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훼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신뢰하며 의지하는 믿음이 강한 이스라엘 백성. 경건주의자들' 이라는 의미이며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기원전 166~160)에 가담하였던 호전적인 종교 단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시딤은 '친절함' 또는 '경건함' 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형용사 '하시드' (חָסִיד)에서 유래된 명사로, 사람을 가리킬 경우에는 복수로만 사용된다. 본래 '하시드'' 라는 형용사는 '선함' 또는 '친절함' 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사드' (חָסַד)에서 출발한 단어이다. 그 명사형인 '해세드 (חֶסֶד) 역시 '선함' 또는 '친절함' 을 의미하며, 전쟁 등에서 승리했을지라도 상대방을 죽이지 않는 태도 등에 사용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아마도 하느님을 향해실천되는 '헤세드' 라는 뜻으로 사용되면서 '하시드' 는 '선한 · 친절한' 이라는 뜻과 함께 '경건한 · 독실한' 이라는 의미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역 사〕 성서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대교 또는 유대 사상에 하시딤이라고 불리는 집단이 단일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 하시딤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정보는 구약성서의 마카베오서(1마카 2, 42 ; 7, 13 ; 2마카 14, 6)이다. 이에 의하면, 그들은 시리아의 왕이었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 기원전 175~164)가 유대교를 박해하자 유다 마카베오를 도와 예루살렘의 헬레니즘화를 막기 위해 독립 전쟁에 참여하였던 경건주의자들이다.
헬레니즘이라는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와 생활 방식을 가진 제국이 팔레스티나 지역의 정치 · 군사적 주도 세력으로 자리를 잡는 것은 기원전 333~64년인데, 기원전 301~198년까지는 프톨레메오스 왕조가, 기원전 198~64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이 지역의 지배 세력이었다. 프톨레메오스 왕조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추구하였으므로 통치 지역에 헬레니즘화된 독립 도시들이 생기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셀레우코스 왕조는 정복지를 헬레니즘화함으로써 그 정치적 지배력이 더 강력해진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셀레우코스 왕조 지배기에 팔레스티나 지역에는 다수의 기존 도시들이 헬레니즘화되고, 새로운 그리스식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특히 안티오쿠스 4세는 이와 같은 헬레니즘화를 지속시켰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를 존중하던 기존의 정책을 무시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하여 군대 유지에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하였다. 이에 반발한 유다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항하여 독립 전쟁을 일으켰는데, 대부분 평민들로 구성된 마카베오 가문의 군대에 경건한 이들' 또는 율법 전문가로 알려진 하시딤이 가담하면서(1마카 2, 42) 명실공히 유대 백성을 대표하는 군대가 되었다. 이들은 뜻밖의 전과를 올리며 예루살렘 지역의 독립을 쟁취하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어, 기원전 164년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재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독립 전쟁의 종교적 명분에 공감하여 적극적으로 동참한, 하시딤이라 불리던 이 유대 경건주의자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 마카베오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마카베오서를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마카베오가 독립전쟁에는 참가하였으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종교적 목적이 성취된 후 유다 마카베오의 후손들인 하스모네 왕조를 돕지는 않았으며, 이 왕조가 종교 혼합적 정책으로 기울자 오히려 왕국과 정치적 갈등을 빚었다는 것이다. 요한 히르카누스 1세(John Hyrcanus I, 기원전 134~104)는 하시딤을 이해하고 가까이 지내며 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궁중에서 그리스식 교육을 받고 자란 그의 아들들은 전혀 달랐다. 그로 인해 하시딤은 유대교의 경신례와 토라의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세에 의한 헬레니즘화를 몰아내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하였다. 그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유대교의 신학적 · 영성적 기반을 위협하는 실체로 간주하였다. 사실 헬레니즘을 강요하는 것은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계약과 율법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기에, 헬레니즘화는 바빌론 유배에 이은 제2의 위기로 여겨졌다. 하시딤이 헬레니즘화를 반대한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구약의 율법은 유대인들의 문화와 관습을 언제나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가시적 결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하느님의 계약과 무관한 헬레니즘 문화를 합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 둘째, 모세 이후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민족으로든 개인으로든 지속적인 안녕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충성하고 순종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가르쳤다. 셋째, 유대인들은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종족과 민족과 문화와 종교가 초강대국들의 정복 사업으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런 이유들로 하시딤은 특권 의식, 배타주의, 고립주의, 그리고 율법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들의 명칭인 하시딤에서 시사되듯이, 그리고 그들이 전쟁을 치른 동기와 그 이후 하스모네 왕조와의 갈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종교적 경건주의자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편에서 하시딤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지만(12, 2 ; 30, 5 ; 31, 24 ; 37, 28 등), 그들이 마카베오서에 나오는 특정한 무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몇몇 학자들은 이들을 요세푸스(F. Josephus, 371 38?~100?)가 전하는 에세네파와 동일시하기도 하고,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랍비 문학 : 이에 속한 작품들은 하시딤의 종교적 전통과 경건함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시드 또는 하시딤으로 호칭되는 사람들이 미쉬나와 탈무드에 등장하는데(Ber 5, 1 ; Hag 2, 7 ; Sot 3, 4 ; Avot 5, 10 ; Nid 17a), 이들이 마카베오 시대의 하시딤일 수도 있지만 경건한 생활로 매우 존경받던 사람들을 부르던 일종의 경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비를 내리는 것과 같은 기적을 보여 주기도 하고(M Taan 3, 8 ; T Taan 2, 13) 병든 사람을 고쳐 주며, 많은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특징은 토라 연구에 열성적이었다는 점이다.
