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 프란츠 요제프 (1732~1809)

Haydn, Franz 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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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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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생 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은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빈(Wien) 근교의 로라우(Rohrau)에서 마차 제조업자 마티아스(Mathias Haydn, 1699~1763)와 안나 마리아(Anna Maria Koller, 1707~1754)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훌륭한 아마추어 하프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아 하이든뿐 아니라 두 동생까지 음악가가 되었다. 유년기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으나, 1738년 봄 고향을 떠나 하인부르크(Hainburg)의 이모 집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음악을 배웠다. 이모부 프랑크는 그곳 학교의 교장이며 교회 합창단을 지휘하고 있었다. 1739년에 하이든은 빈의 장크트슈테판(Sankt Stephen) 주교좌 성당의 악장 로이터(G.K. Reutter)에 의해 소년 합창단원으로 발탁되었고, 1740년 빈의 숙소로 이사하여 가창법, 클라비어(Klavier)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전체 6명의 단원들 중 독창자로 활동하다가 변성기 이후인 1750년에 합창단을 떠났다.
하이든은 작곡 공부를 독학으로 하였다. 즉 마태존(J.Mattheson, 1681~1764)의 《완전한 악장》(Der vollkommene Kapellmeister, 1739)과 푹스(J.J. Fux, 1660~1741)의 대위법 학습서인 《파르나수스로 오르는 계단》(Gradus ad Parnassum, 1725)으로 작곡을 배운 것이다. 그의 독학 시기는 합창단원 활동이 끝날 무렵이거나 그곳을 떠난 직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하이든은 18세 때부터 개인 지도, 연주, 작곡을 하며 그의 언급대로 "고민스런 몇 해"를 보낸 후 포르포라(N. Porpora, 1686~1768)의 반주자가 되었다.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보헤미아적-만하임적 성격의 <교향곡 1번>, <살베 레지나>(Salve Regina), <쳄발로 3중주>등을 작곡하며, 몬(M.G. Monn, 1717~1750), 바겐자일(G.C. Wagenseil, 1715~1777), 글루크(C. Gluck, 1714~1787) 등 유명한 작곡가들과 친교를 맺었다. 1759년에는 모르친(Morzin) 백작의 악장에 임명되나, 그해에 오케스트라가 해체되어 빈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가발사의 딸인 마리아(Maria Keller)와 결혼하였지만, 가정 생활은 평탄치 못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이든은 1761년 5월 1일 헝가리의 귀족인 에스테르 하지(P.A. Esterházy) 후작의 부악장으로 임명되어 아이젠슈타트(Eisenstadt)로 이사하였다. 그는 후작을 위해 여러 개의 바리톤 삼중주곡과 <에스테르하지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1766년 베르너(G.J. Werner, 1693~1766)가 사망한 후 하이든은 악장이 되었다. 그는 예술과 자연이 화려한 방식으로 결합된 후작의 여름 별장 안팎의 모든 행사와 관련하여 필요한 음악을 작곡하고 지휘하는 일뿐만 아니라 악보의 정비, 악기의 보수, 가수나 연주가의 계약과 인사 등 악단 관리도 책임져야 하였다. 또한 연주력이 뛰어난 궁정 관현악단을 위해 많은 교향곡들을 작곡하였는데, 1772년에는 <고별 교향곡>(Abschied Symphonie)에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근무하던 연주가들의 여름 휴가를 청원하는 강력한 음악적 메시지를 담았고, 이 연주에 감동받은 후작은 즉시 이들의 휴가를 허락하였다.
1768년에 하이든은 오페라 극장의 개관 공연으로 <가희>(歌姬, Lo speciale)를 무대에 올렸다. 당시 빈의 음악문화는 이탈리아 음악가들과, 그들의 이탈리아 오페라에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하이든은 1773년에 후작궁을 방문한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40~1780)를 위한 오페라 <오판된 부정>(L'infedelta delusa), 마리오네트 오페라 <필레몬과 바우치스>, <무인도〉(1779), <아르미다>(Armida, 1783), <페넬로페>(1796)등 지속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창작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교회 음악도 여러 곡 작곡하였다.
1780년대는 하이든의 첫 절정기였다. 그의 작품들은 빈과 런던에서 속속 출판되며 유럽의 도시들에서 연주되었고,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자 외국에서 작곡 의뢰들이 쏟아졌다. 교향곡 제82~87번(1785~1786)은 파리의 관현악 연주 단체를 위해 작곡한 것이고, 수난곡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Die sieben letzten Worte unseres Erlösers am Kreuze, 1787)은 스페인의 카디스(Cádiz) 주교좌 성당을 위한 위촉 작품이다.
