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모든 곳에, 특히 의로운 영혼 깊숙이 그리고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 가운데 계시다는 것으로, 신앙인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체험.
하느님은 지극히 높은 분이며 동시에 모든 이들에게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이다(시편 119, 151). 그러나 하느님은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최고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분이다. 하느님은 창조주로서 당신의 업적 안에 현존하고(지혜 11, 25 ; 로마 1, 20), 구세주 하느님으로서 당신의 백성 안에 현존하며(출애 19, 4-6), 하느님 아버지로서 당신의 아들과(요한 8, 29) 성령이 생명을 주는 모든 이들과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현존한다(로마 8, 14. 28). 또한 하느님은 모든 시간들 안에 현존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그분이 시간을 지배하기 때문이다(이사 44, 6 ; 48, 12 ; 묵시 1, 8. 17 ; 22, 13). 그러나 하느님의 현존은 현실적인 것이지만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감각적인 표징들을 통해 드러난다 해도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의 피조물을 감싸고(지혜 11, 24 ; 시편 139),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고(묵시 17, 25-28), 당신의 사랑 때문에 인간과 통교하기를 원하고, 인간을 당신 현존의 빛나는 증거로 만들기를 원하는 영적 존재의 현존이기 때문이다(요한 17, 21).
〔구약성서에서의 의미〕 하느님은 인간에게서 현존하기를 원한다. 죄를 지은 인간이 피하여 도망치더라도, 하느님은 인간을 계속 찾아 부르고 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 9)
현존의 약속 :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현존을 성조들(창세 17, 7 ; 26, 24 ; 28, 15)과 모세에게(출애 3, 12) 보여 주었다.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구원한 백성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그 의미를 계시하고,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으로서 과거에 그 조상들과 함께하였듯이 그들과 더불어 할 것을 약속하였다. 또한 자신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며 자신의 백성과 함께 걷는 자(출애 3, 13-15 ; 33, 16)라고 하였다. 계약의 시대부터 행하여진(출애 34, 9-10) 이러한 현존에 대한 약속은 여호수아와 판관들(여호 1, 5 : 판관 6, 16 : 1사무 3, 19), 왕들과 예언자들(2사무 7, 9 ; 2열왕 18, 7 ; 예레 1, 8. 19)에게 갱신되었다. 여기서 의미 깊게 받아들여야 할 것은 이사야가 선포한 바있고 또한 백성의 구원이 달려 있는 아기의 이름이다.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다(이사 7, 14 : 참조 : 시편 46, 8).
하느님은 비록 당신의 백성을 유배로 책벌할 때에도 그들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당신의 종과 증인으로 남아있는 백성에게(이사 41, 8-10 ; 43, 10-12) 하느님은 여전히 목자이고(에제 34, 15-16. 31 : 이사 40, 10-11), 왕이며(이사 52, 7), 신랑이고 구세주이다(이사 54, 5-6 ; 60, 16). 그러므로 하느님은 자신의 약속에 대한 충실성으로 백성을 구원할 것이다(이사 52, 3. 6). 그리고 그 후에는 "야훼께서 거기에 계시다"(에제 48, 35)라고 불린 거룩한 도시로 자신의 영광을 되돌리겠다는 것을 선포한다. 이렇게 하느님은 모든 민족들에게까지 자신의 현존을 분명하게 할 것이며(이사 45, 14-15), 그들 모두를 예루살렘에 모아 들일 것이다(이사 60장). 끝으로 마지막 날에 하느님은 보편적 심판관과 왕으로서 현존할 것이다(말라 3, 1 : 즈가 14, 5. 9) .
