회 또한 큰 피해를 받아 전쟁 기간 동안 257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성직자와 남녀 수도자 그리고 많은 신앙인들이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체포되어 옥중에서 생활하였다.
전쟁이 끝난 1946년 7월 4일 필리핀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로하스(M. Roxas, 1946~1948), 키리노(E. Quirino, 1948~1953), 막사이사이(R. Magsaysay, 1953~1957), 가르시아(C.P. Garcia, 1957~1961), 마카파갈(D. Macapagal, 1961~1965) 등 역대 필리핀 대통령이 미국식 대통령제에 따라 4년마다 민주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로부터 '민주주의 장식창' 이라는 찬사와 함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이던 1945년 2월 필리핀 천주교 주교 회의(CBCP)가 시작되었다. 당시 교황 사절이던 피아니(William Piani)는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상황에서 예수회의 헐리(John Hurley) 신부에게 재난 구호 사업을 맡기며 천주교 복지 기구(CWO)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천주교 복지 기구의 목적은 전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파괴된 시설들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1945년 7월 17일 필리핀의 주교들은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한 이래 처음으로 마닐라에서 모임을 갖고 천주교 복지 기구를 필리핀 천주교회의 공식 기구로 만들었다. 그 이후 오랫동안 이 기구는 여러 분야에서 많은 구호 사업을 하였고 교회의 시설을 복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재산이나 이해와 관련된 문제에서 교회를 보호하고 이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53년 제1차 필리핀 지역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신자들이 천주교인으로서 생활을 품위 있게 유지하며, 풍부하게 하고 이를 전파하는 것' 에 초점을 두고 심도 있게 논의되었고, '사회 질서의 혁신 을 위해 교회의 자원을 동원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교회는 필리핀 농부들을 위한 가톨릭 액션 프로그램(FFF) 및 노동자들을 위한 가톨릭 액션 프로그램(FFW) 등을 결성하였다. 1965년까지 천주교 복지 기구는 교회 및 시민 사회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주교들의 합동 서한과 성명서들을 39회 발표하였다. 1961년에는 로마에서 교황청 대학에 다니는 필리핀 신학생과 사제들을 위한 기숙사를 완공하여 축성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많은 신심 단체 운동들이 도입되었다. 그리스도교 가정 운동(CFM)이 1950년대에 도입되었고, 꾸르실료는 1963년에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들은 평신도들이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불을 당겨 주었다.
1965년 중반 필리핀 복음 전래 400주년(1565~1965)을 기념하는 대회가 전국적인 규모로 6일 동안 거행되었고, 이를 기해 주교들은 필리핀 선교 사업부를 설립하였다. 이 기간 동안 필리핀 교회의 사명과 경험에 중대한 영향을 준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마르코스(F.E.Marcos, 1965~1986)가 필리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된 것이었다.
〔독재와 민중 봉기〕 미국이 1946년 필리핀에게 정권을 이양한 후에도 대(對)이슬람 정책은 변화가 없었다. 투쟁에 지친 모로인 지도자들은 정부의 경제 정책과 정치 제도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더욱이 부유한 북부 그리스도인들이 마닐라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추진하던 남부 개발로, 모로인들은 더욱 소수 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1965년 경제 자립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대통령이 된 마르코스는 집권 초기에 경제 개발 4개년 계획의 추진과 함께 친미 반공 정책 일변도에서 탈피하여 과감한 대공산권 외교와 다각적인 견제 외교를 통한 국가 발전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1972년 반정부 게릴라인 신인민군의 준동과 민다나오 모로인들의 분리 독립 요구 등을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신헌법을 제정(1975)하면서 일인 장기 독재 체제를 갖추어, 1986년 '2월 혁명' 으로 물러날 때까지 국제 사회에서 필리핀을 후진 국가로 전락시켰다. 실제로 1972년 마르코스의 계엄령 선포 훨씬 이전부터 민다나오 남부 지역에서는 내란을 방불케 하는 그리스도인과 무슬림 사이의 무력 충돌이 자주 발생하였다. 1972~1975년까지 약 6만 명의 모로인 무슬림들이 희생되었으며, 1977년 한 해 동안 50만 명 내지 100만명의 모로인들이 생활 터전을 잃고, 20만 명 이상이 말레이시아령 사바(Sabah)로 이주하였다. 마르코스가 집권한 20년 동안 그가 남긴 것은 군국주의의 고취, 폭동, 정당한 사법 절차의 부재(不在), 민주적인 절차의 파괴, 경제의 퇴보, 그리고 국민 전체에 스며드는 공포 등이었다.
