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과의 일치

— 一致

[라]unio cum Deo · [영]union with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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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의 일치가 깨지면서 형제적 불일치(카인과 아벨)와 사회적 불일치(바벨탑)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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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의 일치가 깨지면서 형제적 불일치(카인과 아벨)와 사회적 불일치(바벨탑)가 일어났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신자들, 성령과 신자들이 더욱더 밀접하게 결합되는 것.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할 영적 진보의 목표이다.
〔성서에서의 언급〕 일치의 원천과 파괴 : 우주는 창조주인 하느님의 업적이며 이 우주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 28)이다. 이는 최초의 남자와 여자에게한 명령 속에 계시되어 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하느님 업적의 다양성과 일치성이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지 알수 있다. 모든 피조물이 인간의 지배하에서 일치되려면 인간이 먼저 증가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사랑을 가지고 자기 아내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창세 2, 23-24). 그러나 하느님의 이러한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뢰심을 가지고 승인하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이러한 승인의 거부가 인간의 근본적인 죄이다. 인간은 하느님과 같이 되려고 이 죄를 범하였고, 결국 사랑 자체이며(1요한 4, 16) 일치의 원천인 하느님과 절연한다. 이 절연으로부터 여러 가지 분열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이혼과 일부다처로 결혼의 일치가 파괴되고(창세 4, 19 ; 신명 24, 1), 질투로 형제를 살해하여 형제적 일치가 파괴되며(창세 4, 6-8, 24), 서로 다른 언어로 상징되는 상호 몰이해로 말미암아 사회적 일치가 파괴되었다(창세 11, 9).
계약을 통한 일치의 추구 : 하느님은 이 절연을 회복하려고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고, 그들과 신앙에 입각한 계약을 맺는다(호세 2, 22). 사실 신앙은,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고 그분의 사업에 협력하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이 일치에 대한 추구는 하느님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야훼의 종' 을 선택하고 부를 때마다 끊임없이 반복된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율법을 준 것, 다윗 가문에서 '왕' 을 선정한 것,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백성과 함께 머문 것, 야훼의 종을 성실의 모범으로 내세운 것 등이 이스라엘의 일치를 확고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사제적인 백성(출애 19, 6), 증인인 백성(이사 43, 10-12)으로서의 사명을 성취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즉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한 것은 그들을 통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모든 백성이 당신을 한 마음으로 예배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이스라엘의 불충실에 대한 벌이었던 분산도, 결국은 하느님인 야훼가 창조주요, 구세주임을 이방인들에게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이사 45장).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였다. 이스라엘이 선민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또한 이교 백성들이 이스라엘과 하나가 되어 하느님께 같은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서는(이사 56, 6-8), "한 분"이 오셔야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통일시키고 자신의 죽음으로 많은 죄인들을 구원할 사명을 띤 "하느님의 종"이며(이사 42, 1 ; 49, 6 ; 53, 10-12), 자신의 왕국에 모여든 양 떼를 치는 새로운 다윗이며(에제 34, 23-24 : 37, 21-24), 거룩한 백성의 머리가 될 "사람의 아들" 이다(다니 7, 13-14. 27). 그의 은혜로 야훼가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아내인 시온은 모든 백성들의 공통 어머니가 될 것이며(시편 87, 5 ; 이사 54, 1-10 ; 55, 3-5), 야훼는 그들의 유일한 왕이 될 것이다(즈가 14, 9).
교회 안에서 일치의 실현 :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자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인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루가 9, 35). 그는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자들을 일치시키고, 자신의 영과 어머니를 그들에게 주고(로마 5, 5 ; 요한 19, 27)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로 바친 자신의 몸을 유일한 빵으로 주어 그들을 양육한다(1고린 10, 16-17). 이와 같이 그는 모든 백성을 한 몸에 결합시키고(에페 2, 14-18), 그를 믿는 자들은 그 몸의 지체가 되어 그 몸인 교회의 여러 가지 은사를 받게 된다(1고린 12, 4-27 ; 에페 1, 22-23). 그리고 그들은 살아 있는 돌로서 하느님의 유일한 성전을 짓는 데 쓰인다(에페 2, 19-22 ; 1베드 2, 4-5). 그리스도는 자신의 양들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아는 유일한 목자이며(요한 10, 3), 자신의 생명을 주면서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 무리 안에 모은다(요한 10, 14-16 : 11, 51-52). 실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영역의 일치가 회복된다. 욕정으로 찢겨진 인간 내부의 일치(로마 7, 14-15 ; 8, 2. 19), 그리스도와 교회의 결합을 모범으로 하는 부부의 일치(에페 5, 25-32), 성령의 인도로 모든 사람들이 한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전 인류의 일치(로마 8, 14-16 ; 에페 4, 4-6) 등이 그러하다. 마침내 모든 인류는 "한 마음 한 정신이 되어"(사도 4, 32) 아버지인 하느님을 찬미할 것이다(로마 15, 5-6 ; 참조 : 사도 2, 4. 11).
