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대륙 북동부의 한반도 남쪽에 위치한 민주 공화국. 공식 명칭은 대한 민국(大韓民國).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북한(北韓)과 대치하고 있다.
고조선 이후 삼국 시대, 통일 신라와 발해,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 오다가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나, 이후 국내와 국외에서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고,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에서 패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에 의한 군정(軍政)이 실시되면서 남 · 북으로 분단되었고,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후 8월 15일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이나, 실제 통치 영역은 휴전선 이남 즉 한반도 총면적 222,365k㎡의 약 45%인 99,601k㎡이다. 수도는 서울이며, 총인구는 2004년 12월 현재 49,052,988명이다. 종교는 샤머니즘, 불교, 유교 등 다양하며, 천주교는 18세기 말에 도입되어 100여 년의 박해를 겪은 후 1886년 한불 조약(韓佛條約)으로 선교의 자유를 얻었다.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2004년 12월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9.3%인 4,537,844명이다.
Ⅰ.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 배경
한국에 천주교회가 설립된 것은 1784년이다. 1783년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북경에 갔던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이 이듬해 2월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인 그랑몽(J.‑J. de Grammont, 梁棟材,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것이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이다.
〔예수회의 선교 노력〕 한국 천주교회는 18세기 말에 갑자기 성립된 것이 아니라, 17세기 이후 나라 안팎의 상황 변화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먼저 대외적인 상황 변화로는 근대 초기 지리상의 발견으로 초래된 서세동점(西勢東漸)을 들 수 있다. 서학(西學)이라 불리던 천주교가 항해술의 발달로 복음 전파를 위해 선교사를 먼 지역까지 파견하면서 중국과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고, 이후 조선에 대한 선교가 시도되었다. 즉 임진왜란이 진행 중이던 1593년 말, 일본의 예수회는 세스페데스(G. de Céspedes, 1551~1611)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여 일본인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1년 반 동안 부산 인근에 머물렀던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였을 테지만 이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사실은 없다. 다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일본에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고, 일본 예수회는 이들을 통해 조선 선교를 꾀하였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한역 서학서의 도입〕 한편 중국에 진출한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을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북경을 찾은 조선 사신들은 서양 문물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선교사들과 자주 학문과 종교에 대한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예를 들어 1631년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 1581~?)은 로드리게스(J. Rodriguez, 陸若漢, 1559~1633) 신부를 만나 과학 기구와 서적을 얻어 귀국하였으며, 1720년에는 주청사(奏請使)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쾨글러(I. Kö-gler, 戴進賢, 1680/1682~1746) · 수아레스(J. Suarez, 蘇霖)신부를 방문하여 역상(曆象)과 서교(西敎)에 관해 논담하였다. 또 1766년에는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관하여 홈천감정(欽天監正)이던 할러슈타인(A. von Hallerstein, 劉松齡, 1703~1774) 신부와 필담을 나누었다.
그러나 서양 문물에 대한 지식은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를 통해 조선에 이미 알려져 있었다. 즉 1603년 이광정(李光庭, 1552~1627) · 권희(權憘, 1547~1624)는 마테오 리치(M. Ricci, 利瑪竇, 1552~1610)의 <구라파국여지도>(歐羅巴國輿地圖)를 처음으로 전하였다. 이수광(李睟光, 1165-1628)의 《지봉유설》(芝峰類說, 1614)에는 이러한 사실과 함께 《천주실의》(天主實義) · 《교우론》(交友論)에 대한 논평이 실려 있다. 이후에도 다양한 한역서학서가 전래되는 가운데 조선의 지식인들은 우주관 ·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하였으며, 서양 과학 기술의 우수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619년에는 서광계(徐光啓, 1562~1633)가 조선 선교를 계획하였고, 1644년에는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잡혀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북경에서 샬 폰 벨(J.A. Shall von Bell, 湯若望, 1592~1666)을 만난 후 귀국 길에 선교사를 대동하려고 하는 등 천주교를 직접 선교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이처럼 중국에 전해진 천주교는 중국을 왕래하던 조선의 사신과 한역 서학서를 통해 '서학' 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전해졌고, 그 과정에서 천주교도 조선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의 내적 변화〕 조선에 천주교가 수용될 수 있었던 내적 요인으로는 조선 후기의 사회 · 경제적인 변화에 따른 사상계의 변동을 들 수 있다. 즉 양란(兩亂) 이후 조선 사회는 농업 생산력과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으로 광범위한 계층 분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농민 중 일부는 광작(廣作) 등을 통해 지주화되었고, 또 그와 동시에 영세 농민과 무전(無田) 농민이 다수 존재하게 되면서 이들은 유랑민 내지 도시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또한 소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벌열 정치(閥閱政治)가 행해지면서 몰락하는 양반들이 속출하였다. 이들은 관리로 진출하지도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빈궁하여 일반 양인보다도 열악한 처지가 되었다. 