현존의 표징들 : 하느님은 다양한 표징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시나이의 현현(顯現)은 폭풍우, 천둥, 번개와 바람을 통해 경외감을 일으킨다(출애 20, 18-20). 이것들은 또한 다른 신적 개입의 경우에도 발견된다(시편 18, 8-16 ; 29, 1-11 ; 이사 66, 15 ; 사도 2. 1-3 ; 2베드 3, 10 ; 묵시 11, 19). 그러나 하느님은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즉 미풍이 부는 에덴의 평화스런 분위기 속에서도 나타난다(창세 3, 8). 한편 하느님은 당신의 친구인 아브라함(창세 18, 23-33), 모세(출애 33, 11) 그리고 엘리야(1열왕 19, 11-13) 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하느님 현존의 표징들이 아무리 눈부실지라도, 하느님은 신비에 감싸여 있다(시편 104, 2). 사막에서 당신 백성을 인도할 때(출애 13, 21), 계약의 궤가 들어 있는 천막(출애 40, 34)과 후에는 지성소(1열왕 8, 10-12)를 당신 영광으로 채우면서 백성들 가운데 거처할 때, 하느님은 구름과 불기둥 안에 머문다.
현존의 조건들 : 이러한 신비스럽고 거룩한 현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조건들을 하느님에게서 배워익힐 필요가 있다.
인간은 하느님이 보여 주는 표징들에 응답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브엘세바나 베델처럼 현현의 장소에서 하느님에게 예배를 드린다(창세 26, 23-25 : 28, 16-19).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장소나 물질적 거처에 구애받지 않는다. 계약의 궤로 표시된 하느님의 현존은, 그 백성과 동반하면서 인도하고, 백성들 가운데 당신의 거처를 삼는다(출애 19, 5 ; 2사무 7, 5-6. 11-16). 하느님은 다윗 가문의 자손들과 더불어 거처하기를 원하였다. 솔로몬이 당신께 성전을 지어 바치고 싶어하는 것을 허락하지만, 그 성전이 당신을 담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이해시킨다(1열왕 8, 27 ; 참조 : 이사 66, 1). 하느님을 성전에서 만날수는 있지만, 인간이 그곳에서 그분의 이름을 진실로 부르는 경우에만 그분은 거기에 계신다(1열왕 8, 29-30. 41-43 ; 시편 145, 18). 다시 말해서 인간은 참된 예배, 충실한 마음의 예배를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찾는 경우에만 그분을 만날 수 있다. 신명기의 개혁은 지방의 성소와 그것의 부패를 제거하고 진정한 예배를 널리 행하기 위해 일년에 3번 예루살렘을 순례하라고 규정하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제사를 바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신명 12, 5 ; 16, 16). 그렇다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바치는 예배로써, 인간을 보고 있으며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께 마땅한 존경과 충실을 표현하는 것 역시 필수적이었다(시편 15, 4).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마음으로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된다(예레 12, 2) .그 결과 하느님은 성전을 버리며 그 성전의 파괴를 선언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전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예레 7, 1-15 ; 에제 10-11장).
한편 하느님은 성조들처럼 당신과 함께 거니는 이들(창세 5, 22 6, 9 ; 48, 15)과 엘리야처럼 당신 앞에서 행동하는 이들(1열왕 17, 1), 하느님의 면전에서 신뢰심을 갖고 살아가며(시편 16, 8 ; 23, 4 : 119, 168) 자신의 시련 중에 하느님께 호소하는 이들(시편 34, 18-20), 겸손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이사 57, 15) 선을 찾는 이들(아모 5, 4. 14),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을 도와 주는 이들에게(이사 58, 9), 가까이 계신다. 이들이야말로 하느님의 면전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갈 충실한 자들이다(지혜 3, 9 : 6, 19). 그러나 거룩한 하느님의 면전에서 인간은 자기 죄를 의식하게 되며(이사 6, 1-5), 하느님만이 치유할 수 있는 부패를 의식하게 된다(예레 17, 1. 14). 예언자들은 이러한 쇄신, 즉 거룩해진 백성들을 하느님의 가정으로 만들 새로운 계약의 열매를 선포한다(에제 37, 26-28). 지혜 문학 저자들은, 하느님은 당신의 지혜와 거룩한 영을 사람들에게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알게 할 것이고, 그들이 지혜를 받음으로써 당신의 친구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 지혜의 즐거움은 사람들 가운데 거처하는 데 있다(잠언 8, 31 ; 지혜 7, 27-28 ; 9, 17-18).