그러므로 인간은 이 일치가 분열과 이단으로 인해 다시 파괴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1고린 1, 10 ; 11, 18-19). 그런데 이 일치의 기초는 주님께 대한 신앙이다(에페 4, 5. 13 ; 참조 : 마태 16, 16-18). 베드로의 사랑에 의탁된 교회의 표지는(요한 21, 15-17) 일치이며, 이 일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고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 34-35)라는 유일한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자들이 맺는 열매이다. 그들이 충실하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포도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과 같이(요한 15, 5-10),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일치하여 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는, 독생 성자를 주면서까지 사랑을 드러낸 아버지의 사랑이(요한 3, 16) 그들 안에서 세상에 나타나기 위하여, 또한 전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하여(에페 4, 13) 필요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저 또한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 또한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한 17, 21-22)라고 기도한 그리스도의 염원이 이루어 질 것이다.
〔교부들의 일치에 대한 용어와 견해〕 일치 : 아버지와 말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일치' (unio)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리용의 이레네오(Ireneus Lugdunensis, 130/140?~202?)는 하느님의 말씀이 취한 육신과의 일치를 표현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즉 이 단어는 신성의 그리스도가 인간적인 것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적 육신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물음보다는 믿음으로 이 일치를 받아들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Athanasius Alexandrinus, 295?~373)는 신적 위격(位格)의 모방을 이 일치 안에서 찾으며 내적인 일치를 강조하였다. 그는 복음, 즉 일치를 가지고 오는 말씀을 통해서 신앙인은 아들과 일치하며 그 아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는 내적 생활을 위한 일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신적인 빛에 의해서 신화(神化)된 영의 일치를 의미하였다.
결합 : '결합' (conjunctio)이라는 용어는 다른 사람과 의 관계를 포함한다. 내적 생활의 일치와 하느님과의 일치를 암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일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추상적인 표현일 뿐이다.
친교 : 성서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를 지적하기 위해 '콤무니오' (communio)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육신과의 일치를 지적하기 위해서도 사용하였다. 즉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서로 일치되어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신화(神化) : 베드로의 둘째 서간 1장 4절은 신앙인들이 "약속한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알려 준다. 이때 신성과 일치하게 되었다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신화' (deificatio)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아타나시오는 '우리가 신화되기 위해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고 말하였다. 또 바실리오(Basilius, 329~379)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사람들이 불사불멸(不死不滅)함에 의해 하느님과 유사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저승에서만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다.
〔하느님과의 일치 가능성〕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 라고 말할 때 일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우리 말로 '일치' 라는 것은 '하나' 라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 라는 것과 '일치' 라는 것의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사실 창조주와 피조물이 일치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비례가 되지 않는데 어떻게 일치될 수 있는가? 일치는 상대되는 두 가지 류(類)가 관계를 맺는 것인데 동등한 범주 안에 하느님과 인간을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아무런 공통된 것이 없고, 창조주와 피조물을 같은 의미로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을 어떤 수에 집어넣을 수 없기에 그분은 전체이다. 그 무엇도 보태질 수 없는 분이다.
