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 종교적 실천의 차원과 개념적 규정의 차원에서 사용하는 단어.
종교적 실천 차원에서 '하느님' 은 사람들이 그분에게 말을 걸 때 서두에 꺼내는 호칭이자 일상의 삶이나 돌발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때 소리내어 부르는 이름이며, 그분에게 사로잡힌 것을 아는 신앙인들이 응답할 때 사용하는 말마디이자 그분에게 영광을 드릴 때 발설하는 영송(榮頌, doxologisch)적 단어이다. 그리고 이해와 의사소통의 차원에서 '하느님' 은 모든 존재자를 심층에서 기초 놓고 떠받치는 존재 근거(ratio essendi) 내지 궁극적 실재를 가리키는 개념적 규정어이다.
I. 구약성서에서의 하느님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그에 앞서 성조들에게 한 말씀과 행동 안에서 당신 자신을 알려 주었다고 증언하고 이를 명확히 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시초에 하느님이 당신을 야훼로 알린 사건은 구약성서의 하느님 표상을 결정하고 규정한다. 이집트 탈출 사건을 통해 야훼(יהוה)에 의해 이루어지고 획득된(출애 15, 16) 가족인 야훼의 백성은, 하느님에 대한 자신들의 기초적이고 지속적인 신앙 경험을 "야훼" (출애 3, 15)라는 이름과 연관짓는다.
〔여러 가지 명칭〕 모세 출현 전에 이스라엘 성조들 사이에서 하느님은 여러 가지 다른 명칭들로 불리었다. 그 명칭들 가운데는 '엘' (אֵל)과 '엘로힘' (אֱלֹהִים)이 있었고 아마도 '야훼' 라는 이름도 있었을 것이다. '엘' 은 대부분 하나의 한정사(Determinativ)와 결합되어 나온다. 예를 들면 "엘-올람"("영원하신 하느님" : 창세 21, 33), "엘-로이"("현현하시는 하느님" 또는 "나를 돌보시는 하느님" : 16, 13), "엘-베델"("베델의 하느님" : 28, 12-22), "엘-엘리온"("지극히 높으신 하느님", "지존하신 하느님" : 14, 18-20), 그리고 하느님이 성조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이름인 "엘-샷다이"("가장 높으신 하느님" 또는 70인역에 따르면 "전능하신 하느님" : 창세 17, 1 : 35, 11 ; 출애 6, 3)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브라함의 하느님"(창세 24, 12. 27), "이사악의 하느님"(46, 1. 3),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창세 26, 24 ; 28, 13),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출애 3, 13), "야곱의 장사의 손" (창세 49, 24), "이사악의 두려우신 분" (창세 31, 42. 53)이라는 명칭들도 있다. 이 다양한 명칭들 때문에 많은 종교사가들은 성조들이 많은 지역신들 또는 종족신들을 공경하였다고 결론을 내리지만, 이는 거의 정당화되지 못한다. 일예로 우가리트(Ugarit)에서도 엘 신은 여러 이름을 가졌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각 명칭들은 개개의 고유 명사들을 표현한 것이 아니며 모두가 하나의 하느님을 의미한다. 사실 창세기 설화들은 여러 하느님 명칭들 아래 같은 하느님을 전제하고 있다. "이사악의 하느님", "이사악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창세 26, 23-24), "야곱의 장사의 손" , "이스라엘의 목자요 바위"(창세 49, 24)는 모두 같은 하느님이다. 모세에게 나타난 분도 같은 분 "엘"(출애 6, 3) 곧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출애 3, 15)이다. 이 "엘"은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하느님(창세 33, 20)으로서 "이방신들"(창세 35, 24)을 보면 참지 못한다. 그는 조상들 곧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였고 당신을 공경하는 이들과 항구한 결속 관계를 유지한 채 그들과 하나의 계약을 맺고(창세 12, 1-3 : 15, 7-17 ; 17, 1-4) 그들을 여정에서 보호해 주었다(15, 7 ; 24, 48 ; 30, 27-30 ; 39, 3-6. 21-23). 비록 하느님이 비(非)이스라엘인들로부터 이스라엘의 특별한 신으로 간주되고(창세 26, 28 ; 30, 27), 또 이스라엘인들 이 다른 종족들의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31, 53) 때조차도 하느님의 전능과 통치는 한 장소(18, 25) 또는 한 종족(12, 3)에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모세는 구약의 역사에서 계시의 발전을 위해 규범적 의미를 지니는데, 성조들의 하느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야훼라고 밝혔기 때문이다(출애 3, 13. 15).
〔이스라엘의 하느님〕 구약성서에 따르면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야훼를 "내 아버지의 하느님" 내지 "누구누구의 하느님"(출애 3, 6 ; 15, 2-3 ; 18, 43)으로 부르며 가족 또는 씨족의 하느님으로, 곧 그들 자신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하느님으로 경험하고 공경하였다. 그분은 그들을 돌보고 구원하고 이끌고, 그들에게 삶의 터를 제공하고 삶의 지침을 제시하며 순종을 요구하는 한편 그들을 보호한다. 그분은, 야훼라는 이름의 해석에서 그 자신이 말한 대로 "현존하시며"(출애 3, 14) 자신 소유의 사람들과 함께한다(출애 3, 12). 모세 집단은 가나안 땅에 이미 살고 있거나 새롭게 합류한 씨족들과 무리들에게, 그리고 절박하게 도움을 기다리던 씨족들과 무리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 곧 땅을 그들에게 준 일과 관련된 자신들의 하느님 체험을 전해 주었다. 해방하고 구원하는 하느님에 대한 공경 아래이 씨족들과 무리들은 마침내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백성으로 통합된다(여호 24장 참조). 야훼가 '국가의 신' (Staatgott)으로 섬김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하느님 야훼가 오래 전에 이미 '성조들의 하느님' 이었다(창세 12-50장 참조)는 확신을 갖게 된다. 야훼 공경의 배타성 곧 야훼 충격이 이스라엘 종교를 관통하기 시작하였고, 그 충격은 유일신(唯一神) 신앙이 확고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신앙의 길로 이르는 진행 과정에는 바알에 대항하여 야훼 신앙을 위해 헌신한 엘리야와 호세아, 모든것이 야훼의 말씀과 행동에 지배된다고 본 예언자들, 야훼에게 집중한 신명기 집단(deutemomischer Kreis), 심판의 말씀을 실행에 옮긴 후 구원을 선사할 야훼야말로 홀로 권능을 지닌 분이라고 선포한 제2 이사야, 그리고 야훼가 주권을 소유한 정의로운 하느님이자 주님이라고 입증해 보인 신명기계 역사학과(deuternomistische Schule)등 여러 인물들과 집단 · 학파가 등장하였다.
〔창조주이자 주님〕 야훼가 다윗을 통하여 국가의 하느님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야훼가 여러 나라와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당신 백성의 생활 환경과 생존 및 존속을 확보해 주는 하느님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분은 세상의 창조주로서(창세 14, 19) 세상을 보존할 수 있고 또 보존하려고 하기(시편 96, 10) 때문에 당신 백성에게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창조주는 각 시대와 각 상황에서 구원과 도움을 주는 권능뿐 아니라 몰락(이사 40, 26-27)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권능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특히 그분은 세상과 민족들과 역사의 주님이며(이사 40-48장) 신들과 우상들을 넘어서는 분이다(이사 44, 9-20 ; 46, 1-7). 절대적 주님인 그분은 세상의 왕이며, 무엇보다도 당신 백성의 왕이다(이사 6장). 그분이 겨냥하는 목표와 하는 행동은 공정과 정의이며, 이것은 그분이 만든 모든 것 가운데 최선의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율법은 그분에 의해 모세를 통해 공포된 것으로서, 그분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 율법은 삶 또는 생명을 위한 지침(신명 30, 15-20 참조)으로서, 특히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보호를 강조한다(출애 22, 20-26 ; 23, 10-12 ; 레위 19, 11-18 ; 신명 15-16장). 예언자들에 따르면 그분은 주님이기에 당신의 요구 사항들을 제시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지키는지 점검하고 범죄에 대해서 벌한다. 또한 당신의 백성, 각 개인, 민족들(아모 1-2장)이 올바른 길을 걸음으로써 선익(שָׁלוֹם, 완전 · 안전 · 안녕 · 평화)에 이르도록, 그들에게 경고하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한다. 이런 그분을 부를 때 사람들은 단순히 '하느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부를 수 있다. 그분은 참으로 가까운 곳에도 있고 먼 곳에도 있는 하느님이다(예레 23, 23).
