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는" (1디모 2, 3-4) 것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요한 13, 34 ; 1요한 3 ; 4 ; 루가 10, 25-37).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 은 불투명하게 계시되어 충분히 알아듣기 어렵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뜻을 여러 측면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명히 계시하였다. 실로 예수는 온 생애 동안 아버지의 뜻을 찾으며 실천하였고 여러 방법으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 6, 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쳤다.
I. 구약성서에서의 의미
〔첫 인간 아담과 하느님의 뜻〕 태초에 창조주 하느님의 뜻은 당신의 모상대로 만든 첫 인간 아담에게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그분 뜻의 한 측면은, 그를 온갖 동물들의 영장이 되게 하고 그에게 이상적 동반자를 주는 자비로우신 축복이다. 다른 한 측면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며 그에 수반되는 책임을 지고 본분을 수행하기를 요구하는 정의이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창세 2, 17).
아담은 자만하여 하느님의 절대권에 대해 질투하고 불순종하며 과일을 먹었고(창세 3, 5-6), 뱀의 유혹을 받은 여인 하와는 하느님이 금한 과일을 따먹고 남편 아담에게 주어 먹게 하였다. 그들은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불순종하며 도전한 것이다. 하느님이 책임을 추궁하자 아담은 그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하고 하와는 뱀에게 그 탓을 돌렸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불순종은 책임 전가와 분열을 낳았고 인류에게 원죄와 함께 많은 불행이 닥치게 하였다. 하느님은 뱀에게는 저주를, 아담과 이브에게는 벌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구세주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창세 3, 14-19). 이것은 인류 구원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구약성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는 첫 배경이다.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뜻]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신앙의 선조가 되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명은 인류에게 불행을 초래하였으나 신앙에 의한 아브라함의 순명은 축복을 가져왔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장차 큰 민족을 이루어 주고 복을 내려 주고 이름을 떨치도록 해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고향을 떠나라고 하였을 때, 아브라함은 즉시 순명하였다(창세 12, 1-4). 사도 바오로는 안정된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의 순명을 극찬하였다. "그는 희망할 수 없는데도 희망하면서 '네 후손이 저만큼 되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마 4, 18). 그는 인간적으로는 희망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으나 하느님의 섭리만을 믿고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였을 때에도 그는 믿음으로 순종하였다(창세 22, 1-18). 그런데 늙은 나이에 하느님에게서 큰 축복의선물로 받은 외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기는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야훼 하느님이 모든 것을 알고 배려해 준다는 완전한 신뢰의 마음이었다. 또한 아브라함의 신앙은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즉시 그분의 뜻을 따라 실천에 옮기는 응답이었다.
[모세와 하느님의 뜻] 아브라함이 온갖 시련 중에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어 신념을 갖고 충실했던 데 비해 모세는 의심과 거부와 반항 후에 하느님의 뜻을 따랐다. 아브라함의 사명이 혼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모세의 사명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었기에 대화, 갈등, 저항, 대립 등이 유발될 수 있었다. 또한 많은 곤경과 위험이 동반되었다. 결국 모세에게 내려진 명령의 실행 여부는 모세의 신앙만이 아니라 백성의 신앙에도 함께 달려 있는 것이었다.
모세가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이끌고 광야를 지나 호렙 산에 갔을 때 하느님이 불붙은 떨기에서 그를 부르셨다. 하느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출애 3, 10). 모세는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접을 먹고 자신에게 주어질 사명을 피할 궁리를 찾는다(출애 3, 11 ; 4, 1. 10).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사명을 수행하는 도구라기보다, 자기 능력에 의해 결과가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약했던 것이다. 하느님이 그를 돕겠다고 말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며, 순명해야 할 사명에서 도망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기 방어 수단을 사용하였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주님께서 보내실 만한 이를 보내십시오"(출 4, 13).
