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농민회

韓國 — 農民會

〔영〕Korean Catholic Farmers' Mo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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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 농민회 창립 30주년 기념 미사(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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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 농민회 창립 30주년 기념 미사(1996년).

농민 스스로의 단결과 협력으로 농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인간적 발전을 도모하며, 사회 정의 실현을 통한 농촌 사회의 복음화와 인류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1966년 10월 17일에 설립된 전국 사도직 단체.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 1가 13-1에 소재.
〔가톨릭 농민 운동의 태동〕 농민 운동은 기층 민중 운동으로서 사회 운동의 범주에 속한다. 한국 가톨릭 농민 운동은 '농민이 주체가 된 농민 운동임과 동시에 교회 사회 운동' 이라는 통합적이고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사회 운동이란, 한 사회의 구성원인 어떤 계급이나 계층이 자신의 경제적 · 사회적 · 정치적 권익을 옹호하고 향상시키기 위하여 조직적 · 체계적 ·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객관적 조건을 변화시키고 주체적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농민 운동은 1960년대 한국 가톨릭 농촌 청년회의 태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1970년대 들어 국민 총동원 압축 성장 및 개발 독재의 모순이 깊어지면서 농민 운동은 한국 가톨릭 농민회라는 조직 운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공간이 넓어지면서 기층 민중 운동은 활발해졌다. 농민 운동은 1980년대 후반까지는 한국 가톨릭 농민회의 조직 역량에 의존하여 대부분 전개되었으나, 6월 민주항쟁 이후는 민주화 공간 속에서 농민 운동 역량이 질적 · 양적으로 급속히 성장하고 분화되었다.
〔농민회의 설립 배경과 과정〕 한국 가톨릭 농민회는 1964년 10월 17일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 내에 설치되었던 농촌 청년부(J.A.C.)를 설립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당시 J.O.C.에서 활동하던 도시 노동자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으로, 어려운 농촌 살림을 견디지 못한 청년들이었다. 이에 J.O.C. 평의회에서는 노동 문제는 농민 문제의 연속이라는 인식하에 농촌 청년부를 조직하고, 그 적극적인 활성화를 위하여 J.O.C.에서 농촌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던 이길재를 1965년 3월 전국 대표로 선임하였다. 이어 광주대교구 함평, 전주교구 화산 · 함열 · 진안 · 남원, 수원교구 양지 본당을 중심으로 《JAC 교재》 · 《JAC 개요》라는 자료를 발간하여 교육 · 홍보 활동을 전개하였다. 농촌 청년부는 J.O.C.의 활동이 농촌 본당으로 연장된 형태였기 때문에 회합 형식 조직 형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J.O.C.를 모델로 하였다.
농촌 청년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던 1966년, 이길재 대표는 왜관 감목 대리구장이던 베네딕도 수도회의 하스(O. Haas) 아빠스로부터 현재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는 농촌을 위해서 수도회의 지원 아래 구미에서 활동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에 그는 왜관 감목 대리구를 중심으로 활동의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여름 경북 구미로 사무실을 이전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농촌 청년부의 운동 이론과 방법 · 새 농사 기술 · 신용 조합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제1차 전국 지도자 훈련회를 개최하는 등 초기 조직 활동에 주력하였다. 이처럼 농촌 청년부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됨에 따라 J.O.C. 산하 부서로 활동하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1966년 8월 J.O.C. 전국 평의회는 농촌 청년부를 J.O.C.와 완전히 분리시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7일 경북 구미에서 전국 남녀 대표 30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 가톨릭 농촌 청년회' 의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71년 8월 '선진국 농업의 생산 과잉과 한국 농업' 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미국의 잉여 농산물 문제 · 독점 자본의 문제를 조직적으로 인식하고 본격적인 조직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같은 해 11월 가톨릭 농민 운동 조직 강화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4월 제3차 전국 대의원 총회에서 청년회의 명칭을 '한국 가톨릭 농민회' 로 개칭하기로 결정하였다.
〔농민회의 이념〕 가톨릭 농민회는 '현장 교회' 를 자임하였고, '해방하시는 하느님' 을 따랐다. 농사 현장 · 생활 현장 · 조직 활동 현장에서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한다는 농민회의 노선과 조직적 자세는 농업 현장 · 개인 생활 · 교회 안팎에서 많은 성취와 좌절을 체험하였고, 어떤 때에는 농민 운동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복음의 잣대'를 가지고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농민회는 사회 구원과 개인 구원을 동시에 실천하고자 한 점에서 여타의 운동과 확연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운동론 역시 사회 문제의 과학적인 인식이 강조되면서 더불어 그 한계도 인정하는 존재론적 성찰이 함께 존중되었다. 