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속성

— 屬性

〔라〕Attributa Dei · 〔영〕Attributes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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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에는 하느님의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속성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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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에는 하느님의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속성이 나타나 있다.

하느님의 고유성. 하느님에 대해 진술하기 위해 인간이 철학적 사고 또는 성서적 계시를 토대로 하느님에게 귀속시키는 하느님의 고유한 특성들. 이 신적 특성들 아래 인간은 유비(類比, analogia)의 한계 안에서 하느님의 형언할 수 없는 본질을 표현한다.
〔구약성서에서의 증언〕 구약성서는,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행동이 유일회적인 것이든 진행 중에 있는 것이든 또는 미래에 발생할 것이든 간에(출애 3, 14 ; 15, 21 ; 신명 26, 5-7 ; 시편 136장 ; 예레 16, 14-15 ; 이사 48, 20)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다고 고백한다. 그뿐 아니라 비교할 수 있는 상황들 안에서 비슷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의 본질이나 의지를 표현해 주는 그의 속성들에 대해서도 증언한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신적 속성들을 결코 직선적이거나 풍요롭고 충만하게 진술하지 않았다. 고대 근동에서는 대개 신적 속성들에 관해 명확한 언어 구사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 반해, 구약성서는 예외적으로 유보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였으며 '주님' 이나 '왕' 과 같은 명사적 술어들을 제외하고는 형용사의 형태로 하느님에게 몇몇 속성들을 귀속시켰다. 바빌론 신화에서 티아맛을 쳐이긴 승리자 마르둑(Marduk)을 50개나 되는 그의 이름들로 찬양하지만, 구약성서는 이처럼 수많은 별명들을 통해 신을 찬양하지 않는다. 이러한 고대 근동 종교의 표상들이 이스라엘 종교의 야훼 신앙 안에 통합되면서 야훼 신앙을 특징짓게 되었지만, 동시에 야훼 신앙은 하느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역사 관련성, 특히 미래 관련성과 같은 야훼 신앙의 고유한 차원을 일구어냄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진술에 있어 일의성(一意性, Eindeutigkeit)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 한 예로 즈가리야서 14장 9절은 야훼 신앙의 고유한 미래 관련성의 관점 아래 하느님을 왕이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모든 신들 위에 지극히 높으신(시편 97, 9) '엘리온' (עֶלְיוֹן, '지극히 높으신' 분, '지존하신' 분), 곧 고대 근동의 유산에서 나온 예루살렘 도시 신의 이름 또는 별명(창세 14, 18-20 ; 시편 46, 5 ; 47, 3 ; 48, 2-3)인 '엘리온' 이, "당신 홀로 온 세상에서 지극히 높으신 분이심을"(시편 83, 19)이라는 야훼에 대한 신앙 고백과 함께 하느님에 대한 술어가 되었다.
야훼는 '살아 계신' 분이라고 불린다. 그가 죽고 다시 살아나는 신(神)처럼 죽은 다음에 소생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살아 있는 이로서 입증해 보이고(1사무 17, 26. 36)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수 있기(시편 42, 3. 9 ; 84, 3) 때문이다. 그는 "생명의 원천" (시편 36, 10 ; 예레 2, 13 : 이 구절들을 1데살 1, 9과 비교)이다.
천상 "거룩한 이들의 모임" (시편 89, 6. 8 ; 출애 15, 11)이라는 이미 주어진 고대 근동의 표상으로부터 "야훼처럼 거룩하신 분이 없습니다"라는 진술(1사무 2, 2)이 생겨났다. 하느님 자신이 "거룩하시며"(이사 6, 3 ; 40, 25 ; 호세 11, 9 : 이 구절들을 루가 1, 49 ; 요한 17, 11과 비교), 그 거룩하신 하느님이 인간을 향해 있기에 사람들은 "야훼 우리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시다"(시편 99, 9)라고 진술하였다. "높고 뛰어나신" 그는 아래를 굽어 보고(시편 113, 6-7 ; 이사 57, 15)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며(예레 1, 5), 그들을 격려하면서 그들에게 거룩함을 요구한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레위 19, 2 ; 창세 17, 1 ; 신명 18, 13 : 이 구절들을 1베드 1, 15-16 ; 마태 5, 48과 비교).