신비주의적 종교 운동 : 12~14세기에 중부 유럽, 즉 독일 라인-도나우 지역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생겼던 소위 '아슈케나짐(Aschkenasim) 하시디즘' 은 금욕과 신비주의적 경향의 종교 운동이었다. 예후다 헤-하시드(Jehuda he-Hasid)가 그들을 이끌었는데, 그들은 천상 세계에 대한 관상을 통해 신적 초월에 이르는 것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또한 형식적인 예식에 불만을 품고 개인의 영적 성장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3~14세기에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Kabbala)의 출현 이후 점차 세가 약해졌다.
〔하시디즘〕 18세기 폴란드 남동부와 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 중 가난에 찌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인간의 내면을 쇄신하려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하시디즘은 하시딤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시디즘이 하시딤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역사적 배경 : 14세기 중엽 유럽에는 흑사병이 창궐하여 한동안 죽음의 땅이 되었고 인심이 흉흉해졌다. 그 여파로 독일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다른 나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때 그들을 받아 준 폴란드로 이주하여 15세기에 생활의 안정을 되찾은 유대인들은, 폴란드의 남동부와 동부에 거주하는 가톨릭 지주들과 동방 교회를 따르는 우크라이나 소작 농부들 사이에서 경제적인 이해(利害)가 충돌하자 이를 중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피지배 계층인 우크라이나 소작농들이 유대인들을 증오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결국 우크라이나의 카자크인(Kazak)들은 폴란드인들과 '저주받은 유대인 족속' 들에 대한 '성전' 을 선포, 유대인들을 끔찍하게 학살하였다. 이탈리아의 한 유대인 랍비는 이 전쟁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인들이 뿔뿔이 흩어진 이래 최대의 참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과 참상은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유대인들이 감당하여야 할 출산의 고통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후에 터키 서부의 항구 도시인 스미르나(Smyma, 현 Äzmir)에서 자신을 참된 메시아로 착각한 사기꾼 샤베타이 체비(Shabbetai Tzevi, 1626~1676)가 출현하였다. 그는 과대 망상증에 사로잡혀, 자신이 이슬람 왕국을 정복하여 술탄을 종으로 삼고 왕좌를 양위받아 유대인들의 운명을 획기적으로 바꿀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겁쟁이이자 비겁한 자라는 사실이 곧 드러나자, 급기야 1666년에는 무슬림으로 개종하였다. 여러 달 동안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이 땅에 메시아가 출현하였다는 희망을 가졌던 유럽의 유대인들은 커다란 실의에 빠졌으나, 그를 열렬히 추종하던 사람들은 그가 변절자이며 사기꾼이라는 것이 알려진 다음에도 여전히 미련을 갖고 그가 마지막 부활을 하기 위한 일종의 필요 과정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이라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그리스도교 사상을 어설프게 모방한 유대인들 중에는 영광스러운 메시아 시대의 출현을 '간절히 청하기' 위해 매우 혹독한 고행을 하는 고행자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한편 랍비들은 율법의 세세한 조목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두려움에 가득 찬 험악한 세상에서 쫓기듯 살아가는 폴란드의 가난한 유대인들은, '야훼' 라는 글자를 휘두름으로써 악마를 제어하는 권능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주술적인 치료사들에게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바알 셈 (Baal Schem)이라 불렀는데, 이는 '지존하신 분의 이름을 부르는 선생님' 이라는 의미이다.