〔유일하신 하느님〕 이스라엘 역사가 하느님에 대한 우선적인 공경에서 배타적인 공경으로 흘러감에 따라, 그 공경은 오직 야훼에게로만 집중화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런 집중화는 신명기 집단에게서 더욱 뚜렷하였다. 그리하여 "야훼 우리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신 야훼(יְהוָהאֶחָד)이시다 (신명 6, 4)라는 신명기의 기본 말씀(deuternomisches Grundwort)이 정형화되었다. 이는 야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약을 선사하였고 이로써 당신 백성을 당신 자신과 온전히 결합시켰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 뒤 유배 시대의 예언자 신학과 신명기계 신학(deutermomitische Theologie)은, 야훼가 누군가에게 굴복당해서 당신 백성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결정으로 당신 백성을 포기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고, 유일신론(Monoteieisus)적 관점에서 신명기 기본 말씀의 두 번째 부분을 이해하고 선포한다. 즉 야훼는 '유일한 하느님' (הָאֱלֹהִים, 그 하느님)이고, "그분 말고는 다른 하느님이 없다" (신명 4, 35 ; 이사 44, 6).
한편 구약성서는 다신론적 영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진술들을 야훼에게 응용할 수 있게 되는데, "신들의 왕" (시편 95, 3),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창세 14, 19), "영원하신 하느님"(창세 21, 33), "전능하신 하느님"(창세 17, 1)과 같은 하느님 별칭들로 유일한 하느님의 위대성을 부각시켰다. 이 점에서, '권능' 또는 '권능을 지닌 분' 으로 해석되는 '처바오트' (צְבָאוֹת, 모든 권능과 능력들의 하느님)는 야훼와 함께 쓰이는 칭호로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새로운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다. 그분은 오직 한 분이시지만 고독한 신이 아니라, 묵시 문학적 시야에서 볼 때 천사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있으며 당신을 통해 존속하는 피조물들과의 연관성 안에 머물러 있다. 어떤 사람이 고통과 죄 가운데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그런 악으로부터 다른 신에게로 도망칠 수는 없다. 비록 그가 고통과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느님은 그의 죄책과 관련되어 있는 고통을 치유하고 악을 정복하고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분은 인과응보적 연관성(TunErgehen-Zusammenhang : 행함과 당함의 연관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기(욥기 38-40장) 때문이다. 결국 하느님 홀로 용서를 베풀고, 용서를 위한 수단을 마련하고(레위 16장 ; 17, 11), 죄책을 없애고 그분에게로 돌아가 그분의 뜻을 이행하는 사람을 받아들인다.
〔하느님의 본질적 면〕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에 대한 본질적 진술은, 하느님이 말씀을 통해 해석된 사건인 역사안에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행동의 하느님인 그분 없이는 어떤 선익도 발생하지 않으며, 그분은 자신의 행동과 말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다. 구약성서는 그분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보다는 어떻게 활동하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성서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신앙 경험을 표현한 "하느님 찬양" 안에서 대략적으로나마 하느님의 속성들을 다음과 같이 정형화하였다. 즉 "하느님은 위대하시고 두려우시며(신명 7, 21) 의로우시고(시편 7, 10) 충실하시어(신명 7, 9)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그대로 자애를 베푸시고 도와 주신다." 참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이자 영원하신 하느님(예레 10, 10)은 '되어감' 과 '소멸' 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분은 거룩하고(이사 5, 16), 그분 이외의 모든 것과 전적으로 다르고, 자신의 본질상 그 자신에게 충실하고,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으며(이사 40, 25), 또한 당신 자신을 숨기고(이사 45, 15), 이스라엘이 당신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길때면 질투한다(신명 4, 24).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허용되어 있다. 그분이 벌을 내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참을성 있고 자애와 충실에 있어서 풍요로우며, 죄책 · 악행 · 죄를 치워 준다(출애 34, 6-7). 끝까지 그분은 구원하는 하느님으로 머무신다.
〔희망과 미래의 하느님〕 하느님이 백성에게 희망적인 미래를 선사하기 위해(예레 29, 11) 구원 계획을 갖고 있다는 소식이 바빌론 유배지에 전해지자 귀환의 희망을 품게 된 사람들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되찾고(에제 36-37장) 그들의 조국에서 당신 백성에게 충만한 구원을 선사한다(이사 35장)는 의식을 갖게 된다. 즉 그분은 시온을 다시 세우고 영광스럽게 하며(이사 52장 ; 54-55장), 성전 안에 머무는 그분의 이름(신명 12, 5) 내지 영광(1열 왕 8, 11)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이 시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즈가 8, 3). 시온은 하느님이 민족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곳(이사 2, 2-5)이자 그 민족들의 섬김을 받아들이 는 곳(이사 60장)이며 잔치(이사 25, 6-8)의 표징적 의미안에서 구원을 선사하는 곳으로 현양된다. 이로써 이민족들도 그분의 백성에 속하게 된다(이사 19, 22-24). 하느님은 메시아, 곧 다윗의 의로운 싹(예레 23, 5-6)을 구원의 중개자로 세울 것이고, 그에게 아버지가 되어 줄 것이고(2사무 7, 14), 세계의 통치를 그에게 넘겨줄 것이다(시편 2, 7-8 ; 110장). 그리고 하느님 자신은 세계와 시간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주님으로 머물 것이다. 세상의 모든 권능을 거슬러 당신 자신의 뜻과 계획을 관철시키며(다니 2장 ; 7장), 당신을 거스르는 적대적인 통치자들을 낮추고(다니 2-5장), 종말에 자신의 영원한 나라를 이끌어 올 것이다(다니 7, 27). 죽음을 없앨 수 있는 그(이사 25, 8)는 자신을 충실히 섬겼던 이들을 죽음 한가운데 머물도록 그리고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시편 75장). 그들은 그들 자신이 항구히 희망해 온 하느님에 의해 부활할 것이다(다니 12장).
II. 신약성서에서의 하느님
예수와 원시 교회는 구약성서가 선포한 것과는 다른 하느님을 모시거나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진전된 계시 안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선포하였다.
〔명칭들〕 신약성서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자주 하느님에 대해 말하였다. 신적 수동형 외에도 "호 크티사스" (ὁκτίσας, 창조하신 분 : 마태 19, 4)나 "호 칼론" (ὁ καλών, 부르신 분 : 1데살 5, 24)과 같은 분사적 술어들, "하늘" (마르 11, 30)이나 "엄위하심"(히브 1, 3)과 같은 에두른 표현들을 사용한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직접 하느님을 가리키기 위해 가장 흔히 쓴 명칭은 "테오스" (θεός, 하느님)이다. 그리고 "아버지" , "하느님 아버지", "주님", "구원자"(루가 1, 47 : 1디모 1, 1 ; 디도 1, 3), "권능자" (루가 1, 49), "주권자"(1디모 6, 15), "전능자"(묵시 1, 8 ; 19, 6. 15 ; 2고린 6, 18), "입법자", "심판자" (야고 4, 12)와 같은 명칭들도 쓰였다. 그런가 하면 명령자(요한 12, 49-50 ; 14, 31 ; 참조 : 15, 10), 세계와 역사의 주재자(마태 6, 25-34 ; 참조 : 사도 1, 7), 세계와 역사의 완성자(마태 24장 참조) 등의 하느님 표상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하느님 명칭들 가운데 특히 "주님", "구원자"와 같은 명칭들은 그리스도에게도 또한 전용(轉用)되기 때문에 신론과 그리스도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문제가 대두된다. 신약성서에는 구약과 신약의 하느님 사이의 연속성이 다음과 같은 하느님 명칭들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마태 15, 31), "조상들의 하느님"(사도 3, 13),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마르 12, 26)과 같은 명칭들이 그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의 연속성은 신약성서 신학의 기본 원칙으로 통용된다.
