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교육 사업
韓國 — 敎育事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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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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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론 성 요셉 신학교(1931년).
한국의 가톨릭 교회가 각급 학교를 설립 · 운영하면서 "학생들이 지상 국가의 복지를 효과적으로 증진하도록 가르치고,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준비시켜 사도직 생활의 실천과 모범으로 인간 사회에서 구원의 누룩이 되게 하는" (교육 8항) 것을 지향하는 사업. I. 목적과 형태 〔목 적〕 그리스도를 교육 활동의 토대로 하는 가톨릭 교육 사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화' 이다. 바로 이 때문에 가톨릭 학교는 여타의 학교와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 1965. 10. 28) 8항과 <학교 내 가톨릭 평신도의 역할> 38항에 의하면 가톨릭 학교는 그리스도교 교육 공동체의 중심 기관으로, 그 고유한 사명은 자유와 사랑의 복음적 정신으로 충만한 학교 공동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청소년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키는 것,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 세계와 생활 그리고 인간에 대해 습득하는 지식이 신앙으로 비추어지도록 돕는 것,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봉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와 인간, 사회 상호 간의 유익을 위해 양자의 대화에 기여하고 문화와 신앙의 통합, 신앙과 생활의 통합을 지향한다. 〔교육 사업의 형태〕 가톨릭 교육 사업은 성직자 양성의 신학 교육과, 학교를 비롯한 교육 기관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적 전인(全人)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 교육으로 구분된다. 2004년 12월 현재 한국의 가톨릭 학교는 유치원 215개교, 초등학교 6개교, 중학교 27개교, 고등학교 38개교, 전문대학 2개교, 대학교 11개교가 있다. 이들 학교 외에도 특수 교육 대상자를 위한 특수 학교와 직업 학교, 야간 학교가 11개교이다. 정규 학교를 제외한 학교 외의 기관으로 교육 사업을 시행하는 대표적인 기관은 본당 주일학교이다. 신앙 교육은 특정한 장소와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 학교뿐 아니라 가정과 본당, 지역 사회와 연계 · 통합될 때 가장 효과적이다. 가톨릭 교육 사업은 정규 학교뿐 아니라 학교 밖의 다양한 교육의 장에서 형식적 · 비형식적 형태로 전체 연령층의 신자를 대상으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들 활동은 '가톨릭 문화 사업' , '가톨릭 사회 사업' 에서 다루어지기도 한다. 가톨릭 학교는 교육 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교육의 평생성과 통합성을 고려할 때 가톨릭 교육 사업은 '문화 사업' 그리고 '사회 사업' 과 연계되어야 한다. 각 사업이 갖고 있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발전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데 매우 유용한 안목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Ⅱ. 역사 한국 가톨릭 최초의 교육 사업은 한국 교회를 사목할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1836년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820?~1837) 등을 마카오로 유학보낸 일이다. 이후 1855년에는 충청도 배론(舟論)에 한국 최초의 근대 교육 기관인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개항 후 이 땅에서 선교하던 성직자들은 신자들을 교육하는 일이 참 신앙 생활을 위한 기초임을 강조하면서, 부모에게 늘 자녀의 신앙 교육을 권고하였다. 〔박해 시기 : 가톨릭 교육 사업의 맹아기(1784~1882)〕 천주교 전래 후 1882년까지의 박해 시기 동안 가톨릭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은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 교육이었다. 그 목적이 성직자 양성이라는 점에서 특수했으며 교육받는 인원이 소수이고, 박해의 시기이자 근대 교육이 도입되는 초기 상황이어서 학교라는 체제를 완전히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이 구체적이었고 교사, 학생, 교육 내용이 있는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이었으므로, 명실상부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교육 사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성직자 양성을 위한 해외 파견 교육 : 1836년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인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1803~1839) 신부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선발하여 신학과 라틴어를 가르친 후 그해 12월에 마카오(澳門)로 유학보냈다. 이는 근대 해외 유학생의 효시로, 근대적인 서구 문물을 배우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교육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마카오의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한 이들은 신학 공부뿐만 아니라 지리, 역사, 과학, 프랑스어, 중국어 및 라틴어도 배웠다. 이들 중 최방제는 1837년 병사하였으나 김대건과 최양업은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체계적인 서구 교육을 받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어 박해가 비교적 완화되었던 철종(哲宗, 1849~1863) 시대인 1854년, 메스트르(J.A. Maistre, 李, 1808~1857) 신부는 이만돌(바울리노), 임(林) 빈첸시오, 김(金) 요한 등 세 사람을 선발하여 페낭(Penang)의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으며, 1858년에도 세 사람을 유학보냈다. 그러나 병인박해(1866~1873)로 신학생 파견이 중지 되었다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 이후 점차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자 블랑(G.