여기에 삼정(三政)의 문란(紊亂)으로 대표되는 국가의 가혹한 수탈은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이것은 당시 광범위하게 발생한 민란(民亂)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모순은 봉건 사회의 해체를 촉진하였으며, 이에 따라 지식인 층에서는 이러한 현실에 대처하기 위한 학문적 반성으로 새로운 학풍인 실학(實學)이 대두되었다. 실학은 성리학에 회의를 품고 당시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개혁 사상으로, 가장 큰 특징은 학문적 기반이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학문적 중심은 이기설(理氣說)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농업, 상공업, 사회 제도 등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에 있었으며, 연구 방법 또한 실증적인 것이었다. 즉 실학은 역사적으로 적체되어 온 모든 폐혜와 비리 및 인습을 근원적으로 개혁함으로써 이상적인 국가 체제의 실현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특성으로 실학은 서학이 수용될 수 있는 사상적인 토대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의 실학이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에 와서 학파로 형성되었듯이, 조선의 서학도 이익에 이르러 학문적 단계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이수광 · 유몽인(柳夢寅, 1559~1623) · 김육(金堉, 1580~1658) · 이이명 등이 서학에 대해 단편적인 촌평을 하고 천문 · 역산에 관심을 나타낸 것과 달리, 이익은 한역 서학서를 광범위하게 수집 · 섭렵하고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서양의 과학 기술을 실증 · 실용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하였으며, 종교 · 윤리서인 《천주실의》와 판토하(D.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의 《칠극》(七克)에 대해서도 보유론적인 논평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관점은 이후 제자들에 이르러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몰아 배척하려는 측과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 신앙으로 수용하려는 측으로 갈라졌다. 즉 신후담(愼後聃, 1702~1761)은 《서학변》(西辨)을 통해 일련의 서학서를 논평하면서 천주교의 교리인 창조설과 영혼 불멸설을 일축한 반면, 이벽(李檗, 요한, 1754~1785?), 이승훈,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1736~1801),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751~1792), 정약용(丁若鏞, 요한, 1762~1836) 등은 학문적인 단계를 넘어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조선 후기 실학이 발생할 수 있었던 사회적 분위기는 서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 또한 불러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천주교가 조선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Ⅱ. 천주교회의 설립과 초기 박해
〔신앙 공동체의 설립과 확산〕 천주교를 학문적인 단계에서 신앙의 단계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은 이벽이었다. 그는 1776년을 전후하여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서학서를 접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79년 권철신 · 정약전(丁若銓, 1758~1816) · 이벽 등은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강학회(講學會)를 가졌고, 이때 유교 경전과 한역 서학서의 내용들을 검토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한 토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이후 이벽은 천주교 교리를 심도 있게 연구하고 실천하였다. 1783년 말 이벽은 동료인 이승훈이 연행사(燕行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된 아버지 이동욱(李東郁, 1738~1794)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천주교에 관한 더 많은 지식을 얻고자 이승훈을 찾아가 북경에 가서 선교사들을 만나 교리 공부를 하고 관련 서적들을 가져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이승훈은 북경에 있는 북당을 찾아가 교리를 배운 다음, 1784년 2월에 그랑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3월에 귀국하였다.
북경에서 천주교 서적들과 성물을 가지고 돌아온 이승훈은 이벽에게 자신이 가지고 온 책들을 전해 주었고, 이벽은 몇 개월 동안 책들을 탐독한 뒤 이승훈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정약전 · 약용 형제를 찾아가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양근(楊根)의 권철신 · 일신 형제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김범우(金範禹, 토마스, 1751~1786)를 비롯하여 최창현(崔昌顯, 요한, 1759~1801),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1765~1795), 지황(池璜, 사바, 1767~1795) 등 중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 가운데 1784년 9월(음) 이벽의 집에서 첫 세례식이 거행되어 이벽, 정약용, 권일신 등이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교회가 설립된 직후 권일신은 열렬한 복음 전파자가 되어 내포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과 전주의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 1754~1801)을 입교시켰고, 그들을 통해 호서 지방과 호남 지방에까지 천주교를 전파시켰다. 그러나 조선 천주교회는 탄생한 지 1년도 채 되지 못하여 시련에 부딪혔다. 즉 1785년에 발생한 을사 추조 적발 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일명 明禮坊事件)으로 김범우가 유배되고 이벽은 부친의 강요 때문에 신자들과의 접촉을 끊었으며, 나머지 신자들도 당분간 조심스럽게 행동하거나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교회를 멀리하였다. 이승훈도 처음에는 가족의 강요로 교회 활동을 중지하였으나, 곧 권일신 등과 함께 교회의 재건에 나서 1786년에는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만들어 유항검, 권일신, 홍낙민(洪樂敏, 루가, 1751~1801), 이존창, 최창현 등 10인을 신부로 임명하고 성사를 집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독성(瀆聖) 행위임을 알게 된 유항검은 즉시 성사를 중지하고 북경 교회에 밀사를 파견하여 지시를 받도록 건의하였다. 이에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1760~1795)이 1789년과 1790년에 두 차례 북경을 왕래하면서 가성직 제도의 잘못과 조상 제사 금지 등의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구베아(A. de Gouvea, 湯士選, 1751~1808) 주교로부터 선교사 파견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1791년 초 레메디오스(J. dos Remedios, 吳, ?~1793) 신부가 조선에 파견되었으나, 조선 교우들을 만나지 못해 입국에 실패하였다.