〔공관 복음서 : 예수의 선포에서의 하느님〕 예수의 설교는 언제 어디서나 구약성서에서 계시된 하느님과 관계된다. 때로 예수의 말씀 중에서 "조상들의 하느님"은 늘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 그리고 이로써 또한 종말론적 하느님으로 부각되고 강조된다(마태 12, 27 ; 루가 16, 23-31 : 참조 : 마태 8, 11).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맺은 계약의 본질적 가르침은 이제 막 동튼 결정적 구원 시기에 비로소 적절하게 들어맞는다(마르 7, 9. 13 ; 10, 19 ; 12, 29-31). 수많은 율법 규정들이 예수에 의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됨으로써 그 안에 담겨 있던 본래의 하느님 뜻이 밝히 드러났다는 점에서, 시나이에서 그리고 예언자들에게서 빛나던 하느님의 얼굴은 예수의 근원적 조명 안에서 새롭게 빛나게 된다. 하느님의 얼굴은 모든 지상적인 것을 넘어서는, 그리고 또한 예수의 선함(마르 19, 8)과 앎(마르 13, 32)을 넘어서는 유일무이하고 거룩한 영광 안에서 빛나며, 이 신적 영광에 의해 세상의 모든 것은 오로지 그 영광에 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상대화된다. 즉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로, 땅은 그분의 발판으로(마태 5, 34-35 ; 이사 66, 1) 상대화되는 것이다. 이 초세계성(Ühberweltlichkeit)은 창조주이자(마르 10, 6-9 ; 13, 19) 주재자로(마태 6, 25-34 참조),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와 역사의 완성자로(마태 24장 참조) 그가 행사하는 절대적 통치권 안에서 증언된다. 하느님의 의지적 결정은 그 자신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무제한적 권능에 의해 심판과 구원의 말씀(마태 10, 28 ; 11, 22 ; 25, 34. 41 ; 마르 10, 27. 40 ; 루가 10, 12) 안에서 틀림없이 효력을 낸다. 예수는 구약성서적 하느님 상에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두려움의 신비" (mysterium tremendum)를 축소하거나 그 두려움의 신비에 덧칠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다음과 같은 점을 구약성서가 강조했던 것보다 더욱더 강조한다. 즉 인간과 비교하여 볼 때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과 친밀함에 있어서 "전적으로 다른 분" 〔全的 他者]이다. "가까이 계신 하느님"에 대한 이 메시지는, 예수가 초기 유대교와는 달리 "하느님"이라는 단어를 에두른 표현들로 대체하지 않았으며(마태 8, 18 ; 루가 15, 7-8 등은 예외),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많은 장애물들을 할 수 있는 대로 제거했다는 사실 안에 벌써 표명되어 있다. 예수는 하느님을 그냥 "아빠" (Abba)라고 부르며 일상의 가정사에서 빌려온 이 호칭으로, 곧 동시대인들에게는 격식을 갖추지 않고 존경심 없이 부르는 것으로 비친 이 어휘로, 제자들이 당신〔예수〕처럼 그분〔하느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네도록 가르쳤다. 구약성서가 보여준 하느님의 아버지 상(특히 호세 11, 1)에 토대를 두고서 예수는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하느님의 자애와 자비를 아버지에 관한 비유들에서 들려주었다(마태 7, 9 이하 ; 루가 15, 11 이하). 같은 주제가,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루가 11, 5 이하)와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1, 1 이하),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리사이와 세리의 예화(루가 18, 9 이하)에서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하느님의 자비는,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용서와 종말 시기의 구원을 가져다준다. 이것이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 관한 복음의 중심 내용이며, 예수의 인품 · 말씀 · 활동 · 삶의 궤적 안에서 적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 세상 안으로 돌진해 들어왔다는 사실에 의해 고유한 특색을 얻게 된다. 예수는, 종말론적 하느님 다스림의 포자' 일 뿐만 아니라 존재하고 오는 하느님이 그 안에 벌써 현존하고 활동하는 그런 분, 곧 하느님의 외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인 그런 분이다. 이로써 예수의 메시지는 구약의 메시지를 추월하고 능가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본질과 통치에 대한 구약의 진술들이 예수의 메시지에 온전히 통합된다는 의미에서만, 예수의 메시지는 구약의 메시지를 추월하고 능가한다.
〔바오로 서간〕 바오로 서간은 하느님에 관한 구약의 메시지를 본질적인 면에서 모두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그 구약의 메시지를 궁극적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마 15, 6 ; 1고린 1, 3 ; 11, 31 ; 에페 1, 3)인 하느님 안에 수렴되는 것으로 진술한다.
하느님은 인류가 지은 죄의 잘못에 대해 분노하는 진노의 하느님이자 동시에 연민을 비의 하느님이다. 바오로에 따르면 심판과 은총, 이 둘의 역설적 단일성은 십자가에서 발견된다. 처형된 분이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 (1고린 1, 23 : 참조 : 1, 18 ; 갈라 5, 11)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바로 그를 "죽은 이들의 맏물"(1고린 15, 20)로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시켰으며(로마 4, 24 ; 참조 : 6, 4 ; 10, 9 ; 골로 2, 12 ; 에페 1, 20), 그처럼 "우리도 당신의 힘으로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1고린 6, 14).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이, 곧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마 1, 4)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새로운 창조물"이다. 심판과 구원을 아우르는 전체 구원 역사에 각인되어 있는 하느님의 이 주재(主宰)와 다스림은 하느님의 절대적 자유와 파악할 수 없는 신비에 상응한다(로마 9-11장).
〔요한 복음〕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육화한 영원한 하느님의 아들이며, 그의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이 세상에 선사된다" 라는 메시지를 중심 주제로 삼는다. 영원한 말씀으로서 "하느님"(1, 1)이자 "하느님과 하나인" (10, 30) 예수 안에서 아버지가 계시되고(1, 18 ; 8, 19. 26-29 ; 10, 32 ; 12, 49-50 ; 14, 8-20 ; 15, 23-24) 생명과 구원이 주어진다(6, 27. 32. 40. 57). 그러나 이와 동시에 예수를 통해서 심판이 선포된다. 그런데 공관 복음사가들이 '예수를 인도하는 아버지의 능력' 이라고 증언한(마르 1, 12 : 마태 12, 2-8 ; 루가 4, 14) 하느님의 영이 요한 복음의 '협조자' 에 관한 말씀들(요한 14, 17. 26 ; 15, 26 ; 16, 7. 12-13)에서는 인격적인 윤곽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 생명의 삼위적(三位的, trinitarisch) 충만성은 요한 복음에서 투명하게 드러나 있다(A. Deissler). 요한 복음에 나오는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협조자 · 위로자 · 변호자)는 신약성서의 구절에 자주 등장하는 "성령"보다 분명히 더욱 인격적이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영처럼 자주 하나의 능력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성령에게 준(準)인격적 특성(quasi-personal features)을 돌리는 구절들이 있다. 예를 들면 바오로 서간에서 아버지와 아들 곁에 나란히 성령을 언급한 구절들과, 성령이 의지적 작용을 수행하는 것으로 표현한 구절들(1고린 12, 11 ; 로마 8, 16)이 그런 예이다. 더욱이 요한 복음은 '파라클레토스' 를 특수한 역할 가운데 있는 성령으로, 곧 그리스도인들 안에 계신 예수의 인격적 현존으로 제시하였다. 이렇게 제시하는 이유는, 협조자 안에 그리고 협조자를 통해 예수가 참으로 와서, 그리스도인들 안에 인격적으로 현존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협조자' 라는 호칭 아래 '성령' 의 인격적 역할(personal role)을 표현한 것은 요한 복음의 독특한 용법이다(R.E. Brown).
〔그 밖의 정경 작품들〕 그 밖의 신약성서 작품들은 복음서들과 바오로 서간들에 의해 시작된 일련의 주제 안에서 하느님에 관한 메시지를 선포하지만, 그 강조점은 사뭇 다를 수 있다. 사도 행전은, 하느님이 예수를 부활시켰고(3, 26) 그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을 부었고(10, 38)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십자가형에 넘기고(2, 23-24) 부활한 그를 당신 오른편으로 높이 올리고(2, 33) 그를 종말 때의 심판자로 지정하였으며(3, 20 ; 10, 42), 그때까지 당신의 계획에 따라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 역사(歷史)를 힘차게 형성할 것이라는 점을 제시함으로써, 하느님을 특히 그리스도 사건의 창시자로 부각시켰다. 이에 반해 요한 묵시록은 박해받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온 세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전능자' (1, 8 : 4, 8 : 11, 17 ; 15, 3 ; 16, 7. 14 ; 19, 6. 15 : 21, 22)로서의 하느님을 제시하였다. 즉 하느님은 당신을 거스르는 적대 세력들을 쳐 이김으로써 '어린 양 과 당신 백성에게 승리를 이룩해 주실 전능하신 분이다.
