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12
지난 일에 대한 억울함, 원통함, 원망, 뉘우침 등의 감정과 관련하여 맺힌 마음. 가장 한국적인 슬픔의 정서이다. '원한' (怨恨)이라고도 한다.
〔발생 원인과 증상〕 원한은 한국인의 정신 · 심리적 외상(外傷)이자 자상(自傷)이다. 흔히 한국인은 원한을 '마음에 박힌 옹이'나 '마음에 맺힌 고'(苦)라고 말하며 아픔이나 쓰라림의 증상을 호소한다. 하지만 원한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정' (情), '신명' (또는 신바람), '흥' (興), '화증' (火症) 그리고 '원한' , 이 다섯 가지는 한국인의 정신과 감정에 걸쳐 전형적인 복합 증후군을 이루고 있다. 이것들은 한국인의 정신 · 감정 증후군의 양지와 음지, 햇볕과 그늘이다. 어느 것을 빼어도 한국인의 정신과 감정 세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정서나 서정에 걸쳐 있기도 하다. 때로는 한 가지만이 단독으로 문제 될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복합적으로 서로 물고 물려 한국인 의식의 내용물이 된다. 무엇보다 시(詩), 내방 가사나 민요들이 노래한 서러움, 서글픔, 애달픔, 노여움, 구슬픔 더러는 고달픔 그리고 한스러움 등은 이들과 전적으로 무관할 수 없다.
이러한 다섯 가지 한국인 마음의 가닥 혹은 올은 서로 날줄과 씨줄로 짜여지고 엮여지고, 또 마치 수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그 다섯이 동시에 그런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그 일부는 서로 연줄로 엮여져 있다. '정' 에 금이 가거나 끊기면 '화증'에 휘말리고 '원한' 이 맺히게 된다. 꼬였던 '정'이 풀리면 '신명' 도 나고 흥청거리게도 된다. '화증'과 '원한' 을 한국인 마음의 음지로 보고 '신명' 과 '흥' 을 양지라고 본다면, '정' 은 이 양극 사이의 조정자 자리에 있는 것이다.
'화증'은 '원한' 에 가깝다. 잠복된 원한이 화증을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한에 사로잡혔을 때나 화증에 시달릴 때 모두 가슴이 타고 애가 타는 것은 똑같아서 원귀의 일부는 화마(火魔)가 된다는 속신(俗信)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원한이 늘 화증으로 경험되는 것은 아니다. 차가운 원한, 얼음이나 서릿발처럼 냉혹한 원한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여성 원령(怨靈)이 달밤에 찬바람과 더불어 나타난다는 속신을 참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달빛은 냉랭함의 빛이다. 원한을 품고 죽은 여성이 뱀으로 화신(化身)한다는 속신도 싸늘하기가 얼음이다. 이처럼 한국인의 원한은 불과 얼음 사이를 오간다. 그렇기에 '화증'의 또 다른 징후는 얼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파괴와 저주 그리고 파멸의 검은 기운으로는 불과 얼음이 다르지 않다. 화증이 한국인의 '사이코소마틱' (psychosoma-tic)한 질병이라면 '냉증' 역시 그와 다를 바가 없다. 마음의 아픔과 상처가 생리적 혹은 육체적인 통증으로 경험될 때, '가슴이 탄다' 고도 하고 '애가 끓는다' 고도 한다. 내장이 잘리고 끊어지는 아픔, 그것은 극히 냉혹한 아픔일 것이다. 또한 '등골이 오싹하다' 거나 '심신이 으스스하다' 혹은 '가슴에 냉기가 돈다' , '으슬으슬 한기가 든다' 라고 말할 때, 그것 또한 심리 · 육체적인 어떤 병증(病症)에 관한 호소이다. '싸늘하다' 는 것은 죽음의 함축성을 갖고 있고, '으스스' 는 어둠을 연상시킨다. '오싹' 은 공포와 동의어가 된다. 어느 것이나 '정' 과는 먼 관계에 있다. 따라서 한국인의 원한을 말할 때, 화증만 말하고 냉증을 말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열(熱)과 한(寒)은 한국인의 원한에서 서로 상반되는 두 극지(極地)이다.