〔성직자 영입 운동〕 1787년에는 이승훈이 반촌(泮村)에서 정약용 등과 천주교 서적을 읽고 연구한 것이 발각되는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발생하였고, 1791년에는 진산 사건(珍山事件)으로 불리는 신해박해(辛亥迫害)가 일어나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1759~1791), 권상연(權尚然, 야고보, 1751~1791)이 참수되었다. 이때 윤지충은 모친상을 당하고도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불살랐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천주교는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로 인식되어 본격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상 제사 금지 조치는 이후 양반 신자들이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는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신자들의 성직자 영입 노력은 계속 되어, 1793년에는 다시 북경에 밀사를 보내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가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1784년 말 조선에 입국한 뒤 이듬해 1월 서울에 도착하였으나, 4월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때 피신한 주문모 신부를 대신하여 윤유일 . 최인길 · 지황 등 3명이 포도청에서 장살(杖殺)되는 을묘박해(乙卯迫亥)가 일어났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박해를 겪었지만 주문모 신부는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 · 최창현 · 강완숙(美完淑, 골롬바, 1761~1801) ·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 등 교회 지도자들의 도움으로 교리 연구 및 선교를 위하여 설립된 명도회(明道會)를 통해 사목 활동을 펼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당시 4천 명에 불과하였던 신자수는 1800년에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어지는 박해들〕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다. 특히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고 하였던 〈백서〉(帛書)가 발각됨으로써 박해는 더욱 격화되었다.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한 <백서>의 내용이 당국자들에게는 매국 행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산간 벽지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한국 천주교회는 목자(牧者) 없는 교회, 지도자 없는 교회가 되어 와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흩어진 신자들은 피난처에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역설적이게도 박해가 신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계기가 된 것이다.
박해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신자들은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신태보(申太甫, 베드로, ?~1839), 이여진(요한, ?~1830) 등은 1811년에 북경 주교와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 교회의 사정을 알리고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또 1816년 이후에는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 등에 의해 성직자 영입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러한 노력은 1831년 9월 조선 대목구(朝鮮代牧區)의 설정과 1834년 1월 유 파치피코(余恒德, 1795~1854) 신부의 입국으로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그 사이 조선 교회는 1815년의 을해박해(乙亥迫害)와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를 겪게 되었다. 을해박해는 경상도의 청송(노래산) · 진보(머루산) · 영양(곧은장과 우련밭)등지와 강원도의 울진에서 일어나 서석봉(徐碩奉, 안드레아, ?~1815) · 김강이(金綱伊, 시몬, 1755?~1815) 등이 순교하였고, 정해박해는 전라남도 곡성에서 시작되어 전라도 전역과 경상도 상주 등지로 이어져 이경언(李景彥, 바오로, 1790~1827) · 김세박(金世博, 암브로시오, 1761~1828) 등이 순교하였다.
Ⅲ. 조선 대목구의 설정과 교회의 발전
[〔조선 대목구의 설정〕 1690년 이래 포르투갈의 보호권(保護權, padroado) 교구인 남경교구(南京敎區)에 속해 있던 조선 포교지는, 1792년 4월 북경교구장인 구베아 주교에게 위임되어 북경 주교의 지도 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이후 북경으로부터 성직자는 더 이상 파견되지 않았다. 1826년부터 북경교구까지 관할하게 된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G. Pirés-Pereira, 畢學源) 주교는 조선 포교지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이를 위한 항구적인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 경리부 대표로 있던 움피에레스(R. Umpierres) 신부는 중국 교회의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신자들이 1825년경 교황에게 보낸 서한을 1826년 12월 라틴어로 번역하여 이듬해 교황청에 전달하면서 조선을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운 수도회에 맡길 것을 건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교황청에서는 본격적으로 조선 포교지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831년 9월 9일 조선 포교지를 조선 대목구로 설정하는 동시에 조선 선교를 자원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B.Bruguière, 蘇, 1792~1835) 주교를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하고, 1833년 8월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조선교구를 맡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지 못한 채 1835년 10월 중국의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고, 이후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 1836년에는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1803~1839) 신부가, 1837년에는 샤스탕(J.H. Chastan, 鄭牙各伯, 1803~1839)신부가, 1837년 말에는 제2대 조선 대목구장인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1796~1839) 주교가 입국하였다.
〔파리 외방전교회의 활동〕 조선에 입국한 파리 외방전 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1836년 말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820?~1837)를 마카오로 보내 현지인 사제 양성을 시도하였고, 매괴회(玫瑰會) · 성의회(聖衣會) 등 신심 단체를 설립해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심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로 3명의 외국인 선교사와 정하상,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1791~1839) 등 교회 지도자가 순교하였고, 1846년 병오박해 때에는 1845년에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1797~1846) 등 9명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함으로써 한국 교회는 다시 한 번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병오박해 직후에도 성모 성심회(聖母聖心會)를 설립하는 등 교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특히 제4대 조선 대목구장인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1814~1866) 주교는 입국 이듬해인 1857년 3월 최초의 조선교구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여 선교사들의 행동 규칙과 활동 계획을 수립하였다. 또한 1861년 10월에는 조선 전 지역을 8개 구역으로 나누어 신부들의 사목 구역을 지정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천주교회가 점차 안정되고 체계화되어 감을 보여 주는 것으로, 그 결과 신자수가 1857년에는 15,206명, 1859년에는 16,700명, 1861년에는 18,035명, 1865년에는 23,000명으로 계속 증가하였다.