〔그리스도교적 차원의 고유성〕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 사건은 구약과의 연속성 안에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사건은,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 신약성서에서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곧잘 함께 언급되며(예를 들면 로마 1, 7), 생명의 선사 죄의 용서와 같은 신적 특권들, 그리고 주님 · 구원자와 같은 신적 명칭들이 그리스도에게도 또한 전용(轉用)된다. 일련의 구절들에서는 심지어 '테오스' 라는 단어조차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어떤 구절들(로마 9, 4-5 ; 2데살 1, 12 ; 2베드 1, 1)에서는 이 단어가 그리스도에게 사용되었는지 불확실 또는 불명확하지만, 다른 구절들(요한 1, 1. 18 ; 20, 28 ; 디도 2, 13 ; 히브 1, 8 ; 1요한 5, 20)에서는 확실하거나 거의 명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에서는, 이 점과 관련하여 이신론(二神論, Ditheismus)이 논의될 수 있는 아무런 계기가 제공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첫째, 하나의 신적 명칭을 예수에게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곳(사도 2, 36 : 13, 23 : 1 요한 4, 14)에서조차 주도권은 여전히 하느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상승 그리스도론의 노선과 하강 그리스도론의 노선 위에서 그리스도의 중개자 역할이 강도 높게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현양(Erhöhung)된 후에도 우리를 위한 대변자이며(로마 8, 34) 아울러 하느님을 위해 살고 있다(로마 6, 10 ; 1 고린 3, 23 ; 11, 3 ; 15, 28). 그리고 하느님과 그리스도 사이의 일치가 그처럼 부각되는 요한 복음에 있어서도 아버지의 주권은 보존되어 있다(요한 14, 28). 따라서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경합 또는 경쟁 관계에 있다는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없고, 또 그런 이야기가 신약성서에 있을수도 없다.
그렇다면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융화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신약성서는 아직 숙고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삼위 일체론에 관한 고유한 숙고 또한 신약성서 후 시대에 비로소 나타났다. 그러나 이 문제를 특히 구원경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와 관련된 사안은 신약성서 안에, 즉 공관 복음(마태 28, 29)과 사도 행전(2, 33), 바오로 서간(로마 8, 9-17 ; 1고린 1, 19-22 ; 6, 11 ; 12, 4-6 ; 2고린 13, 13 ; 에페 4, 4-6 ; 참조 : 로마 8, 3-4. 14-15 ; 갈라 3, 1-5. 10-14 ; 4, 4-6 ; 에페 1, 3-14 ; 2, 18. 21-22 ; 6, 14-17 ; 2데살 2, 13-14) 안에, 그리고 요한 전승(요한 1, 29-34 ; 7, 39 ; 14, 16. 26 ; 15, 26 ; 16, 5-10. 13-15 ; 1 요한 4, 2. 13-14) 안에 풍부하게 나타나 있다.
Ⅲ. 신학사에서의 하느님
하느님은 종교적 실천 차원에서 사용하는 말마디만은 아니며 가장 심층에서 모든 존재자를 기초 놓고 떠받치는 궁극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적 규정어로서, 이해와 의사 소통의 차원에서 일반인들과 신앙인들이 함께 사용하는 말마디이다. 여기서 '하느님' 이란 단어가 어디서나 같은 것을 의미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이라는 단어를 어떤 방식으로 적용하고 사용할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요구된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처음부터 신앙적 실천의 하느님 곧 신앙인들이 설명해 왔고 기도드려 온 성서적 전통의 하느님이, 개념적 언어에서 '하느님' 이라고 불린 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신학은 성서의 하느님과 철학자들의 하느님(神) 사이에 놓여 있는 긴장에 올바르게 그리고 항상 새롭게 부응하고자 애썼다.
〔고 대〕 그리스 철학, 특히 기원전 70년부터 서기 40년에 발생한 이른바 중기 플라톤주의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2세기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3세기에도 여전히, 그리스도교 교사들과 저술가들은 유대교 ·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야훼가 그리스 철학이 추구하고 물었던 바로 그 하느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애썼다. 플라톤주의적으로 또는 스토아주의적으로 각인된 신에 관한 철학 이야기 안에, 그리스도교 신학을 위한 단서들이 다양하게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느님은 성서적 전통에서처럼 그런 철학 이야기 안에서도 한 분이고, 그 자체에 있어서 완전하고, 자신은 창조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만든 이 곧 창조자였다(아리스티데스, <호교서>). 창조자는 시공적 질서 위에 있기에 인간적 감각으로는 그분에게 도달할 수 없다. 물론 하느님은 전적으로 '누스' (νοῦς, 지성) 곧 신적 정신이기에, 원칙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이해로써 이 '누스' 에 접근할 수 있으나, 모든 것을 포괄하는 '누스' 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지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리용의 이레네오, 《이단논박》 Ⅱ, 13, 4).
그런데 성서적 전승과 그리스 철학을 하나로 연결지어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먼저, 성서상의 창조주 하느님은 오직 형태 없는 원질료와 상관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가정되어야만 하는 모든 존재자의 형상적 원리인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자유로운 결정으로 존재자를 "무로부터" 존재로 불러내었기(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 《아우톨리쿠스에게》 2, 4 ; 리용의 이레네오, 《이단 논박》 Ⅱ, 10, 2)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실재의 근거인 하느님의 단일성과 단순성은 중기 플라톤주의의 저세상〔彼岸〕적 일자(一者)와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신적 특성이 서로 합치되도록 진술해야 하였다. 그 두 가지 특성이란, 시간 공간적 차원의 온갖 완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족적인 하느님을 가리키는 신적 속성 곧 역사와 세상 너머에 있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신적 속성인 하느님의 '완전성' 과, 인간의 구원을 위해 역사안에 개입하는 것을 뜻하는 신적 특성인 하느님의 '인격적 투신' (persönliches Engagement)이었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이 '그 자체로 단순한' 정신적 실재이기에 유한한 개별적 정의(定義)들 안에서 묘사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창조 작품들로부터 추론하여 하느님을 진술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들은 설명하였다(타시아노, 《그리스인들에 대한 연설》 IV, 3 ; 오리제네스, <원리론》 1, 1, 6). 이런 문제점들 외에도, 철학 자체 안에 놓여 있는 긴장은 하느님에 대한 성서적 묘사와 철학적 묘사 사이의 긴장을 더욱 첨예화시켰다. 여기서 철학 자체 안에 놓여 있는 긴장이란, 하느님을 개념적으로 파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념적으로 표현하고, 또 이런 종류의 온갖 인식으로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하느님에게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부적절한 방식으로 불완전 하게나마 하느님에 대해 진술하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신적 속성들을 부정신학적으로 진술하는 방식에 부응해야 하였다. 다시 말해, 유한한 인간의 불완전성 안에서 인간의 유한한 완전성이 부정 또는 제거됨으로써 하느님의 파악불가성(incomprehensibilitas)과 불가해성(inaestimabilitas)이 신적 속성들로 진술되었던 한에서(오리제네스, 《원리론》 1, 1, 5), 사람들은 부정신학적 진술 방식에 부응해야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세계 안에서 불완전하고 제한된 것으로 경험하는 것의 부정을 하느님으로 실체화할 위험에, 그리고 하느님을 이세상적이고 역사적인 것에 대한 '타자' (das Andere)로 규정할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에게 있어서 역사적 · 인간적 실재는 하느님의 영원한 완전성과 양립할 수 없는 타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 때문에 삼위 일체론은 자족적이고 완전한 하느님과 세상 및 역사의 하느님 사이에 놓여 있는 긴장을 중재하는 일, 다시 말해 자족하며 완전하고 고통당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된 모든 존재자의 원근거와, 세상 및 역사 안에서 통교하면서 자신을 세상과 역사에 연루시키는 하느님 사이에 놓여 있는 긴장을 중재하는 일을 과제로 갖게 되었다. 이 과제의 중요성은, 삼위 일체적 구원 경륜으로부터 내재적 삼위 일체론이 독립하려고 할 때마다 삼위 일체론 안에 곧바로 긴장이 증폭되어 삼위 일체론이 위태롭게 된 데서 드러난다.