그런데 '정' 의 파탄은, 특히 가족 간 '정' 의 파탄은 원한을 불러오고 화증을 일으킨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가족주의에서 '정' 은 인연이기 전에 피이고 살이며 뼈였다. 온 가족이 세대를 넘어서 서로 하나가 되게 운명지어진 무엇이므로, 그 파탄은 한국인에게 치명적이다. 그것은 핏줄의 잘림이고 살의 찢어짐이고 뼈의 부서짐이다. 한국인이 경험한 정신적 외상(外傷, trauma)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다. 오구굿, 저승굿 등 죽은 이를 위한 위령(慰靈)의 굿에서는 특히 이 점이 크게 부각된다. 무당에 의해서 불려 나왔거나 무당 몸에 실린 사령(死靈)의 '넋두리' 또는 '푸념' 은, 상처나고 찢긴 정을 둘러싼 '이야기' (discourse)이다. 그것은 '정' 의 '고통지' (苦痛誌)이고 '병력지' (病歷誌)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정' 의 회복은 '흥' 을 돋구고 '신명' 을 불러온다. 오구굿의 대단원은 화해한 사령과 생령(生靈)이 푸짐하게 흥청대고 신명을 나누는 것으로 끝난다. '신명' 은 타고 또 타도 모자라 불완전 연소로 지글대던 '화증' 의 불을 완전 연소시키는 불길이 된다. '화증' 은 지글거리고 이글대지만 재가 되도록 타지도 못하고 활활 타오르지도 못한다. 감정의 불완전 연소이기 때문이다. 그건 부글대는 불기운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불완전 연소하는 마음의 불씨를 활활 타게 하는 계기가 '신명' 이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얼음에 박힌 '원한' 을 녹이는 불길이 되기도 한다. '흥' 이나 '신명' 은 회복된 '정' 에 의해서도 마련되지만, '흥' 이나 '신명' 자체가 '정' 의 회복을 부추기기도 한다. 그것은 '정' 의 회복과 신명 돋구기가 상호 보완하고 상승 작용을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신바람' 은 어원상 귀신과 맺어져 있다. 무당이 귀신을 자신의 몸에 싣고 그것과 일체되었을 때, 그 귀신의 기(氣)를 자신의 기처럼 뿜어대고 솟구치게 하는 것이 신바람이고 '신명내는 일' 이다. 귀신은 '신명' 이라고도 한다. 한데 무당이 신에게 지피는 순간은 굿판이 가락과 춤과 놀이로 절정에 이르는 때이다. 그래서 '신남' 은 신과의 혼연일체를 보장하는 도취이며 환희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오구굿판의 신명은 그 전형이다. 바로 그때, 죽어서도 저승에 못 가고 있는 떠돌이 넋과 살아 있는 가족과의 화해가 이룩된다. '정' 의 신명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다.
〔상징성과 감정의 양상〕 '정' 의 상징은 감싸 안음이고 부둥켜 안음이다. 그래서 '정' 의 상징으로는 원(圓)이나 온기(溫氣)가 스민 둥근 품이 가장 적절하다. 그것은 돌보기, 보살피기, 베풀기, 용서하기, 품어 주기 등의 동작으로 구체화될 성질의 것이다. 그렇기에 '정' 의 파탄은 한국인에게 소외이고 고독이며 배반이다. 어딘가 낯선 곳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듯한 감정의 외상이 원한의 병인(病因)이다. 그것은 적어도 가장 크고 가장 전형적이면서 가장 무서운 원한의 동인이다. 따라서 원한을 한국인의 한국인다운 '외상' 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물론 '정' 의 파탄만이 원한의 유일한 병인인 것은 아니다. 욕구와 의지의 좌절, 절대적이었던 소망의 꺾임, 비중이 아주 컸던 어떤 것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의 무너짐, 남녀 간 애정의 상실(喪失) 등이 이기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할 마음의 상처로 고질화되면, 한국인은 원한에 사로잡힌다. 이런 경우는 자가 치유나 의원의 손에 의한 치유가 불가능할 상흔이다. 또한 만성화되고 다스리기 힘든 마음의 병이고 아픔이다. 여기에는 자상(自傷)만이아니라 타상(他傷)도 포함되며, 이로 인해 한국인은 만성적으로 불행하게 된다. 자탄(自歎)만이 아니라 자탄(自彈)하면서 세상과 남을 원망하고, 결과적으로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성인임에도 격한 자폐증에 빠지기도 한다. 세상과 남을 기피하다가 인간을 등지고 세상을 등져, 화증이나 정반대로 냉증에 빠지게 된다. 원한은 타다 남은 숯덩이인데 그나마 꺼질 줄 모르는 불씨가 되는가 하면, 이와는 역으로 영영 녹을 줄 모르는 얼음덩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원한은 불길이나 불씨, 얼음이나 끊어진 줄, 부서진 원, 조각난 작품등으로 표상(表象)되기도 하며, 달리 고나 옹이, 못으로 표상되기도 한다. 원한은 마음의 맺힘이고, 마음에 무엇인가 이질소 혹은 암종(癌腫)이 박힌 것이라고 한국인은 생각하는 것이다. 고, 옹이, 못 등은 무엇인가 응체(凝滯)된 것, 곧 마음의 체증이나 체기(滯氣)이다.