한편 이 기간은 교회가 시련을 겪고 그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성장하는 시기였다. 예언자적인 목소리는 무참히 짓밟히고, 투옥되고 고문을 당하였다. 그리고 무수한 외국 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당시 교회는 국민들의 복리증진에 관한 정책에는 협조하지만 그에 반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즉 사안에 따라 '협력과 비판' 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었다. 1977년 <복음 선포에 있어서 사랑의 연대>(The Bond of Love in Proclaiming the Good News)라는 사목 서한을 발표하여 이 서한은 필리핀이 직면한 많은 사회 문제들과 계엄령에 관한 교회의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이 서한은 사회 전체를 복음화하기 위한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가에 대해 교회의 전반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선언한 중요한 문서이다.
1981년 1월 17일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철폐하였다. 왜냐하면 사흘 뒤에 미국 대통령으로 레이건(R.W. Reagan, 1981~1989)이 취임하고, 한 달 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가 필리핀을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전히 독재 정부를 유지할 수 있는 많은 악법들이 있었다. 교황은 필리핀을 방문하여 두 가지 중요한 당부를 하였다. 그 첫 번째는, 각 사람은 자기 삶 안에서 역동적인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정의와 평화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교황은 대통령과 정부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때때로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빌미로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을 모독하는 행위나, 이 존엄성을 지켜 주는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짓밟는 행위는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1983년 8월 21일 야당 지도자인 아키노(Benigno Simeon Aquino Jr., 1932~1983)의 암살 사건은, 전국적으로 정의와 진리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격렬한 시위를 촉발시켰다. 이때 교회의 입장 표명은 사태의 전체적인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74년부터 마닐라 대교구장으로 재직한 하이메 신(Jaime Sin) 추기경은 필리핀 국민에게 이렇게 경고하였다. "우리가 그분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폭력과 분열이라는 불구덩이에 기름을 붓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1986년에 마르코스는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정권의 위기를 타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투표 결과 베니그노 아키노의 미망인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 1986~1992)가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국민 의회는 마르코스가 이겼다고 선포하였다. 이에 필리핀 국민들은 항의 시위를 벌였고, 선거의 후유증으로 사회 분위기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서 교회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국민을 속이는 선거로 집권하는 정권은 어느 정권이건 도덕적 정통성을 갖지 못한다. 만일 시민들이 이번 선거가 도둑맞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시민들은 이런 사태를 야기한 정권에게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요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에 따라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 1986년 2월 에 일어난 '무혈 혁명' 과 이를 성사시킨 신자들 그리고 신 추기경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분석한 내용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혁명은 '교회와 관련을 맺고있는 집단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비폭력 운동' 으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2월 혁명은 사회적인 대변혁을 초래하는 혁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J.Carroll). 왜냐하면 혁명은 성취되었으나 필리핀 국민을 대물림하면서 괴롭히는 부(富)와 권력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다수의 필리핀 국민들이 깨닫게 된 것은, 사회적 · 정치적 · 경제적인 생활에서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과 자신들은 그 외곽에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국가 경제의 고통〕 마르코스의 집권기 동안 대다수의 필리핀 국민들은 빈곤 계층으로 전락하였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난제(難題)였지만 앞으로도 필리핀이 떠안아야 할 최대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가 몰락한지 15년이 지난 후에도 그가 남긴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있다. 50% 가량의 필리핀 국민들이 빈곤 계층 이하의 생활 수준으로 전락하였고, 정부 예산의 40% 가량이 국내외 부채를 갚는 데 사용되고 있으며, 실업률이 11.8%이고 불완전 고용률이 22%에 이른다. 