〔중 세〕 신플라톤주의적 충격들로 인해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고 새로운 사고(思考) 유형(Denkmodell)들이 대두되었다. 이제 신적이고 초월적인 '원리' (ἀρχή)는 지금 여기서 모든 시간적 실재 안에 현재 효력을 내는 존재 근거(ratio essendi)로서 표현되었다. 그 이유는 이 존재 근거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존재자는, 본질적 차원에서 존재해야 하는 그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원리' 의 초월적 내재(內在)는, 자신을 발산시키고 선사함으로써 존재를 정립하고 완성하는 최고선의 권능으로 진술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자기확산적선(bonum diffusivum sui)이고 가장 완전한 사랑(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 <천상의 위계> 4) 내지 최고애(最高愛)로서, 그 자체에 있어서 전적으로 사랑에 의해 움직여지고 사랑 안에서 통교하는 분이다(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 <하느님의 명칭들> 4, 10. 14). 이 최고애는 "그 자신으로부터 나와서"(πρόοδος, egressus, 發出) 존재자를 일으킴으로써 존재자가 하느님에게 참여하도록 만든다. 그뿐아니라 이 최고애는 그 원천으로부터 나온 모든 존재자를 붙잡는다. 원천에서 멀어지게 된 모든 존재자가 그 원천으로 되돌아가(ἐπιστροφή, regressus, 歸還) 충만해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 최고애의 자기로부터의 발출과 자기와의 합일은 벌써 자기 자신 안에서 하느님이 움직여진 것이다. 이 점은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영원히 사랑 안에 하나가 된데서 드러난다(마리우스 빅토리누스, <찬가들>). 자기 자신을 통교하는 사랑이자 존재자의 '원리' 인 하느님은 절대적인 초월자로서, 존재자 안에 내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을 '사유에 의해 포착'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규정하고 정의하는 긍정적 진술과 부정적 단정은 하느님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유일하고 충만한 원인은 모든 진술들 위에 있고, 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느님의 승고함은 모든 것들의 저편[彼岸)에 있기 때문이다"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 <신비 신학> 5). 이런 의미에서 이 최고선은 이름붙여질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최고선에 의해 붙잡히고 사로잡힌 사람들한테는 물론 이름(nomen, 명칭)에 의해서 불릴 수 있기 때문에 이름붙여질 수 있다. 이 최고애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심지어 사물 곧 존재자마저도 속이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하게 비치는 거울, 곧 존재자들을 창조하고 움직이는 '원리' 를 반사하는 거울이다. 중세 신비가들과 프란치스코회에 의해 영감받은 신학자들은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17?~1274)에 따르면, 하느님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전혀 생각될 수 없는 존재" (quo nihil melius cogitari potest)이고, 바로 그 점에서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통교하는 분이다(《하느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여정》 VI, 2). 하느님은 성령 안에서 아들〔聖子〕을 향한 아버지〔聖父〕의 완전한 자기 통교 곧 자기 자신 안에서의 완전한 자기 통교이자, 아울러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해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선사하는 인간에 대한 자기 통교이다(생 빅토르의 리카르도, 《삼위 일체론》). 따라서 하느님의 자기 통교에 의해 붙잡히고 그분의 사랑안에서 불붙여진 사람들은 그분을 이해할 수 있지만, 이론적 개념을 통해 그를 규정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그분에게 접근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부정 신학과 긍정 신학의 풀릴 수 없는 상호 결합이 이루어지며, 이렇게 상호 결합된 신학의 관심사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유한한 존재자 내지 세계와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본질이 명확히 드러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함으로써 하느님을 세계 안에 함몰되어 있는 분으로 묘사하는 위험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창조의 근거이자 구원의 근거인 하느님이 피조물들 안에 현존하고 세상과 역사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진술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이 신학적 관심사는, 하느님에 의해 일으켜진 피조물들에 대한 그 원근거의 무한한 초월을 전제하는 유비론 안에서 오랫동안 효과적으로 유지되었다. 유비론은 하느님의 정의불가성(定義不可性) 내지 불가규정성(不可規定性)을 보호해 준다. 왜냐하면 유비론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에 있어서 양자 간에 더 큰 비유사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도 진술되지 못한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제2장, <요아킴 아빠스의 오류에 대해> : DS 806)라는 기본 전제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이다. 캔터베리의 안셀모(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는, "하느님은 '그 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존재' (id quo maius cogitari sit quam cogitari nequit)이다" 라는 명제가 "하느님은 '생각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존재' (id quod maior sit suam cogitari possit)이다" 라는 명제에 의해 추월당한 것으로 봄으로써(《대어록》 15), 하느님을 개념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하느님 담론의 한계성을 첨예하게 드러냈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은 인간적 언어와 사유의 궁극적이고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서 맨 먼저 언어로 표현되는 분이지만, 또한 언어와 사고를 무한히 뛰어넘는 분으로서 인간적 언어와 파악의 기반을 상실하게 할 만큼 그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 분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 역시 이런 신학적 흐름 안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하느님을 존재를 선사하는 완전한 원인으로 주제화하고 자기 자신 안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 모든 완전성을 완전한 방식으로 영원히 실현하는 순수 존재 현실이자 존재 자체로 주제화 하는 것(《신학 대전》Ⅰ, 12, 4 : 《명제집 주해》 1, d. 8 q. 1 a. 1)은 다음과 같은 차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차원이란, 하느님의 본질을 유한한 실재 내지 세계에 대한 자연적 관계에서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하느님과 유한한 실재를 혼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실재로부터 신적 실재를 구하여 인식하는 일이 성공적일때, 신적 실재는 비로소 인간에게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神) 인식 또한 "완전하지 않은데, 그 까닭은 하느님은 그 자신의 본질 그대로 인식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교도 논박 대전》 I, 14). 쿠사의 니콜라오(Nicolaus Cusanus, 1401~1464)는 하느님을 '비타자'(非他者)라고 명명했으며 이 통찰을 심화하고 철저히 하였다. 만일 하느님이 오직 유한자의 한 타자(他者)일 뿐이라면, 다시 말해 하느님이 자신의 완전성 안에 그 자신의 타자' 인 유한자를 수용할 수 없다면, 그런 하느님은 자신의 완전성 안에 자기 자신과는 다른 '타자의 본질적인 차원' 을 결(缺)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타자는 어떤 것에 대한 하나의 타자가 아니기에, 비타자에게는 아무것도 결여되어 있지 않고 또 비타자 밖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쿠사의 니콜라오, 《비타자》6). 이런 의미에서 비타자는 모든 존재자가 그리로부터 나와서 그것을 통하여 그리로 향하여 가는 것으로써, 모든 존재자 안에 존재한다. 비타자는 "존재의 근원이자 보존의 수단이자 안식의 목표로서, 모든 것에 의해 최고도로 열망된다"(《비타자》 9).
〔근대와 현대〕 루터(M. Luther, 1483~1546)에 따르면 하느님의 숨어 계심과 접근불가성은 다름아닌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상황으로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구원 및 인식을 확보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아울러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배려되고 있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다. 이 점에 입각하여 볼 때 하느님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숙고와, 신적 은총의 배려 안에 있는 죄인의 상황에 대한 숙고를 토대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현대의 하느님 사상은 인간의 자기확실성에 대한 문맥에서 하느님을 인간의 정신적 자기 실현 행위의 필수 조건으로서, 곧 인간적 인식의 필수 조건이자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의 필수 조건으로서 주제화하였다. 이 처럼 하느님을 필수 조건 내지 필연적 조건으로서 귀결짓는 철학적 추론이, 비지성적 실재인 세계에 직면해 있는 인간이 자기 실존의 존재 근거를 저세상적인 완전한 하느님에게서 확보하려고 했던 그동안의 가망없는 시도를 넘어서는 좀 더 나은 차원의 시도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초월 철학적 하느님, 곧 이른바 '철학자 들의 하느님' 이 인간에게 말을 걸고 응답을 요구하는 "아브라함 · 이사악 · 야곱의 하느님"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지(B. Pascal, Le Mémorial) 하는 점 또한 아직 알 수 없다.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을 추구한 초월 신학을 바로 이 점에서 바라본다면, 정신적 자기 실현 행위의 '필연적 조건으로서의 하느님' 과 '신앙의 하느님' 을 함축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 초월 신학적 관점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초월 경험을 진리와 윤리의 보편성의 요청으로서 기초 신학적으로 정초(定礎)하려는 초월 신학의 작업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사조가 오늘날 신학에서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즉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하느님 안에서 인간으로부터 소외당한 인간 실존의 존재 근거(ratio essendi)를, 새롭게 인간 안에서 획득하려는 시도이다. 이 시도를 통해 새롭게 발견된 하느님은 말하자면 '비타자' , 곧 인간 신성(神性, Göttlichkeit)의 총화로서 통찰될 수 있다. 포이어바흐(L.A. Feuerbach, 1804~1872)와 니체(F. Nietzsche, 1844~1900)는 약자들의 원의와 소망이 투사된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하느님의 가면을 벗김으로써 인간의 정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약자들은 인간 안에 놓여 있고 그 자신에게 부과되어 있는 유한한 실존의 존재 근거를 감히 떠맡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새롭게 통찰된 하느님 이해는 신학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이 스스로 그분의 창조 작품들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영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감행하는 '도전' , 곧 절대적으로 실현 가망성 있는 도전을 의미한다. 쿠사의 니콜라오가 주장했듯이 하느님은 말하자면 '비타자' 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졌던 것으로 간주되어 온 경합 관계의 저편〔彼岸〕에, 곧 경쟁과 대립 관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이 '함께 사랑하는 자' (Duns Scotus)이기를 원하기에, 인간은 하느님의 경쟁자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사랑의 능력에 '참여' (participatio)하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이다. 이처럼 사랑의 능력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적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믿도록 인간이 도전을 받는 한 하느님은, 그분의 창조 작품들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영 안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감행하는, 절대적으로 실현 가망성 있는 '도전' 이다.