결국 모세가 형 아론과 함께 파라오에게 가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자 파라오는 화를 내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더욱 힘든 노동을 부과하여 괴롭혔다. 이 상황을 듣고 다시 겁먹은 모세는 하느님께 돌아와 호소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이 백성을 더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보내셨습니까? 제가 파라오에게 가서 당신 이름으로 말한 뒤로, 그가 이 백성을 괴롭혀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께서는 당신 백성을 도무지 구해 주시지 않습니다"(출애 5, 22-23). 모세가 두려움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대목이 있다. "이 백성에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저에게 돌을 던질 것 같습니다"(출애 17, 4). 그러나 마침내 모세는 온갖 곤경을 체험하고 자신의 약함을 깨달으면서 차차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존하게 되었다. 많은 충격을 받으면서 그는 버터 냈고 극복하였다. 그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그분이 도와 주셨던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과 하느님의 뜻〕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뜻 :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그들의 역사에 개입하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며, 특히 선물로 준 법을 통하여 뜻을 전달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 안에서 그분의 자비롭고 자애로운 뜻을 인식해 나간다. 야훼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로 결정하고(출애 3, 8) 그들을 그곳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다(출애 9, 4).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1사무 12, 22). 또한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유배의 시련을 겪고 돌아온 후에 이교도 왕을 통하여 예루살렘을 복구하고 성전을 재건축하기를 원하였다(이사 44, 28).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죽음을 원하지 않고 구원을 원하며(에제 18, 32) 역경이 아니고 평화를 원한다는 것(예레 29, 11)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표현된 하느님의 뜻은 사랑의 표지였다. 법을 주신 것 또한 사랑의 표지였다. 법은 하느님 뜻의 표현인 말씀이 언제나 그들의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어 언제든지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신명 30, 14). 시편 저자들은 비할 수 없는 기쁨의 원천인 하느님의 뜻과의 만남을 노래하였다(시편 1, 2 등). 그들의 기도는 열렬하였다. "당신께서는 저의 하느님, 당신의 뜻 따르도록 저를 가르치소서"(시편 143, 10).
하느님의 뜻이 지닌 속성 : 예언자들, 현인들 그리고 시편에서는 하느님의 본래의 뜻을 더욱 잘 알고 흠숭하도록 하느님의 뜻이 지닌 속성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며 강조하였다,
① 지고의 독립성 : “그분(하느님)께서는 유일자, 누가 그분을 만류할 수 있으리요? 그분께서 원하신다면 해내고야 마시거늘" (욥기 23, 13). 하느님이 세상에 보내신 말씀은 그 받은 사명을 이루고 하느님의 뜻을 반드시 성취한다(이사 54, 11). 하느님은 인간의 조언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하신다(이사 40, 13). 성서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이런 강조는 하느님의 전능함과 그분의 완전한 독립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창조주로서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며, 어디서나 무엇이든 자신의 뜻대로 이룬다(시편 135, 6). 그분은 이루신 업적의 주인으로서 인간 마음의 움직임을 이끌며(잠언 21, 1), 자신이 원하는 이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다니 4, 14), 자신의 뜻대로 사람들을 높이거나 낮춘다(토비 4, 19). 성서는 흙으로 자유롭게 그릇을 만드는 옹기장이를 예로 들면서 피조물에 대한 하느님의 근본적 독립성을 상기시키곤 한다(로마 9, 19-20 ; 예레 18, 1-6 ; 이사 29, 16 등).
② 지혜로움 :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흠승은 하느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깊은 믿음에 기초한다. 그분의 뜻을 추구하도록 이끄는 조언, 계획 그리고 지혜를 인식하는 것에 기초를 두는 것이다. 어떠한 인간적 지능도 그분의 뜻을 알아들을 수 없으나(지혜 9, 13) 인간이 청할 때 하느님이 주는 지혜는 그것을 알아듣게 해 준다(지혜 9, 17).
③ 자비로움 : 이 속성은 '자비, 친절, 은혜로운 호의' 등의 용어로 표현된다. 히브리어로 '그를 원한다' 는 말로 '그를 사랑한다' 는 뜻을 지닌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은 자신의 종(이사 42, 1), 자신의 백성(시편 44, 4),의인들(시편 22, 9)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선택된 백성에게 자비, 용서, 선의를 베풀기를 원하며, 그들을 사랑한다(호세 6, 6 ; 예레 9, 23 등).