그리고 전 국민의 1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해외에서 이주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뇌물과 부정 부패는 필리핀의 풍속이라고 할 정도로 성행하고 있으며, 환경 오염이 개선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유아 사망률은 아시아에서 가장 높다. 그러나 이 처럼 필리핀 전역을 짓누르는 가난과 극명하게 대립되는 환경에서 사치를 누리며 살고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어, 소득 분배의 구조가 매우 불평등함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필리핀의 정치 제도하에서 권력이나 재화는 영향력이 있는 극소수의 정치가, 사업가 그리고 군인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이 필리핀 사회에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정부의 기능을 민주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당면하였던 어려운 문제들은 파산 상태에 이른 경제,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군사기지의 지위 문제,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의 무력 봉기를 포함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정치적 반란, 자연 재난, 급증하는 인구 문제, 외채, 농지 개혁 등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아키노 대통령은 1992년 5월 필리핀 국민들이 자유롭고 공정한 분위기에서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하였고, 그 결과 평화롭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 라모스(Fidel V. Ramos, 1992~1998)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필리핀에서는 처음으로 비가톨릭 신자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모로인의 분리 독립 요구는 1996년 라모스 대통령과 필리핀 무슬림의 최대 무장 세력인 모로민족해 방전선(MNLF)의 누르 미수아리(Nur Misuari)의 비밀 회동에서 24년간에 걸친 분쟁을 종식시키기로 합의하여 어느 정도 해결점을 찾았다. 하지만 이해 관계를 달리하는 이슬람 세력들과 완전 합의에 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의 구현〕 필리핀 교회는 공의회 정신을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주교들은 새복음화를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둔 것은 사회 사목으로, 교회는 공의회 시기에 이미 농부와 노동자 그리고 어부들을 위한 노동 조합과 협동 조합을 설립하고 이를 돕기 위해 노력하였다. 주교들은 사회 활동 단체들과 정의 및 발전에 대한 주제로 사목 교서를 여러 차례 발표하였으며, 1967년 국립 농촌 발전위원회를 후원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마을로 간다' 를 표어로 내세웠는데, 이는 그 후 사회 정의와 발전에 대한 교회의 임무를 거론할 때 기준이 되었다. 주교들은 사회 사목 활동을 위한 협조 단체로 사회 활동 단체들과 정의, 평화를 위한 전국 사무국(National Secretariat for Social Action-Justice & Peace, NASSA) 설립을 적극 후원하였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노력으로 인간 발전에 관한 교회의 시야(視野)가 넓어져, 즉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적 변화와 아울러 국가의 구조적인 변혁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노동자와 농민 계층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교회가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인 문제에 개입하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중대한 과제로 떠올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규정한 교회상이 필리핀 교회에 뿌리내리면서 교회는 성숙하고 활동적인 모습으로 변모하였다. 강력한 공동체가 곳곳에서 결성됨으로써 영적 성장은 물론 교리 지식의 보급과 섬김의 자세 그리고 사회적인 성장을 이룩하였다. 교회 내에 점차 강력한 힘이 축적되기 시작하면서 구체적인 경험에 입각한 신학적 접근이 가능해졌고. 사회 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필리핀의 상황에 맞도록 조절되었으며, 인간 발전을 위한 영성 분야 및 교회론과 선교학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적극적인 방법으로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방법, 사회적 · 정치적 위기 상황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 교회와 사회 단체들의 책임 소재 등에 대한 많은 경험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변모해 오는 동안 교회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소신 있게 증언하다가 생명을 잃은 증거자들과 순교자들 또한 얻게 되었다. 1997년 2월 4일에는 벤야민 (Benjamin de Jesus, O.M.I.) 주교, 2000년 5월 3일에 갈라르도(Rhoel Gallardo, C.M.F.) 신부, 이노첸시오(Benjamin Inocencio, O.M.I.) 신부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필리핀 주교들은 복음화를 이룩하여야 한다는 교회의 사명에 입각하여 사목 교서를 발표하였고, 이를 통해 계속하여 온건한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67년 정식으로 인가받은 필리핀 주교 회의는 1965~2000년 까지 125개의 사목 서한과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중 3분의 2가 사회 · 정치 · 경제에 관한 문제였다. 이 사목 교서들은 필리핀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삶에 대한 정확한 지표이다.