1790년대는 하이든의 마지막 절정기로, 그의 대표적인 걸작들이 작곡되었다. 1790년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니콜라우스 후작이 사망하자 후계자인 안톤 후작은 관악 합주단만을 남기고 궁정 오케스트라를 해산하였다. 하이든은 악장을 사임하고 빈에서 '자유 예술가' 의 삶을 시작하였으며, 런던에서 활약하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예술 기획가였던 독일인 잘로몬(J.P. Salomon)의 '교향곡 12곡 작곡, 런던에서의 연주' 제안을 허락하였다. 1791 ~1792년, 그리고 1794~1795년의 런던 잘로몬 콘서트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영국 국왕인 조지 3세(1760~1814)는 하이든에게 영구 체류를 권유하였으나 그는 1795년 8월 15일 귀국길에 올랐다.
1794년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사망 후, 작위를 계승한 미클로슈 2세는 다시 하이든을 악장으로 초빙하여 궁정 악단의 재건을 꾀하였다. 하이든은 1796~1802년까지 6개의 미사곡과 <천지 창조>(Die Schöpfung, 1798) 등 2개의 오라토리오를 연이어 작곡한 후 창작 활동을 접었으며, 1804년에는 43년 동안의 궁정 생활에서 은퇴하였다. 그리고 1809년 5월 31일 오전 0시 40분 빈 근교의 굼펜도르프(Gumpendorf) 자택에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6월 1일에 이곳 성당에서 거행된 장례 미사는 그의 동생인 요한 미카엘 하이든(J.M. Haydn,1737~1806)의 <레퀴엠>과 함께 거행되었다. 2주 후인 6월 15일, 빈의 시민들은 도심의 쇼텐 성당에서 하이든 추모식을 모차르트(W.A. Mazart, 1756~1791)의 <레퀴엠>연주와 함께 엄숙하게 거행하며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유해는 훈트슈투름(Hundsturm)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헝가리 아이젠슈타트의 베르크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하이든 탄생 200주년이 되던 1932년,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그의 공적을 기리며 하이든의 유해를 석관에 옮겼다.
〔하이든과 고전주의〕 하이든은 모차르트, 베토벤(L.van Beethoven, 1770~1827)과 함께 18세기 빈 중심의 고전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였다. 유럽의 18세기를 주도하였던 계몽주의는 신 중심주의적 중세를 극복한 15세기의 인본주의에서 출발하였으나, 인본주의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들어올린 반면 살아 숨쉬는 유기적 생명체로 수용하지 못한 것을 성찰하였다. 또한 이러한 경향은 감정을 앞세워 인간을 '느끼는 존재' 로 파악한 17세기의 바로크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음을 고백하며, 인간을 감정과 이성 곧 느낌과 분별력을 함께 소유한 성숙한 존재로 파악하였다. 성숙한 인간의 낙관주의는 지나친 과장, 감정, 인위성과 같은 바로크적 생활 방식을 거부하며 비인간적인 옛 봉건 질서를 붕괴시켰으며(중심의 상실 시대), 인간의 분별력에 대한 믿음으로 단순성과 자연스러움에 대한 동경을 싹틔웠다.
하이든의 음악사적 업적은 무엇보다 그의 '보편적 음악'에 대한 창작 의지에 있다. 그는 전세계 인류가 이해하는 초국가 · 초민족적 음악을 지향하였으며, 이를 위해 인간의 표현 욕구를 작곡 규범으로 철저히 제어하여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이것은 하이든의 화성적 음악 언어가 합리적 서양 음악을 절정으로 이끌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이든은 정신과 감정을 형식과 내용처럼 대조적인 균형성 안에서 일치시켰다.
하이든의 또 다른 업적은, 그가 '테마 가공 작업' 을 통해 음악에 '발전' 개념을 추가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1760~1770년대의 이른바 '단순 테마 작업' 과 달리, 하나의 테마나 모티프를 축소하거나 확대하는 가공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이었다. 하이든이 1782년 자신의 현악 사중주 <러시아 4중주곡>(op. 33, 총 6곡)에서 처음 선보인 이 '테마 가공 작업' 방식은 음악을 '반복' 이 아닌 '발전'의 대상으로 파악하였다. 모차르트는 이에 큰 충격을 받고 6곡의 현악 사중주곡을 작곡, 헌사를 붙여 하이든에게 증정하여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하이든도 모차르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24살의 간극을 뛰어넘은 두 대가의 이러한 우정에 베토벤은 큰 감동을 받아, 하이든의 '발전적' 테마 가공 작업 및 모차르트의 성악적 선율과 표현적 반음계를 수용하여, 한 악곡(악장)을 '제시부 · 발전부 · 재현부' 로 구성하는, 고전 시대 기악 음악의 핵심 형식인 새로운 소나타 형식을 완성하였다.
