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1522. 1. 9~1523. 9) 본명은 뵈이엔스(Adrian Florensz Boeyens) 또는 데달(Adrian Florensz Dedal).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가 선출되기 전까지 마지막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이었다.
〔생 애〕 1459년 3월 2일 네덜란드 위트레흐트(Utrecht)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하드리아노는 데벤테르(Deventer)에 있는 '공동 생활 형제회' (Brethren of the Common Life)에서 교육을 받았다. 17세 때 루뱅(Louvain) 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 서품 후 에는 루뱅 대학교의 신학 교수가 되었다. 학장직을 두 차례 역임한 그는 1497년에 루뱅의 성 베드로 성당 수석 사제 겸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베드로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095~1160)의 《명제집》(Sententiarum Libri)에 대한 그의 강의 주해(Sententiarum Petri Lombardi, 1512)와 12가지 논쟁점(Quaestiones quodlibeticae, 1515)이 그의 제자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이 강의록은 그가 교회법과 윤리적 측면에서 한쪽으로 기울어진 생각을 지닌 학자였음을 보여 준다.
카를 5세와의 인연 : 1507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1493~1519)는 하드리아노를 손자인 카를 5세(Karl V, 1519~1556)의 가정 교사로 임명하였다. 1515년 카를 5세는 네덜란드의 섭정이자 고모인 마르가레테(Manganerete von Österreich)의 조언에 따라, 왕위 계승권을 확인받기 위해 스페인으로 갔다. 1516년 아라곤(Aragón) 왕인 페르난도 2세(Ferdnando Ⅱ, 1479~1516)가 사망하자 하드리아노는 카를 5세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톨레도의 히메네스 데 시스네로스(Francisco Ximenes de Cisneros, 1436~1517) 추기경과 함께 섭정을 하였으며, 토르토사(Totosa)의 주교이자 아라곤과 나바라(Navara)의 이단 심문관으로 활약하였다. 이듬해 에는 카를 5세의 특별 요청에 따라 위트레흐트의 추기경이 되었으며, 1518년에는 카스티야(Castilla)와 레온(León)의 이단 심문관으로 임명되었다. 카를 5세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 1520~1522년 스페인을 떠나 있을 때에 총독으로 임명되어, 비록 서툴기는 하였지만 지역 반란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하드리아노에 대한 높은 신뢰와 윤리적 평가를 갖게 된 카를 5세는 그의 교황직 선출에 기여하였다.
교황직 수행 : 르네상스 교황 중 마지막 교황인 레오 10세(1513~1521)가 세상을 떠나자, 정치적 경쟁자들처럼 대립하고 있던 추기경단은 만장일치로 스페인에 있던 하드리아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학식이 깊을 뿐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 황실의 신임이 두터웠기에 후임 교황으로 적합해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투르크 제국이 쉴레이만 1세(Süleyman I, 1520~1566)의 통치하에서 베오그라드(Beograd)를 함락시켜 헝가리 전역을 뒤흔들었으며(1521), 1522년에는 로도스(Ródhos) 섬을 침략하였다. 그렇기에 하드리아노는 중앙 집권 체제의 쇄신을 통한 종교 개혁 상황의 점검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위협을 막기 위해 그리스도교 세계인 유럽을 일치시키는 것이 자신의 기본 과업이라고 생각하였다.
교황은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스페인에서 배를 이용해 로마에 도착하였다. 당시 로마 시민들은 북쪽 '야만인' 이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적의를 품은 이들도 있었다. 교황 레오 10세가 진 빚으로 인해 교황청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데다, 그가 르네상스 예술에 무관심하자 로마인들의 거부감은 더욱 커져갔다. 1522년 9월 1일 교황에 선출된 후 처음으로 개최된 추기경 회의에서 하드리아노가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자, 추기경들은 새로운 교황이 교회 수입의 배분을 기존과 같이 하지 않고 또 세속화된 교황청을 정화하려는 데 놀랐다. 더구나 그들은 교회와 교황청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려는 새 교황에게 협력하기는 커녕 오히려 방해하였으며, 그로 인해 교황은 점차 추기경들로부터 소외되어 몇 명뿐인 스페인 친구나 가까운 플랑드르(Flandre)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하였다.
교황은 독일에서 루터(M. Luther, 1483~1546)가 야기시킨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1522년 12월에 개최된 뉘른베르크(Nürnberg) 제국 의회에 키에레가티(Francesco Chieregati)를 대리자로 보내어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빚어진 교회의 무질서가 교황청 자체의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게 되었다는 비난을 수용한다는 내용과 전력을 다해 교회 개혁을 수행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된 훈령을 전하였다. 이것은 반종교 개혁(contrarefomatio) 수행의 첫 번째 단계이자 동시에 교묘하게 종교 개혁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교의적 변화에 대해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루터를 이단으로 처벌하라는 요구와 루터의 가르침을 금지하는 보름스(Worms) 칙령(1521. 5. 8)을 발효시키라는 강력한 요구를 받음으로써 루터 문제의 해결은 고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당시 투르크 제국에 대한 유럽 전선의 활성화 시도는 교황의 외교적 무능력을 드러내고,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1515~1547)에 대항하는 연맹에 가담해 주기를 기대한 카를 5세의 바람을 저버리고 중립을 지킴으로써 황제와도 멀어졌다. 그리고 투르크 제국에게 로도스 섬을 빼앗기고 요한 기사 수도회가 쫓겨나자(1522. 12. 21), 교황은 3년 동안 유럽의 그리스도교 국가에 성무 집행 정지를 내리려하였다. 게다가 프랑스 왕과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된 소데리니(Soderini) 추기경을 체포한 사건은 프랑수아 1세 와의 결별로 이어졌고, 프랑스 왕은 더 이상 로마로 돈을 보내지 않았으며 롬바르디아(Lombardia) 점령을 준비하였다. 결국 교황은 1523년 8월 3일 신성 로마 제국과 영국, 오스트리아, 밀라노 및 기타 이탈리아 도시들과 방위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이후 과로와 여름철 더위에 지친 채 중병에 들어 그해 9월 14일, 64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평 가〕 좋은 의도와 진지한 개혁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하드리아노 6세의 주변에는 협조자가 없었으며, 그에게는 개혁을 위한 충분한 시간과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였다. 하지만 그가 뉘른베르크 제국 의회에서 인정하고 발표한 교회의 잘못은 교황 요한 23세(1958~1963)에 의해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교회 일치 운동을 통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이단 심문 ; 카를 5세)
※ 참고문헌 J.N.D. Kelly, Oxford Dictionay ofPopes, Oxford Univ. Press, 1996, pp. 258~2591 R.R. Post, 《LThK》 4, pp. 1309/ K.M. Saum, 《NCE》 1, 2003, pp. 129~130/ A. Franzen, 최석우 역, <개정 증보판 세계 교회사》, 신학 텍스트 총서 2.1, 분도출판사, 2001. 〔邊琪燦〕
하드리아노 6세 (1459~1523)
Hadrianus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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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하드리아노 6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