〔인간의 거부 앞에서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의 의지는 이기적이며 죄를 고집하는 인간의 의지와 충돌한다. 아담의 역사는 언제나 현실적인 것이다. 예를 들면, 아모스 예언자는 불충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자비의 뜻은 징벌의 뜻으로 변한다고 선언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다마스쿠스의 세 가지 죄 때문에, 네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 ··가의 세가지 죄 때문에, 네 가지 죄 때문에 나는 철회하지 않으리라"(아모 1, 3. 6). 이스라엘이 여전히 자신의 주님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스스로 결정적인 징벌을 준비하는 것이다(아모 4, 6-12).
한편 하느님은 벌하고자 하는 뜻을 고집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결정을 바꾸고 뜻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예레 18, 1-8 ; 에제 18장). 그분은 죄인이 못된 행실을 버림으로써 살게 되는 것을 참으로 기뻐하기 때문이다(에제 18, 23). 하느님은 불충한 신부인 이스라엘이 마음을 바꾸어 돌아오기를 촉구하며 그에게 "새 마음"을 넣어 주어(에제 36, 26) 그가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그에게 자신의 뜻에 복종할 수 있게 귀를 열도록 고무하신다(이사 50, 5 ; 시편 40, 8).
Ⅱ. 신약성서에서의 의미
예수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실현된 후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기도 를 통해 다음과 같이 청하는 것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 10).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원의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깨달음에 도달하는"(1디모 2, 4)것이라고 가르쳤다. 사도 베드로 또한 하느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 (2 베드 3, 9)에 참을성을 갖고 대한다고 가르치면서 모든이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강조하였다.
〔마리아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은 천사 가브리엘을 나자렛 마을의 마리아에게 보내어 예수의 잉태를 예고하도록 하였다(루가 1, 26-33).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을 때 은총으로 충만한 마리아는 겸손한 자세로 응답하였다. "저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가 1, 38). 마리아에게 예수 잉태의 신비는 인간의 상식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이해할 수 없고 한없이 두려운 것이었지만,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그분의 뜻을 수락함으로써, 인류를 위한 구세주가 태어나도록 협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뜻〕 예수는 자신의 말과 활동으로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 보이고 수행하였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보다도 당신의 나라와 그 정의를 세우는 데 있다. 그러나 안다는 자들과 똑똑하다는 자들은 하느님 나라와 그 정의가 예수를 통해 현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예수의 말과 활동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래서 아버지께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를 찬양하나이다"(마태 11, 25).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선물이 철부지 같은 사람들에게 허락되어 있음을 알려 주었다. "작은 양 떼여. 사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나라를 여러분에게 주시기로 기꺼이 작정하셨습니다" (루가 12, 32)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른다고 모두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마태 7, 21). 왜냐하면 그래야만 그분의 가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그런 사람은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마태 12, 50).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 보임 : 예수는 일명 '탕자의 비유 라고 불리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루가 15, 11-32)에서 자비로운 하느님상을 제시하였다. 이 비유에서 집을 떠나 방황하던 방탕한 작은 아들을 애절하게 기다리다가 그 아들이 돌아오자 기뻐하며 잔치를 벌인 아버지는, 죄인의 회심을 기다리고 회개하였을 때 기뻐하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가져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루가 15, 22-24).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엄격한 하느님상에서 벗어나 자비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 이해하도록 의식 전환을 요구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를 본받아 잘 못사는 형제들을 자비롭게 용서하기를 바란다. 실로 구약성서의 하느님상은 흔히 정의를 먼저 찾는 엄격한 심판자, 접근하기 어렵고 두려운 분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예수가 알려 주는 하느님은 대자대비한 아버지이다.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이렇게 표현하였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두고 하느님의 천사들도 기뻐합니다"(루가 15, 10).
'바리사이와 세리의 예화' (루가 18, 9-14)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지녀야 하는 자세, 기도의 자세에 관해 가르친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갔는데 바리사이파 사람의 기도는 오만불손하다. "하느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나는 강탈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따위의 다른 인간들과는 같지 않을 뿐더러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루가 18, 11). 그는 다른 사람을 고발하면서 감히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이어 자기 자랑을 한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루가 18, 12). 한편 세리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 13). 세리에게 있어서 구원의 주도자는 하느님이고 바리사이파 사람의 경우에는 인간인 자기 자신이다. 예수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저 사람(바리사이파 사람)과는 달리 이 사람(세리)은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습니다"(루가 18, 14). 실로 세리의 기도는 짧고 내세울 것도 없이 초라한 것이었지만, 하느님의 인정과 자비를 받을 만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실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듯이, 그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달란트의 비유' (마태 25, 14-30)를 통해 인간 각 개인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능력에 따라 성실히 살아야 하며 종말에는 하느님 앞에서 셈을 바쳐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또한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마태 20, 1-16)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나라에 부름받았으며,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깨우쳐 준다. 예수는 하느님의 마음을 편협하게 이해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의 절대적 자유를 선언하였다. "나는 이 맨 나중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주고 싶습니다. 내 것을 갖고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혹은 내가 선하다고 해서 당신의 눈길이 사나워집니까?" (마태 20, 14-15).