그런데 에크하르트(J. Eckhart, 1260~1328)는 "피조물을 전무화(全無化)함으로써 무(無)와 전체(全體)가 일치(一致)한다" 라고 하였다. 또 카탈라의 잔(Jeane de Catala)은 "하느님과의 일치는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잊혀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르트(K. Barth, 1886~1968)는 "하느님은 모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부와 전혀 다른 분이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이 말은 매우 모순적인 것이다. '전부' 라는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다. 또한 다른 이에게 일치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가 되어야 하며 '나' 를 버려야 한다.' 결국 하느님에게서 완전히 분실되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소개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실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말한다지만 다분히 신학자의 하느님에 대한 관념을 말하는것일 수 있다. 특히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인간을 하느님과 동등시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하느님과의 일치는 하느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다루는 것이지 두 존재를 비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일치는 하느님에게 일치, 무엇과 무엇 사이에 하나가 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도 아니다. 하느님 안의 일치를 고찰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는 '친교' (commumio)이다.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일치 : 하느님과의 일치를 어떤 두 존재의 일치로 생각할 수는 없다. 마땅한 말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께 일치한다' 고 말하여 왔을 뿐이다. 하느님과 예수가 둘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오랜 탐구가 필요하였다. 결국, 신학은 인격(人格, persona)이라는 용어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을 두 인격이라고 하였으며, 하느님의 유일성과 삼위의 위격(位格, hypostasis) 안에 일치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즉, 삼위 일체(三位一體, Trinitas)를 교리로 확정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하느님은 혼란 없이 실제적으로 일치된 위격(位格)이기에 이 일치를 신적인 일치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신비라고 불린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인성(人性)으로는 창조된 본성이지만, 하느님으로서는 창조되지 않은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개념적으로 알 수 없기에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육화(肉化)로 인한 신성과 인성의 일치는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계시로만 이해할 수있다.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일치 : 하느님 안에 일치가 있고 육화가 있다는 것을 토대로 신앙은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사실 그리스도에게 일치된 사람은 하느님께 일치되어 있다. 물론 어떻게 그리스도와 일치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스도와 일치된 다는 것은 인간 사이에서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정이나 사랑이 아무리 친밀하더라도 둘이 완전히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친교와 일치는 실제적이다. 그래서 생각을 나누고 교환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인간 관계의 체험으로, 예수가 하느님이자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듣기에는 불충분하다. 물론 부활과 성령의 선물에 의하여 복음의 여러 가지 계시를 인식할 수 있기는 하지만, 수 세기 전의 사람과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예수의 양식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와 하느님이 맺은 관계에 참여하고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속성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예수와 비슷해지는 것은 아직 일치가 아니다. 아버지의 모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아들 안에 아버지가 실재하기 때문에 예수는 하느님이고. 신자들은 예수와 비슷해질 수도 없다. 신자들 또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하느님과 깊이 일치되기를 소망하지만, 누구도 그분의 아들은 아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살고 계십니다"(갈라 2, 20)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갈라 2, 19)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많은 영성가들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살도록 자기 자신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일치는 하느님과 예수의 유사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물론 육화하여 죽고 부활한 예수의 물리적인 몸과 같다는 것은 아니다.
〔교리서가 밝힌 그리스도와 하느님과 이루는 인간의 일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가정' 안에 모인 사람들의 중심에 있다. 그는 자신의 말씀과 하느님의 말씀을 나타내는 징표들과 제자들의 파견을 통해서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불러모은다. 사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와 일치되도록 부름을 받았다(교회 3항). "내가 땅에서부터 들어 올려지게 되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입니다"(요한, 12, 32).
하지만 성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계획의 목적인 당신의 신비를 교회 안에서 완성하고 계시한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 위에 있는 것이 든 만물을 그리스도 아래에 모으시려는 것입니다"(에페 1, 10).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 관계를 사도 바오로는 "신비"(에페 5, 32)라고 하였다. 마치 신랑과 결합하듯 그리스도와 결합하였기 때문에(에페 5, 25-27 참조) 교회도 신비가 된 것이다(에페 3, 9-11 참조). 이러한 교회 안에서 "가실 줄 모르는 사랑"(1고린 13, 8)으로 하느님과 인간들이 이루는 일치가, 지나가는 이 세상과 관련된 교회 안의 모든 성사적 도구의 목적이다(교회 48항). 인간과 하느님의 깊은 일치를 이루는 성사가 되는 것, 이것이 교회의 첫 번째 목적이다. 사람들 사이의 친교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또한 인류 일치의 성사이기도 하다. 이 일치는 교회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 (묵시 7, 9)의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모으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교회는 장차 도래할 이 일치를 완전히 실현하는 표징이며 도구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일곱 개의 성사를 보존하고 있다. "모든 성사의 효과는 신자 전체의 것이다. 성사들, 특히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문과 같은 세례성사는 모두를 서로 묶어 주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 결합시키는 거룩한 끈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교부들의 신경 해석에서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성사의 공유로 이해하고 있다. …성사는 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므로, 모든 성사는 친교의 성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친교를 완성시키는 주된 성사는 성체성사이므로 친교의 성사라는 말은 성체성사에 더 적합하다"(《로마 교리서》 1, 10, 24). 특히 영성체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일치를 증진시켜 준다. 성체를 받아모심으로써 얻는 주요한 효과는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이는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니다"(요한 6, 56).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그와 일치를 이룬 삶의 토대는 성찬의 잔치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파견하셨고 또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이도 또한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요한 6, 57).