〔신약성서에서의 의미〕 예수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선물 : 성령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내려옴으로써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었던 선물을 가져왔다. 주님이 그녀와 함께 계시니,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루가 1, 28. 35 ; 마태 1, 21-23). 실제로 다윗의 후손인 예수는 주님이고(마태 22, 43-44 ; 마르 12, 35-37 ; 루가 20, 41-44),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며(마태 16, 16), 당신의 현존을 미소한 자들에게 알린다(마태 11, 25-27). 예수는 육화하여 우리 가운데 거처하는 하느님의 말씀이다(요한 1, 14). 그는 당신 아버지의 영광을 이 세상에 현존하게 한다.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나다"라고 하고(요한 8, 28-29 : 16, 32), 그 이름이 함축하고 있는 현존에 대한 약속을 친히 채운다. 사실 예수 안에는 신성이 충만해 있다(골로 2, 9).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성취하였을 때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보증하였다(마태 28, 20 ; 참조 : 루가 22, 30 ; 23, 42-43).
성령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신비 :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육체적으로 그들에게 현존해 있기 위해서가 아니다. 발현의 이유는 그들이 신앙을 통하여 살아 있는 예수를 찾도록 격려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와 더불어 살고 있다(요한 20, 17). 그는 또한 모든 고통받는 이들 안에 현존하며, 그들 안에서 봉사받기를 원한다(마태 25, 40). 예수는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들 안에 현존하고, 그들의 말씀 안에서 당신이 전파되기를 원한다(루가 10, 16). 그는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러 모인 이들 가운데 현존한다(마태 18, 20).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는 이들 가운데만 있지 않고, 바오로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 준 것처럼 믿지 않는 이들 안에도 현존한다. 사실 예수는 신앙으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갈라 2, 20 ; 에페 3, 17), 즉 당신의 몸으로 양육되는 그들 안에 살아 현존한다(1고린 10, 16-17). 성령은 그들 안에 살면서 그들에게 생기를 주고(로마 8, 9. 14), 그들을 하느님의 성전이 되게 하며(1고린 3, 16-17 ; 6, 19 ; 에페 2, 21-22),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한다(1고린 12, 12-13. 27). 이 성령에 의하여 예수는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들 안에 살아 있다(요한 6, 56-57. 63). 마치 아버지가 당신 안에 있듯이 예수는 그들 안에 있다(요한 14, 19-20). 이러한 친교는 예수가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서 당신의 영을 보내신 것을 전제로 하며(요한 14, 16-18 ; 16, 28), 이것이 바로 그가 육체적으로 부재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한 이유이다(요한 16, 7). 이러한 부재는 영의 선물에 의하여 실현되는 내적인 현존의 조건이다. 이러한 선물에 힘입어 제자들은 자기들 안에 아버지와 아들을 결합시키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요한 17, 26). 이 사랑이 바로 하느님이 그들 안에 머물러 있는(1 요한 4, 12) 이유이다.
아버지의 영광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완성 : 바오로가 모두에게 실현되기를 바라는 주님의 현존은(2데살 3, 16 ; 2고린 13, 11), 우리가 육체를 떠나서 해방될 때에야 완성될 것이다(2고린 5, 8). 그리하여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통하여 부활한 다음에(로마 8, 11) 우리는 모든 사람들안에서 모든 것인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1고린 13, 12 ; 15, 28). 이렇게 해서 예수가 자신과 가까이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준비한 그곳에 가서야 그분의 영광을 보게될 것이며(요한 14, 2-3 ; 17, 24),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는 장소인 새로운 예루살렘의 빛을 보게 될 것이다(묵시 21, 2-3. 22-23). 그때에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현존이 완성될 것이다(1요한 1, 3 ; 3, 24). 이것이 바로 주님이 모든 믿는 이들에게 제공하는 현존이다. 이 현존은 혈육으로 다가갈 수 있는 현존이 아니며(마태 16, 17), 어느 한 백성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며(골로 3, 11), 한 장소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요한 4, 21). 이 현존은 성령의 선물이다(로마 5, 5 ; 요한 6, 63). 성령의 선물은 성령을 충만히 지니고있는 몸을 통해서 모든 이들에게 베풀어진다(골로 2. 9). 성령은 이러한 충만성 속에 들어오는 신자들 안에 실존하기 때문이다(에페 3, 17-19). 주님은 이 현존의 선물을 당신께 응답하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을 통하여 "오소서"(묵시 22, 17)라고 외치는 모든 이들에게 베푼다.