‑M.‑J. Blanc, 白圭三, 1844~1890) 주교는 1882년부터 1884년까지 매해 총 21명의 신학생을 유학보냈다. 이들은 박해 때문에 신학교를 설립할 수 없는 동양 각국의, 인종과 풍습이 다른 10여 개국의 유학생들과 함께 4~9년 동안 교양, 철학, 신학 과정을 공부하였고, 이 중 11명이 후에 고국으로 돌아와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유학생들은 기후병으로 심한 고생을 하였고, 심지어 병사(病死)하는 경우도 있었다.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어 선교 활동이 허용되자 1887년, 한국 천주교회는 서울 용산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하고 페낭의 신학생들을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국내 신학 교육 사업-배론 성 요셉 신학교 : 신학 교육 사업은 해외 유학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전개되었다.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주교인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1796~1839) 주교는 1838년,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 중이던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을 비롯한 4명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매일 두 시간씩 라틴어와 신학을 강의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기해박해가 발발하여 앵베르 주교와 정하상 등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이 교육은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1855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정식으로 설립한 최초의 학교가 충청도 배론에 설립되었다. 배론 신학당이라고도 불린 이 학교의 정식 교명은 '성 요셉 신학교'이며, 설립자는 당시 부주교이자 조선 선교지의 장상인 메스트르 신부였다. 장소가 배론으로 정해진 것은 그곳에 정착하여 살던 장주기(張周基, 요셉, 1803~1866)가 자신의 집을 교사(校舍)로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메스트르 신부는 장주기를 교사로 하여 신학생 3명을 맡겼고, 1년 후 새로 입국한 푸르티에(J.A. Pourthie, 申妖案, 1830~1866) 신부를 신학교 교장으로 임명하여 각지에서 선발한 1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하였다. 학생들은 철학 과정에 들어가기 전의 기초 과정으로 교리, 한문, 라틴어, 일반 상식, 수사학 등을 배웠다. 1861년에는 교수 신부로 프티니콜라(M.A. Petitnicolas, 朴, 1828~1866)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 시기는 박해가 극심하였기에 깊은 산중의 마을 배론에서도 마음 놓고 정규 수업을 하기는 어려웠으나, 학생들은 두 명의 프랑스인 교수 신부로부터 학문과 서구 문물에 관한 새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 또한 1866년의 병인박해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장주기 등이 모두 순교함으로써 10여 년간 지속되던 교육 활동이 중단되고 폐교되었다. 성 요셉 신학교는 비록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특수 교육 기관이었지만,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교육 기관이었다. 박해 시대의 신학 교육은, 비록 규모는 작았지만 국내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서양 학문을 배웠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학생들은 라틴어를 비롯해서 한글, 한문, 수사학, 천문학, 음악, 지리, 역사, 자연 과학에 이르기까지 일반 교양 과목을 배울 수가 있었으며, 더 나아가 스콜라 철학을 비롯한 신학의 전문 분야를 터득하였다. 이 외에도 서양 신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공부하는 동안 정규 과목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그들의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신학 교육은 최초로 서구식 학문을 배우기 위해 해외 유학생을 보냈다는 데에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양반의 자제만이 공부할 수 있는 불평등한 유학풍(儒學風)을 배격하고 재능과 덕행이 있는 소년이면 신분이나 계급에 구애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평등적이고 과학적인 학풍을 심어 주는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박해기의 일반 학교에 관해서는 달레(C.C. Dallet, 1829~1878)의 《한국 천주교회사》(Histoire de I'Eglise de Corée, 1874)에 기록되어 있듯이, 1866년에 이미 서울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과학과 인문을 가르치고 교리 학습과 종교 의무 실천을 강조하는 청소년 학교가 운영되기도 하였다. 〔선교의 자유기 : 가톨릭 교육 사업의 개화기(1882~1910)〕 선교와 종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면서 천주교회는 한국의 개화를 위해 근대식 교육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교육 사업에는 뮈텔(G.‑C.-M.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는 지하 교회에서 벗어난 교회의 모습을 좀 더 확연히 하기 위하여 종현(현 명동) 성당, 약현(현 중림동) 성당 등을 준공하였으며, 한국 가톨릭 교육 사업을 위해 1908년 1월 24일부터 일본의 마리아회, 벨기에 루뱅의 성모 승천 수도회(Augustins de l`Assomption), 이탈리아 로마의 성모 승천회 총본부 및 베네딕도회(Ordo St. Benedicti), 프랑스 파리의 살레시오회(Societa di san Francisco Salesio), 도미니코회 제3회(Congregacion de Religiosas Misioneras de Sto. Domingo) , 이수댕의 성심 선교회(Missionnaires de Sacre-Coeur d`Issoudun), 그리스도 교육 수도회 등을 방문하여 교육 사업을 위해 한국에 진출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인원의 부족, 한국어 습득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모두 거절당하였다. 