예수는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 (루가 16, 19-31)에서 때가 늦기 전 적절한 시기에 회개하기를 원하는 하느님의 뜻을 가르쳤다. 호화롭게 인생을 즐기기만 하는 부자는 대문간에서 구걸하는 걸인 라자로에게 자비롭지 못하였으며 인색하였다. 둘 다 죽어서 부자는 죽음의 세계로, 라자로는 아브라함이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 갔다. 고통 중에 시달리던 그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통해 자비를 베풀어 주기를 요청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는 답변을 듣는다. 이 예화는 라자로가 가난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부유해서 어두움의 세계에 갔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이 예화를 통해 때가 늦기 전에 회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 부자와 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사귀어, 그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여러분을 영원한 초막에 맞아들이도록 하시오"(루가 16, 9)라는 예수의 말은 이웃과 나눔, 사랑의 실천을 원하는 하느님의 뜻을 알려 주는 것이다.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루가 13, 6-9)를 통해 예수는, 하느님은 인간이 뉘우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만 유예 기간이 끝나면 심판을 내린다는 것을 가르쳤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여러해 동안 결실을 기대하였지만 허사여서, 포도원지기에게 베어 버리도록 명하였다. 그 포도원지기는 한 해만 더 기다리기를 요청하였고, 주인은 그것을 수락하였다. 주인으로부터 한 해의 유예 기간을 얻은 무화과나무는 하느님에게서 유예 기간을 얻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뜻한다(호세 9, 10).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유대인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며 늦기 전에 회심의 열매를 맺을 것을 요구하는것이다. 이처럼 유예 기간 동안 회심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기다림의 자비는 인간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인내의 표현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저버릴 때, 그분의 기다림의 인내는 곧 심판의 표지가 될 것이다.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 (루가 12, 16-21)는 현세 생명에 집착하면서 생명의 주인인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사는이에 대한 경고이다. 부자는 농사를 지어 많은 소득을 얻은 후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영혼아, 너는 여러 해 동안 (사용할) 많은 재물을 쌓아 두었으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루가 12, 19). 그러나 하느님은 "어리석은 자야, 이 밤에 너에게서 네 영혼을 되찾아 가리라"(루가 12, 20).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과 이웃 사랑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재화만이 유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여기며 자기 안일만 생각하는 부자의 이기심은 결국 산산조각이 난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결국 "하느님 앞에 재물을 모으지 않는 사람"(루가 12, 21)이 되었다.
'혼인 잔치의 비유' (마태 22, 1-14)에서 결혼 잔치에 초청된 이들은 여러 이유를 들며 참여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들은 심부름 갔던 종들을 박대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성서에서 '잔치' 는 하느님의 나라 또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예수는 이 비유로 하느님 나라의 초대를 경시하지 말도록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왕은 종들에게 거리로 나가 만나는 이들을 잔치에 초청하도록 명하였고 혼인 잔칫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다. 잔치가 시작될 무렵 왕이 들어왔을 때 혼인 잔치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한다. 왕은 그를 내쫓도록 하였다. 예복을 갖추지 않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필요한 것을 갖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뜻을 수행함 : 요한 복음에서 예수는 '아버지의 뜻' 이라고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 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요한 복음사가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 안에 '파견' 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입니다"(요한 4, 34). 사실 예수는 아버지의 뜻만을 찾으며(요한 5, 30), 자신을 보낸 분의 뜻에 맞는 것을 모두 행하였다(요한 8, 29). 예수를 보낸 분인 아버지의 뜻은 예수에게 맡긴 사람들을 모두 부활시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요한 6, 39). 아버지의 뜻은 하나의 명령 형태로 표현되기도 하지만(요한 10, 18) 예수는 그것을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는 표지로 보았다(요한 10, 17). 아들인 예수의 순종은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는 것이다(요한 15, 10).