질투는 세상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거룩함의 한 표현이다. "질투와 거룩함은 오직 야훼의 한 속성에 대한 다른 음영(陰影)의 표현들일 뿐이다" (G. von Rad). 그의 질투 내지 질투의 거룩함으로, 곧 그의 배타적 의지로써 (출애 20, 5) 야훼는 이방신들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이스라엘에 대해서 마음을 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온통 마음을 쓴다 (즈가 1, 14).
시가(詩歌)적 언어 안에서 첨예하게 표현된 예언자적 통찰, 곧 "숨어 계신 하느님" (Deus absconditus) 또는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에 대한 통찰(이사 8, 17 : 45, 15 ; 참조 : 1, 15 ; 28, 21 ; 29, 14 ; 예레 15, 18 ; 23, 23)은 하나의 중대한 영향사(影響史)를 갖는다.
"영원한 하느님"(창세 21, 23 ; 이사 40, 28 ; 참조 : 예레 10, 10), "시작이고 마지막인" 그분(이사 41, 4 ; 44, 6 ; 48, 12 ; 참조 : 묵시 1, 17-18 ; 21, 6)은 덧없이 사라져가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면서도 또한 변화하는 세대들의 현전(現前)에 있다(시편 90, 2 ; 102, 26-28 : 139장 ; 참조 : 로마 1, 23).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보는 것이 위험스런 일이라고 이야기하며(출애 33, 20 ; 판관 13, 22 ; 이사 6, 5 ; 신명 4, 12-14), 이런 흐름 안에서 신약성서도 하느님이 불가시적이라는 것을 안다(로마 1, 20 ; 골로 1, 15 ; 1디모 1, 17 6, 15-16).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이사 45, 21)라고 제2 이사야 예언자는 말하였다. 사실 그분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진실하신 하느님" (신명 7, 9. 12 ; 9, 4. 9. 18 ; 1열왕 8, 23)이라고 일컬어진다. 구약성서에서 여러 번의 전거를 가지고 있는 한 신앙 고백 정식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 (시편 103, 8 ; 145, 8 ; 출애 34, 6-7 ; 예레 3, 12 ; 15, 15 ; 요나 4, 2). 이 본질적 특징들은 하느님의 구체적인 행동들로서 이해된다. 그리하여 이 본질적 특징들에 대한 묘사는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신다"라는 하나의 인격적 진술(시편 103, 10)로 바뀌어 표현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행동하는 가운데 존재한다(이사 40, 28-30). 개괄적으로 말하면 신앙 고백적 명제들 안에서도 하느님의 본질' 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시는"(1사무 2, 6-7 ; 신명 32, 39 ; 에제 17, 24) 하느님의 행동에 의해서 표현되고 증언되었다.
하느님의 자애(시편 136장)에 대한 통찰은 시편 23편 4절(욥기 10, 21-22 ; 참조 : 이사 50, 10)의 "어둠의 골짜기에서"라는 표현이 시사하는 바대로 갈등을 경험하는 역경의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거슬러 또한 견지된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사랑(호세 11, 1. 4 ; 14, 8 ; 예레 31, 3 ; 신명 7, 8 ; 10, 15)을 증언하며, 이런 흐름 안에서 요한문헌은 "하느님은 사랑”(1요한 4, 8. 16)이라고 증언하였다(2고린 13, 11 참조).
〔신약성서에서의 증언〕 신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존재 · 본질 · 행동 · 속성들에 대한 진술들은 전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그 진술들을 구분하는 언어적 기준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속성들은 부가어들을 통해 진술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소유격(Genitv)과의 결합을 통해, 그리고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을 통해 진술될 수 있다. 하느님 속성에 관한 이 진술들은 하나의 고정된 도식을 향해 방향지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여러 전승 집단 내지 공동체들을 향해 방향지어져 있다.