그러다가 1908년 9월 15일부터 9월 20일까지 독일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의 수도원에 머물며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교육을 담당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러한 요청이 연합회의 설립자인 암라인(A. Amrhein, 1844~1927) 신부의 새로운 선교 방법, 즉 기존의 교구 내에 수도원을 설립하고 교구 전체의 사목을 문화적으로 도와 주는 선교 방법에 부합되어 베네딕도회가 한국 진출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 가톨릭 교육 사업의 특징은 본당을 중심으로 초등 수준의 일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 기관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선교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학교 교육 사업이 성장하였고 여성 교육 기관이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점, 그리고 중등과 고등 교육 단계에서 성직자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의 설립, 신자 교사양성을 위한 사범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는 점 등이다. 초등 교육 : ① 본당 중심의 일반 교육 : 선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인정된 1882년 이후, 천주교회에 의한 일반 교육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천주교회에서 설립한 최초의 근대적 성격의 초등학교는 개량(改良) 서당 형태의 '한한학교' (韓漢學校)로, 1882년 종현 성당에 세워진 인현학원이 그 효시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인현 학원은 1883년 6월에 종현 성당 구내로 옮겨져 종현학당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교회가 경영한 최초의 초등학교로서 종교 교육뿐만 아니라 한문과 한글을 비롯하여 근대 계몽 교육까지 실시하였다. 1886년 블랑 주교의 편지에 의하면 재학생 수가 한때는 40명 이상인 경우도 있었고, 학생 가운데에서 교리 문답과 기도문을 잘 배운 세례자들이 15명이나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종현학당은 본당 차원에서 설립된 소규모의 학교이긴 하지만 1883년에 설립되어 한국 최초의 근대 학교로 불리는 '원산학사' (元山學舍)보다 1년 먼저 세워진 개화기 최초의 근대 초등 교육 기관이었다. 대구의 경우 1899년 계산동 본당이 완공되면서 해성제(海星齊)라는 한문 서당이 설립되었다가 1908년 해체되고 초등 교육 기관인 성립학교(聖立學校)가 설립되었다. 평양 지역을 사목하던 파리 외방전교회는 본당을 중심으로 한 선교 활동뿐 아니라 교육을 통해 선교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닫고, 교육 기관의 설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각 본당의 신부들도 선교에 앞서 문맹 퇴치 운동이 시급함을 인식하고 서둘러 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1900년경 진남포 본당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시작으로 1905년 남자 교육 기관인 기명학교, 이듬해에는 성모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1929년 성모보통학교로 통합되었다. 1908년 영유 본당에 영청학교(永淸學校)가, 1909년 진남포 본당에 지정여학교(智貞女學校)가 설립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운영하기 시작한 일반 교육 기관은 본당 차원에서 설립 · 운영되었다는 특징과 함께, 서민 자제들을 대상으로 초급의 근대적 교양을 교육하는 개량 서당이면서 동시에 신앙 생활을 위해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치는 교리학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학교들은 주로 본당에서 성직자들에 의해 기초 과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신자들도 교육 사업에 동참하였다. ② 학교 교육 사업의 양적 성장 :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인의 국내 여행이 보장되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 선교사들의 사목 활동이 활발해졌다. 선교사들은 많은 본당을 설립하면서 동시에 각 본당을 중심으로 신자 자녀들의 교리 교육과 민중 계몽을 위한 개량 서당적인 초등 교육 기관들을 운영하였다. 이때부터 한국 가톨릭 교회의 학교 교육 사업은 양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1905년 일본의 보호 정치(保護政治)가 시작되자 학교 설립 열기가 고조되어 도처에 신형 학교가 설립되었고, 기존의 학교는 신형 학교로 개편되었다. 선교사만이 아니라 성직자, 평신도 유지들도 학교 설립 사업에 참여하였다. 평양에서는 청년들이 학교 설립을 목적으로 청년회를 조직하여 기명학교를 설립하였고(1905), 진남포에는 삼흥학교와 돈의학교가, 고산에는 측량학교가 설립되었다. 1905~1909년 사이에 새로 설립되었거나 개편된 학교의 수는 60여 개교에 이르러, 1910년에는 학교 124개교, 총 학생 수 3,048명이라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또한 한 학교당 수용 학생이 점차 증가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천주교회의 학교가 개량 서당적인 교육 기관에서 정규 학교로 정비 · 발전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서울의 종현학교(1909년 설립된 계성학교와 계명학교)는 236명, 가명학교는 185명, 제물포 여학교는 118명, 대구와 평양의 읍내 학교가 각기 135명과 130명의 학생수인 학교로 성장하였다. 비교적 자유로운 교육 활동을 펼 수 있었던 한국 천주교회의 학교 교육 사업은 1908년 이후 점차 법적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일제는 팽배하는 민족 정신을 꺾고 민족 교육 활동에 제약을 가하기 위해 1908년 9월 1일 사립 학교령을 제정 · 공포하고 모든 사학 기관의 교육을 규제하기 시작하였다. 이 법령에 따라 파견된 시학관(視學官)이 교육 목적, 내용, 방법은 물론 교원의 임면(任免), 학교 재정 등 학교 운영 전반을 철저히 통제 · 감독하였다. 따라서 교회가 경영하는 학교들도 이 법령에 의해 정식 인가를 받아야 공식적으로 교육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며, 또 교육 면허장을 가진 사람만을 교원으로 채용해야 하였다. 물론 학교 측에서는 이 통제 정책에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약 3분의 1 정도는 조선 통감부(朝鮮統監府)의 인가를 받았지만 나머지 학교들은 비인가 상태에서 교육 활동을 계속하였다. 