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벨기에의 카르딘(Joseph Cardijn) 신부에 의하여 설립된 가톨릭 노동 청년회(Jeunesse Ouvrière Chrè-tienne)가 1958년 한국에 소개되면서 조직된 단체.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에 입각하여 청년 노동자의 전인적 · 지속적인 교육에 참여하고 노동계에 복음을 전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전국 협의회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148-53에 소재한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 창설] 1912년 벨기에 브뤼셀(Bru-ssels) 교외의 라켄 본당 보좌 신부였던 카르딘 신부는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여성 ·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서클을 결성하였다. 이 모임에서 교육을 받은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노조를 설립하는 등 배운 바를 실천하며 자신들의 권익을 확보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 1915년부터 브뤼셀 지역의 사회 액션 지도 신부로 활동하던 카르딘 신부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반독(反獨) 행위로 수감되었고, 이때 <노동 헌장>(Rerum Novarum, 1891. 5. 15)을 연구하며 액션 단체들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카르딘 신부는 노동자 문제는 노동자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판단하에 노동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년 노동 조합' (Jeunesse Syndicaliste)을 만들었고, 1920년에는 약 천 명의 회원을 가질 정도로 세력이 증대하였다. 한편 청년 노동 조합이 발전하자 상위 단위인 '그리스도교 노동 조합'과 충돌이 일어났다. 당시 '그리스도교 노동 조합'의 산하에 있던 다른 청년 조직들처럼 청년 노동 조합도 발언권이 없었는데, 카르딘 신부가 청년 노동자의 자치를 주장하자 장년 노동자들과 충돌을 하게 되었고, 거듭된 토론 끝에 결국 1923년 청년 노동 조합의 자율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어 가톨릭 청년 연합회에서 청년 노동 조합을 연합회에 소속시키려 하면서 다시 갈등이 일어났다. 가톨릭 청년 연합회에서는 청년들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든 청년들을 연합회에 포함시키려고 한 반면, 카르딘 신부는 진정 책임감 있는 노동 청년의 양성을 위해서는 청년 노동 조합의 자립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르딘 신부는 1924년 4월 청년 노동 조합의 명칭을 '가톨릭 노동 청년회' (이하 J.O.C.)로 개칭하고, 1925년 3월 교황 비오 11세(1922~1939)를 비공식적으로 알현하여 단체의 공식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4월에는 평의회를 개최하여 공식적으로 J.O.C.를 창립하였다. 당시 가톨릭 노동 청년회에는 200여 개의 지역 모임과 6,000여 명의 조합원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점차 프랑스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으로도 퍼져 나갔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발발하자 J.O.C.는 지하 운동 체제로 돌입하였으며, 카르딘 신부는 '청소년의 인간 발달에 있어서 교육의 위치와 국가의 특수한 역할' 에 대한 강연이 문제가 되어 1942년 6월 독일 보안대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직후 활동을 재개한 J.O.C.는 1945년 8월 말 세계 각국의 지부를 총괄하기 위해 국제 사무국을 설치하였고, 1957년 8월에는 로마에서 제1차 국제 평의회를 개최하여 정관을 제정함으로써 국제 J.O.C의 공식적인 창설을 이루어냈다.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1958년 1월 서울대학교 병원의 간호사인 박명자(마리아)가 이해남(李海南, 요셉)을 통하여 J.O.C.를 접하게 되면서 태동되었다. 이해남은 같은 달 로마에서 개최된 평신도 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러 J.O.C.를 소개받았던 것이다. 이후 박명자는 이해남의 권유로 일본 J.O.C. 본부와 연락하여 소개 책자를 전달받아 연구를 시작하였고, 3월부터는 서울대학교 병원 간호사 10여 명이 모임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프랑스에서 사목 실습 중에 J.O.C. 국제 본부에서 2개월 동안 지도자 훈련을 받았던 박성종(朴成鍾, 프란치스코) 신부가 지도 신부로 선임되면서 한국 J.O.C.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런 가운데 1958년 11월 카르딘 몬시뇰이 내한하여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깃발과 배지를 수여함으로써 한국 지부가 공식적으로 창립되었다. 이후 한국 J.O.C는 1959년 6월 빈민촌 무료 진료(새 남터)를 시작으로 대외 활동을 전개하였고, 안양 본당에 처음으로 J.O.C. 팀을 설치하였다.
한편 J.O.C.는 서울 · 대구 · 대전 · 전주 · 광주 · 춘천 · 부산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거나 설치할 준비를 하였고, 이들을 총괄하기 위하여 1960년 7월 전국 조직 본부를 서울 경향신문사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1961년 10월에는 서울 · 대구 · 전주 · 대전 교구의 남녀 대표들이 모여 제1차 전국 평의회를 개최하였으며, 11월에는 제2차 국제 평의회에서 정식 가입 국가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같은 달에 개최된 주교 회의에서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정식 인준을 받게 되면서, 초대 총재로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가 선임되었다. 이어 1962년 1월에는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실무자 회의라고 할 수 있는 전국 위원회를 조직하여 모든 조직을 체계화하였으며, 1963년 6월에는 본부를 명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1월에 다시 저동으로 옮겼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설립된 한국 J.O.C.는 설립 직후부터 노동자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에는 선면 공업 주식회사와 드레스 미싱에 노조를 결성하였고, 이어 '제지 공업' 임금 인상 사건 등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넝마주이들의 의식주 문제와 정서 교육을 위한 넝마주이 교도 사업(1962. 8)과, 노동자들을 위한 보리싹 식당 운영(1963. 2), 식모 문제 해결을 위한 여론 조사(1964. 6) 등을 실시하였고, 1960년대 초반에는 서독 파견 광부들을 위한 활동과 해외 이민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 윤락 여성 선도 및 근로 재건대 활동 등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다.