또한 예수가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뇌가 담긴 동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수난 여정에서 잘 나타난다. 게쎄마니에서 예수는 '자신이 원하는 것' 과 '아버지의 뜻' 사이에 나타나는 모순을 감지하였으나(마르 14, 36) 아버지께 기도하는 중에 갈등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맡겼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루가 22, 42) .
Ⅲ. 신학적 고찰
사도 바오로는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시킨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과 대칭시키면서, 새로운 아담으로 소개하였다. 불순종으로 인류에게 죄를 가져온 아담과는 달리 예수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인류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는 것이다(로마 5, 15. 17. 19).
〔아버지의 뜻을 찾은 예수의 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기도는 큰 위치를 차지한다. 복음사가들이 예수의 생애에서 중요하게 간주하는 것 중 하나는 그가 공생활 전체를 통해 수행한 활동, 즉 복음 선포에서 기도를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나눈 대화였기 때문이다.
복음을 보면 중요한 일이 가까이 왔을 때마다 예수는 항상 기도하였고, 또한 더 많은 결실을 얻기 위하여 기도 중에 그 일을 수행하였으며 완성하였다. 루가 복음사가는 특히 예수의 활동 중에 아버지와의 대화인 기도의 중요성을 관찰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의 복음에서는 예수의 기도와 사건 사이에 긴밀한 유대가 있음이 명확히 나타난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다음 기도하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형체를 취하여 비둘기처럼 당신 위에 내려왔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루가 3, 21-22). 많은 병자들을 고쳐 준 다음 날 전도 여행에 앞서 예수가 제일 먼저 어떤 일을 하였는지,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렇게 알려 주고 있다. "새벽 몹시 어두울 때에 그분은 일어나 밖으로 나가, 외딴 곳으로 가셔서 거기서 기도하셨다"마르 1, 35).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가 열두 제자를 뽑기에 앞서 산에 들어가서 온밤을 새워 아버지의 뜻을 찾으며 대화하였음을 전해 준다(루가 6, 12). 또한 베드로에 게 수위권을 주기 전에도 기도하였다고 전해 준다(루가 9, 18-20 ; 마태 16, 13-20). 그리고 중책을 맡은 시몬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였음을 알려 주었다. "시몬, 시몬, 보다시피 사탄은 마치 여러분을 밀알처럼 키로 까부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믿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당신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루가 22, 31-32). 또한 그는 자신 안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던 영광스런 변모 때에도 역시 기도하고 있었다(루가 9, 28-29). 올리브산에서 깊은 고뇌의 순간은 기도의 절정을 이루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루가 22, 42).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분의 마지막 기도는 온전한 자기 위탁이었다. "아버지, 제영을 당신 손에 맡기옵니다"(루가 23, 46). 이처럼 예수는 수행해야 할 모든 사명과 활동에서 기도를 결코 분리시키지 않았다. 즉 모든 일에서 아버지의 뜻을 찾고, 순종하였다.
예수는 기도를 자신이 해야 하는 사명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실천하셨다. 그는 기도를 가르쳤고 자신의 말씀을 효율적으로 증거하면서 몸소 실천하였다. 사실 그가 기도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찾고 그분께 자신을 의탁하면서 사명 수행에 전념하였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과 아버지의 사업을 수행하는 것은 예수에게 있어서 총체적으로 유일한 임무, 즉 역사 안에 신비를 구현하는 임무의 불가분적인 두 측면이었다. 달리 말해서, 기도는 예수 안에 구체적으로 육화한 아버지의 구원 의지에 대한 전적 투신의 표현이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찬양할 때에도 예수의 찬미는 자신의 직무를 통해 자신의 위격 안에서 실행하고 있는 복음적 신비의 특수한 가치들에 집중되어 있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루가 22, 42). "내 음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입니다"(요한 4, 34).