하이든은 41개의 피아노 삼중주, 70개 이상의 현악 사중주 등 많은 실내악 작품 외에도 104곡 이상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1759~1795년까지의 이 교향곡들은 모차르트가 41개, 베토벤이 9개를 작곡한 것에 비하여 월등히 많은 작품수인 것이다. 하이든의 초기 교향곡들은 악장수가 일정하지 않은 디베르티멘토(divertimento)와 흡사하며, 아직은 미뉴에트(minuet)가 없는, 밝고 자유로운 성격의 로코코 양식에 의존적이었다. 1766년 악장이 된 이후의 40여 개 교향곡들은—악단의 토마지니(바이올린), 바이글(철로) 등 뛰어난 독주자들을 위한—옛 바로크의 콘체르탄테(concertante) 양식과 이탈리아의 선율, 만하임 악파의 표현성, 보헤미아의 감정 고조 등 새로운 갈란트 양식을 혼합한 것들로, 39번 g단조(1766), 44번 e단조(1773, 장송 교향곡), 45번 f#단조, 46번 c단조(1770년경) 등 단조가 많다. 그러나 점차 감정과다와 질풍 노도의 시대 사조를 반영하며 바로크를 극복하고 단순하고 자유스런 선율을 구사하며, 미뉴에트를 포함한 4악장의 고전 시대 교향곡의 틀을 확립해 나갔다. 부드럽고 화려한 1780년대의 파리 교향곡(82~87번, 1787~1788)을 비롯하여, 1790년대의 12개 런던 교향곡은 하이든의 대표적 교향곡들이다. 교향곡 94번 〈놀람〉, 98번 <협주 교향곡> 등 6개의 초기 런던 교향곡과 교향곡 100번 <군대>, 101번 <사계>, 103번 <큰북 연타〉, 104번 <런던> 등 6개의 후기 런던 교향곡은 베토벤 교향곡의 출발점이 되었다.
〔교회 음악〕 하이든은 탁월한 교회 음악 작품들로 서양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는 바흐(J.S. Bach, 1685~1750)나 다른 고전 작곡가들처럼 근본적으로 기악적 사고의 소유자였으나, 양적으로는 기악 음악과 성악 음악이 거의 비슷하다. 그리고 그의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이 미사곡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그가 '실천하는' 가톨릭 교회 음악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요제프 2세 (1765~1790)의 개혁 칙령으로 모든 '사치' 가 금지되었던 1782년부터 런던에 체류하던 1790년대 전반까지를 제외하면 일생 동안 교회 음악을 작곡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합리주의의 시작과 교회의 세속화를 의미하는 이 칙령은 독일어로 된 단순한 민족적 교회 성가를 요청하며 빈과 오스트리아의 풍부한 교회 음악 전통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하이든과 슈베르트도 큰 규모의 화려하고 장엄한 라틴어 미사곡 대신 독일어 미사곡을 작곡하였으며, 1791년 비엔나에 이주한 자유 예술가 모차르트가 교회 음악의 주문을 받지 못한 채 14년간 미사곡 창작을 포기한 것도 이 칙령과 관련되어 있다. 이 칙령은 요제프 2세 황제의 서거 후인 1796년에 취소되었다.
미사곡 : 하이든은 습작 시기에 작곡한 첫 미사곡인 <짧은 미사곡>(Missa brevis, F, 1749/1750)을 제외하고 총 12개의 미사곡을 남겼다. 이 미사곡들은 요제프 2세 황제의 개혁 칙령을 중심으로 6개씩 두 그룹으로 나뉜다. 6개의 전기 미사곡은 하이든이 신축된 후작 궁정의 악장이 된 1766년부터였다. 1782년까지 미사곡 3~8번까지를, 그리고 칙령이 취소된 1796~1802년에 미사곡 9~14번까지를 작곡하였다. 3번 <성 체칠리아 미사곡>(Missa Sanctae Ceciliae, C장조, 1769~1773), 4번 <순트 보나 믹사타 말리스>(Sunt bona mixta malis, d단조, 아카펠라, 1765~1768, 분실), 5번 <성 요셉 미사곡>(Missa Sancti Josephi, Eb., 큰 오르간 미사곡, 1776), 6번 <성 니콜라오 미사곡>(Missa Sancti Nicolai, G장조, 1772), 7번 <성 요한 작은 미사곡>(Missa brevis Sancti Joannis de Deo, Bb장조, 작은 오르간 미사곡, 1782), 8번 <마리아 미사곡>(Mariazeller Messe in C, 1782) 등 전자의 미사곡들은 그 대부분이 4성부(SATB) 독창자들(7번은 S)과 4성부 합창, 관악 내지 소규모의 관현악단과 오르간으로 편성되었다. 오르간은 임의(3, 6, 8번) 혹 의무(2, 7번)로 요구되었다.