IV. 조직 신학에서의 하느님
조직 신학에서 하느님 담론은 둘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진행된다. 즉 모든 존재자의 원초적 근거이자 궁극적 실재에 관련된 '인간적 조건의 철학적 주제화' 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 자신의 현존 사건' 사이에 놓여 있는 긴장에서 하느님 담론이 진행된다.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 하느님에 관한 형이상학적 담론은, 피조물과의 자연적 관계로부터 그분의 '본질' 그대로의 하느님 자신이 인식될 수는 없지만 피조물이 어떻게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진리를 '갖는지'를 제시하고 또 하느님을 모든 실재의 궁극적 근거로서 주제화함으로써 하느님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하느님 담론에 따르면, 모든 피조물의 완전성을 신적 완전성의 참여(participatio, 분여, 한몫 나누어 받기)로 생각할 수 있는 한 원근거인 하느님의 완전성은 온 창조계의 완전성을 무한히 능가한다. 그런데 하느님에 의해 정립된 모든 것들의 존재 근거(ratio essendi)인 하느님은 인간이 인식에 의해 포착할 수 있는 범위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나 있는 하느님으로서, 숨어 계신 분(이사 45, 15 ; 참조 : 요한 1, 18)이자 현존해 계신 분이다. 다시 말해 믿는 이들의 신앙 안에서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행동하는 분, 곧 인간에게 말을 걸고 부르고 자기를 계시하는 분으로 경험되지만, 또한 부재하는 분으로서 경험된다.
〔형이상학적 담론과 계시 신학적 담론 간의 긴장〕 그리스도교적 이해에 따르면 이스라엘 역사와 그 역사 안에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영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의 자기 현존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다.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에 자신을 열어 놓는 사람들 안에 그리고 그들의 믿음 · 희망 · 사랑 · 생각 안에 이 자기 계시를 현존하게 한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담론은 삼위 일체적으로(trinitarisch)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담론은 모든 존재자의 원근거를 하느님 담론의 주제로 삼는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자는 그 원근거로부터 유래하여 그 원근거를 목표로 삼는 한 신적 진리를 갖고 있고 또 그것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계시 신학적으로 동기지어진 하느님 담론은 '참된 존재자' (ὄντως ὄν, 참으로 존재하는 것), 곧 모든 공허한 것 · 거짓 · 가상에 대립해 있는 참된 실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물음을 모른 척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에 관한 담론은 궁극적인 최고 실재에 관련된 인간적 조건의 철학적 주제화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하느님 자신의 현존 사건 사이에 놓여 있는 긴장 관계에서 진행된다. 철학이 인간적 조건을 숙고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형이상학적 담론은 궁극적 실재의 현존을 또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계시 신학적으로 동기지어진 하느님 담론은 하느님 다스림의 시작에서 비로소 발생한 하느님의 이 자기 계시가 어떻게 궁극적인 최고 실재의 현존을 의미할 수 있는지, 그 점을 확고히 하고자 한다.
〔하느님의 다스림과 시작이자 완성이신 하느님〕 하느님의 다스림은 하느님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실재이자 유한한 실재를 완성으로 이끄는 실재임을 뜻한다. 하느님 다스림의 신적 완전성은, 점령과 정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안에서 스스로 서 있도록 충만한 권한을 부여해 주는 사랑의 강력한 힘으로 드러난다. 하느님 다스림의 완전성이 발생하는 곳에서는, 압제와 소외를 일삼는 세력들이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고 아울러 소모되고 고갈되는 시간의 지배도 최후를 맞게된다. 하느님이 이룩하시는 시작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작을 일으키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 자신은 소모되고 고갈될 수 없는 시작이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영에 의해 붙들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추종 안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모든 사람들을 이 시작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하느님의 속성들〕 형이상학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신적 완전성과 하느님의 다스림의 시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적 계시 가능성, 이 둘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볼 때 하느님의 속성들은 인간적 조건의 기본 규정들의 '비타자'이자 인간적 조건에 의해 달성될 수 있는 완전성의 '비타자' 로서 숙고될 수 있다. 이 점을 신학적으로 전제한 채 하느님의 주요한 속성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전능과 존재 권능(Seinsmacht), 곧 사랑의 권능을 들 수 있다. 하느님의 전능과 사랑의 권능이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서 드러나는 한, 하느님의 전능과 사랑의 권능 앞에는 다른 능력이 있을 수 없다. 둘째로 하느님의 '영원성' 과, '시간을 능가하는 월등성' (Zeitüberlegenheit)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시간을 능가하는 월등성이란 모든 것을 소멸하게 만드는 시간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셋째로 불변성, 곧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성을 들 수 있다. 하느님이 당신에 의해 선택된 사람들과 맺은 계약에 언제나 충실한 한, 하느님은 변함없이 자신에게 충실한 분이다. 넷째로 공간적 존재의 조건들로부터의 자유로움들 수 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영의 작용에 자신을 열어 놓는 곳이라면, 그리고 믿는 이로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하는 곳이라면 하느님은 어디에나 현존한다. 다섯째로 창조적 자유로서의 하느님의 자족성(Unbedürftigkeit)과,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자족성이란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지만 그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시작하여 그것을 완성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창조적 자유를 말한다.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은 단순한 반응에 의한 고통과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있는 하느님의 엄위하심을 가리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런 종류의 고통과 괴로움을 사랑으로 인내하는 하느님의 자유로움을 가리킨다. 여섯째로 전지(全知)와 전선(全善)을 들 수 있다. 전지와 전선은 하느님의 행동 속성들로서, 하느님에게 붙잡힌 모든 존재자는 이 속성들 덕택에 자기 자신과 타인을 위해 하느님의 진리와 선을 획득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된다.
형이상학적 기반 위에 있는 하느님 담론과 성서적 · 그리스도론적 기반 위에 있는 하느님 담론 사이의 긴장은 '전능' (全能)이라는 주제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다스림은 시작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에 대한 적대 세력들은 아직 굴복당하지 않은 채 여전히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도처에 감추어져 있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오직 십자가의 표지를 통해서 곧 파괴적인 힘들의 우세함 아래 놓여있는 사랑의 힘없음을 통해서 드러날 뿐이다. 그 때문에 하느님의 다스림과 그분의 주 되심(Herrwerden)을 믿는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적대적 세력들에게 넘겨졌다는, 곧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극한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이 상황이, 믿는 이들이 변신론적 문제 제기와 함께 하느님에게 탄원하는 상황 곧 기도로 하느님 나라의 오심을 청하는 상황이다. 이와 함께 하느님 자신을 뜻하는 '하느님의 다스림' 이 숨어 계심의 상태에서 마침내 나타나게 된다.