공관 복음과 사도 행전 : 공관 복음서의 예수 전승에서 하느님은 "지극히 높으신"(마르 5, 7과 병행구) 분이자 "선한" (마르 10, 18과 병행구) 분이라는 부가어로 고백되는 유일무이한 분이다. 그 밖에도 하느님은 "완전하신"(마태 5, 48) 분이자 "살아 계신"(마태 26, 63) 분으로 고백된다. 공관 복음의 예수 전승에는 하느님의 전능(마르 14, 36 ; 10, 27과 그 병행구)과 전지(마르 13, 32와 그 병행구)에 대한 진술이 일부 포함되어 있고, 또한 하느님의 아버지다움(마태 5, 45 ; 6, 9와 그 병행구)에 상응하는 그분의 관용(루가 18, 7) · 자애(루가 6, 35) · 배려(루가 12, 22-31과 그 병행구)에 대한 진술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마음을 아는 하느님의 능력(루가 16, 15)은 사도 행전 15장 8절에서 "마음을 아시는"이란 의미의 그리스어 '카르디오그노스테스' (καρδιογνώστης)라는 하나의 부가어로 압축되어 표현되었다. 그리고 사도 행전 14장 15-17절에서는 하느님이 "살아 계시고, 창조하시며, 관대하시고, 자애로우신" 분으로 정의되었으며, 사도 행전 17장 24-31절에서는 헬레니즘화된 표현에 따라 "부족함이 없으시고, 질서를 정하시며, 가까이 계신" 분으로 정의되었다.
서간들 : 하느님에 관한 진술들은 바오로서간에 집중되어 있다. 로마서를 예로 들면, 로마서 1장 16-23절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의로움(로마 3, 21-22. 26 참조)과 진노(골로 3, 6 참조), 하느님의 진리(1데살 1, 9의 "참되신 하느님" 참조), 능력, 신성, 영광(로마 3, 7 ; 5, 2 참조)에 대해 언급하면서, 하느님을 볼 수는 없지만(골로 1, 15 참조) 인식할 수 있으며 또한 영원하고 불멸한 분이라고 규정하였다. 로마서 2장 4절에서는 자애, 인내, 관용이 더해진다. 하느님에 관한 이 진술들에는 하느님이 "한 분"이라는 사실(로마 3, 30 ; 1고린 8, 6)이 전제되어 있고, 하느님에 관한 다른 진술들 가운데는 계약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성(로마 3, 3 ; 부가어로 나오는 구절로 1 고린 1, 9 ; 2고린 1, 18)과 그의 권능(에페 1, 19)이 언급되어 있다. 계약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성과 그의 권능은, 무엇보다도 죽은 자들을 부활시켜 살게끔 만드는(로마 4, 17) "살아 계신 하느님"(1데살 1, 9 ; 히브 10, 31)인 그의 능력 안에서 수행된다. 또한 그는 사랑(로마 5, 5 ; 8, 39)과 평화의 하느님(로마 15, 33 ; 2고린 13, 11 ; 필립 4, 7)으로 묘사되며, 고린토 후서 1장 3-7절의 찬송(Eulogia)에서는 자비롭고(에페 2, 4 참조) 위로해 주는(2테살 2, 16 참조) 하느님으로 고백된다.
사목 서간은 "소멸할 수 없는, 볼 수 없는, 유일한"(1 디모 1, 17 참조)이라는 부가어에 "복되신"(1디모 1, 11)을 덧붙이며, 헬레니즘화된 말투로 하느님의 "불멸성"(1디모 6, 16)과 "인간애" (디도 3, 4)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런가 하면 히브리서는 하느님을 "다 태워 버리는 불" (12, 29)로 묘사하였다. 그 외 신약성서의 서간들 중에서 하느님에 관해 특기할 만한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을 "유혹당할 수 없는" 분(1, 13)이자 "빛의 아버지"(1, 17)로 묘사하는 야고보서와, 여러 형용어구들로써 하느님을 칭송(1, 25)하는 유다서를 들 수 있다.