교세의 증가와 함께 제기된 문제는 성직자의 부족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성직자는 베르뇌 주교를 비롯하여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1818~1866), 최양업, 프티니콜라(M. 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푸르티에(J. Pourthié, 申妖安, 1830~1866), 페롱(S.Féron, 權, 1827~1903) 신부 등 6명뿐이었다. 이에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아울러 문서 선교 및 현지인 사제 양성책도 병행하였다. 이후 선교사들은 장마 등으로 선교 활동을 할 수 없을 때 교리와 윤리에 관한 소책자를 저술하였고, 1861년에는 서울에 인쇄소를 설립하여 《성교요리문답》 · 《천주성교공과》 · 《신명초행》 · 《회죄직지》 · 《영세대의》 · 《주교요지》 · 《천당직로》 등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서적을 신자들에게 보급하여 선교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려는 베르뇌 주교의 뜻에 따라, 메스트르(J.A. Maistre, 李, 1808~1857) 신부는 1855년 2월에 배론의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한 것 외에 1864년에는 제2의 신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병인박해〕 발전을 거듭하던 한국 천주교회는 1866년이 되면서 커다란 시련을 맞았다. 물론 철종(哲宗, 1849~1863) 시대에 박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안동 김씨들은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1863년 고종(高宗, 1863~1907)이 즉위하고 전통적으로 천주교를 박해하였던 풍양 조씨가 정계에 등장하면서 천주교는 잠재적인 위협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권을 장악한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천주교 선교사를 통해 영국 · 프랑스 양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던 러시아의 위협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김면호(金勉浩, 토마스, 1820~1866) ·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1814~1866) · 이유일(李惟一, 안토니오, 1819~1868) · 남종삼(南鐘三, 요한, 1817~1866) 등은 이 기회에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대원군에게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하고, 베르뇌 주교와의 면담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지고 청국의 천주교 탄압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정의 분위기가 변하였다. 즉 조두순(趙斗淳, 1796~1870) · 김병학(金炳學, 1821~1879) 등은 대원군의 천주교 교섭을 공공연하게 비난하였고, 나아가 선교사 및 신자들의 처형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발생하여,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9명의 선교사와 남종삼 등이 처형되었다. 이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68년 독일 상인인 오페르트(E.J. Oppert, 載拔)가 덕산의 남연군(南延君) 묘를 파묘한 사건(德山掘塚事件)이 발생하면서 박해는 더욱 격화되었고, 1871년 미국이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辛未洋擾) 이후에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1878년에 체포된 리델(F.C. Ridel, 李福明, 1830~1884) 주교와 이듬해에 체포된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鎮, 1848~1889) 신부가 처형되지 않고 추방당한 사실은, 이 시기에 이르러 천주교에 대한 조선 정부의 입장이 바뀌었음을 알려 준다. 이것은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을 추진한 정부의 정책 변화와 맞물린 현상이었으며, 이제 한국 천주교회는 변화된 현실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다.
IV. 신앙의 자유와 일제하의 천주교회
〔한불 조약과 신앙의 자유〕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수호 조약을 체결한 후, 1880년대에는 미국을 비롯한 구미(歐美) 여러 나라들과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특히 1882년에 미국과 맺은 수호 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와 체결한 최초의 조약으로, 조선에서의 천주교 신앙이 묵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886년에 체결된 한불 조약(韓佛條約)을 통해 선교사들이 호조(護照)만 지니면 국내 어디나 자유롭게 다니며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치외 법권을 보장함으로써 선교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개항지에서 본당을 설립 · 발전시킴은 물론, 개항지 이외의 지방에도 정착하여 본당을 설립하였다. 그 결과 1882년에는 서울에 종현(현 명동) 본당이 처음으로 설립되었고, 이어 제물포(1883)원산(1887), 갓등이(1888), 부산(1889), 평양(1896) , 목포(1897), 마산(1900) 등 지방의 주요 도시에도 본당이 신설되었다. 본당이 설립되면서 성당들도 건축되었는데, 1892년에는 약현(현 중림동) 성당이, 6년 후인 1898년에는 명동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에 앞서 1885년에는 서울 곤당골에 고아원이, 관철동에는 양로원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사회 복지 사업은 이후 1888년에 진출한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맡아 운영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는 제주도와 간도 등 당시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던 지방에도 복음이 전해졌다. 특히 황해도는 개종 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곳으로, 1895년까지 본당이 없었다가 3년 사이에 4개의 본당이 설립되고 신자수도 현격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지방에서 교회와 관련된 여러 가지 마찰을 야기시켜 많은 교안(敎案)이 발생하였다. 한불 조약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당면 과제는 한국인을 위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선교사를 위해서는 개항지뿐만 아니라 타지역에서도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일이었다. 그것을 획득하려는 과정에서 교안이 발생하였는데 시기적으로는 1890년대 후반부터 1904년 사이에 가장 빈발하였으며, 1901년의 제주 교안(濟州敎案)과 1902~1903년 황해도 일대에서 일어난 해서 교안(海西敎案)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런 가운데 1899년 조선 대목구장 뮈텔(G.‑C.‑M.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와 내부(內部)의 지방 국장 정준시(鄭駿時) 사이에 교민 조약(敎民條約)이 체결되어 한국인에게도 신앙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1904년에는 프랑스 공사와 외부 대신 사이에 선교 조약(宣敎條約)이 체결되어 선교사들의 지방 정착권도 허용되었다.
