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 요한 미카엘 (1737~1806)

Haydn, Johann Michae

글자 크기
12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의 동생.
〔생 애〕 하이든은 1737년 9월 14일 오스트리아 빈(Wien) 근교의 로라우(Rohrau)에서 마차 제조업자인 아버지 마티아스(Mathias Haydn, 1699~1763)와 어머니 안나마리아(Anna Maria Koller, 1707~1754)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45년에 형인 프란츠 요제프가 이미 활동 중이던 빈의 장크트슈테판(Sankt Stephen) 주교좌 성당의 소년 합창단에 입단하여 세 옥타브(octave)를 넘나드는 '빼어난' 소년 소프라노로 활약하였으며, 이 시기에 성악, 바이올린, 피아노, 오르간을 배웠다. 1757년부터 헝가리와 오라데아(Oradea, Grosswardein)에 머물면서 피르미안(Firmian) 대주교의 악장으로 일하였으며, 1763년에는 잘츠부르크(Salzbug)의 대주교인 슈라텐바흐(S.Schrattenbach)의 궁정 음악가 겸 관현악단 악장으로 임명되어 궁정 악장 레오폴트 모차르트(L. Mozart, 1719~1787)가 아들인 볼프강 아마데우스(W.A. Mozart, 1756~1791)의 연주 여행에 동행할 때마다 그의 빈자리를 대신하였다. 하이든은 1768년에 베니스에서 수학한 후, 모차르트가 <하늘의 여왕>(Regina coeli)을 작곡하여 극찬하였던 궁정 가수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 Lipp)와 결혼하였으며 1771년에는 세상을 떠난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를 위해 <레퀴엠>(Requiem)을 작곡하였다. 이 곡은 그에게 있어서 첫 번째 의미 있는 대작으로 평가되는데 현대의 음악학자들은 이 <레퀴엠>과 20년 후 모차르트가 작곡한 <레퀴엠>(1791, 모차르트의 제자 쥐스마이어가 완성) 사이의 유사점들을 지적하면서, 모차르트가 하이든에게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한다. 이 <레퀴엠>은 그의 형인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의 장례 미사(1809)에서도 연주되었다.
하이든은 1777년에 삼위 일체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였고 1781년에는 신임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인 콜로레도(H. Colloredo)와의 불화로 모차르트가 사임하자 잘츠부르크 궁정과 주교좌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으며, 궁정 오르간 연주자의 자리는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하였다. 1787년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후임으로 합창단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40~1780) 황녀의 요청으로 신성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2세(1792~1806)의 영명 축일을 위한 <성 프란치스코 미사곡>(Missa sub titulo S.Francisci Seraphici)을 작곡하였는데, 고유 미사곡과 <테데움>(Te Deum)까지 포함된 이 대규모의 미사곡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평가하였다. 1804년에는 스웨덴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외국 회원이 되었다. 1805년에 황녀는 요한 미카엘 하이든에게 <저를 구하소서>(Libera me)를 포함한 <레퀴엠>의 작곡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이미 깊은 병을 앓고 있던 그는 자신의 두 번째 <레퀴엠> 창작의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1806년 8월 10일 형인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보다 3년 먼저, 69세의 나이로 잘츠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821년 베드로 수도원의 묘지로 이장되었다. 1808년 그의 제자인 오터(J. Otter)와 원(G. Shinn)은 《미카엘 하이든의 전기》를 출판하였다. 베버(C.M. von Weber, 1786~1826), 후에 베토벤(L. van Beethoven, 1770~1827)과 피아노 연주 시합을 벌였던 빌플(J. Wölfl), 그리고 출판업자 디아벨리(A. Diabelli, 1781~1858) 등도 그의 제자이다.