주요 사상 : 치료사로서 하시디즘의 중심 인물이 된 사람은 이스라엘 벤 엘리에제르(Israel ben Elieser, 1698~1760?)였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바알 솀 토브' (Baal Shem Tov) 즉 '모든 선의 근원이신 분의 이름을 부르는 선생님' 또는 '선량한 선생님' 이라고 칭하였으며, 이를 간단히 줄여 '베세트' (Besht)라고 불렀다. 그는 카발라에 대하여 철저히 연구하였고 산속 깊은 곳에서 홀로 기도와 명상에 잠기면서 낙담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봉사할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여러 곳을 여행하며 설교를 하였으며 신비적인 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의 철학적이고 형식적인 랍비-유대 사상에 반발하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그와 그의 제자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두고 가르친 것은 하느님이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이었다. 비록 구석지고 캄캄한 곳이더라도 하느님은 반드시 계신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사물이더라도 하느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단순하고 무식한 사람이더라도 탈무드를 공부하는 학생들 못지않게 사랑하신다. 그렇기에 배운 것이 없더라도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순결하고 정의롭게 살 수 있으며 성령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참회하는 사람, 죄와 세속적인 자아를 끊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사람, 겸손한 사람, 그리고 팅 빈 손을 들고 구걸하는 걸인처럼 하느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그들을 맞아 주신다. 비록 이 세상에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슬픔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기쁨의 소식을 전해 주는 전달자와 같은 것임을 깨달아야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모두 하느님께 맡기고, 복되고 기쁜 믿음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면 그분 또한 우리를 내려다 보신다는 엄청난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얼마나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시디즘을 따라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Hasidim)이 정통 교리를 따라 생활하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은 교리상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강조하는 내용과 일상적인 생활 모습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 차이가 크게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은 유대교 주류에서 벗어나 그들나름의 독자적인 단체를 구성하였다. 그들은 카리스마를지닌 지도자 '차디크' (Tzaddik) 곧 '의로운 사람' 주위에 모였다. 상당히 먼 거리에서 떨어져 사는 사람들도 안식일을 '의로운 사람' 과 함께 지내기 위하여 찾아왔다. 함께 지내는 동안 '의로운 사람' 은 사람들의 영적 진보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돌보아 주었고, 그들은 지도자에게 어떤 물건이 필요한지를 살펴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모인 사람들과 하늘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그들은 자진하여 그에게 자신들의 생활을 모두 털어 놓았다. 이렇게 '의로운 사람' 이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는 것은 그의 학식 때문이 아니라 초월적인 세계와 맺는 교류 때문이다. 유대인의 신비적인 신화에 의하면, 태고 시절 빛을 담아 놓은 그릇 가운데 몇 개가 깨어져 담겨 있던 불꽃들이 땅으로 떨어졌는데, 이 불꽃들은 다시 하늘에 있는 그릇으로 돌아가 거룩한 조화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한다. '의로운 사람' 들의 임무는 바로 땅에 떨어진 이 거룩한 불꽃들이 지상의 방랑을 끝내고 하늘로 들려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는 '세상의 심장부' 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그가 만진 물건이나 인정하는 사람들은 거룩하게 변화된다고 믿었다.
하시디즘에 속한 사람들이 특별히 강조한 것은 기쁨과 형제애 그리고 일치된 경험으로 하느님 안에서 기쁨으로 바치는 공동체적인 예배였다. 그들은 공동으로 하느님앞에 나아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의로운 사람' 의탁자를, 경외심을 갖고 다가가야 할 제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였다. 안식일의 세 번째 식사가 끝난 후 그들은 어두운 방에 앉아서 깊은 감동 속에 빠져 그들 선생님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 탈혼 상태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와 춤은 식후의 여흥으로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나 거룩한 축일을 지내는 동안 해야 할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그들은 형제적인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을 드러낸다. 모든 축제일에 남자들은 콧소리를 내거나 멜로디를 따라 노래하면서 서로 손을 잡고 둥글게 원형을 이루어 춤을 추었다. 가끔씩 손뼉을 쳐서 기쁨을 고조시키면서 노랫가락을 더욱 빠르게 하다가 한 사람이 갑자기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모든 사람들이 '오! 아름다우신 아버지, 도와주소서'(Tate ziser, helf!)라는 노래를 불렀다.
