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교회사가. 교부학자.
〔생 애〕 1851년 5월 7일 에스토니아(Eesti)의 도르파트(Dorpat)에서 루터교 신자인 신학 교수 테오도시우스 하르나크(Theodosius Harnack, 1817~1889)의 아들로 출생한 아돌프 하르나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신학적 진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 외에도 도르파트 대학교의 신학 교수인 외팅겐(A. von Öettingen,1827~1905)과 앵겔하르트(M.B. von Engelhardt) 등 하르나크의 학문적 사고에 도움을 준 스승들이 있었다.
1872년부터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그노시스주의의 역사에 관한 사료 비평〉(Zur Quellenkritik der Geschichte des Gnostizismus)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874년에는 그노시스주의에 관한 세밀한 교수 자격 논문을 제출하였다. 그해 겨울 학기에 전공인 그노시스주의와 관련한 강의를 시작으로, 2년 뒤인 1876년에는 라이프치히 대학 신학부의 교회사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79년 의학부 교수의 딸인 아말리에(Amalie)와 결혼한 뒤 기센(Giessen) 대학 신학부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과는 다른 활기찬 환경 속에서 열정적인 교수 활동을 하였다.
1885년에 하르나크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 《교의사 강의》(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제1권의 증정본을 당대의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 리출(A. Ritschl, 1822~1889)에게 보냈다. 그는 이 책에서, 리츨의 초기 교회의 기원에 관한 연구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연구를 시작하였고, 이 작업은 서기 3세기 이후 마무리되는 초대 교회의 교의 형성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결실이라고 밝혔다. 또한 교회의 교의는 그리스도교가 헬레니즘 속에 편입되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하였으며, 니체아 공의회(325)로 최초의 그리고 공식적인 정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하였다.
1886년 하르나크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직을 거절하고, 1879년에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던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였다. 1887년에는 《교의사 강의》 제2권을 발간하였는데, 이 책은 서기 4세기초부터 아우구스티노(Augusinus Hipponensis, 354~430)의 등장까지를 다른 것으로, 여기서 하르나크는 칼체돈 공의회(451)의 신경은 순전히 부정사(不定詞)를 동원하여 만들어낸 피상적인 타협책이라고 하였다. 2년 뒤인 1888년에 베를린 대학 신학부로 옮긴 하르나크는, 이듬해에 제3권을 펴내 대작 《교의사 강의》를 완성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특히 교황이 아우구스티노적 언어를 통해 통 속 가톨릭 교회의 전형' 을 강화하여 표현하였고, 종교를 하나의 법률적 제도로 간주하는 관점을 뚜렷이 드러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교황의 인품에 대해서는 "현명하고 정력적인 수도자요 노련한 정치가였으며, 친절하고 인상적인 사목자" 였다고 지극히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1890년 초에 프로이센 학술원 회원이 된 그는 그리스 교부 문헌 편찬위원회의 책임자로 지명되었다. 위원회에서는 3세기까지의 그리스 교부들의 문헌 총 50권을 약 20년에 걸쳐 발간할 예정이었다. 이 작업을 통해 하르나크는 역사학자이자 프로이센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몸젠(T. Mommsen, 1817~1903)과 친분을 맺었다. 1905~1921년까지는 프로이센 왕립 도서관의 관장을 겸직하였으며, 1911년부터 학문 진흥을 위한 카이저-빌헬름 협회의 회장직을 역임하였다. 1914년에 작위를 받았고, 1921년에는 서기 2세기경에 발생한 이단의 대표적 인물이자 그노시스주의자인 마르치온(Marcion, ?~160?)의 전기 《마르치온》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정통주의자 또는 보수주의자를 포함한 많은 신학자들의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923년 프로테스탄트 잡지인 《그리스도교 세계》(Die Christliche Welt)에서 하르나크는 신학자인 바르트(K. Barth, 1886~1968)와 논쟁을 벌였다. 1919년에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Der Kommentar zum Römerbrief)이 발간된 이래, 그와 관련해서 신학적 입장 차이를 보여 왔던 두 사람의 논쟁은 서로 이해를 좁힐 수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하르나크는 1925년과 1926년 민스터(Münster)와 본(Bonn) 대학의 초청 강연회를 통해 바르트와의 우의를 재확인하였다. 하르나크는 1921년 교수직 정년이 되었지만, 1929년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교회사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무려 54년 동안 교수직을 수행하였다. 그의 퇴임식에서는 제자인 본회퍼(D. Bonhoeffer, 1906~1945)가 송별사를 하였다. 그는 베를린 대학 교수직을 퇴임한 이듬해인 1930년 6월 10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사상과 평가〕 베를린 대학에서의 '소박한 복음으로 돌아가라' 는 제목의 강의를 기록한 《그리스도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900)에서 하르나크는, 간결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의 본래 모습과 처음의 단순 소박하고 생생한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관해 되묻고자 하였다. 하르나크는 철학적 · 사변적 · 개념적으로 지나치게 복잡하고 거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을 축소함으로써 오늘날 그리스도교 선포의 핵심 내용이 뚜렷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그의 시각은 유럽 중심으로 국한되어 근대적 전형을 보여 준다는 한계를 지닌다.