신앙인이 이루어야 하는 영적 진보의 목표는 언제나 그리스도와 더욱더 밀접하게 결합하는 것이다. '거룩한 신비들' , 곧 성사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삼위 일체의 신비에 참여하기 때문에 이 결합은 '신비적' 이다. 하느님은 인간 모두를 당신과 더욱 깊이 결합하도록 지금도 부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주는 이 은혜를 드러나게 하려고, 소수의 특정한 사람들에게는 특은이나 이 신비 생활의 특별한 표징들을 주시기도 한다. 이는 교회에서 존경받고 있는 성인들이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예언이나 오상, 치유 등 특별한 은사를 받아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과 더 일치하도록 이끈 것으로 증명된다. 사실 예수는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들입니다. 내 안에 머무는 사람, 그리고 내가 그 안에 머무는 사람, 그런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한 15, 5)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 란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풍요로워지는 삶의 거룩함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신비에 참여하며 그의 계명을 지킨다면, 구세주는 직접 우리 안에서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형제들, 곧 우리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을 사랑하러 오신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행실의 살아 있는 내적 규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 12). 이러한 계명의 실천, 즉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일치를 이루며 친교를 나눈 이들이 보여야 할 징표이기도 하다. 또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 신앙인이, 그 결과로 변화되었음을 알려 주는 가장 분명한 모습이다.
〔일치에 이르는 길〕 위대한 영성가들은 자신들의 영적 여정이 상당한 성숙도에 도달하였음을 나타내는 기도 체험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일치에 이르는 길' 이라는 말을 하나의 틀로 사용하였다. 영적 여정에서 밝고 환한 길이 끝날 무렵, 그 길목까지 온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사랑에 합치되는 기도의 체험을 하는 은사를 받게 된다. 그 사람에게는 가장 먼저 스스로의 인성에서 정화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성령이 그 사람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게 되며, 하느님의과 일치에 이르는 변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밝고 환한 길목에 선 그 사람은 삼위 일체인 하느님과의 더욱더 깊은 일치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며, 하느님의 현존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자신의 절대적인 가난과 무력함에 대한 실존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길의 입구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기도에 몰입된 상태에서 사랑 자체인 하느님이 자신을 찾아 주심을 체험함으로써 그는 하느님 사랑의 위대함을 더욱더 잘 깨닫게 되며, 또한 그 사랑의 현현에 대하여 자신은 응답조차 할 수 없는 철저한 무능력자임을 점점 더 잘 알아듣게 된다.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할 때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더 완전한 변화를 갈망하게 된다. 그러면서 하느님과 충만한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꼭 있어야 할 새로운 마음은 오직 성령만이 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이 어두운 밤을 지내면서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성장함에 따라, 그는 자신의 존재를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맡기기 시작한다. 이 기간을 흔히 '하느님과 약혼하였다' 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는 하느님과 일치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에 와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 그는 자신이 불완전한 자아에서 벗어나 거룩한 하느님의 사랑의 품속으로 들어올려짐을 느끼면서 하느님의 자신을 당신 안에서 온전히 변화시켜 주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져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 약혼 기간 동안 탈혼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는 잠시 비록 동안이지만, 이미 자신에게 새로운 마음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준 분은 바로 자신의 존재와 행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그리스도임을 알게 된다.