그래서 생리의 유통이 막히고 그로 인해 감정이나 삶의 운행도 틀어막힌 어떤 마음의 골짜기나 막장이 한국인에게는 원한이 된다. 음식을 먹어서 식체(食滯)에 걸리듯이,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잘 이뤄지지 않는 상태의 마음의 체증, 곧 '심체' (心滯)가 원한이다. 이러한 마음의 체증이나 체기가 열기(熱氣)로 경험되는 것이 화증이고 냉기(冷氣)로 경험되는 것이 냉증이라고 봄으로써, 원한과 심체와 화증 및 냉증을 연관짓는다. 심체가 화증과 냉증을 유발하는 것이지만, 심체의 동인(動因) 하나에 '정' 의 파탄이 이루어진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만큼 한은 한국인의 복합적인 심성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이러한 상징을 수반하고 있는 원한은 서러움, 서글픔, 애달픔, 슬픔, 아림, 쓰라림, 저림, 억울함 등 여러 가지 감정 상태와 겹쳐져 상심(喪心)이나 상심(傷心) 혹은 애상(哀傷)으로 포괄되기도 한다. 물론 미움, 앙심, 저주심(詛呪心), 복수심, 살기(殺氣), 파괴 충동이나 공격 충동과 동화될 수도 있는 것이 원한이다. 이것들은 원한의 적극적인 일면이다. 하지만 파괴 충동이나 공격 충동과는 반대로 강한 성취 동기, 집념 또는 망집(妄執)의 경지에 무한히 근접할 성취 동기가 되어 달아오르는 경우도 원한이라 여겨진다. '내가 이것을 하지 못하고 죽으면 눈도 감지 못하리라!' 라고 할 때, 예상되는 원한은 성취 동기를 미리 촉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원한의 적극적인 심리 양태에도 파괴와 성취의 양극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한의 감정 상태는 단색(單色)도 아니고 단조(單調)도 아닌, 매우 복합적인 것이다. 단순하다면 이미 그것은 원한이 아닌지도 모른다.
〔원령과 민속 신앙〕 '원' (寃)과 '원' (怨)은 상통하면서도 서로 다른 의미가 있다. '원' (寃)은 어원상 무고한 죄를 뒤집어 쓰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억울함이나 원통함에 겹친 분함으로, 부당한 짓을 당한 피해 의식이 그 주된 내용을 이룬다. 이에 비해 '원' (怨)은 신령(神靈)에게 원통함을 호소하거나 딱한 사정을 애소(哀訴)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물론 이 경우에도 상당한 피해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이에 비해서 '한' (恨)은 사악한 힘에 눌려서 더 이상 뜻을 펴지 못함을 의미한다. 좌절에 따른 마음의 상처가 곧 '한' 인 것이다. 한탄(恨歎), 회한(悔恨) 등의 복합어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한' 에는 정신적 외상, 남이 입힌 마음의 상처뿐이 아니라 자상도 포함되고 따라서 타인 지향적인 공격 충동 외에 자탄, 곧 자기 스스로를 탓하고 나무라는 상심도 포함된다. 말하자면 정신적인 자해(自害)나 자학 의식도 무시할 수 없다. 원한에 사무친 여인이 곧잘 '이 못난 년, 차라리 죽어야지!' 라고 자탄하는 소리, 자해하는 소리는 드물지 않게 듣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적인 언어 관습과 그에 투사된 의식 등으로 미루어 헤아리자면, '원' 과 '한'과 '원한' 은 등가(等價)로 사용되고 있으며, '원' (怨),'원' (寃) 및 '한' (恨)의 원천적인 자의(字意)를 포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같이 다양하고도 복합적인 한국인의 원한 의식은 원령(怨靈) 또는 원귀에서 가장 뚜렷하게 구체화되고 또 전형화한다. 객귀 또는 잡귀라고도 칭해지는 원귀 혹은 원령은, 전부는 아니라 해도 보통 원한을 품고 죽은 이의 넋이다. 한국의 무속 신앙에서 그리고 한국인의 속신에서 이 원령이 차지하는 몫은 매우 크다. 공포와 짝지어진 원령 숭배를 주로 할 경우 이른바 '블랙 샤머니즘 (black-shamanism)이 대두한다는 이유에서 시베리아 원주민 샤머니즘의 검정과 한국 무속 신앙의 검정은 상통하고 있다.