하르나크는 슐라이어마허(F.E.D. Schleiermacher, 1768~1834)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신학계의 자유주의 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역사 신학에 대한 그의 비판적 관점들은, 20세기 초반 풍부한 신학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초대 교회의 성장 과정과 그리스도교 교의의 발전 과정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하르나크의 논의는 이 둘, 즉 그리스도교와 교의는 그리스 그노시스주의의 영향 때문에 본래의 모습에서 왜곡되었다는 주장에 도달한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교, 도덕적 인성교육 그리고 모든 인습적 문화의 유일한 근거인 원초적 복음의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하였다.
당대의 가장 권위 있던 교회사가 중 한 사람인 하르나크의 많은 저서들은 교회사뿐만 아니라, 교의사 특히 교부학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는 학문적 활동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회 문제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결국 그가 평생에 걸쳐 노력하였던 과업은 세계와 사회, 그리고 문화 속에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효력을 확보하여 그 안에서 통합하려는 것이었다. (→ 리츨, 알브레히트 ; 몸젠, 테오도르 ; 바르트, 카를 ; 본회퍼, 디트리히)
※ 참고문헌 F.W. Bautz, 《BBKL》 2, pp. 554~568/ K. Blaser, Geschichte Kirchengeschichte Dogmengeschichte in Harnacks Denken, Giitersloh, 1964/ W. Dobertin, Adolf von Harnack. Theologe, Pädagoge, Wissenschafspolitiker, Frankfurt a. M., 1985/ W. Elert, Der Kampf um das Christentum. Geschichte der Beziehungen zwischen dem Evangelischen Christentum in Deutschland und dem allgemeinen Denken seit Schleiermacher und Hegel, Miinchen, 1921/ G.W. Glick, The Reality of Christiamity. A Study of Adolf v. Harnack as Historian and Theologian, New York · Everston · London, 1967/ M. Greschat ed., Theologen des Protestantismus im 19. und 20. Jahrhunderts, vol. 1, Stuttgart, 1978, pp. 198~212/ G. Heinz, Das Problem der Kirchenentstehung in der deutschen protestantischen Theologie des 20 Jahrhunderts, Mainz, 1974/ F.W. Kantzenbach, Evangelium und Dogma. Die Bewältigung des theologischen Problems der Dogmengeschichte im Protestantismus, Stuttgart, 1959/ ⸺, Programme der Theologe, Denker, Schulen, Wirkungen. Von Schleiermach bis Moltmann, Miinchen, 1984/ ⸺, 《TRE》 10, pp.450~458/ K.H. Neufeld, Adolf v. Harnack. Theologie als Suche nach Kirche, 《KKTS》 16, 1977, PP. 360~369/ ⸺, Christentum im Widerstreit. Adolf v. Harnacks Frage nach dem Wesen des Christentums, Stimmen der Zeit 198, 1980, PP. 542~552/ ⸺, 《LThK》 4, 1995, pp.1196~1197/ K. Nowak ed., Adolf von Harnack, Göttingen, 2001/ W.Pauck, Hamack and Troeltsch. Two Historical Theologians, New York, 1968/ R. Staats, Adolf v. Harnack im Leben Dietrich Bonhoeffers, 37, 1981, pp. 94~212/ A. v. Zahn-Harmak, Adolf v. Harnack, Berin-Tempelhof, 1936(Berlin, 2nd ed., 1951). 〔吳敏煥〕
하르나크, 아돌프 폰 (1851~1930)
Harnack, Adolf v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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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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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에젤은 하란에서 이사악의 아내로 삼을 리브가를 데려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