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제일 먼저 선포한 주제이며, 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이 통치하는 나라. 이 나라를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하늘나라'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라고 하며, 한국에서는 '천국' (天國) 또는 '천당' (天堂)이라고 한다. 성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 (로마 14, 17)이라고도 하였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한 말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 15)였다. 사실 예수는 공생활 동안 하느님의 나라를 이스라엘 방방곡곡에 전파하며 다녔다. 아니, 그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나라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온전히 하느님의 나라만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가 예수의 활동과 사상의 중심에서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뜻을 헤아리는 것은 쉽지않다.
〔특 징〕 하느님 나라의 비유 :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수 차례에 걸쳐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를 인간의 언어로 담아 내는 일은 결국에는 인간의 지력(知力)이 좇아갈 수 있는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듣는 이의 수준에 맞추어 '어떻게 하면 보다 쉽고 설득력 있게 하느님의 나라를 이해시킬 수 있을까? 라는 문제에 봉착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유 라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무슨 비유로(ἐντίνι παραβολῆ) 그것(하느님의 나라)을 밝혀 보일까?(마르 4, 30) 인간의 언어와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의 흐름이 매우 자연스러우며 전하려는 한 가지의 큰 뜻만 파악하면 되는 비유를 통해서 표현한 것이다. 이 바탕에는 '인간의 언어를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미 그러나 아직 :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와 미래라는 양쪽 시간대에 길게 걸쳐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치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아서 하루하루 쉬지 않고 자라난다. 그리고 이 같은 현재는 또 다른 현재로 이어져 뿌려진 씨에서 싹이 돋고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낱알이 맺히게 된다(마르 4, 26-29). 그런가 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마치 밀가루 반죽에 넣어 놓은 누룩처럼 꾸준히 반죽을 부풀게 하고(루가 13, 20-21), 겨자씨 한 알처럼 작기는 하지만 매 순간 땅 속에서 쉼 없이 자라는 것이기도 하다(마르 4, 30-32). 이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성을 가지고있다. 그러나 이 현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줄기차게 움직여 나간다는 측면을 가진다. 이는 씨들이 하루하루 자란다거나, 밀가루 반죽이 조금씩 부풀어 나간다는 이미지를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즉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이란 한 곳에 멈추어 선 시간대가 아니라 움직이는 현재, 혹은 자라나는 현재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반면 하느님의 나라가 가지는 미래성은 장래에 닥쳐올 특정한 시점을 가리킨다. 그날이 되어 곡식이 익으면 밭의 주인은 추수 때가 된 줄 알고 곧 낫을 댈 것이며, 겨자씨는 어느덧 큰 가지를 뻗을 만큼 자라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정도가 된다. 물론 이때쯤에는 누룩을 섞어 두었던 밀가루 반죽도 알맞게 부풀어 올라 끓는 물에 넣어질 준비가 끝나게 된다. 비유에 따르면 이 같은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은 현재가 이어지고 이어져서 그 축적된 힘으로 실현되는 미래이다.