〔개화기 천주교회의 활동〕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개화기의 천주교회는 언론과 교육 활동을 통해 개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천주교회는 참된 개화의 방향을 제시해 줌으로써 애국 계몽 운동에 동참하고 신자들에게 올바른 교리 지식과 시사 문제를 제공해 주려는 목적으로, 1906년 10월 순한글의 주간지인 <경향신문>(京鄕新聞)을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발간 즉시 교회 내외에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여 1907년에는 정기 구독자가 4,200여 명에 달하였다. 또 부록으로 교리 문제, 천주교회사, 법률 해석 등 오랫동안 보존할 필요성이 있는 내용들을 수록한 〈보감〉(寶鑑)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한일합병 이후 순수 종교 신문의 발행만을 강요하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1910년 12월 30일 폐간되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1911년부터 <보감>을 격주간 종교 잡지인 《경향잡지》로 변경하여 발행하였다.
천주교회의 교육 사업은 구미 제국과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1882년에는 서울에인현학교(仁峴學校)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각지에 학교가 세워져, 정규 학교뿐 아니라 비정규 학교를 포함한 천주교계 학교가 1893년에는 21개, 1904년에는 75개, 1910년에는 124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 천주교회가 교육 활동을 통해 구한말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설립된 학교들의 설립 취지가 대부분 국태민안(國泰民安), 보군보국(保君輔國), 국권회복(國權回復)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1909년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도회는 1910년에 실업 학교인 숭공학교(崇工學校)를, 1911년에는 사범 학교인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교사가 양성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일제는 사범 교육을 독점하려는 의도에서 정책적인 탄압을 가하였고, 그 결과 승신학교는 1913년 9월에 폐교되었다. 반면 숭공학교는 실업 교육을 장려하였던 일제의 정책으로 꾸준히 성장하다가 베네덕도회가 원산으로 진출하면서 1923년 6월 폐교되었다. 이에 앞서 예수성심신학교가 1885년 10월에 경기도의 부엉골에 세워졌다가 1887년 3월에 용산으로 옮겨 재개교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천주교회〕 일제하의 천주교회는 선교사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국권 수호 운동과 독립 운동에 전교회적으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평신도들이 개인적으로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을 제창한 대구의 서상돈(徐相燉, 아우구스티노, 1850~1913)은 열심한 천주교 신자였고,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1879~1910)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포살(砲殺)하였다. 또 1910년 말에 발생한 안악 사건(安岳事件)에는 안명근(安明根, 야고보, 1879~1928)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들이 참여하였고, 1911년의 105인 사건에도 신자 이기당(李基唐, 안토니오)이 연루되었다. 그리고 1919년 3 · 1 운동 때에는 교회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대구의 신학생들이 만세 시위에 앞장섰으며, 황해도 은율(殷栗) 본당의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1886~1969) 신부를 비롯해서 강화(江華), 광주(廣州) 등지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만세 시위의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이에 3 · 1 운동으로 서울, 원산, 신의주, 평양, 공주, 대구 등지의 감옥에는 53명의 천주교 신자가 투옥되었고, 해외로 망명해서 독립 운동을 전개한 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방우룡(方雨龍) 등 천주교 신자들은 1920년대 초 간도 지방에서 대한의민단(大韓義民團)을 조직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일제의 종교 통제는 해가 거듭할수록 노골화되어 1915년 3월에는 '개정 사립학교 규칙' 을 공포하여 그리스도교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 및 종교 의식을 금지시켰으며, 8월에는 '포교 규칙' (布教規則)을 제정하여 성당의 건립과 선교 등 교회 활동을 견제하였다. 일제는 병합 이후 신사(神社) 제도를 정비하면서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는데, 천주교는 1920년대까지 신사 참배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신자들에게 이를 거부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 천주교회가 신사 참배를 국민 의례로 허용하자 한국 교회도 신사 참배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결국 평양 지목 구장인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1889~1987) 몬시뇰의 반대가 있었지만, 1936년 5월 교황청의 교령에 따라 신사 참배를 공식화하였다. 그렇지만 모든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 참배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투옥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아울러 한국 천주교회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던 조상 제사 문제는 1939년 12월 8일 교황청이 <중국 의례에 관한 훈령>을 발표함으로써 관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런 가운데 1937년 7월 중일 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국가의 모든 체제를 전시 체제로 전환하였고, 종교계에 협력을 강요하였다. 이에 1938년 7월에 결성된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에 경성 대목구가 참여하였고, 이듬해 5월에는 '국민 정신 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 연맹' 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1940년 11월에는 이 조직을 '국민 총력 천주교 경성교구 연맹' 으로 개편하였는데, 교회는 이러한 조직을 통해 미사 · 기도회 · 황군 위문·시국 인식 강연회 · 국방 헌금 등의 형태로 일제의 침략 전쟁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 한국에서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기타 외국인 선교사들을 구금하는 한편, 한국 천주교회의 교구장들을 일본인으로 대체하였다. 그래서 광주 지목구는 1942년에 맥폴린(0. McPolin, 林, 1889~1963) 지목구장을 대신해 와키다 아사고로(脇田淺五郎, 1881~1965) 신부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대구 대목구도 같은 해에 무세(G. Mousset, 文濟萬, 1876~1957) 주교를 대신해 하야사카 구베에(早坂久兵衛) 신부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울 대목구는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주교가 비밀리에 동경의 교황 사절을 통해 1942년 1월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1902~1984) 신부를 서울 대목구장으로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최초의 조선인 교구장 주교가 탄생하였다. 한편 1942년에는 일제의 무허가 학교 폐교 조치에 따라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가 폐교되었고, 1944년에는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폐교되었다. 그러나 신학교를 유지하려는 한국 교회의 노력으로 1945년 2월에 경성천 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教神學校)가 설립되었다.