〔작 품〕 요한 미카엘 하이든은 평생 잘츠부르크에 살면서 360여 곡에 이르는 가톨릭 교회 음악을 작곡하였다. 이 수치는 황제 요제프 2세(1765~1790)의 개혁 칙령이 발효되었던 1782~1796년까지의 14년을 감안한다면 더 대단한 것이다. 다양한 교회 전례를 축소 내지 포기하고 꼭 필요한 전례라도 최대로 간소화할 것을 요청한 이 '사치 금지 칙령' 은, 빈뿐만 아니라 잘츠부르크 등 대도시의 교회 전례와 교회 음악을 크게 위축시켰다. 독창과 합창 그리고 오케스트라로 구성된 장엄한 미사곡도, 독서와 복음 사이에서 연주되던 순수 기악 음악의 연주도 전례에서 금지되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요한 미카엘 하이든에게 이 기악 음악을 대신할 검소하고 단순한 독일어 미사곡과 독일어 성가를 작곡하라고 지시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하이든의 교회 음악은 낙관주의라는 시대 정신 아래 근본적으로 밝고 활달하다. 그의 핵심 창작 분야는 미사곡이었다. 라틴어 미사곡 32곡, 독일어 미사곡 8곡, <레퀴엠>, 그리고 대단히 많은 고유 미사곡들, 즉 층계송(Graduale) 117곡, 봉헌송(Offertorium) 45곡, 응송(Responsorium)27곡이란 작품수가 이를 증명한다. 실제로 그는 통상 미사곡보다 고유 미사곡을 더 많이 작곡하였다. 그리고 후자는 형식의 풍요로움 때문에 19세기에 고유 미사곡 창작의 전형이 되었다. 또한 <테 데움> 6곡, <저녁 기도>(Vesperae) 4곡, <성인 호칭 기도>(Litaniae) 12곡, 오라토리오(Oratorio) <주님의 수난>(1775?), 칸타타 등 100여 곡의 크고 작은 교회 작품들을 남겼으며, 이 외에도 교향곡 46곡, 콘체르토 5곡, 오중주 7곡, 현악 사중주 9곡, 관현 앙상블 2곡 등 다양한 편성의 실내악곡들과 작은 오르간 전주곡 50여 곡, 이탈리아 오페라 <안도메다와 페르스코>(Andomeda e Persco, 1787) 등이 있다.
요한 미카엘 하이든의 교회 음악에는 대위법적 옛 양식과 새 나폴리 양식이 공존한다. 옛 양식은 18세기 당시의 주된 음악 언어였지만, 무엇보다 그는 그것이 교회 음악의 전통 언어라고 믿었기 때문에 사용하였다. 그가 팔레스트리나-르네상스 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도 이러한 전통적 교회 양식을 계승 ·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762년 오라데아에서 쓴 모테트(mottete) <그리스도가 되시었다>(Chistus factus est)와 <십자가 미사곡>(Missa crucis) 등 초기의 작품들은 그가 《파르나수스로 오르는 계단》(Gradus ad Parnassum, 1725)의 저자인 푹스(J.J. Fux, 1660~1741)의 화성적 대위법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던 탁월한 작곡가였음을 입증한다. 이 옛 양식은 1771년의 <레퀴엠> 도입부와 1796년의 응송 <주님의 만찬>(Coena Domini) 등 후기 작품에서도 사용되며, 그의 주요 교회 음악 언어였다.
다른 하나는 동시대의 나폴리 양식이다. 그가 시대의 언어를, 그래서 나폴리 성악 양식을 자신의 교회음악 창작에 수용한 것은, 오페라와 유사한 세속적 교회 음악을 멀리하며 교회 음악의 정통성을 앞세우던 평소의 주장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요한 미카엘 하이든이 옛 교회 양식에 나름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만이 유일한 교회 음악 언어여야 함을 부인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그는 모든 교회 음악이 전통의 뿌리에서 출발하여 현재의 신자 공동체를 위한 음악에도 열려 있던 작곡가였다. 초기의 대표적 교회 작품들은 이 나폴리 양식으로 작곡되었다. 예컨대 1750년대의 <삼위 일체 미사곡>(Missa SS. Trinitatis, 1754), <치릴로와 메토디오 미사곡>(Missa SS. Cyrilli et Methodii, 1758), <요셉 미사곡>(Missa S. Josephi, 1757년경), 그리고 대림 시기의 봉헌송 <아베 마리아>(1765)도 본문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독창자와 합창, 두 대의 바이올린, 베이스, 계속저음 오르간, 클라리노 트럼펫, 트롬본, 팀파니 등의 편성으로 짜여 있다. 특히 15악장의 대규모<치릴로와 메토디오 미사곡>은 바흐(J.S. Bach, 1685~1750)의 (Mass in B Minor, 1733)이나 베토벤의 <장엄 미사곡>(Missa solemnis, 1823)과 비교될 수있다.
요한 미카엘 하이든의 교회 음악은 그의 기악 음악이나 극음악들에 비해 수준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한 작품 목록(1814)에서는 18세기 후반의 오스트리아 개혁가들에 의해 고무받은 '새로운' 교회 양식에 요한 미카엘 하이든이 크게 기여한 점을 염두에 둔 듯, 그를 "교회 양식에 있어서 위대하고 독창적이며 모방할 수 없는 거장"이라고 묘사하였다. 또 그의 교회 음악을 형인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의 교회 음악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그는 음악뿐 아니라, 《20년간의 잘츠부르크 기상 관측 보고서》를 남길 정도로 자연과학과 역사학에도 대단한 관심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 가톨릭 음악 ; 레퀴엠 ; 하이든, 프란츠 요제프)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수, 《음악은이》 2, 음악춘추사 2000, pp. 356f., 359/ R.G. Pauly, 《NGDMM》 8, pp. 407~412/ H. Jancik, 《MGG》 5, pp. 1933~1944/ W. Gurlitt ed., Riemann Musik Lexikon, Personenteil 1, Schott's Soehne, 1959. 〔趙善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