〔교육 및 주교 회의〕 교리와 교육 사업 : 필리핀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천주교 교리 교육은 교회 쇄신의 근본이 되었다. 교리 교육 부서들은 미래에 대한 통찰력에서 출판물, 연구소 그리고 교리 교육을 위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데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다. '교리와 천주교 교육에 관한 주교위원회' (The Episcopal Commission on Catechesis and Catholic Education, ECCCE)는 그동안 주목할 만한 책들을 여러 권 출판하였고, 전국적인 규모의 워크숍(workshop)과 각종 대회를 후원하였다. 그리고 교리에 관한 계간 잡지 《도체테》(Docete)의 발간으로 교리에 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높아졌고 질적 수준도 많이 향상되었다. 또한 주교 회의는 1990년을 '교리의 해' 로 정하고 1년 동안 전국적인 규모로 성대하게 기념하였다. 이후에도 이 행사는 계속 개최되었으며 교구 산하 교리 연구소가 주요 도시에 설립되어(Bacolod, Cebu, Davao, Manila, Naga, Vigan 등) 교리 교사들을 수십 년간 양성하였다. 필리핀 의회는 공립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였으나 교리 교사의 수가 부족하여 교리를 가르치는 학교의 수를 제한하였다.
필리핀 교회는 수백 개의 초 · 중 · 고등학교 및 300개의 단과대학과 종합대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필리핀 가톨릭 교육 재단 연합회' (The Catholic Educational Association of the Philippines, CEAP)가 1941년에 설립되어 현재까지 가톨릭 교육 기관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으며, 종교 교육의 진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1973년에 설립된 '필리핀 가톨릭 대학교 연합회' (The Association of Catholic Universities of the Philippines, ACUP)에서도 이와 비슷한 활동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필리핀 교회가 이룩한 종교 교육과 쇄신의 성공 요인은 그동안 특별한 주제로 개최된 전국 규모의 각종 대회이다. 교회는 대회에 참석한 대표자들이 대회가 끝나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갔을 때, 그 대회 때 받은 교육이나 정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여, 각종 시청각 교재들과 유인물들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노력들이 매우 큰 효과를 거두었음이 입증되었다. 그 동안 개최된 주요 행사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즉 1985년 마리아의 해, 1987년 성체의 해, 1989년 성서의 해, 1990년 교리의 해, 1995년 세계 청소년 대회, 1997년 세계 성체 대회, 1998년에는 두 번에 걸친 성령대회, 1999년 성부의 해, 2000년 삼위 일체 대회, 그리고 같은 해의 전국 선교 대회 등이다.
필리핀 주교 회의 : 1995년에 필리핀 주교 회의는 설립 50주년을 기념하면서 그동안의 활동과 기능을 반성하였다. 그리고 주교 회의의 정관과 부칙을 수정하여 새로운 사무국, 즉 언론 매체 사무국, 법률 문제 사무국, 연구 조사 기관, 생명 윤리 사무국, 여성 사무국, 그리고 교회의 문화 유산 담당국 등을 신설하였다. 현재 33개국(department)과 위원회, 필리핀 천주교회가 관심을 두고있는 분야에 대해 연구하는 사무국(office)이 있다.
'제3 천년기' 에 요청되는 쇄신에 부응하기 위해 필리핀 주교 회의는 필리핀 국민들의 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정신에 입각하여 심도 있고 광범위한 문제를 다루는 사목 권고안을 발표한 뒤, 1997년에는 '필리핀의 정치에 관하여' , 1998년에는 '필리핀의 경제에 관하여' , 1999년에는 '필리핀의 문화에 관하여' 그리고 2000년에는 '필리핀 국민들의 영성에 관하여' 를 사목 권고안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주교들은 이 사목 권고안들을 <새 천년기를 맞이한 필리핀 교회의 사명>이라는 문서로 종결하였다. 또한 2000년 대희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 가운데 가장 크고 의미 있는 행사로 전국적인 규모의 선교 대회를 진행하였고, '3천년기에 들어선 지역 교회로서 첫걸음' 을 떼는 행사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마르코스의 집권기 동안 주교 회의는 좌경 무장 세력들을 상대로 여러 차례에 걸쳐 평화 회담을 시도하였으며, 1990년에는 사목 교서 <평화를 추구하며, 평화의 길로 나아가다>를 발표하였다. 이 사목 교서에서 주교들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열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필리핀 토착 신앙을 믿는 사람들이나 무슬림들과의 종교 간 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주교와 이슬람 고위 성직자 간의 공개 토론회는 필리핀 남부 여러 주에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들이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많은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민다나오 섬에서 매년 거행되는 평화 주간이 1999년부터 시작되었다.