일제의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꾸준히 발전하였다. 그 결과 1911년에는 조선 대목구가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로 분리되었고, 1920년에는 원산 대목구, 1927년에는 평양 지목구(平壤知牧區, 1939년 대목구로 승격), 1928년에는 연길 지목구와 황해도 감목 대리구, 1937년에는 전주 지목구(1931년 감목 대리구)와광주 지목구, 1939년에는 춘천 지목구가 설립되었고, 1940년에는 원산 대목구가 폐지되고 덕원 면속구(德源免屬區)와 함흥 대목구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신설 교구들은 대부분 조선에 진출한 선교 단체들이 맡았는데, 베네딕도회는 원산 대목구를, 1923년에 진출한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평양 지목구를, 1933년에 진출한 골롬반회는 광주와 춘천 지목구를 담당하였다. 다만 전주 지목구는 한국인 성직자에게 맡겨져 처음으로 방인 교구(邦人敎區)가 탄생하였다.
한편 1925년에 로마에서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 이 거행되어 조선의 자긍심을 높였고, 1931년에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을 맞이하여 기념 행사와 기념 사업을 전개하는 가운데, 한국 교회의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경향잡지》(1911)를 비롯하여, <별>(1927), <천주교 회보>(1927), 《가톨릭 청년》(1933), 《가톨릭 연구》(1934) 등이 간행됨으로써 문화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V. 해방 이후의 천주교회
〔해방 공간의 천주교회〕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면서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정부가 수립되지 못한 채 3년간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이 시기에 천주교는 프로테스탄트와 더불어 우대를 받으며 교세를 확장시켰다. 언론 · 출판 분야에서는 1946년에 <경향신문>이 창간되고 《경향잡지》가 속간되었으며, 1947년에는 《가톨릭 청년》이 속간되었다. 그리고 교육 분야에서는 종래의 초등 교육 기관들이 중 · 고등 교육 기관으로 개편되었고, 1947년 4월에는 경성천주공교신학교가 정식 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성신대학(聖神大學)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또 교회 조직 면에서는 1946년 1월 하야사카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1894~1975) 신부가 대구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7월에는 김현배(金賢培, 바르톨로메오, 1905~1960) 신부가 전주 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같은 해 8월에는 초대 평양 지목구장이었던 번(J.P. Byrne, 方溢恩, 1888~1950) 신부가 주한 교황 사절로 임명되었으며 1948년 6월에는 충청남도가 서울 대목구에서 분리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는 대한 민국의 건국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1946년 12월에는 입법 의원(立法議院)에 장면(張勉, 요한, 1899~1966)을 천주교 대표로 추천하였다. 1948년 1월에는 총선거에 대비하여 가톨릭 시국 대책위원회를 조직해 신자와 청년들을 단합시키는 한편, 교구장들은 연합 교서를 발표하여 신자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한 특별 기도와 희생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교회는 반공주의(反共主義)를 견지함으로써 1948년 8월 단독 정부 수립에 일조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최덕홍(崔德弘, 요한, 1902~1954) 신부가 대구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1949년 1월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 주교로 서품되었고, 1950년 2월에는 성년(聖年)을 맞이하여 순교지인 새남터에 '순교 기념탑' 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미국과 소련에 의한 국토 분단은 결과적으로 북한 교회의 전멸을 초래하였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주둔하면서 토지와 화폐의 개혁을 거쳐 점차 종교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고, 1949년 4월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 이러한 정책은 더욱 노골화 · 본격화되었다. 즉 1949년 5월 9일 공산주의자들은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을 습격해 사우어 (B.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를 비롯한 신부와 수사들을 체포하였고, 5월 14일에는 평양 대목구의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1906~?) 주교를 구금하였다. 그리고 6월부터는 평양의 성직자들을 계속 체포 · 연행하였다. 그 결과 한국 전쟁을 전후하여 성직자들이 체포되거나 남하하여, 북한 지역의 교회들은 더 이상 신부가 남지 않은 '침묵의 교회' 가 되었다. 이에 앞서 연길 대목구는 1946년 중국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중국 소속 교회가 되었다.
〔전쟁과 복구〕 그런 가운데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남한 교회는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전쟁 중에 많은 성당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직자 · 수도자 · 신자들이 피랍되거나 죽임을 당하여 한국인 성직자 40명, 외국인 선교사 57명이 피살되거나 옥사하거나 행방 불명되었다. 하지만 휴전 후 파괴된 교회를 복구하고 선교 활동을 재개하는 가운데 한국 천주교회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 결과 1950년대의 연평균 신자 증가율은 16.61%에 이르렀고, 1958년의 경우는 24.18%의 증가율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재건에는 미국의 가톨릭 구제위원회(C.R.S)의 도움이 컸다.
한국 교회의 교세가 증가함에 따라 교구도 늘어났다. 즉 1953년 9월에는 충청북도 지역이 감목 대리구가 되었다가 1958년 4월에 청주 대목구로 설립되었고, 1954년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지역이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었다가 1957년 1월에 부산 대목구가 되었다. 또 1958년 6월에는 안동 지역이 감목 대리구(1969년 5월 정식 교구)로, 충청남도 지역은 대전 대목구로 인천 지역은 10월에 감목 대리구가 되었다가 1961년 6월 인천 대목구가 되었다.