아버지의 구원 의지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렬한 청원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기본적 목표는 요한 복음사가로부터 전해진 다른 기도 안에서 잘 나타난다. "지금 제 마음이 몹시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저를 구원해 주소서' 할까요? 그러나 저는 이 때문에 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요한 12, 27-28). 즉 아버지의 영광은 하느님의 뜻이 예수 안에서 성취될 사업 안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요한 17, 4). 결국 예수의 기도의 결론은 "아버지, 아버지의 사업이 내 안에 이루어지게 하소서!"이다. 그렇기에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 36)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는 위격을 표현하고 사명을 실현하는 기도, 영원하신 성부께 영원하신 성자가 봉헌하는 기도이다. 구세주가 지상에서 하는 기도로서, 예수의 뜻은 성부의 구원 의
지가 은총과 진리의 충만함 속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도록 예수를 이끈 성령〕 복음서들과 사도 행전에서, 성령은 성부와 언제나 일치해 있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계시와 사명 수행의 인도자로 소개된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이 성령을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에 연관시켜 소박하게 언급하는 반면, 루가 복음사가는 요한 복음사가와 함께 성령의 활동을 크게 부각시켰다. 루가는 예수의 탄생 예고를 설명하면서 성령의 특수한 활동과 역할을 강조하였다. 예수의 탄생을 준비하고 그 서막을 여는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에서, 천사는 태어날 사람이 주님 보시기에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알려 준다. 왜냐하면 "제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루가 1, 15)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는 유일하고 예외적인 메시아 품위를 선포하였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예고한다. "성령이 당신에게 내려오실 것이니, 곧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감싸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분은 거룩하다고 불릴 것이니, 곧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루가 1, 35). 이 약속은 성령의 영감 중에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루가 1, 43)로
영접하며 인사한 말씀과 일치한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로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이 인사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아기가 내 태내에서 신명이 나 뛰놀았습니다"(루가 1, 43-44). 또한 성령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며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노인 시메온으로 하여금 성전에서 마리아의 아들이 구세주임을 알아보도록 하였고, 그 아기가 이방 민족들에게 계시되는 "빛"이 되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됨을 찬양하도록 하였다(루가 2, 25-32).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의 메시아적 권위를 계시하고 입증해 주는 표지로 세례의 장면을 묘사하는데, 그 때에 성령이 공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예수 위에 내려왔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루가 3, 22). 예수는 세례 때 자신에게 내려온 성령의 인도로 복음적 사명 수행을 시작하였으며, 초기에 갈릴래아에서 자신을 구약의 예언을 완성하는 자로 소개한다. 즉 성령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파견된 자라고 선언하였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과연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도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들에게는 해방을, 소경들에게는 눈뜰 것을 선포하며 억눌린 이들을 풀어 보내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시려는 것이로다"(루가 4, 18-19 : 이사 61, 1-2). "이 성경 (말씀)은 오늘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루가 4, 21). 예수의 세례 때 성령이 내려온 것을 기름 부음(塗油, unctio]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것은 예언자적 도유, 선포의 사명을 위한 도유, 또한 악과 악마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기쁜 소식의 실현 사명을 위한 도유인 것이다. 예수 안에 성령이 충만함은 그의 전 존재, 온 생활 그리고 모든 사도직 활동을 내포한다. 즉 육화(루가 1, 35 ; 마태 1, 18-20), 세례(요한 1, 33 ; 마태 3, 16 ; 루가 3, 21-22), 광야에서의 생활(마르 1, 12 ; 루가 4, 1-12),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드러낸 설교(루가 4, 14-22), 성령 안에서의 기쁨(루가 10, 21), 성령의 이끄심으로 수행하게 될 사명을 제자들에게 위탁함(요한 20, 21-23) 등이다.
요한 복음은 모든 이에게 생명수, 즉 성령을 보내 줄십자가와 부활의 순간을 향해 나아가는 착한 목자의 형상을 예수에게 부각시켰다. 루가의 관점에 요한의 강조점을 일치시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적 생활은 성령의 이끄심에 따른 단계적인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광야로의 인도,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파견 그리고 부활을 앞당김으로써 성령안에서의 기쁨 등이다.