이와 함께 J.O.C.는 농촌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1964년 10월에 개최한 전국 평의회에서 산하 단체로 농촌 청년회를 신설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는 1966년 8월 농촌 실정에 맞는 청년 사도직 수행을 위하여 '한국 가톨릭 농촌 청년회' (J.A.C.)로 독립되었다. 그런 가운데 1967년 5월에는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주교가 2대 총재로 취임하였고, 1968년 1월에 강화도 심도 직물 섬유 노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J.O.C.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노조를 결성하자 회사 측에서 탄압을 가한 것으로, 당시 한국 주교단에서는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리 옹호를 위한 성명서>와 공동 교서 등을 발표하며 회사 측에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이후 J.O.C.는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한국 교회도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69년 10월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가 3대 총재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11월에는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노동 문제를 전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무렵 J.O.C.는 광산 노동자 실태 조사(1970. 1) , 여차장 삥땅에 관한 심포지엄(1970. 4), 박신정 사건(1970. 12), 천 요셉 산업 재해 사건(1971.11), 한국 모방 퇴직금 체불 사건(1972.9), 삼립 식품 사건(1973.3) 등 노동 현장에서 노동 조건 및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하여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와 기업에서는 J.O.C.를 지속적으로 탄압하였는데, 특히 1974년 7월 지학순 총재 주교가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어 강제로 연행된 이후 J.O.C. 회원들에 대한 정부와 회사 측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한편 1970년대 후반의 사회 분위기는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동일시하는 인식이 만연되어 있었다. 이에 J.O.C.는 이전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서울 통상 사건(1975. 3), YH 무역 회사 사건(1975. 5), 동일 방직 사건(1976. 2), 원주 범양 산업 사건(1977. 7), 아리아 악기 사건(1978), 태평 특수 섬유 사건(1978. 3) 등에서는 회사 측이 J.O.C.에 대항하는 어용 노조를 형성하거나 J.O.C. 소속 직원들을 해고하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J.O.C.는 이 무렵부터 가톨릭 신자가 아닌 노동자들도 회원으로 받아들여 조직을 확장하였고, 또한 각 지역별로 훈련회를 개최하여 노동 운동에 대한 재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는 계속되는 공안 기관의 탄압과 일반 노동 운동의 성장으로 해체되는 J.O.C. 연합회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2년 9월에 해체된 원풍 모방 J.O.C.의 경우 회사 측과 정부 측이 협조하여 J.O.C.를 탄압하였는데, 이것은 이후 노동 운동 탄압의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런 중에 1984년 3월 J.O.C.는 '가톨릭 노동 사목 연구소' 를 창립하여 노동 현실에 대한 실태 조사와 노동법 개정 연구, 노동 문제에 대한 초보적인 권리 자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1987년 6월의 민주화 항쟁에 참여하였고, 7 · 8월 노동자 대투쟁에서는 경제 성장 과정에서 묵살되었던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며 노동자들의 자주성 회복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J.O.C.는 전체적인 위기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 정부의 탄압으로 초래된 위기와는 다른, 사회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70년도에는 대학 진학률이 8.4%였던 것에 비하여 2002년도에는 74.3%로 증가하는 등 노동 청소년과 청년은 크게 감소하였고, 노동 형태가 유연해지면서(일용직의 증가, 노동 시간의 불규칙성) 노동자 인식 또한 희박해졌다. 아울러 다양한 노동 운동 단체들이 생겨난 것도 J.O.C.가 쇠퇴기를 맞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에 J.O.C.는 노동 운동 중심에서 생활 운동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 2월에 개최한 전국 회원 교육에서는 노동 청년의 여가 · 문화 · 가치관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바탕으로 노동 청년의 복음화와 J.O.C.의 대중화를 위한 캠페인을 추진하였고, 5월에는 학원가가 밀집하여 청소년들이 많이 모이는 노량진에 가톨릭 청소년 상담 센터를 개소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 1999년 5월에 개최된 주교 회의 상임 위원회에서는 J.O.C.가 전국 연합회 형태에서 교구 중심으로 활동하는 협의체 형태로 전환하도록 결정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J.O.C.의 생활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띄었는데, 2000년도에 실시한 청소년 아르바이트에 관한 설문 조사를 바탕으로 2001년도에는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처한 환경과 문제점들에 대하여 알리는 캠페인을 펼쳤다. 그리고 2002년 6월에는 회원 확장과 가톨릭 홍보 그리고 쉼터 제공을 목적으로 노량진에 있는 J.O.C. 전국 본부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 라는 찻집을 마련하였다. 2005년 현재 J.O.C.는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이어지는 노동 청소년 · 청년들의 노동 형태와 청년층 실업 등에 관심을 갖고 대책 마련에 노력하고 있으며, 서울, 인천, 광주, 마산의 4개 교구에서 약 10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 가톨릭 노동 여자 청년회 ; 가톨릭 노동 청년회 ; →가톨릭 사회 운동)
※ 참고문헌 J. N. Moody, 《NCE》 3/ M. Fièvez, 《NCE》 14/ 《가톨릭 사전》 《노동자의 벗 - 조셉 까르댄》, 가톨릭 출판사, 1977/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25년사》, 분도 출판사, 1986/ 황상근, 《벽돌 없는 학교》, 성 바오로 출판사, 1989/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 사업 위원회, 《최석우 신부 수품 50 주년 기념 논총 제2집 -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 《경향잡지》 2003년 8월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 천주교 연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가톨릭신문> 1896호(1994. 3. 13) · 1900호(1994. 4. 10)/<평화신문> 530호(1999. 5. 30)/ http://www.calolicor.kr/yom [金가람]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韓國 — 勞動青年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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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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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소그룹 회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