하시디즘의 발전 : 빠르게 전파된 것에 비례하여 이 운동은 큰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가장 크게 반대한 사람들은 '미트나게담' (Mitnaggedim)이라 불린 정통 랍비들이었는데, 이들은 하시디즘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베세트를 '메마른 우물' 이라 하고 그 추종자들은 '뿌리까지 뽑혀져야 할 가시나무와 엉겅퀴' 라 하였다. 또 '하느님의 길을 황폐화시키는 부정한 사람들' 이라고도 하였다. 그들은 정부에 하시디즘의 활동을 금지해 줄것을 요청하였고 그들의 책을 불살랐으며 유대교에서 파문시켜 쫓아내겠다고 거듭 공표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하시디즘과 이를 억압하던 미트나게딤은, 그들의 주장 중 공통된 부분만을 취합하여 새로 출현한 운동인 하스칼라(Haskalah, 계몽주의) 운동의 위협을 받았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여 이 운동에 가담하자 하시디즘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전에 그들을 반대하던 사람들보다 더욱 경직된 모습을 띠게 되었다.
벨로루시 지역의 루바비츠(Lubavitch)를 중심으로, 도브 바에르(Dob Baer, 1773~1827)와 그 추종자들은 '하밧 하시디즘' (Habad Hasidism) 운동을 일으켰다. 이 하시디즘은 이후 동유럽 유대 사상의 보수적 성향을 주도하였는데, 특히 인간의 지성을 중요시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분파에서는 교사로서 활동하는 '의로운 사람' 과 함께 마음에 관계되는 믿음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지닌 초기의 지도자들이 세습 왕조에 굴복하자 이 운동은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몇몇 지도자급 인물들은 타락하여 마침내 그들이 있는 곳이 탐욕과 미신의 중심지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하시디즘은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끗끗하게 버터왔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초기의 정신에서 퇴색하여 극보수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어 공동체 내에서의 어떠한 근대성의 표현도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한때 유럽에 거주하는 전체 유대인 가운데 절반 가량이 속하였으나 그 보수성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당시 나치 정권에 의해 대부분 학살당하고,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탈출한 몇몇 지도자들과 하시디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던 팔레스티나의 유대인들을 통해 그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루마니아의 사투마레(SatuMare)를 중심으로 '사트마르 하시디즘 (Satmar-Hasidism)이 시작되었는데, 요엘 테이텔바움(Yoel Teitelbaum, 1888~1982)이 그 지도적 인물이었다. 이 하시디즘은 당시까지의 헝가리 유대 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중심지를 미국의 뉴욕으로 옮겼다. 그들은 매우 배타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다른 유대 사상, 특히 극단적 정통주의(orhodox)에 따라 토라를 이해하여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려는 시온주의(Sionismus)와 대립하였다. 특히 나치의 유대인 학살(Holocaust)을 이러한 변화를 모색하는 새로운 경향의 유대 사상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현대 문명을 거부하면서 전통적 유대 방식의 삶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하시디즘을 따르는 이들은 많지 않지만 유대인의 사상과 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특히 철학자인 부버(M. Buber, 1878~1965)는 하시디즘을 현대 세계에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카프카(F. Kafka, 1883~1924) 역시 《황제의 사신(使臣)》이란 작품을 통해 하시딤적인 이야기를 발표하였다. 현재 하시디즘은 종교적 · 문화적 · 정치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하시디즘 ; →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 마카베오서 ; 바리사이파 ; 부버, 마르틴 ; 유대교 ; 카프카, 프란츠 ; 쿰란 공동체)
※ 참고문헌 J.I. Kampen, The Hasideans and the Origin of the Pharisees, Atlanta, 1988/ G. Stemberger, Pharisaeer, Sadduzaer, Essener, Stuttgart, 1991/ J. Maier, Geschichte der juedischen Religion, Frankfurt, 1992/ P.F. Ellis, Hasidaeans, 《NCE》6, pp. 659~660/ J.M.Oesterreicher, Hasidism, 《NCE》 6, pp. 660~662/ A. Rubinstein, Hasidism, 《EJ》 7, pp. 1390~1399/ J. Kampen, 《ABD》3, pp. 66~67. 〔崔昇晶〕
하시딤
[히]חֲסִידִים · [그]Ἀσιδαῖοι · [영]Hasid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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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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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헬레니즘화를 막기 위해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에 참가한 하시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