〔과제와 전망〕 필리핀 교회가 활력에 넘쳐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교회가 선교의 범위를 확장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2000년 중반 69개의 수도회에서 1,329명의 필리핀 여성과 206명의 필리핀 남성이 해외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들이 봉사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80개국이다. 주교들은 1965년에 필리핀 선교회(The Mission Society of the Philippine)를 설립하였고, 메리놀회에서는 1977년에 필리핀 가톨릭 평신도 선교회(The Philippine Catholic Lay Mission)를 설립하였다. 또 신 추기경은 산로렌소 선교회(The San Lorenzo Mission Institute)를 1987년에 설립하였는데, 이 선교회의 주된 목표는 중국 선교이다. 이 선교회의 수호 성인인 성 로렌소 루이스(Loren 20 Ruiz, 1600?~1637)는 1987년 필리핀 사람으로는 최초로 시성된 결혼한 평신도 순교자였다. 평신도 교리 교사였던 페드로 칼릉소드(Pedro Calungsod, 1655?~1672)는 2000년 5월 시복되었는데, 그의 시복식은 2000년의 행사였던 선교 대회를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게 한 동력이었다.
필리핀 교회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는 1991년에 개최 되었던 제2차 필리핀 지역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는 3년간의 치밀한 준비 끝에 한 달 동안 열렸다. 회의에 참여한 사람은 504명인데, 그중에는 165명의 평신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회의 기간 동안 필리핀 국민이 처한 상황을 포괄적으로 성찰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쇄신할 것인지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지역 교회의 사명으로 '예수님 제자들의 교회,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 새롭게 인식된 총체적인 복음화에 대한 사명 인식, 필리핀에 새로운 생명의 문화와 사랑의 문화 건설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 을 선정하였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안이 전국적인 사목 방침으로 발표된 <선교의 상황 안에서 : 새롭게 인식된 총체적인 복음화를 향하여>라는 문서로, 1993년 7월 11일 주교들에 의하여 승인되었다.
2001년 1월 16~20일까지의 반정부 시위 끝에 부정부패 혐의를 받고 있던 에스트라다(J. Estrada, 1998~2001) 대통령이 물러난 그 다음주에 개최된 '교회 쇄신을 위한 전국 사목 협의회' (The National Pastoral Consultation on Church Renewal, NPCCR)에 모인 대표자들은 필리핀 지역 공의회의 결정과 전국적인 사목 방침의 실천 정도를 점검하고 반성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천년기를 맞아 첫 10년 동안 사목에서 가장 우선시하여야 할 주제를 선정하였다. 즉 믿음, 양성 및 교육, 평신도, 가난한 사람, 가정, 공동체 건설, 사제 쇄신, 청소년,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 그리고 백성들을 위한 선교(ad gentes mission) 등이 었다. 또한 교회는 대통령의 하야(下野)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에,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기뻐하면서 "하느님께서 필리핀 사람들에게 허락하신 은총으로 국가의 쇄신과 도덕적 쇄신을 이룩하라고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적 사회 질서 강화, 추락된 정부 신임도의 회복,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여건 개선, 침체된 경제의 재건 등이 교회가 앞으로 수행하여야 할 과제로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필리핀 교회는 '새롭게 인식된 총체적인 복음화' 를 새로운 각도에서 깊이 다루면서 노력하고 있다.
〔현 황〕 오늘날 필리핀에서 가톨릭 교회는 국민들로부터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으며 또한 신뢰받고 있다. 그동안 사회 정의에 대해,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과 연대를 맺고 모범을 보여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 지도자들 사이의 분열도 있었다. 특히 1970년대 중반에는 이런 분열이 심화되어 빗나간 사목 지침으로 많은 신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일부 주교들은 인간 개발 계획과 복음의 예언자적인 사명에 참여하기를 주저하였는데, 이런 현상은 계엄령 초기에 심하게 나타났다. 현재도 사제나 수도자가 되는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기는 하나 그 증가율은 인구 증가율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사목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도시에 몰려 있어 인적 자원의 분배가 매우 불균형한 상태를 이루고 있다.