〔하느님의 현존 체험〕 인간을 자신에게로 이끄는 신비로운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미소함을 깨달으며, 그분에 대한 경외심과 거룩함의 감정을 매우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하느님의 현존을 믿는 정도에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서, 그러한 감정들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하느님의 현존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현존 형태 :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설명은 영성가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아빌라의 데레사(Theresia ab Avila, 1515~1582)는 하느님의 현존을 세 가지 양식으로 이해하였다. 즉 자연을 통한 현존, 은총을 통한 현존, 사랑을 통한 현존 등이다. 반면 십자가의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은 영혼 안에 하느님 현존의 세 가지 양식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본질적인 현존' 으로, 하느님은 선의의 거룩한 영혼들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고 죄가 있는 영혼들, 그리고 그 외 모든 피조물들 안에도 현존한다. 하느님은 이 현존 양상으로 그들에게 생명과 존재를 주며, 만일 이 현존이 없게 되면 모든 것은 전부 무(無)로 돌아가고 그 존재는 끝난다. 그래서 이 본질적인 현존은 영혼에게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둘째는 '은혜를 통한 현존' 으로, 하느님은 인간의 영혼이 당신에게 만족토록 하고 그 만족하는 영혼 안에 산다. 그러나 이 현존이 모든 영혼들에게 다 공통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죄에 빠진 영혼들에게는 이 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혼은 자신이 이 행복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셋째는 '영적인 애정으로 이루어지는 현존' 이다. 하느님은 신심 깊은 많은 영혼들에게 여러가지 영적 선물을 주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휴식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그러나 이 영적인 현존은 다른 현존처럼 가려져 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존재하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현존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우선 '무소부재' (無所不在)는 하느님의 속성에서 나온 그분 의 현존 형태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만물 안에 실제로 현존하시되 본질과 현존 및 권능이란 세 가지 방식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만물을 존재케 하고 보존함(창조와 보존)으로써 본질에 의해 현존한다. 그리고 어떤 것도 하느님의 현존 없이는 생겨날 수 없고 또 계속 존재할 수도 없다. 그 어떤 것도 결코 하느님의 눈을 피할 수가 없고 만물은 그분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은 현존에 의해 존재한다. 또 만물이 하느님의 권능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은 권능으로 현존한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였고, 말씀으로 자신이 창조한 것을 없앨 수 있다. 둘째 내주 (內住)에 의한 하느님의 현존은, 은총 및 은총에서 나오는 작용의 결과인 특수 현존 상태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의로운 영혼에게 마치 친구와 아버지처럼 현존하며, 그 영혼으로 하여금 신적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셋째 하느님의 '성사적(聖事的) 현존' 은, 예수그리스도가 성체성사 안에서 누리는 현존, 즉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실재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성사 집전 중에 이루어지는 씻고, 기름 바르고, 빵을 떼고, 잔을 나누는 행위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인 것이다. 넷째, 하느님의 '위격적 또는 실체적(hypostatic) 현존'은 삼위 일체인 하느님의 제2위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유한 것이다.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이 하느님의 아들인 말씀의 위격 안에 존재하게 된다. 다섯째, 하느님의 '현현(顯現)에 의한 현존' 은 하늘나라에 있는 하느님의 고유한 존재 형식이다. 그러나 인간은 장차 하늘나라에 들어가 지복직관을 누리게 될 때에 비로소 이현현에 관해 인식할 수 있다.