약혼 기간 동안 그는 사랑하는 그분의 현존(現存)과 부재(不在)를 번갈아 체험함으로써 연옥의 고통과 천국의 기쁨을 교대로 느끼게 된다.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에 이르도록 개인을 준비시켜 주는 성령의 정화 작업으로 인해 때때로 고통을 체험하지만, 그 시기에도 그는 하느님에 대하여 변함없는 신뢰를 품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기다릴 줄 알게 된다. 이처럼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때를 '하느님과 결혼한 시기 로 비유한다. 이때 하느님은 성실하며 약속에 충실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약혼 기간 동안 하느님이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바꾸어 주는 것을 통하여 당신과 충만한 일치를 이루게 하여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정배인 하느님이 자신을 찾아 줄 때마다 매번 느끼는 새로움은 그에게 거룩한 생활의 충만함 속에서 나눔의 능력을 더욱 크게 확대시켜 준다. 성령이 한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정화시키는 일을 끝냈을 때, 그에게는 신비로운 결혼의 은총이 주어져 성령이 그에게 불어넣어 준 관상(觀想, contemplatio)을 하게 된다. 간혹 삼위 일체인 하느님을 지적(知的)인 면에서 깊이 관상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결혼을 한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그리하여 온전히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루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는 은총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은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에서 성부와 성령과 온전히 하나를 이루었음을 깨닫게된다.
영혼이 어두운 밤을 지내는 동안 고통을 겪게 되지만, 그 고통은 그에게 깊고 심오한 평화를 느끼게 해 준다. 왜냐하면 그가 받은 상처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치유되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변화됨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언제나 새롭게 쇄신시켜 주고 재창조해 주는, 삼위 일체인 하느님의 자애로운 사랑 앞에 늘 있다는 즐거움이 너무나 크기에 영적 여정에서 오랫동안 정배인 하느님을 찾아 해매고 다녔던 피로를 말끔히 씻어 준다.
삼위 일체인 하느님의 삶 안으로 자신이 들어가 있음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면, 그는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교회의 사명에 전적으로 동참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변화되어 성령의 불로 뜨겁게 타오르는 사람은 지혜의 은사로 인도되어,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들이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에 전적으로 바쳐지는지를 알게 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구원과 성화에 대한 열정에 타올라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확장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맡아 수행할 힘과 용기를 주는 거룩한 사랑의 놀라운 효과에 대하여 알게 된다. 하느님이 관심을 두는 것과 어떤 사람이 관심을 두는 것이 완전히 하나가 될 때, 그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겸손한 섬김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과 성령의 성화 활동이 새로운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한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를 체험한다 하여도 그가 갖고 있는 인간적인 약점이나 도덕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로 인한 자신의 상처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의 원천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안에 끝임없이 투사시킨다. 이때 그는 자신의 문제로 인해 고통스럽게 걱정하는 단계를 넘어서게 되어, 하느님이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심에 항상 감사드리고 늘 기쁨에 찬 생활을 하게 된다. 삼위 일체인 하느님의 현존에서 흘러넘치는 거룩한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잘못을 얼마나 잘 용서하여 주고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지를 보여 주는 뚜렷한 표징이 된다.
일반적으로 결혼식이 부부가 사랑과 일치 안에서 성장해 가는 삶을 시작하는 예식이라면, 예수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결혼 역시 역동적인 삶의 시작이지 정적인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결혼한 후부터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하여 신앙 안에 숨어 있던 하느님이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구원 계획의 신비에 자신을 거듭 바쳐드릴 것을 요구받게 된다. 여전히 슬픔과 고통을 체험하게 되겠지만, 그 슬픔이나 고통은 그가 그리스도와 결혼하기 이전에 경험하였던것이 아니고 단지 죽고 부활한 그리스도와 하나를 이루고 사는 삶의 한 부분으로 경험된다. 성령의 은사를 충만히 받은 사람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놀라운 변화가 장차 천국에서 이루어질 결혼 잔치의 예표라는 것을 알고 큰 기대와 희망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일치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사랑의 부르심에 호응하여 겸손한 봉사의 삶 속에서 평화롭게 기다릴 줄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부르심은 마침내 영원한 삶의 충만함 안으로 그를 기쁘게 들어가게 하여 줄 것이고, 거기에서 하느님은 참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며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분이다. (⇦ 합일 ; → 사랑 ; 신앙 ; 예수 그리스도 ; 하느님)
※ 참고문헌  M.F. Lacan, union, Vocabulaire de Théologie Biblique, X. Léon-Dufour ed., Cerf, 19771 B. Groeschel, Spiritual Passages : The Psychology of Spiritual Development, New York, Crossroad, 1983/ T.D.McGonigle, union, unitive way,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ty, M. Downey ed., The Liturgical Press, 1993, pp. 987~988/ M.Dupay, union du Dieu, 《Dsp》 14, pp. 40~61.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