요한 문헌 : 요한 복음에는, 죽은 자들을 다시 살게 하고(요한 5, 21) 생명을 자신 안에 지닌(요한 5, 26) 하느님의 종말 때 선물인 '생명' 에 관한 주제가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 그러면서 요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개 역할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예수가 하느님을 "홀로 참 하느님"(요한 17, 3)이자 "거룩한 아버지"(요한 17, 11)로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요한 복음은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경계들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오직 요한 문헌만이 "하느님은 영이시다" (요한 4, 24), "하느님은 빛이다"(1요한 1, 5), "하느님은 사랑이다"(1요한 4, 8. 16)와 같은 정의적(定義的) 성질을 지닌 명제들을 정형화하였다. 그 명제들은 하느님의 실재를 남김없이 포착하지는 못하지만,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하나의 본질적 진술로서 기능하며 궁극적으로는 구원론적으로 방향지어져 있다.
그리고 요한 묵시록(21, 11. 23 ; 22, 5)은 "하느님께서 비추어 주시는 빛의 힘"을 알고 있다. 그 밖에도 요한 묵시록은 그분의 영광과 권능을 노래하고(7, 12 ; 12, 10), 그분의 분노와 진노에 대해 언급하며(14, 10 ; 19, 15), 하느님을 전능하신 분(παντοκράτωρ, 전능자)으로 규정한 채(1, 8 ; 19, 15 ; 21, 22) 과거 · 현재 · 미래의 시간 정형을 그에게 적용한다(1, 4. 8).
〔전통 교리와 전통 신학의 이해〕 스콜라학의 전통 교리에 따르면, 모든 신적 완전성들은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서로 동일하지만, 인간의 한계성 때문에 하느님의 완전성들을 서로 구별지어 이해할 뿐이다. 스콜라 신학은 하느님의 완전성들을 신적 속성들의 개념 아래 이해한 채, 그 전체를 하느님의 물리적 본질이라고 불렀다. 이신적 완전성들은 신적 존재의 궁극적 근거인 하느님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신적 속성들은, 논리적으로 앞서는 신적 존재의 궁극적 근거로부터 필연적으로 연역될 수 있다. 물론 하느님의 절대적 단순성 때문에 하느님에게 있어서는 본질과 속성이 전적으로 서로 동일하므로, 각 속성들 간의 구별은 피조물들의 다양한 완전성들에 따른 인간의 개념적 구별일 뿐이다(토마스 아퀴나스, 《명제집 주해》 I, d. 2, q. 1 a3 : 《신학 대전》 I, q.13 a. 4 참조).
하느님이 궁극적으로 절대적 신비이기 때문에, 유비 내지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에 의해 그의 속성들에 대해 작성할 수 있는 모든 진술들은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simuitido)보다 양자 간의 비유사성(dissimilitudo)을 더욱 많이 드러낸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 따르면, 하느님의 이 (incomprehensibilitas)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속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하느님의 속성들에 대해 이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오직 하나이고 참되고 영원하고 무량하고 불변하고 파악할 수 없고 전능하고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고히 믿고 진심으로 고백한다" (DS 800). 이 진술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 의해, 더욱 확장된 정형 안에서 반복되었다. "참되고 살아계신 한 분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자 주님,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무량하고 파악할 수 없으며 지성과 의지와 모든 완전함에서 무한하신 그런 분이 계신다. 그 분은 하나이고 단일하고 전적으로 단순하고 불변하고 영적인 실체이므로 우리는, 그분이 세계로부터 참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구별된다고 선포해야 하고 또 그분이 그 자신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전적으로 복되다고 선포해야 하며 그분이 모든 것 위에 곧 그분 자신과는 다르게 존재하거나 다르다고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 위에 형언할 수 없게 탁월하시다고 선포해야 한다" (DS 3001). 일반적으로, 전통 신학은 이 신적 속성들을 긍정적 속성들과 부정적 속성들, 통교될 수 없는 속성들과 통교될 수 있는 속성들, 절대적 속성들과 상대적 속성들, 정적 속성들과 역동적 속성들로 배열하였다. 단일성(unitas)과 단순성(simplicitas)을 속성으로 하고 있는 '더욱 높은' 존재의 전체성을 하나의 현실 안에 적절하게 포괄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는 인간 사고의 구조 때문에 신적 속성들은 이런 방식으로 진술될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전통 신학은 하느님의 속성들에 대해 신학적으로 진술할 때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인간적 표현의 부적절함과 한계들에 주의를 기울였다.