예수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시간성을 요약하자면, 그것은 현재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으며 이런 움직임은 성장으로 이어져 더 이상 커나갈 수 있는 여지가 없을 때,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꽉 차는 때에 완성된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당연히 인간의 시간 관념으로 도달할 수 없는 시간대, 즉 역사의 끝에 다다르게 된다. 다만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과 관련해 한 가지 명심해 둘 점은, 현재 일어나는 시대의 징표를 보아 스스로 그 때를 짐작할 일이지(마르 13, 28-29)특정 시간이 미리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미래성은 현재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통치 개념으로서의 하느님 나라 : 그렇다면 시간성이라는 하느님 나라의 속성을 넘어서면 무엇이 있을까? 현재 부지런히 성장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완성을 가져올 하느님의 나라란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 이는 '하느님의 나라' 로 번역된 그리스어 '바실레이아 토우 테우'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에서 밝혀진다. 여기서 '바실레이아' (βασιλεία)라는 단어는, 동사 다스리다' (βασιλεύω)와 명사 '왕'(βασιλεύς) 등과 연결되는 개념으로 '나라' 보다는 '왕국' 혹은 '왕권' 이 정확한 번역이다. 즉 왕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공간적으로 보아 왕이 다스리는 땅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통치 개념으로 보아 왕의 다스림을 뜻하는지를 가려내야 한다. 그런데 후자에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로 첫째, '바실레이아 토우 테오우' 는 구약성서 및 유대교 전통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이 흔히 '왕' 으로 묘사되고, 신학적으로 볼 때 그 다스림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그래서 하느님은 옥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며, 그는 언제나 강한 통치권을 휘두르는 분으로 묘사된다(시편 29장). 특히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통치의 중심지로 알려졌는데, 바로 이곳에 계약의 궤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물론 이스라엘의 왕권이 하느님의 통치를 대변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숨어 있다. 즉 현실 정치라는 맥락에서 이스라엘 왕조는 '하느님의 나라'를 집권 이데올로기화하여 통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둘째, 예수가 제시한 하느님의 나라는 대단히 융통성을 가진 개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기도 하지만 겨자나무처럼 무척 크기도 하다. 또한 오거나 가는 것이며(주님의 기도문 중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공간적인 개념으로 보아 '여기 있다' , '저기 있다' 라고 가리킬 수 없는 것이다(루가 17, 20-21). 셋째, 하느님의 나라는 시간성을 보아 완성을 지향하는 개념이지 영토를 넓혀간다는 식의 정복을 지향하는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바실레이아 토우 테우' 는 '하느님의 다스림' 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시간성이라는 속성으로 보자면 하느님의 다스림은 현재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때가 바로 미래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면 곧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되며, 매 순간의 결단들이 이어지고 이어져 결국 하느님의 다스림을 온전히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겠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적인 결단이 미래의 운명까지 결정짓는다.
분리가 아닌 통합 :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분리가 아니라 통합을 지향하는 개념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 15). 하느님의 나라는 이처럼 회개와 믿음을 절대적인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회개만 하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이런 식의 사고는 유대인 사회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예수 당시의 기층 종교 세력은 하느님의 나라를 계층적, 민족적으로 해석하여, 하느님의 나라는 율법 규정들의 한 점 한 획까지 철저히 지키는 의인들의 몫이지 죄인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어 생각하던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우월감에 비추어 보면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주어질 리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 즉 회개할 수 있는 자격에 구분을 두지 않아 세리, 창녀, 어부, 병자 등의 죄인은 물론 이방인에게도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이는 하느님 나라의 기준이, 사람들이 제멋대로 정한 율법 지상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에게 있음을 가리키는 대목으로, 하느님 통치의 보편성을 보여 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이해와 구약성서-유대교적인 해석의 차이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절대로 이스라엘만 위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인 하느님의 완전함(마태 5, 45-48)에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결국 기존의 제도권 유대교 회당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예수는 광야로 내몰려 재야의 신세가 되었고(마태 13, 54-58 ; 마르 6, 1-6 ; 루가 4, 16-24)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공생활이 마감되었다.
