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독일의 왕(1002~1024)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1014~1024). 라틴어식 이름은 헨리코(Henricus). 축일은 7월 13일.
[생 애] 973년 5월 6일 바이에른(Bayem), 혹은 힐데스하임(Hildesheim)에서 바이에른의 공작 논쟁꾼(the Quarrelsome) 하인리히 2세와 부르고뉴(Burgogne)의 왕인 콘라트(Conrad)의 딸 기셀라(Gisela)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 작센 왕조를 시작한 하인리히 1세(918~936)의 손자였지만, 오토 2세(973~983)와 오토3세(983~1002)에게 모두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바이에른에서 추방당하여 오랜 세월을 보내야 하였다. 하인리히는 프라이징(Freising)의 아브라함 주교에게 교육을 받다가 힐데스하임의 주교좌 성당 학교를 졸업한 후, 바이에른으로 가서 로렌(Lorraine) 지역의 수도원 개혁을 소개한 레겐스부르크의 볼프강(Wolfgang of Regensburg)주교에게서 배웠다. 995년에 아버지가 죽자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4세(995~1005)가 되었고, 998년에는 룩셈부르크의 여백작(女伯爵)이자 후에 시성(諡聖)된 구네군다(Cunegunda, 978~1033/1039)와 결혼하였다.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교육을 받은데다 사제직에 관심을 두었던 하인리히는, 경건한 삶을 살았지만 또 한편 오토 대제(936~973)처럼 교회를 권력의 지렛대로 활용하였다. 건전하고 상식적이면서 신중한 사람이었던 그는 활기차고 양심적인 인물로, 분열된 제국을 통합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늘 노력하였다.
황제로서의 활동과 사상 : 하인리히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은 평탄치 않았다. 1002년 1월 23일 오토 3세가 이탈리아의 비테르보(Viterbo) 근처에서 후계자 없이 죽자, 세 사람의 후보자가 각기 독일의 왕권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그중에서 하인리히가 가장 강력히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였으나 귀족들 상당수가 그의 즉위를 반대하거나 후보자로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시신을 아헨(Aachen)으로 운구하기 위해 바이에른을 통과하던 오토 3세의 측근들을 습격하여 왕의 창을 비롯한 왕권의 상징물들을 빼앗아 입지를 강화하는 등, 일련의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이 왕권의 후계자임을 확인시켰다. 결국 대다수 영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해 6월 마인츠에서 비록 소수이지만 영향력이 큰 귀족과 교회 인사들에 의해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마인츠의 빌리기스(Willigis) 대주교에게 도유를 받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최종 승인을 받기까지는 1년이 더 걸렸다.
하인리히가 독일의 왕으로서 추진하였던 일들은 영주권에 대한 왕권의 확립, 교회와의 복잡하고 다중적인 관계 해결 모색, 영토 통합을 위한 노력, 왕의 통치에 신적인의미를 부여하여 격상시키는 것 등이었다. 그의 대외 정책은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두드러진다. 즉 폴란드의 공작(992~1024)이자 초대 왕이 된 볼레수아프 1세(BolesławⅠ, 1024~1025)와의 오랜 분쟁, 선왕 오토 3세의 정책 중 이탈리아에 대한 야심의 변경, 서부 지역을 안정시키고 독일 왕이 부르고뉴 왕국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 등이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독일 왕국의 동쪽 국경은 안정되기 시작하였으며, 10세기에 활발했던 선교적인 팽창은 둔해졌다.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펼치던 하인리히는 통치기간 동안 영토를 넓히려는 볼레수아프 1세를 싫어하였으며, 그래서 가톨릭 신자인 그에게 맞서 1003년에는 이교도인 리우티티안족과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복음 전파보다 영토와 정치적 세력 확장에 더 관심을 두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귀족들은 마지못해 그에게 협력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난과 비협조로 왕권과 왕명이 효과적으로 집행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하인리히는 1005년과 1013년, 그리고 1018년에 볼레수아프 1세에게 제국 동부의 땅들을 영지로 내어주는 협정에 동의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조치를 통해 볼레수아프 1세가 보헤미아를 차지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를 중시한 선왕 오토 3세와는 달리, 하인리히는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 황제의 지배적인 입지가 확보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오토 3세는 재임 기간의 반을 이탈리아에서 보냈지만, 그는 아주 짧은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그리고 단 세 번, 이탈리아의 왕이라고 자처한 이브레아(Ivrea, Eporedia)의 후작 아르두인(Arduin)을 진압하기 위해서 1004년에, 교황 베네딕도 8세(1012~1024)가 집전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서(1014. 2. 14),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동로마 제국 및 롬바르디아의 군주들의 위협으로부터 교황권을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1021~1022년에 카푸아(Capua)와 살레르노(Salerno)에 대한 황제권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이탈리아 원정을 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독일 관리들에게 이탈리아 행정을 맡김으로써 이탈리아에 대한 강력한 지배권을 선언하였다.