조선 통감부 측 자료에 의하면 1910년 2월 당시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학교는 46개교로, 앞선 시기의 교회 통계에 따른 124개교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는 통감부 통계에는 인가를 받은 학교만이 포함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③ 여성 교육 기관의 등장과 발전 : 1900년대 들어 천주교회의 교육 사업에서 주목되는 현상은 여성 교육 기관의 출현이다. 그 이전까지 설립 · 운영되던 교회의 교육 기관은 모두 남성을 위한 초등 교육 기관이었으나,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아(女兒)들을 위한 학교가 인천과 서울, 황해도 등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는 여자들의 바깥 출입이 여의치 못한 때였으나, 수녀들의 주관하에 성당에서 경영하는 학교이었기에 부모들은 안심하고 딸을 취학시킬 수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들에 의해 1899년 8월 제물포에서 시작되었다. 학생 규모는 30명 내외였으며, 읽기, 쓰기, 수예 및 기도문과 교리 문답 등이 교육 내용이었다. 1900년에는 서울 종현 본당과 약현 본당에도 본당 부설의 여학교가 개설되었다. 이러한 여성 교육 기관은 거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수녀들이 맡아 운영하였으며, 비록 남학교보다 숫자는 적었지만 학교의 규모는 월등히 앞서고 있었다. 1901년 당시 남학교 1개교 당 학생수가 평균 9명이었던 반면, 여학교의 학생수는 평균 20명이었으며, 1910년에는 학교수도 10개교로 늘어나고 평균 학생수도 남학교의 두 배인 48명이나 되는 등 지속적인 발전을 보였다. 중등 및 고등 교육 : ① 성직자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의 설립—예수성심신학교 : 1882년을 전후해서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자 천주교회는 우선적으로 한국인 성직자 양성에 초점을 맞춰 교육 기관의 설립을 다시 추진하였다.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블랑 주교는 1885년 10월 28일 강원도 원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하고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1860~1916) 신부를 책임자로 하여, 페낭에서 돌아온 신학생 4명과 새로 모집한 신학생 3명 등 7명의 학생을 교육시켰다. 이 신학교는 1887년 3월에 서울 용산으로 옮긴 후 중등과 3년과 고등과 3년을 합한 소신학교(小神學校) 과정과, 철학과 2년, 신학과 4년을 합한 대신학교(大神學校) 과정으로 나뉘었다. 소신학교는 라틴어와 장차 철학과 신학을 익히기 위한 기초 교육을 실시하는 중등 교육 기관이고, 대신학교 과정은 중등 교육을 마치고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는 6년제 고등 교육 기관이었다. 교수진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로 구성되었으며, 매년 정규적으로 신학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 매년 또는 2~3년에 한번씩 비정기적으로 입학시켰다. 예수성심신학교는 명실상부하게 근대 교육 과정을 갖춘 고등 교육 기관이었다. ② 신자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학교 추진 : 이 시기에 천주교회의 교육 사업 발전으로 훈련받은 교사의 수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고, 1908년 일제 통감부에 의해 제정 공포된 '사립학교령' 에 따르면 정식 교원 면허장을 취득한 교사만이 교단에 설 수 있었으므로 교사를 충원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였다. 이를 위해 뮈텔 주교는 신자 교사의 양성을 계획하고 사범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909년 베네딕도회에 한국에서의 사범학교 설립 및 운영을 맡을 선발대를 입국시켜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오랜 물색 끝에 서울 혜화동에 교지를 구입하고 사우어(B. Sauer, 辛上院, 1877~1950) 신부를 책임자로 하여 개교를 서두르게 되었다. 교사의 충원이라는 현실적인 이유와 더불어 가톨릭 교육관을 체득한 교사들이 가톨릭 학교와 기타 관립 · 사립학교에서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복음 전파의 성과를 얻고자 했던 적극적인 선교 이유도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 현대적 학교 체제 정비를 통한 학교 운영(1910~1945)〕 일제는 1910년 무단 통치를 강행하면서,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한국의 문화를 말살하려는 식민지화 교육 정책을 위한 조선 교육령을 제정 ·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몇 차례 개정된 사립학교 규칙들은 가톨릭의 교육 사업에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 교육 탄압 정책과 재정 부족, 신자 교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교육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초등 교육, 중등 교육, 직업 교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 활동을 전개하면서 현대적인 학교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복음 선포와 선교라는 일차적 목표와 국민의 근대적 계몽과 지적 개발 및 전인적 양육이라는 이차적 목표를 위해 교회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던 것이다. 이 시기 교육 사업의 가장 큰 특징은 실업 교육과 중등교육 기관의 등장, 본당 학교에서 정규 학교로의 발전, 여성 고등 교육의 시작, 복음 선포(선교)를 위한 종교 교육, 일반 대중을 위한 비정규 교육 기관의 운영, 사범학교의 설립 등이다. 초등 교육 : 한국 천주교회는 전국에 많은 초등 교육 기관을 운영하였는데, 대개는 남학교보다 여학교가 더 잘 운영되었다. 이는 수녀들의 헌신적 봉사가 큰 몫을 차지하였다. 당시 천주교회의 교육 사업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재정난이었는데, 수녀들이 열의와 헌신으로 사도직에 임했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보수를 받지 않았기에 본당 학교의 빈약한 재정에 도움이 되고 학교 유지와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초등 교육 사업에서 가장 많은 활동을 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총 23개 초등 교육 기관에서 지속적 혹은 단기적으로 교육 사업을 하였다. 