〔변신론적 탄원과 최후의 심급〕 납득하기 어려운 신적섭리와 설명하기 힘든 하느님의 세상 주재(主宰) 방식들을 신학적으로 시사하고 제시하는 것으로는 변신론적 문제 제기에 따른 사람들의 탄원을 진정시킬 수 없다. 변신론적 문제 제기에 따른 탄원과 함께 믿는 이는 '하느님 에게서 버림받은 예수의 체험' 곧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경험하고 느꼈던 그 체험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믿는 이는 하느님 영의 힘 안에서, 죄와 하느님을 거스르는 적대적 세력들에 의해 규정된 현재의 창조 상태를, 하느님은 당신이 시작한 것을 완성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믿음의 자세로(필립 1, 6) 극복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사실 그는 탄원 안에서 자신을 의심에서 지켜 주십사고 하느님에게 청하는 용기를 얻고 싶어 한다. 믿는 이는 아마도 이 탄원 안에서 이런 긴장이 신앙 안에서 형성될 수있는 것임을 증언하도록 자신이 어떻게 불리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이런 변신론적 탄원과 기도가 발생하는 곳에서, 믿는 이들은 주님이신 하느님의 전능에 호소함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에 의해 존재하게 된 모든 것이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실재' 로서 믿어진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자연의 진행 결과와 세계 역사의 궁극적 차원을 점검하는 한, 믿는 이들은 하느님이 소멸하게 되는 것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제하고 구원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하느님은 '최후의 심급' (ultima instantia, 최종심)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류 역사에서 힘으로 이루어진 판결 · 판정 · 판단들과 그로 인한 결과들이 최종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만드시는 한에서 그리고 인간의 판단력을 무한히 능가하는 신적 정의 안에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참으로 의로우신 한에서, 하느님은 최후의 심급이다.
〔비타자이자 절대적 도전으로서의 하느님〕 인간이 '하느님은 속성들을 갖는다' 고 생각한 채 하느님에게 그 속성들을 귀속시키면서 하느님에 대해 말하려고 하던 노력은, 포이어바흐 이래 "인간이 자신의 원의와 본질을 하느님에게 투사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적어도 이 의심은, 하느님에 대한 담론이 항상 또한 인간에 대한 담론이라는 점에서 정당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자 애쓰는 곳에서 발생하는 하느님 담론은 극복되어야 할 인간적 한계성들에 대한 담론, 곧 인간의 존재 실현과 본질 실현에 관련하여 부정되어야 할 인간의 한계성들에 대한 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느님에 관한 담론이 모두 인간의 '한계 경험들' 을 토대로 그리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을 규정하는 동경을 토대로 이뤄진다면 하느님에 관한 모든 담론은 왜곡된 채 진행될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여성 신학적 관점에서 전통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전통 신학 안에서는 정의(正義)와 완전성과 주님되심에 대한 남성적 투사(投射)와, 모든 것을 규정하는 하느님 원의에 대한 남성적 투사가 신적 생명과 사랑의 완전성의 경험에 대한 여성적 차원의 경험적 접근법들을 거슬러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문제 제기와 비판에 따라 사람들은 인간적 욕구와 상황에 의해 규정된 하느님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고 또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는지 한 번 더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하느님 담론에서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한 주의(注意)가 요구된다. 하느님에 대한 인간적 욕구의 새로운 상황들을 거슬러 그리고 지금까지 배제된 경험적 차원들을 거슬러 하느님 담론이 종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런 새로운 상황들과 경험적 차원들로부터, 하느님의 완전성과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배려에 대한 다른 방식의 담론이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 담론은 단순히 하느님에 대한 추상적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더 나은 세상과 완성된 세계를 지향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로서만' 하느님 담론이 진행될 수 있다는 점이 신학안에서 원칙적으로 통용된다면, 신학은 또한 하느님 상념에 대한 '투사' (Projektion)의 의심을 원칙적으로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완전성이 그 분의 창조와 창조계의 완성에 도움을 주는 완전성으로서 신학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한, 오늘날 신학은 이 '투사' 의 의심을 피하지 말고 견더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은, 당신과 함께 이루어가는 인류 역사 안에서 인간이 단서를 찾은 동경의 성취와 상호 교환될 수 있는 차원의 것으로 머물러 있다. 이 점은, 하느님이 한 인간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였을 때에 그리고 당신과의 관계 안에서 완성된 인간 존재인 예수가 궁극적으로 하느님 자신을 계시하셨을 때에 우리 인간들에게 보여졌던 점이기도 하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됨은 또한 숨어 계신 분의 계시됨이다. "우리의 무지의 어둠 안에서 포착될 수 없는 방식으로 엄밀한 진리가 비추어지는"(《무지의 지》 1, 26) 한에서 하느님은 그렇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면서 인간들을 만난다. '투사' 의 좁은 지평에서 벗어나 진리의 단서를 찾은 인간의 동경이이 '진리의 절단' (praecisio veritatis)에 의해 절대적으로 실현 가망성 있는 도전을 받는 한, 하느님은 그렇게 전적으로 당신 자신을 투신하면서 인간들을 만난다. (⇦ 신 ; 하느님의 능력 ; → 삼위 일체 ; 야훼 ; 엘로힘 ; 인격신 ; 천주 ; 초월 신학 ; 하느님의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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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종교학에서의 하느님
한국인들도 하느님을 믿어 왔다. 중국으로부터 유교, 불교, 도교 등이 유입되기 이전부터 고유하게 믿어 온 종교 사상이 있다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토착 종교를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느님 사상의 연구사〕 수산(修山) 이종휘(李種徽, 1731~1797)는 한국사를 정리한 《동사》(東史)라는 기전체(紀傳體) 한국사에서 환웅(桓雄) 시대부터 고구려의 제사 의례를 정리하면서, 중국과는 다른 고유한 한국의 토착 종교 사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비록 중국의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국의 종교 제의들을 이해하려고 하였다는 한계가 있으나 중국적 기준과 다른 한국의 고유한 토착 종교 사상이 있음을 발견한 점에서 그는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난곡(蘭谷)이란 인물에 의해 19세기에 기록된 《무당내력》(巫黨來歷)이란 책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책은 필사본인데, 당시의 무당들이 최영 장군이나 사도 세자와 같은 인물을 무신(巫神)으로 내세우는 것을 비판하고 무교(巫敎)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받고 있다.
1910~1930년대에 한국의 고유한 하느님 사상을 연구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단군을 통해 고유한 종교 사상을 연구한 위의 책들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말에 애국 계몽 운동을 펼쳤던 김교헌(金敎獻, 1868~1923), 박은식(朴殷植, 1859~1925),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등이 1910년에 활동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김교헌은 대종교(大倧敎)의 이론가이며 제2대 교주로서 대종교의 원류가 신교(神敎)에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교란 한국인들이 아득한 옛날부터 거행한 제천 행사를 말하는 것으로서 환검선인(桓儉仙人)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였다. 이 역시 제천 행사의 중요한 내용이 단군으로 표출된 한국의 고유한 사상에 있음을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은식도 《한국통사》(韓國痛史)라는 저서를 통해 한국 고유 종교의 원류를 제천보본(祭天報本), 삼신(환인, 환응, 단군) 등에서 찾고 이런 사상이 기자 조선, 삼국 시대, 고려 시대를 거쳐 계속 전승되어 온 고유한 하느님 사상이라고 하였다. 또한 신채호는 <동국고대선교고>(國古代仙仙敎考)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의 고유 종교는 환인, 환웅, 단군으로 표상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는 중국의 도교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그는 불교가 수용됨에 따라 이런 고유 종교는 점차 위축되어 고려 말과 조선 초엽에 이르러 거의 단절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선교의 역사를 나름대로 밝히고 있다. 특히 신채호는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史)라는 책을 통해 '수두교' 라는 독특한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는 단교(壇敎)라는 용어가 '수두' 라는 한국 고유의 용어를 한역(漢譯)한 것이라면서, 광명신(光明神)의 서숙처(棲宿處)라는 신성한 곳이 수두였다고 한다. 광명신은 말할 것도 없이 삼신(三神)을 가리킨다. 그는 이런 광명신을 숭배하던 지역이 흉노와 중국의 하은(夏殷)에도 미쳤고 신라의 화랑으로 그 맥이 계승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의 세 사람은 일제 식민지하의 대종교 운동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은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불교 수용 이전에 이미 한국에는 비교적 체계가 잡힌 고유 종교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고유 종교는 말할 것도 없이 삼신으로 표상되고 있는 하느님 사상이다.