교회에 대한 정책 : 하인리히는 왕권이 공식적으로 교회에 의해 세워지지만, 그렇다고 세속과 교회의 모든 영역에서 왕권 행사가 위축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독일의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에 대하여 왕권을 강화했으며, 교회의 폭넓은 개혁 운동을 지원하면서 부유한 교회의 재산을 일부 몰수하여 가난한 교구에 분배하는 등, 교회 재산을 임의로 취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주들의 힘이 결집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귀족들에게 제한을 가하는 여러 조치들을 시행하였다. 남부의 공국들을 좀 더 확고하게 제국에 편입시키고, 여러 세력가들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그 권력을 교회 인사들에게 분배한 것이다. 또한 그는 교구와 수도원에 세운 왕실 교회들이 세력을 확장하도록 도와, 교회에 대한 왕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주교와 아빠스 서임 및 임명권을 행사하여 측근 중에서 원하는 사람들을 성직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주교들은 제국의 관리로서 왕에게 무제한적인 복종을 바쳐야 했고, 아빠스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는 왕의 권한과 왕실 교회를 활용하여 권력을 확고하게 하고 영토를 통합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수도원과 주교좌 성당의 기도회에 참석하였으며, 몇몇 주교좌 성당의 참사 위원이 되었다. 교회에 관련된 그의 업적 중 가장 큰 것은 1004년 메르제부르크(Merseburg) 교구를 복구한 것과 1007년 밤베르크(Bamberg) 교구를 설립한 것이다. 또한 여러 수도원들을 세웠으며, 권력을 독점하던 왕실 수도원들을 개혁시켰다. 또 대립 교황인 그레고리오 6세(1012)에 맞서 교황 베네딕도 8세를 지지하였고, 독일의 시노드들에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1014년과 1022년에는 교황과 함께 개혁을 위한 시노드를 개최하여 참석하였다. 주교의 허락 없이 교황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소집된 이 시노드에서 그는 개혁파들의 편에 섰으며, 나아가 주교의 불법적인 권한 행사에 맞선 국제적인 절차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함께했던 프랑스 왕의 죽음으로 좌절되었다.
그는 1024년 7월 13일 괴팅겐(Göttingen) 근처의 그로나(Grona)에서 세상을 떠나 밤베르크의 성당 묘지에 안장되었다. 성녀 구네군다와의 혼인 중에 동정을 지켰기 때문에 자식을 얻지 못했다는 전설이 남았으나, 실제로는 병 때문에 자식을 단념한 것이었다. 1146년 교황 에우제니오 3세(1145~1153)에 의해 시성되어, 중세 독일의 왕들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왕이 되었다.
〔평 가〕 하인리히는 냉정한 실천력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단기간에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황제로서의 권력과 명망을 회복한 점이 이를 입증해 준다. 그는 대내외적으로 교회를 보호하고 보급하며 선교하는 것을 국가의 과제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국내 정치에서 더욱 철저하게 제국 교회 제도를 완성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신성한 왕권을 행사하며, 성직자들을 자신의 주권의 강력한 지지자요 제국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보조자로 여겼다. 그가 상속권을 주장한 부르고뉴에서 시작된 수도원 개혁으로, 그와 절친하였던 오딜로(Odilo, 994~1049) 시대에 클뤼니 수도원을 모원(母院)으로 하는 '클뤼니 수도회' (Ordo Cluniacensis)가 설립되었다. 또한 하인리히는 1004년, 황제관을 받기 위해 로마에 갔을 때 신경(信經, credo)을 미사에 도입하도록 교황에게 요청하여, 이후 로마에서도 이를 사용하게 되었다. (⇦ 헨리코 2세 ; → 구네군다)
※ 참고문헌 J. Bernhardt, 《NCE》 6, 2003, pp. 744~745/ P. Antin, 《Cath》 5, pp. 613~614/ A. 프란츤, 최석우 역, 《세계 교회사》, 분도 출판사, 2001. 〔편찬실〕
하인리히 2세 (973~1024)
Heinrich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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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하인리히 2세 성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