〔현대 신학의 이해〕 오늘날 신학은 성서가 보여 주고있는 하느님 상에 토대를 두고 하느님의 속성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전통 신학의 하느님 속성 이해와 현대 신학의 하느님 속성 이해는 구별된다. 물론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스콜라학의 가르침이 부분적으로는 성서적 증언의 기초 위에 있었다는 점에서 지지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가르침은 성서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스콜라 철학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가르침 안에 제시된 성서적 증언의 범위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성서의 사상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지 않는다. 사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하나의 원리(ἀρχή), 하나의 형상(ἰδέα), 하나의 궁극적 최고 일자(-者, ἕν)에 대한 물음을 알지 못하며 또 이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본질과 속성들에 대한 물음도 제기하지 않았다. 성서는 "하느님이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숙고하지 않은 채 하느님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 하였다. 다시 말해 성서의 사상에 따르면, 하느님은 당신 행동의 충실성 안에서 당신 백성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성서는 "하느님이 누구인 지"를 묻지 않고, "하느님이 인간을 향한 그분의 행동 안에서 어떻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시는지"를 묻는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는 구세사 안에서 활동하는 하느님의 행동에 대해서 일차적으로 이야기하였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은 다만 인간에 대한 그분의 행동으로부터 하느님의 본질 또는 속성들에 대한 어떤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은 계약의 체결과 약속 안에서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점진적으로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이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승고한 계시와 이에 의한 인간의 신(神) 인식은 일차적으로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 계시에 의해 현실 안에서 경이로움이 발생하고 발전이 이루어지며 새 지평이 열리게 된다. 물론 이런 일이 발생하는 현실은 미래에 대한 희망 안에서 미래를 향해 자신을 열어 놓는 사람들에 의해 기대된 현실이며, 여기서 미래란 하느님의 미래이자 동시에 인간의 미래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일은 하느님의 종으로써 말씀과 행동으로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그 나라를 위해 헌신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하였다. 계시의 역사를 결정하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그의 아들인 예수 안에서 절정에 이르기 때문에 예수는 하느님의 결정적 자기 계시이다. 예수는 순종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름으로써, 사랑의 힘없음 안에서 당신의 전능을 드러내는 하느님 아버지를 인식할 수 있게 해 주는 길이 되었다.
하느님이 자신의 얼굴을 구체적인 역사적 행동 안에서 서서히 드러내 보였기 때문에 성서의 하느님 상은 역동적이다. 물론 그 행동 방식에 대한 성서의 여러 진술들은 하느님의 속성에 관한 간접적인 진술들로 간주될 수 있으며, 성서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속성들은 신적 자유의 인격적이고 능동적인 계시로 이해된다. 성서에 따르면, 신적 자유의 인격적 · 능동적 계시는 세계와 그 세계의 구조들에 기초한 '자연적' 길들 위에서도, 제한된 방식으로나마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하느님의 영원성(로마 16, 26), 불사불멸성(에페 6, 24 ; 2디모 1, 10), 불가시성(로마 1, 20)과 같은 진술들은 인간에 대한 신적 구원 행위의 빛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영원성 · 불사불멸성 · 불가시성(不可視性) 등은 여기서 추상성을 상실하고 구체적 관계성 안에서 경험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얼굴에" (2고린 4, 6) 빛나는 하느님 영광의 인식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 주는 성령 안에서, 지금 