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공렬 (1913~1973)

韓玜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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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교. 제4대 전주교구장. 제6대 광주대교구장. 세례명 베드로.
1913년 2월 3일 서울 서대문구(현 중구) 만리동 1가 69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33년 4월 서울 경복중학교를 졸업하고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진학한 후, 1939년 6월 24일 명동 성당에서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 신부는 7월 약현(현 중림동) 본당의 8대 보좌로 부임하여 활동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있는 호세이(法政) 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다. 1944년 9월 법문학부를 졸업한 후 1945년에 귀국한 한 신부는 9월에 인천 박문여자중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1946년에는 서산(현 서산 동문동) 본당의 5대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약 1년간의 짧은 본당 사목 활동을 마감하고 1947년 4월 성신중학교(소신학교) 교장으로 부임한 후 1948년 9월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1949년 10월 동 대학 부학장, 1954년 10월 동 대학 학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0년 신학교 시찰을 위해 유럽으로 떠나 프랑스 쉴피스(Sulpice) 신학대학에 머물고 있던 한 신부는 1961년 2월 13일 전주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3월 12일 로마 우르바노 대학 성당에서 주교로 서품되었다. 서품 직후 귀국한 한 주교는 1961년 3월 29일 전주에서 착좌식을 가진 후 제4대 전주 대목구장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1962년 3월 10일 한국 교회에 정식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전주 대목구는 정식 교구가 되었고, 이에 교구에서는 1963년 6월 12일 교계 제도 설정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거행하였다. 한 주교의 재임 기간 동안 전주교구는 1966년 2월 인보 성체 수도회(후에 '성체회' 로 개칭)를 유치하였고, 10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사도회를 조직하여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강화하였으며, 1970년 10월에는 가톨릭 회관을 증축하여 그곳으로 교구청을 이전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 가운데 1971년 7월 14일 한 주교는 제6대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동시에 대주교가 되었고, 9월 8일 착좌식을 가졌다. 이후 광주대교구의 자립과 발전을 위해 힘쓰던 한공렬 대주교는 1973년 1월 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3월 7일 선종하여 광주 남동 본당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공렬 대주교는 《소화 데레사의 정신》(경향잡지사, 1953), 《결혼문답 : 회칙 가스띠 존누비아 해설》(경향잡지사, 1954), 《루르드의 성모》(경향잡지사, 1954) 등의 번역서를 남겼다.
※ 참고문헌  <가톨릭 시보> 1961년 3월 19일자 . 1971년 7월 18일자 · 1971년 9월 19일자 . 1973년 3월 11일자/ 《경향잡지》 904호 (1939. 6. 28) · 905 · 906호(1939. 7. 25) · 1261 호(1973. 4)/ 《隣保》(성청 인가 25주년), 인보 성체 수도회, 1986/ 《瑞山東門本堂 七十年史 : 1917~ 1987》, 天主教 大田教區 瑞山東門敎會, 1987/ 《博文五十年史》, 仁川博文女子中 · 高等學校, 1991/ 《천주교 전주교구사》, 천주교 전주교구, 1998. 〔梁仁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