그런데 1920년대에 들어서자 교사 수녀의 양성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1922년까지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양성한 교사 수녀는 약 20명 정도이고 10개 본당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사범학교 졸업생은 한 명도 없었다. 이에 수녀회에서는 1927년부터 체계적인 교사 양성 계획을 추진하고, 대구 수녀원에서는 초등 교육 자격증을 위한 사범 교육뿐 아니라 나아가 중등학교 교사 자격자 양성까지 목표로 하여 지원자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켰다. 한편 1940년에는 한국 최초의 현지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가 처음으로 서약자를 배출하면서 교육 사도직을 시작하여, 평안도 지역에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운영해 온 학교들을 이어받았다. 중등 교육 : ① 중등 실업 교육의 실시 : 교회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야학과 직업 학교 등 다양한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특히 직업 교육과 기술 교육은 독일의 베네딕도회가 진출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베네딕도회는 1910년 교육을 통한 사회 문제 해결, 자립적 가톨릭 수공업자 계층 탄생을 통한 경제적 도움, 가톨릭 신앙의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숭공 학교' 를 설립하여 실업 교육을 시작하였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가 교육 사업을 해야 하는 당위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숭공학교는 독일 도제 제도 방식의 실습 위주 교육으로, 3년 과정이었다. 과정을 수료하면 이론과 실습 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받으며, 졸업생은 이후 2년 동안 숙련공 자격으로 수도원에 남아 급여의 반을 수도원에 기숙비로 지불하고 나머지 반은 저축하여 자립 자본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 8월 원산 대목구가 설정되고 베네딕도회가 그 관리를 맡게 되면서 수도원 이전 및 학교에 대한 지원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어 숭공학교는 1923년에 폐교되었다. 실업 학교로는 1920년에 초등 교육 기관인 '소의학교'(昭義學校)를 '소의상업학교' 로 개편한 을종(乙種) 실업 학교인 동성상업학교(동성중고등학교의 전신)가 있었다. 이 외에도 교회는 고산(高山)의 계명측량강습소(啓明測量講習所), 노성(魯城)의 명성측량학교, 신천(信川)의 측량학교 등 측량 기술 학교와 농업 학교들을 세워 직업 교육을 통한 자립의 길을 열고자 하였다. 이러한 직업 학교의 설립은 민중 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인문 학교와 함께 기술 발전을 통한 사회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갖는다. ② 여성 중등 교육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한국 근대 여성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녀원 구내에 설립한 전문 학교 과정인 '계성여학원' 은 1927년 4월에 개교하였으며, 가정과 1년, 연구과 1년으로 전체 수업 연한이 2년이었다. 교육 과정은 국민 도덕, 가정, 요리, 화재(和栽), 양재(洋栽), 프랑스어, 영어, 교리, 꽃꽂이 등이었으며 학생은 가정과 70여 명, 연구과 30여 명으로 보통 100명이었다. 당시 교회가 운영한 학교 대부분이 초등 단계의 학교인 데 반해 '계성여학원' 은 상급 교육 과정을 제공한 것이 이채롭다. 그러나 1944년에 3년제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가 인가되면서 '계성여학원' 은 폐교하였다. 당시는 전쟁의 막바지로 일제의 강압이 극에 달하고 제3차 조선 교육령 공포 이후 사립중학교 설립을 허가하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계성여학원' 의 폐지를 조건으로 상업전수학교 설립 허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1940년에 인천에서 '소화고등여학교'(昭和高等女學校)가 개교하였으며,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에 중등학교로 개편하면서 명칭을 인천 박문중학교로 바꾸었다. ③ 본당 학교에서 정규 학교로의 발전 : 일제 치하에서도 천주교회의 교육 사업은 계속 발전하여 학교수와 학생수가 남녀를 막론하고 증가하였고, 학교 당 평균 수용 학생수도 점차 확대되었다. 이는 교육 사업이 점차 학당적(學堂的) 성격에서 벗어나 현대적 학교로 조직화 내지 충실화되어 감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1922년 제2차 조선 교육령 개정 이후 보통학교 이수 연한이 6년제로 연장됨에 따라, 가톨릭 학교들 중에서도 공립학교와 같은 수준의 6년제 지정보통학교 허가를 받은 학교들이 등장하였다. 1924년에 계성과 효성, 1925년에 박문, 가명, 경애, 1929년에 성모보통학교가 이와 같은 인가를 받았다. 이 시기 원산 대목구에서는 1908년 삼원동 본당에서 설립한 덕흥학교(德興學校)가 대립자해성학교로 개칭하여 운영되었고, 1918년 조양학교(朝陽學校), 1921년 용정해성학교(龍井海星學校) 등이 설립되었다. 함경도에서는 1921년 야학으로 시작하여 이듬해 3월 7일에 4년제 남녀 보통학교로 인가된 원산 본당의 해성학교가 유명하였다. 1933년에는 회령 본당에서 명악학교를, 북청, 흥남 본당에서 해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이 밖에도 영흥 본당에서 야간 학교를, 고원 본당에서 보통학교를 설립 · 운영하였다. 대구 대목구의 경우 1915년 일제의 포교 규칙 선포로 교회 학교 운영이 어렵게 되자, 기존의 성립학교가 평신도에게 인계되어 해성학교로 개칭되었다. 해성학교 여자부는 1924년 교명을 효성여학교로 개칭하고 독립하였다가 1925년 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④ 선교를 위한 종교 교육 : 가톨릭 학교 교육의 복음 선포와 선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 활동은 종교 교육이다. 그러나 종교 교육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일차적으로 종교 교육의 대상은 신자 학생들이었으며, 타종교 학생들에게는 원하는 이에 한해서 종교 교육을 시켰다. 하지만 선교의 효과는 매우 컸다. 전체적으로 세례 신자수는 적었지만 미신자 학생이 종교 교육을 통해 세례를 받는 수가 증가하였으며, 졸업 후 세례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1915년 '성경 · 종교 교육의 금지' 가 포함된 '개정 사립학교 규칙' 이 공포되어, 사립학교의 교육 과정은 보통학교 규칙에 준하여 정하고 그 밖의 학과목은 일절 부과할 수 없도록 하였다. 성경 · 지리 · 역사 등의 수업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에 가톨릭 교육 기관에서는 교과 시간 이외의 시간을 이용해서 종교 교육을 지속하였다. 