한국에서 원령은 마을 공동체 혹은 지역 공동체의 주신(主神)으로 섬겨진다. 최영(崔塋, 1316~1388) 장군,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 공민왕(恭愍王, 1351~1374)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역사적 위상과 그에 비례하는 원한의 크기 탓에 서낭신 또는 당산신이 된 존재들이다. 이들 원신(怨神)들은 가진 바 권능의 크기도 그 원한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공포와 숭배가 반반인 셈이지만, 일반 서민의 처지에서는 자신이 살아 있는 원령으로서 갖고 있을 피박해 의식, 즉 자신의 피해 의식과 죽은 원령들의 상흔이 공감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드물기는 하지만 서민의 원령이 마을 서낭신 구실을 하는 사례도 있다. 처녀의 원귀인 '손각시' 와 총각 원귀인 '몽달귀' , '애기 귀신' 이 공포의 대상이자 숭앙의 대상으로 섬겨지고 있다. 이와는 달리 잡귀 또는 객귀라고만 호칭되는 무명의 원령들 또한 무속 신앙과 속신에서 적잖이 섬겨지고 있다. 심지어 조선 시대 궁중에서도 '여제' (厲祭)라는 이름으로 객귀에게 바치는 종교 의식이 거행되었다. 이들 객귀 또는 잡귀 중에는 더러 무당의 몸주, 곧 무당의 몸에 실린 귀신으로 섬겨진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진혼(鎭魂) 의식 혹은 천도(薦度) 의식이기도 한 오구굿은 가족의 원령에 바치는 한 집안 혹은 가정 차원의 의식이었다.
이들 다양한 검은 원령들은 무속 신앙 특유의 영혼관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죽은 이의 넋은 원칙적으로 저승으로 간다고 믿어져 왔다. 시베리아 인류학에서 범주화 된 바 있는 영혼이 그렇듯이 한국인의 넋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하나는 육체혼이고 다른 하나는 탈신혼(脫身魂) 혹은 자유혼이다. 전자는 육체를 떠나는 일이 없지만, 후자는 자유로이 육신을 들락거릴 수 있다. 즉 사후에 저승으로 가게 마련인 것이 자유혼이다. 하지만 누구나 임종 때 돌아보는 삶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 성취하지 못한 소망, 다하지 못한 책무 등과 그것들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처 등이 여한(餘恨)이나 원통함으로 남아 있다면 탈신혼은 저승에 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한국인은 이 상태를 일러 '죽어도 눈을 못 감는다' 또는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몸을 벗어난 탈신혼이 이승을 떠돌고 헤맨다고 믿는 것이다. 이게 바로 원귀이고 원령 혹은 잡귀 또는 객귀다. 인류학에서는 '떠돌이 혼' 혹은 '방랑 혼' 이라고 일컫는다. 갈 곳으로 못 가고 길을 잃은 '떠돌이 혼' 은 단순히 이승에 머물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 '검은 넋' 들은 자신들이 앓고 있는 마음의 환부를 남에게, 살아 있는 다른 이에게 전이하려고 기도한다. 이 '착오의 복수' 또는 '무차별의 저주' 가 언제, 어느 경우, 누구를 희생물로 삼을지는 알 수 없다. 하나 이것은 부당한 상처의 전가(轉嫁), 상흔의 떠넘기기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다른 이의 목숨과 운명에 대한 심술궂고 심통 사나운 '재뿌리기' 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원령은 여한을 풀고 저승길에 오른다고 믿어져 왔다. 그래서 원령은 단적으로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점은 가족이나 친척 간에도 다를 바 없었다. 그 결과 사령(死靈)과 생령(生靈)들 사이에는 상시(常時)로 갈등과 적대 관계가 야기되어 있었다.
한국 샤머니즘, 즉 무교에서 무당은 사령과 생령 사이에 있는 악연(惡緣)의 조절자 역할을 해 왔다. 무당은 '넋의 저승길의 길라잡이' 로서 그 몫을 다해 온 것이다. (→ 무교 ; 무당)
※ 참고문헌  김열규, 《한맥원류》, 주우사, 1981/ 최길성, 《한국인의 한》, 예전, 1991/ 천이두, 《한의 구조 연구》, 문학과 지성사, 1993. [金烈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