종말-묵시적인 관점 :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에는 종말-묵시적인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종말의 심판과 연계해 회개를 강조하였다.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참석하겠지만, 이를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신랑으로부터 "나는 그대들을 모른다" 라는 냉정한 말로 외면당해 혼인 잔치에 참가하지 못하고 차갑게 닫쳐진 문을 뒤로 한 채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할 것이며(마태 25, 1-13), 달란트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종은 있는 것마저 빼앗기고 어두운 곳으로 내쫓겨 가슴을 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마태 25, 14-30). 악을 일삼는 자들 역시 하느님의 나라 밖으로 쫓겨나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루가 13, 27-28). 이처럼 종말의 날이 닥치면 심판이 이루어지고 악한 자들은 회개를 한 이와 구분되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그날에는 천지개벽을 하며 하느님의 나라가 세상에 들어와 기존의 질서를 뒤엎고, 세상은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부여받게 된다(마르 13, 24-27). 비록 지금은 하느님의 나라가 겨자씨 한 알처럼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나 그 안에는 엄청난 가능성이 숨어 있어 거대한 나무로 자라게 되니, 곧 궁극적인 하느님의 통치가 반드시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로부터 장차 '그날' 이 다가오면 하느님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잔치를 벌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를 "하늘나라가 완성되는 날" , "메시아 잔치가 벌어지는 날" 등으로 개념화시켰다(이사 25, 6 ; 63, 13 ; 1QSa 2, 11-12 ; 에티.에녹 62, 14). 또한 '메시아 잔치' 란 신약성서에서도 낯설지 않은 표현이다(마태 8, 11 ; 22, 1 이하 ; 루가 14, 16 이하 ; 사도 19, 9 이하 ; 참조 : 마르 11, 25).
그리스도 중심 : 복음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나라에는 한결같이 그 중심에 그리스도론이 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의 입을 통해 선포되었기에, 하느님나라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은 바로 예수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예수의 언행을 통해서 이 세상을 힘차게 가르며 들어왔기에 궁극적인 하느님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올 분도 바로 예수라는 뜻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묵시 문학적으로 이해하여 종말의 날에 천군 천마를 이끌고 나타나 하느님의 심판을 대신할 분인 사람의 아들[人子]이 오리라는 기대를 가졌으며, 부활하여 하느님에게 올라갔던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 되어 재림할 것으로 간주하였다.
복음서가 가지는 하느님 나라의 그리스도론적인 측면은 구약성서의 하느님 나라의 이해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사실 구약성서에서는 철저히 하느님이 전면에 나서서 통치권을 휘두르지만, 신약성서에서는 예수가 중심이 되어 하느님이 뒤로 밀려났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결국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모든 이의 구원과 비구원이 결정되고, 예수는 궁극적인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종말 심판관 역할까지 도말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완벽한 해석자이며 구현자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신중심적인(Theozentrisch) 개념이었던 하느님의 나라가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zentrisch)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복음서의 하느님 나라는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 (마르 1, 27)이라 하겠다.
〔교회의 가르침〕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하느님의 나라가 "진리와 생명의 나라요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이다. 그 나라에서는 피조물이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교회 36항)라고 하였다.
이러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상에서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현존 안에서 사람들에게 빛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창립자의 은혜를 받아 사랑과 겸손과 극기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를 선포하고 모든 민족 가운데에 이 나라를 세울 사명을 받았으며 또 지상에서 이 나라의 싹과 시작이 된 것 이다" (교회 5항). 결국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마태 18, 3-4). 즉 자신을 낮추어야 하고(마태 23, 12 참조) 작은 이가 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하느님에게서 나고(요한 1, 13), 새로 나야(요한 3, 7) 한다. 이를 위해 예수그리스도가 마련한 것이 세례성사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15항). 결국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하고 미소한 자들, 곧 겸손한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다(544항). 죄인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마르 2, 17). 하지만 예수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회개를 우선적으로 호소하였다. 대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1고린 5, 11 : 갈라 5, 19-21 ; 묵시 22, 15).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 번 죄를 열거하면서, 육정으로 인한 행동을 한다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것입니다"(갈라 5, 21)라고 하였다(로마 1, 28-32 ; 1고린 6, 9-10 ; 에페 5, 3-5 ; 골로 3, 5-9 : 1디모 1, 9-10 ; 2디모 3, 2-5). 그런 이유에서 교회는 대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추방되고 지옥의 영원한 죽음을 당한다" 라고 가르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861항).