〔교계 제도의 설정〕 1962년 3월 10일 교황청에서는 한국 교회의 자립 능력을 인정하여 정식 교계 제도(敎階制度)를 설정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완전한 재치권(裁治權)을 행사하는 교회가 되었다. 동시에 서울, 대구, 광주 등의 대목구는 대교구가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3개의 관구(管區)가 설정되었다.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개최되어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과 쇄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65년 1월부터 미사가 한국어로 집전되었고, 전례와 예식은 간소화되었으며, 본당에는 본당 신부의 자문 기구인 '사목 협의회'가 조직되어 평신도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와 함께 프로테스탄트와의 대화 및 기도회 등이 빈번해졌고, 1968년 1월부터 신 · 구약성서가 프로테스탄트와 공동으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교회 안의 사회 참여 의식도 고조되어 인간 경시 · 황금 만능 풍조 · 사회 부조리 등에 대항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교계 제도가 설정된 이후인 1963년 10월에 수원교구가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되었고, 1965년 3월에는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가, 1966년 2월에는 부산교구에서 마산교구가, 1969년 5월에는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 · 설정되었다. 그리고 1966년 11월에 개최된 주교 회의 총회에서는 '주교 회의 규약' 이 확정되어, 이듬해 12월 교황청의 승인을 받았고, 1968년 7월에는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발족하였다. 아울러 1968년 10월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시복식이 로마에서 거행되었으며, 1969년 3월에는 서울대교구의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대사회적 활동〕 1960년대의 급격한 산업화로, 한국 사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러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였는데, 1968년 1월에 있었던 '심도 직물' 의 노사분규는 교회가 사회 문제에 입장을 밝힌 첫 번째 사건이었다. 당시 교회는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깊이 개입되었던 '심도 직물' 사건에 대해,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 라는 주교단의 공동 교서를 발표함으로써 노동 운동의 정당성을 표명하였다. 이후 1970년대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 사회 구현을 목적으로 주교 회의산하에 정의 평화위원회(1970)가 발족하였고, 가톨릭 노동 청년회 · 가톨릭 농민회 등과 같은 교회 단체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런 가운데 1974년 7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원주교구장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1921~1993) 주교가 체포되면서, 교회의 민주화 운동도 본격화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직된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 은 평신도 운동 단체 · 학생 청년들과 연대하여 반독재 투쟁과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한국 교회는 1980년대에도 스스로의 쇄신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고, 그 결과 국내외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1981년에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을 맞아 신앙 대회 · 자료 전시회 · 심포지엄 등 다양한 행사를 거행하면서 교회의 현황을 점검하는 기회를 가졌고, 같은 해 10월에는 한국 외방선교회에서 파푸아뉴기니에 선교 사제를 파견함으로써 최초의 외방 선교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전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1984년 5월에 교회 설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는 한국 교회를 축복하는 동시에 순교 복자 103위 시성식(諡聖式)을 거행하였고, 1989년에는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개최하여 성장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세계에 보여 주었다. 1985년 이후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시국 기도회가 도처에서 열렸고, 1986년에 발생한 부천 성고문 사건의 규탄 집회가 명동 성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1987년 6월에는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에서 박종철 학생 고문 치사 사건의 진상을 밝힘으로써 국민들의 저항을 이끌어냈고, 그 결과 6 · 29 선언(1987)을 쟁취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1990년 이후의 한국 천주교회〕 1990년대 들어 한국 천주교회는 사회 정의, 사회 복지의 신장은 물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였다. 국내외적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상을 정립하는 가운데 1992년에는 대구대교구에서 사할린에 선교 사제를 파견하여 북방 선교를 시작하였고, 1994년 6월에는 어려운 농촌을 돕기 위해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 본부를 발족시켰다. 또한 1995년 2월에는 서울대교구에서 민족 화해위원회를 발족시켜 대북(對北) 지원을 본격화하였으며, 1998년에는 IMF로 인한 실직자 돕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외에도 한국 천주교회는 생명 · 환경 운동, 도시 빈민 운동, 통일 운동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오늘날 사회 정의와 공동선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시기에는 교회 내적으로도 변화되고 발전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1995년 3월에 평화방송 케이블 TV를 개국하여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영상 매체에 의한 선교 시대를 열었고, 4월에는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를 공포하여 새로운 지역 교회법을 마련하였다. 또 1996년 8~9월에는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전시회와 신앙 대회를 개최하였고, 12월에는 1966년부터 사용하던 미사 통상문을 우리말 어법에 맞도록 개정하였다. 그리고 1997년 5월에는 1968년 이후 사용해 오던 기도문도 개정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 한국 천주교회는 2000년 대희년과 새로운 천년기에 부응하는 쇄신된 교회로 거듭나고자 노력하였고, 이에 각 교구에서는 교구 시노드를 준비하였다. 1997년 11월 대구대교구를 시작으로 1999년 6월에는 인천교구가, 같은 해 7월에는 수원교구가, 2000년 1월에는 서울대교구가 시노드의 개최를 공식 선언하여 교회의 쇄신과 복음화를 향한 첫 걸음을 내디뎠다. 1998년 5월에는 서울대교구의 보좌 주교로 민족 화해위원회 위원장인 최창무(崔昌武, 안드레아) 주교가 한국 주교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1999년 12월 25일에 대희년이 개막되자 주교 회의에서는 회개와 쇄신을 바탕으로 민족 화해와 평화 통일에 전력해 줄 것을 당부하는 한편 청소년 교육, 토착화, 아시아 대륙 복음화 등에 더욱 힘을 쏟을 것을 내용으로 하는 사목 교서를 발표하였다. 이어 새 천년기가 시작되는 대림 제1 주일인 2000년 12월 3일에는 <쇄신과 화해>라는 공식 문서를 통해 한국 천주교회가 지난 210년의 역사에서 잘못한 점을 공식적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였다.