여기서 우리 인간에게 계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ἀόρατος) , '불사불멸한 (ἄθέατος) '복된' (μακάριος) 등의 표현법이 형이상학적 신학의 진술들 내지 자연 신학적 진술들과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언어적 표현들은 궁극적으로는 오직 신앙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언어적 표현들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 '불사불멸한' : '복된' 등의 표현법이 형이상학적 신학의 진술들 내지 자연 신학적 진술들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로마 1, 20 ; 골로 1, 15 ; 1디모 1, 17), "불사불멸한" (로마 1, 23 ; 1디모 1, 17), "복된"(1디모 1, 11), "하느님은 빛이시다"(1요한 1, 5)와 같은 묘사보다는, "신실하신 하느님"(1고린 1, 9 ; 2데살 3, 3), "평화의 하느님"(로마 15, 33 ; 필립 4, 9), "인내의 하느님"(로마 15, 5), "희망의 하느님”(로마 15, 13), "위로의 하느님"(로마 15, 5 ; 2고린 1, 3), "사랑의 하느님" (2고린 13, 11), 그리고 요한의 어법인 "하느님은 진리이시다"(요 3, 33)와 같은 묘사가 성서적 특징을 더욱 잘 보여 준다. 하느님을 자비롭고(루가 1, 72. 78 ; 15, 11-32) 선하고(마태 19, 17) 용서하고(마태 6, 14 ; 마르 11, 25) 사랑하는(요한 3, 16) 분으로 묘사하는 구절들도 성서적 특징을 더욱 잘 보여 주는 진술들에 해당한다.
그런데 신학에서, '하느님의 사랑' 의 속성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강조되어야 하는 하느님 속성이 있다. 그 속성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전능' 이다. 신약성서는 하느님의 전능에 대한 신앙에서 구약성서를 전제한다. 하느님이 세상의 창조주 보존자이고 역사의 주재자 · 심판자라는 것(마르 13, 19 ; 에페 3, 9 ; 사도 1, 7 ; 4, 24 ; 로마2, 5-6)이 확고한 사실이듯이, 그의 권능이 절대적이고 자유로이 행사되며 무진장하다는 것 또한 확고한 사실이다. 하느님의 이런 권능을 묘사하기 위해 많은 영송(榮頌, doxologia)들은 "영원한 권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1디모 6, 16 ; 1 베드 4, 11). 이에 반해 요한 묵시록은 "전능자"라는 명칭을 사용하며(1, 8 ; 4, 8 ; 11, 17 ; 19. 6. 15), 그 외에는 고린토 후서 6장 18절이 신약성서에서 유일하게 이 명칭을 사용하였다. 로마서 1장 20절에 따르면, 불가시적 속성인 하느님의 영원한 힘과 신성은 그분의 창조 작품들 안에서 인식될 수 있다. 신약성서의 중심 메시지에 따르면, 하느님의 근원적 권위이자 능력인 이 전능은 궁극적 구원 의지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하였다. 사실, 하느님 다스림의 도래를 나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와 활동은 "전권(ἐξουσία, 권위)과 능력(δύναμις, 힘)"(루가 4, 36)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전권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주님됨은 다른 사람들을 자유로운 의사로 섬기는 것임을 입증해 보인다. 다시 말해 예수는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기꺼이 인간을 위해 당신 자신을 헌신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의 약자(弱者)로서 수난을 당하고 죽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의 힘없음 안에서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을 결정적으로 증명해 보여 주며, 이와 함께 하느님이 발견될 수 있고 그분의 능력이 기대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준다. 하느님이 발견될 수 있고 그분의 능력이 기대될 수 있는 곳이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서이고, 또 힘없는 약자로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이제는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살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길 위에서이다(2고린 13, 4 : 4, 6-8).
이런 성서적 기초 위에서 오늘날 신학은, 긴장과 조화의 관계 안에서 변증법적으로 일치해 있는 하느님의 '사랑' 과 '전능' 을 하느님의 다양하고 구체적인 속성들에 대한 진술들을 통일시킬 수 있는 근거이자 귀결점으로 부각시킨다. (⇦ 전능 ; 전선 ; 전지 ; 편재 ; → 예수 그리스도 ;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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