하느님 나라는 종말에 완성될 것이다. "이 나라는 상승적인 발전에 따른 교회의 역사적 승리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신부를 하늘에서 내려보내실(묵시 21, 2-4) 하느님께서 악의 마지막 발악에 대해 승리하심으로써 완성될 것이다(묵시 20, 7-10)"(《가톨릭 교회 교리서》 677항).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기를 재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재물에 대해서 초연하라는 계명(마르 10, 21 ; 루가 14, 33 : 21, 4)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말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마태 7, 21). 그렇다고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046항).
전례적으로 보면, 하느님 나라는 세례자 요한이 선포하였고(가해 대림 제2 주일 복음), 예수도 이를 선포하였으며(사순 제2 주간 수요일 복음)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연중제14 주간 수요일 복음, 가해 연중 제21 주일 복음) 재림 때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다해 대림 제1 주일 복음).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명백히 언급된다. 이 날의 감사송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영원하고 보편된 나라" 이며 "진리와 생명의 나라이고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이며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 라고 하였다.
〔현대적 이해〕 '천당' 이 역사의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 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하느님의 나라' 가 마태오 복음에서는 모두 '하늘나라'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총 32회 나옴)로 바뀌어 있는데, 거룩한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없기에 우회적인 표현을 즐겨 쓴 유대인의 언어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마태 5, 34-36 참조). '하늘나라' 를 한자로 옮기면 천국(天國)이 되고, 당(堂) 자를 쓰면 천당이 된다. 그렇다면 천당이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너무나 쉽게 천당에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고, 세상에서 맛도 볼 수 없던 과일들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으며, 파란 잔디밭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거닐고, 늘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인간이 상상해 낼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곳이 바로 천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이미 우주라는 무한 공간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다분히 거북한 설명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시대를 초월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가늠하는 잣대 역할을 해 왔다. 예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나라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구약성서에는 정확히 '하느님의 나라' 라고 번역할 수 있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으며, 하느님이 왕정을 펴고 있다는 사상이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 라는 개념에 해당한다. 그래서 독일어권의 대표적인 신학 백과사전에서는 구약성서의 '바실레이아 토우 테우' 를 '하느님의 다스림' 으로 번역하였다(《TRE) 15, pp. 176~189).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 란 곧 하느님의 다스림이며, 나아가 임금님으로서 환히, 그리고 힘차게 선정을 베푸는 하느님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하느님이 다가왔다는 것이며 하느님의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께로 간다는 뜻이다. (⇦ 천국 ; 천당 ; ↔ 지옥 ; ← 영복 ; → 비유 ; 예수 그리스도)
※ 참고문헌 정양모 역주, 《마르코 복음서》, 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분도출판사 1981/ G.E. 래드, 신성종 역, 《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 들》, 성광문화사, 1982/ 주교 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역,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 의회, 2003/ 정태현 편역, 《성서 비평 사전》, 성서와 함께, 1993/ ⸺, 《놀라운 발견— 하느님 나라의 비유》, 바오로딸, 1996/ H. 큉 · D. 트라시, 박재순 역, 《현대 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국신학연구소, 1989/R.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AncB 29-29a, London 1970/ J. Gnilka, Das Evangelium nach Markus 1.2, EKK 2-2, Neukirchen 1979/ U. Luz, Das Evangelium nach Matthius 1.2, EKK I.1-2, Neukirchen 1985 . 1990/ A. Lindemann · L. Jacobs . L.E.Zenger, Herrschaft Gotttes/ Reich Gottes, 《TRE》15, pp. 172~244/ N.Perrin, Jesus and the Language of the Kingdom, London, 1976/ G.Strecker,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Berlin · N.Y., 1996/ M.Wolter, Was heisset nu Gottes reich?, 《ZNW》 86 Beiheft 1-2, pp. 5~19, 1995. 〔朴泰植〕
하느님의 나라
〔그〕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 〔라〕Regnum Dei(Coelorum) · 〔영〕Kingdom of God(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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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