한편 필리핀 독립 교회는 미약한 교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필리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다. 특히 1992년에 선출된 라모스 대통령은 필리핀 독립 교회의 신자여서, 1992년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중에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신 추기경의 반대를받았다.
필리핀인의 사회 생활은 대부분 전례력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성탄과 사순 시기의 여러 행사, 각 마을의 수호성인을 축하하는 피에스타(piesta) , 그리고 모든 성인의 날, 위령의 날 등이 중요한 연중 행사인데, 이때 가족이나 친척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간의 유대를 돈독히 한다. 특히 필리핀의 최대 명절인 예수 성탄 대축일은 일찍 시작되어 10월이면 거리에서 캐럴이 울리기 시작하고, 11월부터는 각 성당마다 성탄 트리 장식과 성탄 전례 등 본격적인 성탄 준비에 들어간다. 학교들은 보통 성탄 전후로 20일간 성탄 방학을 가지며 일반 사회인들도 5~7일정도 휴가를 갖게 되는데, 이 시기가 되면 한국의 명절 때처럼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져 모든 이들이 가족과 고향을 찾는다. 성탄이 다가오면 성탄 대축일 전 9일 동안 매일 새벽 4시 30분에 미사가 봉헌된다. 성탄맞이 9일 기도인 셈인데 독실한 신자들뿐 아니라 쉬는 신자들까지도 이 미사에 참례하여 성탄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한다. 또 청소년과 청년들은 성탄 2주 전부터 집집마다 돌며 크리스마스 캐럴을 불러 주고 모은 성금으로 불우 이웃 돕기를 한다. 어렵게 사는 이웃에 생필품이나 양식을 예수님으로부터' 라는 글귀와 함께 몰래 갖다 놓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마음에서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을 새삼 느끼게 되며 그 의미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필리핀에서 가톨릭 신자는 전 인구의 83%이지만, 실질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그중 25%를 넘지 않는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명목상의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펼치고 있다. 필리핀 교회에는 2004년 현재 대교구 16, 교구 53, 성직 자치구 6, 대목구 8, 군종 교구 1, 본당 2,792개가 있으며 3명의 추기경과 17명의 대주교, 99명의 주교가 있다. 7,614명의 신부(교구 소속 5,122, 수도회 소속 2,492)와 종신 부제 8, 627명의 수사와 11,044명의 수녀, 99,567명의 교리 교사들이 사목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 필리핀에 4팀의 평신도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10년째 활동하고 있는 장은열 선교사를 비롯하여 5명의 평신도 선교사들이 있다. 또한 1997~2000년까지 서울대교구의 조해붕, 이효언 신부가 민다나오 지역에서 골롬반 지원 사제로 활동하였다. 2004년 12월 31일 현재 필리핀에는 540명의 한인 신자들이 있으며, 2명의 신부들이 성당 두 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 동아시아 사목 연구소 ; 라디오 베리타스 ; → 보호권 ; 스페인 ; 펠리페 2세)
※ 참고문헌 John H. and Mae H. Esterline, How the Dominoes Fell : Southeast Asia in Perspective, Lanham and London, Hamilton Press, 1986/ Ernesto A. Franco ed., Management in the Philippine Setting, Manila, National Book Store,1988/ Landa Jocano, Kinship and Technological Change : A Study from Western Bisayas Philippines, Filipino Tradition and Acculturation, Shigeru Katsumura, Tokyo, Waseda University, 1983/ Yasushi Kikuchi, The Character of the Filipino Kinship System, Filipino tradition and Acculturation, Shigeru Katsumura, Tokyo, Waseda University, 1983/ David O. Moberg, The Church as a Social Institution, Michignan, Baker Book House, 1984/J.H. Kroeger, 《NCE》 11, 2003, pp. 255~264. [李炳度]
필리핀
〔영〕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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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신자들의 성체 거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