한편 9번 <성 베르나르도 미사곡>(Missa Sancti Bernardi de Dooida, Bb, 거룩한 미사곡, 1796), 10번 <전시(戰時) 미사곡>(Missa in tempore belli, C, 팀파니 미사곡, 1796), 11번<넬슨 미사곡>(Nelson Mass, d, 비탄 미사곡, 1798), 12번<테레지아 미사곡>(Theresien Messe, Bb, 1799), 13번 <천지 창조 미사곡)(Schöpfungsmesse, Bb, 1801), 14번 <하모니 미사곡)(Hamoniemessse, Bb, 1802) 등 후기 미사곡들은 지방색이나 일회성 행사용의 차원을 뛰어넘는 걸작들로 평가된다. 이 미사곡들은 무엇보다 독주자들과 합창의 상호 보완성 등 음악 구조의 강화, 런던 교향곡의 경험을 반영한 관현악 기법의 보강 등으로 전기 미사곡들과 근본적으로 차별화된다. 여기서 오르간은 5개 미사곡에서 임의로 생략할 수 있게 하였고, 그 자리에 첨발로 등의 계속 저음을 요구한다(11번은 오르간 의무). 후기 미사곡들은 전기 미사곡과 달리 아카펠라나 관악기 편성을 포기하고, 모두 관현악 편성을 의무화하였다.
오라토리오 : 하이든은 6곡의 오라토리오를 남겼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들은 19세기 시민적 음악 문화가 창조한 오라토리오 운동을 주도하며, 오라토리오 작곡의 기준이 되었다. 오라토리오는 독창, 합창, 오케스트라를위한 교회 작품으로 서술자(Historicus, Testo), 성서의 내용을 낭송하는 레치타티보, 그리고 갖가지 음악적 부분들을 묶으며 연기 없이 음악회 방식으로 공연되었다.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창작시기는 미사곡과 마찬가지로 요제프 칙령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육중하고 어두운 <성모애가>(Stabat Mater, 1767), <박수 갈채>(1768), <토비아의 귀환>(1775)은 그 이전에, 그리고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 <천지 창조>, <사계>는 그 이후에 쓰여졌다.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은 하이든이 생존해 있을 때 성공한 대표 작품이지만, 현재는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그리고 프리베르트(K. Friebert, 1736~1816)가 편곡한 이 곡을 하이든이 재수정한 것이 <토비아의 귀환>이다. 하이든의 <천지 창조>는 고전 시대 오라토리오의 절정으로, 바흐의 <성탄 오라토리오>(1733/1734)와 헨델(G.F.Händel, 1685~1759)의 <메시아>(1742)를 베토벤의 〈올리브 동산의 예수>(1800), 멘델스존(F. Mendelssohn, 1809~1847)의 <성 바오로>(1836)와 <엘리야>(1846), 프랑크(C. Frank, 1822~1890)의 <구원>(1874), <축복>(1879), 쇤베르크(A. Schoenberg, 1874~1951)의 <야곱의 사다리>(1922) 등으로 연결시키는 핵심 교량 역할을 하며, 오늘날도 여전히 대단한 사랑을 받고 있다.
이 밖에 하이든의 교회 작품들로는 <살베 레지나>(E, 1756 ; g, 1771), <성체 찬가>(Lauda Sion, 1769?), <테 데움>(C, 1765? ; 1800), 봉헌송 <논 노비스 도미네>(Non nobis, Domine, d), 6개의 <영어 시편>(1794/1795) 그리고 독창과 현악기를 위한 민속적 칸틸레나(cantilena) 등 양식과 규모가 다양한 23곡 정도가 전해진다. 이 교회 작품들은 주로 하이든의 창작 초기에 작곡된 것들이다.(→ 가톨릭 음악 ;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 미사곡 ; 오라토리오 ; 푹스, 요한 요제프 ; 하이든, 요한 미카엘)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수, <음악은이> 2, 음악춘추사 2000, pp. 335, 355~361, 379ff, 3971/H.P. Larsen, 《NGDMM》 8, pp. 328~407/ R.Schaal, 5, pp. 1857~1933/ W.Gurlitt ed., Riemann Musik Lexikon, Personenteil 1, Schott's Soehne, 1959, pp. 750~754. [趙善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