1922년 당시 천주교회의 중등 교육 기관인 남대문상업학교에서도 교과 과목에 교리(종교 교육)가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교우 학생들을 위해서 종교부를 통해 교리 연구와 미사 참여를 하도록 하고, 학교 행사에서도 천주교 예식이 행하여졌다. 또한 매주 토요일 신인식(申仁植, 바오로) 신부가 수강하고자 하는 학생들에 한해 30분간 종교 강의를 하였는데, 서울교구 연보(1929)에 의하면 300명의 학생 중 신자는 58명뿐이었지만 종교 강의 청강생은 100명이 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0년대에 동성상업고등학교에서는 명동 본당의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신부가 토요일마다 종교 강의를 하였는데, 그는 식민 통치가 강력하게 전개되던 그 시대에도 반드시 우리 말로 강의하였다. 이처럼 일제 말 전쟁기에 조선어학과를 폐지하여 우리 말을 배울 수 없게 되었을 때, 가톨릭 학교들은 종교 교육 시간을 통해 한글을 교육하고 보급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⑤ 사범학교의 설립—숭신학교 : 모범적인 가톨릭 신자 교사를 양성하고자 하는 뮈텔 주교의 요청으로 1911년 사범학교인 '숭신학교' (崇信學校)가 설립되었다. 초대 교장으로는 에카르트(A. Eckardt, 玉樂安, 1884~1974)신부가 임명되었으며, 첫 입학생은 15세 이상 28세 미만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남학생 25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2명이 등록을 포기하여 23명의 학생으로 시작하였다. 교과목은 종교, 윤리, 교육학, 한국어 문법과 작문, 한문, 일본어, 세계사, 지리, 수학, 과학, 음악, 미술, 체조 등으로, 이 중 종교 과목이 가장 철저하게 교육되었다. 학생들 간의 학력 차이가 커서 3개월 후인 12월 21~23일까지 시험을 통해 학생들을 분반하고 학과 진도도 속도를 중간으로 유지해야 하였다. 그러나 조선 교육령에서 사범학교는 관립학교에만 설치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숭신학교는 개교 2년 만에 졸업생 없이 자진 폐교하였다. 일반 대중을 위한 비정규 교육 기관의 운영 : 당시 각 지방의 본당과 그 소속 공소에서는 대부분 교육 기관을 설립 운영하였는데, 대개는 학원, 강습소, 야학, 여성 야학, 개량 서당 등 비정규 교육 기관이었다. 정규 학교라 할지라도 비정규 교육 기관에서 승계된 경우가 많았으며, 빈민에게 거의 무료로 교육을 실시하여 민중 교육 기관처럼 운영된 학교가 많았다. 본당 학교들은 대부분 가난한 학생들에게 수업료 부담 없이 교육의 기회를 갖도록 해 주기 위해 무료로 운영되거나 최소한의 수업료만을 받았다. 물론 재정적으로 많은 부담과 어려움을 주었지만, 본당 신부들은 기꺼이 그 어려움을 감수하였다. 이 시기 설립된 학교로는 김해(金海)의 농군학교, 영천(永川)의 노동야학교, 고산(高山)의 노동야학교, 홍산(鴻山)의 상명노동학교, 진남포(鎭南浦) 야학교, 울산(蔚山)의 농무학교(農務學校) 등이 있다. 일제하 천주교회의 교육 사업에는 선교와 문맹 퇴치, 그리고 빈민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민중을 계몽하려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본당과 그 소속 공소가 설치되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민중 교육이 실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인 선교사나 한국인 신부, 수녀 혹은 공소 회장들이 선교 방편으로 택한 것은 교육 사업, 의료 사업, 구호 사업 등이었으며 가장 보편적으로 행해진 것이 교육 사업이었다. 가장 용이하게 전개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고, 일제하 우리 민족이 당면한 가장 큰 현실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8 · 15 해방~현재까지〕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교육법을 제정하고 교육 제도와 각급 학교 교육 과정을 정비하면서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을 이루어 왔다. 해방 이후 가톨릭 교육 사업 전개의 주요 특징은 초등 교육 기관의 점차적 감소, 중등 교육 기관의 비약적인 성장과 발전, 고등 교육 기관들의 설립과 발전, 특수 교육 기관들의 설립과 발전, 종교 교육에 대한 정부의 규제와 천주교 중등학교들의 대처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초등 교육—교육 기관의 감소 : 해방과 더불어 초등학교 의무 교육 실시가 예견되자 천주교회의 학교 교육 사업은 중등 교육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의무 교육을 시행하면서 공립 학교로는 수용 한계를 느껴 사립 초등학교를 장려하였으므로 신설되는 초등학교들도 있었고, 아동 교육의 중요성에 비추어, 또는 졸업생들이나 지역 사회의 열망에 따라 계속 유지된 학교도 많았다. 인천 박문초등학교, 수원 소화초등학교, 왕림 광성초등학교, 장호원 매괴초등학교, 대구 효성초등학교, 횡성의 광동초등학교 등이 이러한 경우이다. 새로 설립된 학교로는 1957년에 성심국제학교, 1962년에 대전의 성심초등학교, 광주 살레시오초등학교, 1963년에 서울 성심초등학교, 논산 쌘뽈초등학교, 1966년 대전 성모초등학교, 1967년에 대전 요한23세초등학교 등이 있다. 그리고 서울의 계성초등학교가 1964년에 재개교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자 재정상의 어려움 등으로 요한23세초등학교, 광동초등학교, 매괴초등학교 등이 폐교되었으며 새로이 설립되는 학교도 없었다. 2005년 현재 가톨릭 초등학교는 서울 계성초등학교, 대전 성모초등학교, 인천 박문초등학교, 수원소화초등학교, 대구 효성초등학교, 광주 살레시오초등학교 등 6개교뿐이다. 중등 교육—비약적인 성장과 발전 : 주로 초등 교육 위주이던 가톨릭 교육 사업은 해방 이후 중등 교육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초등 교육 기관 중에서도 다수가 중등 교육 기관으로 전환되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중등 교육기 관으로는 마산의 성지여자중학교(1945), 인천의 대건고등학교(1946), 왜관의 순심중학교(1946), 논산 대건중 고등학교(1947), 전주의 성심여자중학교(1948), 대구 효성여자고등학교(1949), 제주의 신성여자중학교(1949)등을 비롯하여 1950년대 말까지 40여 개교나 된다.