이런 사상은 이능화(李能和, 1869~1945)와 최남선(崔南善, 1890~1957)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능화도 한국의 고유 종교를 신교(神敎)라고 부르면서 이 신교가 단군 왕검으로부터 비롯되어 예맥(濊貊), , 삼한(三韓)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로 계속 전승되어 왔다고 하였다. 특히 단군을 비롯한 제사장을 무(巫)라고 칭하며, 한국의 무교도 단군 신교의 한 갈래로 파악하였다. 무의 개념이 너무 넓다는 것과 신교라는 개념이 모호하다는 것이 학계에서 제기하는 의문이지만, 한국의 고유 종교를 일관성 있게 하나로 꿰어 보려고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만하다. 서구의 신화학이나 민족학을 그 나름으로 소화하여 새롭게 접근한 최남선도 한국의 고유신앙이 단군에서 비롯된 태양 및 천(天)을 숭배하는 부루교 로서 신라의 화랑, 고려의 선가(仙家)가 바로 부루교단(敎壇)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하는 대표적인 논문은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다. 경성제대 교수였던 손진태(孫晋泰, 1900~1950?)는 한국 토착 종교의 구성 요소들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없이 단지 '단군신교' , '부루교' 등으로 일관해 버린 학풍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해박한 민속학적 지식으로 실증적인 학풍을 선보였다. 한국인의 영혼관, 소도(蘇塗), 산신, 토테미즘 등 다양한 측면의 연구를 통해 중국과는 다른 한국의 고유한 종교 사상이 존재하였음을 밝혔다. 이러한 측면들은 한국인의 하느님 사상을 바탕에 깔고 형성된 종교 형태들이었다. 같은 무렵에 활동했던 일본인 학자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 1902~1971)도 한국 고대의 건국 신화들이 중국 문화, 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간주하던 일본인 역사가들에 반대하여, 한국 고대 문화의 고유한 사실로 인정하고 한국 고대인의 실생활이 여러 측면에서 반영된 것 이라고 보았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볼 때 미시나가 일본인 학자들의 식민지사관에 입각해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서 단군 신화를 불교 전성기에 만들어진 주몽 신화(朱蒙神話)의 변형으로 간주하여 단군의 고대성을 은근히 부인하려 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신라, 가야의 건국 신화들에 주목하였는데, 그것도 단군 신화와 단군 조선의 역사성을 부인하려고한 일본학계의 고대사 인식 체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군국주의 체제 밑에 있던 한국인 학자들은 한국의 고유 사상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김정학(金廷鶴)의 <조선 신화의 과학적 고찰>(1948), 변태섭(邊太燮)의 <한국 고대의 계세(繼世) 사상과 조상 숭배 신앙>(1958~1959) 김택규(金宅圭)의 <영고고>(迎鼓考, 1958), 김재원(金載元)의 《단군 신화의 신(新) 연구》(1947), 김상기(金庠基)의 <국사(國史)상에 나타난 개국전설의 연변(演變)에 대하여>(1955), 이홍직(李弘植)의 <단군 신화의 민속학적 고찰>(1957) 등이 1940~1950년대에 발표된 대표적인 글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연구들이 하느님 사상에만 집중된 것은 아니었지만, 고유한 종교 사상이 직간접으로 한국의 하느님 사상과 관련성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고유한 하느님 사상과 관련된 연구를 한 대표적인 업적들을 나열해 본다면, 최길성(崔吉城)의 <한국 원시 종교의 일고(一考)〉(1968), 임동권(任東權)의 <한국 원시 종교사>(1970), 유동식(柳東植)의 《한국 무교의 구조와 역사》(1975), 김영진(金榮振)의 《한국 자연 신앙 연구》(1985) , 김태곤(金泰坤)의 <무속상(巫俗上)으로 본 단군 신화>(1968) , 장주근(張籌根)의 <신화학에서 본 한국 문화의 기원>(1969), 김경탁(金敬琢)의 <한국 원시 종교사-하느님 개념 발달사>(1970) 이은봉(李恩奉)의 《한국 고대 종교 사상》(1984), 최근영(崔根泳)의 <한국 선사(先史) 고대인의 태양 숭배에 대한 일측면(一側面)〉(1985) 및 <한국 고대의 천신(天神) 신앙에 대한 고찰>(1987)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종교 의례나 종교 체험, 풍속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느님 사상을 전하는 글까지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단군과 한국의 하느님 사상〕 한국의 하느님 사상의 연구사를 살펴보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같이 단군 신화의 중요성을 일깨운다는 점이다. 한국의 하느님 사상을 단군 신화를 통해 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일차적으로는 고대 종교 사상을 연구하기 위한 자료의 빈곤을 들지 않을 수 없지만, 단군 신화가 한국 고대의 하느님 사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비교적 적절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또한 단군 신화는 고조선의 건국과 관련된 어떤 역사성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한국 고대인의 하느님 사상에 관한 소박한 신학을 신화를 통해 표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 고대인이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던 하느님에 대한 관념이 그 신화를 통해 어느정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신화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고조선의 건국 시조인 단군의 탄생에 결부된 역사성과 밀접히 관련된다고 볼 때에 가능하다. 단군의 탄생 신화가 후에 삼국의 건국 신화와 일맥상통하고 또한 비교되면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신빙성이 더욱 크다. 단군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고조선 시대의 주민들이 믿고 있었던 종교 의식과 신앙이 반영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단군 말고도 고대 영웅들을 신격화하는 이야기들을 전하는 책들은 아마 무척 많았을 것이다. 《삼국유사》 등에 고기(古記)라고 인용된 대부분의 책들이 삼국과 그 이전의 역사책이라고 추측되고 있지만, 오늘날 전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은 유감이다. 그렇지만 그 책들이 대개 인물 중심으로 영웅들의 탄생과 활동을 거룩하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쓴 역사책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단군 신화도 이런 고기에서 인용하는 형식으로 《삼국유사》 등에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고조선을 건국한 영웅인 단군의 이야기가 여러 고기에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며, 《삼국유사》 계통 말고도 여러 갈래가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의 하느님〕 그렇다면 한국의 고대인이 믿어 오던 하느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몇 가지 지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느님은 '만물을 지배하고 모든 존재의 근원' 이라는 것이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은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고조선은 우연적으로 생겨난 국가가 아니라 하늘의 뜻에 의해 필연적으로 건국된 국가이다. 고조선의 주민들은 모두 천손족(天孫族)이다. 단군을 숭배하는 의례에서 오늘날 전하는 단군 신화와 같은 내용들이 고조선 주민들에게 어떤 형식으로든 내면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주민들은 국가의 단위를 구성하는 백성들이었지만, 그 의례에 참석하였다는 의미에서 느슨하게나마 단군을 시조로 하는 종교적 믿음을 가진 신도들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둘째, 환인 · 환웅 · 단군이 각각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실은 하나라는 점을 밝히는 단군 신화에서 한국인들이 믿어 온 고유한 하느님이 '초월적 존재' 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은 일찍부터 분명하게 인식되었다. "1만 있고 301 없으면 이것은 용(用)이 없는 것이요, 3만 있고 1이 없으면 그것은 체(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1은 3의 체가 되고 3은 1의 용이 된다" 라고 단군 신화를 해석하였던 것이다. 즉 초월적 세계의 연속과 보존이 유지되어 있어야 하는 아버지(환인)가 있어야 하고, 그 아버지의 뜻을 따라 초월성을 운반하는 동반자로서의 아들(환응)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완성시키는 지상세계의 활동자(단군)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만 신성(神性)이 파괴되지 않은 채 이 지상 세계에 신이 충분히 간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이 초월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단군 신화 안에 반영된 하느님은 초월적 존재로서 손색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 인간 존엄성에 관한 의식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단군은 천지의 결합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것, 모든 존재는 신성한 것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 나아가 인간의 마음 안에 성스러운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 등이 그러하다. 한국인들은 불교나 유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살아온 백성들이었다. 고유한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식한 것은 뿌리깊은 것이어서, 서양의 그리스도교가 들어왔을 때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을 처음부터 아버지로 인식하는 측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마음은 신명(神明)이 통하는 길' 이라거나 '인내천' (人乃天) 사상은 실은 외래 종교 사상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고유한 한국인의 하느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해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넷째, 단군 신화에는 봉사하는 인간의 모습이 가장 원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 '영원' (환웅)이 '시간' (신시(神市〕) 안에 들어오는 것, '전능한 힘'(환응)이 '무력한 존재' (단군)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사상이 어렴풋하게나마 표현되어 있고, 이것이 홍익 인간(弘益人間)의 사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 경천 사상 ; 신 ; → 천)
※ 참고문헌 申采浩, 〈朝鮮上古史〉, 《丹齋申采浩全集》 上, 1977/ 崔南善, 〈不咸文化論〉, 《六堂崔南善全集》 2, 1978/ 孫晋泰, 〈朝鮮上古文化의 研究>, 《孫普泰先生全集》 6, 1981/ 柳東植, 《韓國巫敎의 構造와 歷史》, 연대출판부, 1975/ 李恩奉, 《韓國古代宗敎思想》, 集文堂, 1984. 〔李恩奉〕
하느님
〔그〕θεός · 〔라〕Deus · 〔영〕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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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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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비로 홍수에서 구원받은 노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