2001년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8월에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서 개최된 전시회에는 교황청에 소장되어 있는 황사영의 <백서>원본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2002년 3월에는 '시복 시성 추진 대상 순교자 124위' 를 확정하여 9월에 교황청 시성성의 인준을 받았고, 2004년 6월 24일에는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설립되었다. 그런 가운데 2006년 2월 22일에는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鄭鎭奭, 니콜라오) 대주교가 추기경에 임명되어, 37년 만에 두번째 추기경이 탄생하였다.
〔현 황〕 2004년 12월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수는 4,537,844명이며, 교구는 남한에 대교구 3개, 교구 13개와 북한 지역에 3개의 교구(평양교구 · 함흥교구 · 덕원 자치 수도원구)가 있다. 본당수는 1,414개, 공소수는 971개이며, 추기경 1명, 대주교 4명, 주교 25명(외국인 2명 포함), 몬시뇰 18명, 한국인 신부(교구 · 선교회 · 수도회 포함) 3,535명, 외국인 신부(교구 · 전교회 · 수도회 포함)166명, 수사(외국인 포함) 858명, 수녀(외국인 포함) 9,471명이 있다. 그리고 남자 수도회는 48개, 여자 수도회는 103개이며, 교육 기관으로는 전문 대학을 포함한 대학이 13개, 중학교가 27개, 고등학교가 38개, 초등학교가 6개이다. 그 밖에 특수 학교(맹아 학교 · 농아 학교 . 재활 학교 · 직업 학교 · 야간 학교)가 11개, 유치원이 215개 있다. 의료 사업으로는 성모병원을 비롯하여 종합 병원이 20개, 의원이 11개이며, 영아원, 양로원, 요양원 등 총 920개의 사회 사업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 가성직 제도 ; 강완숙 ; <경향신문> ; 《경향잡지》 ; 광주대교구 ; 교안 ; 구베아 ; 권일신 ; 권철신 ; 그랑몽 ; 기해박해 ; 김강이 ; 김대건 ; 김면호 ; 김범우와 형제들 ; 김세박 ; 남인과 천주교 ; 남종삼 ; 다블뤼 ; 대구대교구 ;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 드게트 ; 로드리게스 ; 리델 ; 리치 ; 메스트르, 조제프 암브로이즈 ; 명도회 ; 명례방 공동체 ; 모리스 ; 모방 ; 뮈텔 ; 배론 성 요셉 신학교 ; <백서> ; 번 ; 베네딕도회 ; 베르뇌 ; 병인박해 ; 북경대교구 ; 북당 ; 브뤼기에르 ; 샤스탕 ; 샬 폰 벨 ; 서광계 ; 서상돈 ; 서석봉 ; 서울대교구 ; 성모 성심회 ; 성직자 영입 운동 ; 세스페데스 ; 숭공학교 ; 숭신학교 ; 신사 참배 ; 신유박해 ; 신태보 ; 신해박해 ; 신후담 ; 실학 ; 안악 사건 ; 안중근 ; 앵베르 ; 유진길 ; 유 파치피코 ; 유항검 ; 윤유일 ; 윤지충과 권상연 ; 을묘박해 ; 을해박해 ; 이경언 ; 이벽 ; 이수광 ; 이승훈 ; 이여진 ; 이유일 ; 이익 ; 이존창 ; 장면 ; 정두원 ; 정미반회 사건 ; 정약용 ; 정약전 ; 정약종 ; 정하상 ; 정해박해 ; 제주 교안 ; 조상 제사 문제 ; 주문모 ; 중국 ; 지황 ; 최방제 ; 최양업 ; 최인길 ; 최창현 ; 침묵의 교회 ; 쾨글러 ; 페롱 ; 푸르티에 ; 프티니콜라 ; 한불 수호 통상 조약 ; 한역서학서 ; 해서 교안 ; 현석문 ; 홍낙민 ; 홍대용 ; 홍봉주 ; 황사영 ; 흥선 대원군)
※ 참고문헌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 가톨릭출판사, 1962/ 《교회사연구》 1~2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8~2005/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 중 .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 1980/ 최석우, 《한국천주교회의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한국교회사의 탐구》 1 · 2 ·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1991 · 2000/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사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노길명, 《가톨릭과 조선후기 사회변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강재언, 《조선의 서학사》, 민음사, 1990/ 문규현,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천주교회사》1~3, 빛두레, 1994/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노길명,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차기진, 《조선 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조광, <한국 천주교회사>, 《한국천주교회총람 : 1995~2003년》,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2004/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04》,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2005. [方相根]
한국
韓國
[영]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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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북당(북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