이러한 가운데 1968년 '국민 교육 헌장' 제정, 1969년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와 1974년부터 실시된 고교 평준화 정책 등의 교육 개혁은 천주교회의 중등 교육 사업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또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의무 교육이 확대되자 천주교회의 교육 사업은 중학교 영역에서 점차 고등학교나 기타 학교로 전이되었다. 또한 가톨릭 중등학교들은 다른 사립학교들처럼 종교 교육을 정식 교육 과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율성의 통제를 받으면서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 · 사립학교의 공납금 균등으로 재정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중학교를 폐교하고 고등학교만을 운영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져, 살레시오중학교, 살레시오여자중학교, 마리아회중학교, 흑산성모중학교, 골롬바노중학교, 성요셉여자중학교 등이 폐교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살레시오중학교와 살레시오여자중학교는 재개교하였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 가톨릭 중등 교육 사업 현황을 도표로 살펴보면 <표 3>과 같다. 고등 교육—양적 확대 : 해방 이후 한국 가톨릭 교육 사업은 고등 교육 기관의 설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 이전에도 고등 교육에 해당하는 신학교가 있었지만 정부에 의해 정식 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상태는 아니었으나, 1947년 4월에 성신대학으로 정식 설립 인가를 받았다. 또한 1962년에는 신학대학인 '대건신학대학' (현 광주 가톨릭대학교)이 새로이 설립되었다. 교회는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뿐 아니라 가톨릭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춘 사회 전문인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여, 일반 고등 교육 기관들을 신설하였다. 1948년 9월에 한국 천주교회의 발의와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윤허(允許)로 서강대학교 설립이 기획되어 1960년 4월에 개교하였다. 1953년 2월에는 대구에서 효성여자대학교가 4년제 여자대학으로 출발하였고, 1964년 1월 강원도 춘천에 성심여자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전문대학인 성신간호전문대학(1967), 상지전문대학(1969) 등도 설립 · 운영되었다. 1980 ~ 1990년대에는 대구 가톨릭대학(1981), 수원가톨릭대학(1983), 부산 가톨릭대학(1990), 대전 가톨릭대학(1993), 인천 가톨릭대학(1994) 등 많은 신학대학들이 설립되었다. 이는 사제 성소의 증가와 각 지역적 특성을 살린 사제 양성의 필요성에 따른 결과이다. 1994년에는 가톨릭대학이 성심여자대학과 통합하여 1995년 3월 종합대학인 가톨릭대학교가 공식 출범하였다. 2005년 현재 가톨릭 고등 교육 기관은 가톨릭대학교와 서강대학교, 그리고 대구 가톨릭대학교 등 3개 종합대학교와 8개 대학,그리고 2개 전문대학이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 나라 사회 각 전문 분야에 가톨릭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춘 인재를 배출해 내기 위해 지속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학교 외 교육 기관의 설립과 발전 : 한국 천주교회는 정규 학교뿐 아니라 불우 청소년들에게 교육 기회를 주고 기술 교육 등으로 자립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고등 공민학교, 기술 학원 등을 설립하였다. 1972년에 마리아회에서는 효성중등학원을 설립하여 배움의 기회를 잃은 이들에게 봉사하였고, 1977년에는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서 불우 청소년들의 직업 교육을 위해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을 설립 · 운영하였으며, 1978년 예수회가 설립한 2년제 야간고등학교인 성이냐시오 학교에서는 취학 기회를 잃은 불우 청소년들을 무료로 지도하였다. 그리고 장애인들에게도 눈을 돌려 사회 봉사를 위한 특수 학교들을 설립 · 운영하고 있다. 1955년에 맹중복 장애 아동을 위한 맹아 학교인 충주 성모학교와 농아 재활학교인 충주 성심학교가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1967년에는 장애인 재활 및 보호를 위한 명혜학교, 1975년에는 청각 장애 아동들을 위한 서울 애화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83년에는 지체 부자유 아동들을 위한 은혜학교가 세워져 운영되고 있다. Ⅲ. 한국 가톨릭 교육 사업의 현안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 확립〕 가톨릭 교육 사업의 목적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가톨릭 학교의 사명은 그리스도적 교육을 통해 교회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다. 가톨릭 학교는 그리스도교 교육 공동체의 중심 기관으로서, 다른 일반 학교와 구별된다. 그러므로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 구현은 현재의 한국 교육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적 교육의 실천이라는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은 건학 이념을 실현하는 데 여러 장애 요인이 되고 있는 입시 중심의 학교 교육, 다종교 상황, 학생의 학교 선택권 부재와 같은 교육 환경에서 문제 해결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 학교의 정체성이 가톨릭 학교 구성원의 의식, 가치, 신념과 같은 비가시적인 영역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고, 각종 예식, 규범, 행사, 제도 등과 같은 가시적인 영역 전반에 스며들어 있을 때 신앙과 삶이 통합된 가장 효과적인 교육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종교 교육〕 1970년대부터 정부는 교육 과정 이수를 위한 수업 시간에 종교 교육 또는 종교 행사를 실시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무시험 추첨제 이전과 마찬가지로 종교 교육을 하려면 갑종 학교가 되든지, 갑종 학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희망하는 학생에게만 특별 활동으로 종교 교육을 실시하라는 것이 당국의 시책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방침은 해방 이후 복음 선포와 가톨릭 교육 이념의 구현이라는 목표 아래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중등 교육 기관들을 설립하여 종교 교육을 수행하던 가톨릭의 중등 학교들에게 적지 않은 타격이 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의 각급 학교 간의 긴밀한 유대 강화와 일치감, 그리고 중지를 모아가며 종교 교육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키고자 하는 의욕도 불러일으켰다. 