현존 체험 : 다섯 가지 하느님의 현존 형태 중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려는 영적 성장 실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첫째와 둘째, 즉 무소부재와 내주이다. 무소부재는 언제나 어떤 조건에서나, 심지어 영혼이 대죄 상태에 있을 때라도 입증되고, 내주는 오직 은총 지위에 있는 영혼 안에서만 발견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현존과 흠 없는 삶은 필연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보고 있다고 확신하면 죄를 피하려고 애쓸 것이고, 가능한 한 하느님의 현존 안에 깊이 잠기려고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려는 실습을 제대로 하기만 한다면 영혼은 기도에 사로잡힐 것이고 마침내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를 맺게 될 것이다. 기도 생활이란 평소에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의 면전에서 지내는 것이며,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현존하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응답할 수 있다. 지각할 수 있는 피조물, 예를 들면 태양이나 별들 그리고 꽃 등을 바라보고 깊이 고찰함으로써 이 사물들 안에 머물고 또 그 밖의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들어 올릴 수있다. 또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나 십자가를 보면서 또는 그리스도가 지금 이곳에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해 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도있다. 이것이 외적(外的) 표상 개념(表象概念)을 따르는 방법이다. 여기서 더 발전하게 되면 특정한 그림이나 성상을 이용하지 않거나 또는 거의 이용하지 않고 신앙의 빛으로 밝혀진 이성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을 생각함으로써 그 현존을 지성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내적(內的)잠심법(潛心法)이다. 이 방법을 잘 이용하면, 하느님의 현존 실습과 깊고 친밀한 하느님과의 결합이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깊고 영속적인 기도 정신을 기르는 데 필요한 조건으로 사용된다.
무한한 하느님이 만물 안에 현존하므로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서 신앙 행위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지금 이곳에 현존하는 하느님에게 자신의 의지를 향하게 함으로써 감성적인 측면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성체 안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기를 원함으로써 영적인 친교를 나눌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데에 있어서 지성적인 측면과 감성적인 측면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감성적인 측면이 결여된 채 지성적인 측면만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려 한다면 이는 단순한 사색에 불과하다. 그리고 지성적인 측면이 결여되어 최소한 한 순간만이라도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감성적인 측면만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려 한다면 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암송 기도와 같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다. 이를 위한 노력들은 하느님에게 마음을 돌려드릴 때 비로소 그 유용한 가치가 드러난다. 그리고 지성적인 측면도 중요하지만 감성적인 측면이 더 잘 육성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감성적인 측면이 우월해지면 비록 마음이 다른 일이나 문제로 심란한 상태라 하더라도 의지의 작용으로 쉽게 하느님께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현존 체험의 효과 : 많은 성인들과 영성가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신심 행위에 정진하기를 권장하였다. 이 정진은 유혹에 직면하였을 때 강한 의지를 갖고 극복하도록 도와 준다. 또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갖게 되며, 덕을 실천하려는 강한 열망을 갖게 하고, 지속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열의를 갖게 만든다.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 체험에 따른 효과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하느님의 현존 실습은 가장 작은 고의적 과실까지도 피하도록 다짐하게 한다. 사람들은 지위가 높은 이들 앞에서 행동을 조심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만 아니라 은밀한 생각이나 움직임까지도 보는 하느님 앞에서는 더욱 조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자신이 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완전하게 행하도록 촉구한다. 이 규범을 성실히 지키면 영혼은 충분히 성덕의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장 이 순간 완덕에 이르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분은 다만 우리가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하기를 바란다. 셋째,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정중하게 처신하도록 한다. 혼자있거나 타인들과 함께 있거나 하느님의 현존을 언제나 깨닫고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나 태도에서 그리스도인의 품위가 유지되도록 노력한다. 그러므로 은총 상태에 있는 영혼들이 삼위 일체이신 하느님이 자신 안에 내주함을 생각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넷째, 그리스도인으로 생활하면서 겪는 투쟁에서 용기를 북돋아 준다. 사람이 혼자서 장애물을 극복하고 시련을 이겨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머물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고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와 준다. (→ 하느님)
※ 참고문헌 K.J. Healy, 《NCE》 11, 2003, pp. 681~682/ 조던 오먼, 이홍근 역, 《영성신학》, 분도출판사, 1987/ H. Dupay, 《Dsp》 XII-2, pp. 2107~2136/ M.F. Lacan, Vocabulaire de Théologie Biblique, ed. by X.Léon-Dufour, Cerf, 19771 L. Freeman,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pirituality, ed. by M. Downey, The Liturgical Press, 1993, pp. 781~7821 주교 회의 교리교육위원회 역,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편찬실〕
하느님의 현존
— 現存
〔라〕praesentia Dei · 〔영〕presence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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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붙은 떨기나무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모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