모든 복음사가들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역동적인 연결성을 강조하였다. 처음부터 약속되었던 것의 성취에 이르는 하느님의 은총의 계획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성은 성령의 표지로서 루가 복음 안에 특히 잘 나타나고 있다. 마리아 안에 예수를 잉태하게 했던 성령은 세상에 교회를 태어나게 하였으며, 세례를 통해 예수를 도유한 후 직무를 이행하게 이끌었던 성령은 예루살렘에서 세상 끝까지 제자들의 사도직을 고무한다. 지상에서 생활하는 동안 예수는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첫 핵심 구성 원인 제자단을 양성하면서 가르치고 지도하였다. 그는 가장 충만하고 구체적 의미에서 그들의 스승이었다. 그가 승천하여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후 사도들의 교회 공동체를 실제로 이끈 분은 성령이다. 성령은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도록 힘차게 이끌어 준 것이다.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높은 데로부터 힘을 얻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도록 명령하였고, 그 힘으로 인하여 곧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게 될 것임을 약속받았다(루가 24, 46-49). 실로 성령이 그리스도 공동체를 활기차고 생동케 하는 영이다. 하느님의 백성을 고무하고 생기를 주며 방향을 이끌어 주는 이러한 활력 없이 부활한 주님을 증거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활 끝무렵에 "며칠 후에"(사도 1, 5), "아버지의 약속을"(사도 1, 4 ; 루가 24, 49) 실현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즉 "오순절이 되어" (사도 2, 1) "진리의 영" (요한 15, 26-27 ; 16, 13-14)을 보내 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때에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약속받은 대로 성부께로부터 성령을 받았고(사도 2, 33) 예루살렘에 머무는 사도들 위에 그 성령을 부어 주었다(사도 2. 4). 성령 강림 사건은 교회 탄생의 날이다. 성령은 사도들 위에 내려왔고, 그들을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였으며 복음을 증거하고 선포하게 하였다(사도 2장).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활동의 통합〕 예수가 공생활 전체를 통해 수행한 모든 사명 및 활동으로부터 아버지의 뜻을 찾는 기도를 분리시키지 않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기도와 활동, 신앙과 생활의 분리를 극복하고 조화와 일치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기도와 활동을 분리하고 신앙과 생활을 분리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갖게되는 문제점이다. 기도와 활동은 단 하나의 실재, 단 하나의 체험이 되면서 두 행위 사이에 균형이 유지되고 조화가 이루어져 그리스도인의 인격 안에 통합되어야 한다. 기도와 활동의 일치는 곧 신앙과 사회 생활의 일치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에 열중하면서 가정이나 사회 활동 및 사도직 봉사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할 수 없다.
다른 한편 기도 없는 활동은 결코 그리스도교적인 것일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 묵상, 생활에 대한 반성의 시간도 가질 수 없을 만큼 여러 업무에, 그것이 때론 사도직 업무일지라도 분주하다면, 이것 역시 잘못된 신앙 생활이다. 이러한 사람은 '활동이 기도의 연장' 이 아니라 '활동이 곧 기도' 라고 정당화하며, 하느님과의 대화와 친교의 관계를 경시하고 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봉사의 이유이며 원동력인 참된 복음 정신이 점차 흐려지고 활동 자체도 변질되어 신자로서의 본분을 소홀히 하고 점점 냉담해져 갈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으며 성령의 이끄심을 따른 예수의 모범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거나 식별하기 어려우며, 성령께 개방하지 않을 때 모든 활동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 기도 ; 성령 ; 예수 그리스도 ; 하느님 ; 하느님의 뜻의 영성)
※ 참고문헌 E. Jacquemin · X. Leon-Dufour, Dizionario di teologia biblica, Casale Monferrato, Casa Editrice Marietti, 1982, pp.1403~1407/ S. Panimolle, Gesu modello e maestro di preghiera nel Vangelo secondo Luca, AA.VV., Lo Spirito del Signore, EDB, Bologna, 1981, pp. 122~186/ R. Fabris, Lo Spirito Santo sul Messia, AA.VV., Lo Spirito del Signore, EDB, Bologna, 1981, p. 991/ 주교 회의 교리교육위원회,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박재만, <사제들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 《가톨릭 신학 사상》 1호(1989. 6),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pp. 71~91. 〔朴載萬〕
하느님의 뜻
〔라〕voluntas Dei · 〔영〕 Will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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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불순종은 책임 전가와 분열을 낳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