1960년대 후반까지 가톨리시즘(Catholicismus)만을 강조하던 종교 교과서들은, 1970년대 이후부터는 가톨리시즘을 강조하면서도 종교 일반과 다른 종교에 대한 내용을 싣는 등 타종교에 대한 포용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점차 타종교와의 대화 증진, 종교에 대한 객관적 지식 함양 등 건전한 종교관을 정립시키고 도덕 · 윤리 교육을 통해 전인(全人)을 형성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가톨릭계 중등학교에서는 대부분 가톨릭 중등 학교장회나 가톨릭 교육 재단 협의회에서 발간한 종교 교과서를 선정하여 사용하면서 종교 교사 개인이 준비한 인성 교육 프로그램이나 시청각 자료, 기타 자료들을 이용하여 종교 교육을 행하고 있다. 1980년대에는 종교계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전인 교육과 인간 교육을 활성화한다는 측면과, 종교계 사립학교에서 종교를 정식 교과로 허용해 달라는 현실적인 요구를 수용한다는 측면에서 교육부는 제4차 교육 과정(문교부 고시 제 442호, 1981. 12. 31)에서부터 '자유 선택 교과' 5개 교과 속에 '종교' 과목을 포함시켰다. 대부분 종교 교육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기초한 종교 교육' 에 그 방향을 두고 있으며 '가톨릭 교리 교육' , '여러 종교에 대한 이해' 도 그 중요한 목적이다. 중학교의 경우에는 '종교' 라는 교과 외에 '창의적 재량 수업'시간을 이용해 종교 수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고등학교는 '종교' 또는 '철학' 교과를 개설하거나 두 과목을 동시에 개설하여 학생들이 선택하도록 하고 있다. 대부분 주당 수업 시간은 1~2시간이다. 한편 가톨릭계 중등학교들은 종교 교육과 병행하여 가톨릭 이념의 구현과 복음 선교를 위하여 학교 미사, 레지오 마리애, 쎌 활동, 피정 및 연수회, 성지 순례, 성모의 밤, 각종 봉사 활동, 성경 연구반, 교리반 운영 등 갖가지 교내 종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입시 중심, 학벌 중심, 평가 중심의 학교 교육 환경에서 가톨릭 교육 이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적 인간 형성을 위한 전인 교육, 종교 교육, 사회 정의 · 평등 · 도덕성 실현을 위한 교육, 교육 공동체의 형성 등을 실현하는 데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이 따른다. 한국 천주교회는 교육 사업을 시작한 이래 '복음 선포 와 '전인 교육' 을 늘 첫 번째 목적에 두고, 재원 확보의 어려움과 규제 일변도의 국가 교육 정책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많은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결과 해방 이후 교육 사업은 질적 · 양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한국의 학교 교육 발전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 가톨릭 교육 사업 ; → 가톨릭 교육 ; 계성학교 ; 광주 가톨릭대학교 ; 교육 사상 ; 〈그리스도교 교육 선언〉 ; 동성중고등학교 ; 매괴학교 ; 뮈텔 ; 배론 성 요셉 신학교 ; 베네딕도회 ; 부엉골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 소화초등학교 ; 숭공학교 ; 숭신학교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 예수성심신학교 ; 인천 박문초등학교 ; 주일학교 ; 충주성모학교 ; 충주 성심학교 ; 페낭 신학교 ; 한국 가톨릭학교장회 ; 효성초등학교) ※ 참고문헌 John B. Hellweg, 현석호 역, <그리스도교적 교육에 관한 선언 해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 총서》 4, 성바오로출판사, 1992/ 가톨릭대학사 편찬위원회, 《가톨릭대학사 자료집》, 가톨릭대학출판부, 1991/ 계성국민학교 학교사 발간위원회, 《계성국민학교 110년사》, 1994/ 교황 바오로 6세, 이종흥 역, 《현대의 복음선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9/ 김경이, <가톨릭학교교육 이념에 대한 연구>, 《종교 교육학 연구》 18권, 한국 종교교육학회, 2004, pp. 97~119/ 김경이 · 김율옥, <가톨릭학교 종교교육 현황 조사>,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한국사목연구소, 가톨릭학교교육포럼 주최, 가톨릭 학교 종교교육 심포지엄 발표 자료, 2005, pp. 77~115/ 김병상, <해방후 한국 천주교회와 교육 운동>, 《한국 교회사 논문집》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김영우 · 피정만, 《최신 한국교육사 연구》, 교육과학사, 1995/ 노병건, <프로테스탄트계 학교와의 비교>, 《경향잡지》, 1974/ 노영택,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교육사업 연구>, 《한국 교회사 논문집》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동성 중고등학교, 《東星八十年史》, 1987/ 살트르성바오로수녀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한국 살트르성바오로수녀회 100년사》, 살트르성바오로수녀회, 1991/ 손인수, 《한국교육사》Ⅱ, 문음사, 1992/ 안병초, <가톨릭 학교 운영의 현황과 문제 및 미래 전망>, 《사목》 223호, 1997/ 오경환, <가톨릭 교육과 현대과제>, 《사목》 128호, 1989/ 유진선, <한국 가톨릭 중등학교의 복음선포>, 《사목》 93호, 1984/ 윤광제, <교회 산하 학교의 현황과 대책>, 《경향잡지》, 1974/ 윤정일 외, 《한국 교육정책의 탐구》, 교육과학사, 1996/ 이양춘, <한국 천주교 교육사업의 발전과정과 문제점>,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0/ 이원순, <한국 천주교 교육 사업의 교육사적 의의>, 《사목》 64호, 1979/ 이충호, 〈구한말 천주교의 교육활동>, 청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0/ 장정란, <외국 선교회의 한국 선교>, 근현대 한국가톨릭연구단,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 상, 가톨릭출판사, 2003, pp. 39~74/ 정의순, <한국천주교회의 교육 사업에 관한 연구>, 부산대 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청구논문, 1980/ 조영관, <한국 가톨릭계 중등학교 종교교육의 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 가톨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 천주교 혜화동 교회, 《백동 60년사》, 1987/ 최석우, 《한국 교회사의 연구》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서울교구연보》 I(1878~190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 <서울교구연보> Ⅲ(1904~1938),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한국교회사연구소, 《조선 교구 통계표》(1882~1910).〔金敬伊 · 曺永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