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리나, 시에나의 (1347?~1380)

Catharina, Sen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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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리나 성녀.

가타리나 성녀.

성녀. 교회 학자. 축일은 4월 29일. 원명은 카테리나 베닌카사(Caterina Benincasa). 1347년 주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 시에나에서 염색업을 하는 베닌카사 가문의 25명의 자녀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유난히도 명랑하고 생기 발랄한 성격의 가타리나는 불과 6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생애를 미리 보는 신비한 체험을 한 후 자신을 결혼시키려는 부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정을 지키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16세에 도미니코 제3회에 가입하여 명상 생활과 함께 병자 간호, 그리고 죄인의 개종에 힘썼는데 특히 흑사병 같은 절망적인 병을 앓는 환자들의 벗이 되어 주었다.
가타리나는 어릴 때부터 종종 환시(幻視)를 보았다. 하루는 예수께서 한 손에는 가시관을, 다른 손에는 금관을 들고 나타나시어 어느 것이나 하나를 택하라고 하였을 때, 그녀는 주저없이 가시관을 택했다고 한다. 1375년에는 오상 성흔(五傷聖痕)을 받았는데 이 상처는 생전에는 볼 수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임종할 즈음에는 확실히 드러났다고 한다. 이러한 환시나 탈혼 등에 열광한 열심한 지지자들 때문에 협잡꾼으로 고발되어 도미니코회의 총회 석상에까지 출두한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카푸아의 레이몬드(Raymond of Capua, 1330~1399) 성인이 고해 신부로 임명되었으나, 곧 제자가 되었고, 후일에는 전기 작가가 되었다.
가타리나는 1376년 아비농의 그레고리오 11세를 찾아가서 교황에게 대항하고 있는 피렌체인들과 화해하도록 간청하였다. 마침내 교황이 청을 받아들여 로마로 돌아옴으로써 1309년부터 1377년까지의 이른바 교황의 아비농 유폐 시대를 종식하고 교황좌를 다시 로마로 복귀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 뒤 다시 시에나로 돌아가 이전의 생활을 계속, 독일과 이탈리아의 도미니코회 개혁에 기여했다. 가타리나의 제자들은 성녀의 영성, 재능, 무아(無我)의 기도, 성혈에 대한 특별한 헌신, 죄인을 회개시키는 능력 등에 크게 감동받았다.
1378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서거하고 우르바노 6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이를 반대하는 일단의 추기경들이 제네바의 로베르토(Robért)를 대립 교황(글레멘스 7세)으로 선출하는 사건 때문에 교회에 큰 분열이 일어났다. 이때 가타리나는 단호히 우르바노 6세 교황을 지지하고 추기경과 제후들로 하여금 그에게 순종케하여 교황의 위치 확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분열을 종식시켰다. 그뿐 아니라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재물과 명예욕에 사로잡히고 사치 생활에 빠지는 경향을 크게 염려하여 그 개혁 방법을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제안하여 실행하게 하였다. 또한 교회를 위한 기도와 희생을 아끼 지 않았고, 교회 지도자들에게 직접 말과 편지로써 회개를 권고하였으며, 자신의 신비적인 체험을 기록한 저서 <대화> 외에도 약 400통의 서한들을 남겼다.
가타리나가 고행과 희생으로 쇠진한 육신을 떠나 사랑하는 주님께로 나아간 것은 1380년 4월 29일, 33세 때였다. 더 이상 바칠 것이 없을 만큼 모두 다 바쳤기에 미련 없이 "주여 내 영혼을 당신께 맡기나이다"라고 최후의 말을 남겼던 것이다.
1461년 교황 비오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1939년에는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으며, 1970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아빌라의 데레사(Theresa de Avila, 1515~1582) 성녀와 함께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 참고문헌  김정진 편역, 가톨릭 聖人傳》, 가톨릭 출판사, 1987/ 최정오 편, 《가톨릭 성인 사전》, 계성출판사, 1987/ 배문한, 《그리스도의 향기》, 성모출판사, 1993/ John Coulson, The Saints, Guild Press-New York/ K. Foster, 《NCE》3. 〔裵文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