사회 구원은 구조적 모순(세상의 죄)에 대한 치열한 싸움 정신을, 개인 구원은 생활상의 잘못(자신의 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였고, 가톨릭 농민회는 이 두 가지를 분리하지 않고 동시에 극복하려고 하였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회원들은 그 과정에서 '구조악과의 싸움이 실상은 자기와의 싸움이면서, 세상의 죄와의 싸움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체득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이 가톨릭 농민회의 차별성인 '생명의 일꾼으로서 가톨릭 농민회 회원이 추구하는 생명 공동체'의 밑바탕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회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외세의 간섭을 물리치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자주적 · 평화적 · 민족 대단결의 원칙과 방법에 따른 민족 통일을 이룩한다. 둘째, 모든 형태의 독재와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민중 스스로 선택 결정하고 책임지는 정치 사회의 민주화를 이룩한다. 셋째, 국내외 독점 자본의 지배를 극복하여 민족 자립 경제를 건설하고 사랑과 정의에 토대를 둔 소유와 분배 질서를 확립한다. 넷째, 억압 · 경쟁 · 소비적인 지배 문화를 거부하고, 해방 · 협동 · 생산적인 민족 · 민중 문화를 건설한다. 다섯째,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하고 모든 이의 자유를 선포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화하고 교회 쇄신을 위해 헌신한다. 여섯째, 민주화 · 민족 통일의 실현을 위해 애쓰는 모든 민족 · 민중 · 민주 양심 세력과 굳건히 연대한다.
〔농민회의 활동〕 초기(1966~1972) 가톨릭 농촌 청년부의 주요 활동은 교육과 협동 사업이었다. 이 시기에 농민회는 농업과 농민 문제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조직적 대응보다는 '앞서가는 착한 농촌 크리스찬' · '협동하는 천주교 농촌 청년' 의 모습을 강조하였다. 이후 꾸준히 조직을 확대하며 농민 운동의 기반을 다져온 농민회는 1974년부터 땅 · 쌀값 · 농협 문제를 중심으로 농업과 농민 문제를 제기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2~8월까지 실시한 농지 임차 관계 실태 조사는 해방 이후 최초로 민간 단체가 실시한 전국 규모의 농지 조사로서, 실제 조사와 실증 자료를 통해 농민과 농업 문제를 제기하여 사회 각계의 비상한 관심을 끄는 동시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또한 1975년 10월에는 쌀 생산비 조사를 통하여 가격 문제를, 1977년에는 농협 실태 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생산자 조직 문제를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공개적으로 문제점과 해결점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농민회는 1976년 4월 춘계 주교 회의에서 주교 회의 산하의 교회 공식 단체로 인준을 받았으며, 6월에는 농민회 전국 본부를 경북 구미에서 대전 가톨릭 문화회관으로 이전하였다.
이와 같이 농민회는 교육 사업과 조사 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농민들은 자기의 문제와 가능성을 알게 되었고 조직 활동을 통해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런 각성과 농민의 전국적 조직화는 후일 농촌 사회의 민주 역량을 드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농민회는 당시 사회의 저(底) 농산물 가격 구조와 유신 정부의 활동 제약으로 인하여 함평 고구마 사건(1978), 안동 농민회 사건 (1979)을 겪어야 하였다.
1980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농축산물 수입 개방 압력이 가중되어 농촌 사정은 더욱 어려워져 갔다. 이에 농민회는 미국 소와 호주 소 수입으로 폭락한 소 값에 대해 전국적으로 연쇄적인 항의 시위를 벌여 한국 전쟁 이후 최대의 농민 투쟁을 주도하였고(1985), 양담배 시판 일을 계기로 전국 30여 군(郡)이 동시 다발 투쟁(1986)을 조직하였다. 또한 6월 민주항쟁 시기에는 전국 60여 개시 · 군에 민주 헌법 쟁취 국민 운동 본부를 조직 · 투쟁하는 데에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시기는 전두환 군부 독재와 미국의 과도한 수입 개방 압력이 중첩되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농민 운동 역시 대중 투쟁 방식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농민회는 사회 구원과 개인 구원을 통일하는 운동 노선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1980년대 전반을 관통하는 농촌 사회의 민주화(사회 구조적 모순과의 싸움, 반독재 투쟁)와 공동체적 삶의 실현(생명 파괴적 문명 양식과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 공동선의 생활화)을 동시에 실천하자는 사업 계획과 작풍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농민회의 민주화 투쟁과 수입 개방 반대 투쟁은 전국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나, 공동체적 삶의 실현이라는 일상 활동 · 현장 활동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건강한 현장 조직에는 반드시 일치하는 몇 가지 공통적인 활동이 있었다. 정기적인 회의와 학습 · 경제적인 협동 활동 · 생명의 농법(農法) 실천 등이 그것이다. 농민회는 공동체적 삶의 실현이야말로 농민 운동의 바탕 힘이며, 훌륭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 점을 모든 교육과 사업 활동에서 계속 강조하였다.
〔농민회의 확대와 앞으로의 과제〕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중의 정치적 · 사회적 욕구가 폭발하여 1987년 8월 노동자 대투쟁, 1988년 농민들의 고추 전량 수매와 쌀값 쟁취 투쟁 등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대중의 진출에 따라 자연스럽게 농민 운동이 전국 단위의 통일 조직으로 발전할 필요성이 부각되자, 1989년 3월 1일 전국 농민 운동 연합이 결성되었고 이듬해에는 이것이 전국 농민회 총연맹으로 발전하였다.
농민회는 총연맹의 발족에 열린 자세로 임하여, 많은 회원들이 총연맹에 참여하도록 촉진하고, 농민회 스스로는 '작은 가톨릭 농민회' · '새로운 가톨릭 농민회' 로 전환하였다. 이것이 바로 1990년 대의원 총회에서 채택된 '생명과 해방의 공동체를 건설하자'는 표제하의 생명 공동체 운동으로의 전환이었다. 농민회는 생명의 가치관 · 생명의 세계관을 확립하여 일체의 반생명적 질서와 공해 추방에 앞장서서 땅과 농민을 살리는 '생명의 농업' 에 충실할 것을 결의하였다.
생명 운동은 다양성의 존중 · 관계성의 강화 · 순환성의 구조화 · 영성의 드높임이 없으면 사실상 관념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생명의 농업은 농촌 노동력이 거의 바닥난 현실에서 자연의 법칙을 최대한 선용하면서 많은 일을 해야만 한다. 또한 한국 농업의 활로도 전면적인 개방 체제에서는 가족농 · 소농의 협동 체제와 지역 농업에 토대한 생명의 농업 외에는 다른 방안이 없다. 이러한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가톨릭 농민회는 우리 밀을 살려내는 중심 노릇을 수행하였고, 천주교의 도시 교회와 농촌 생산자를 공동체적으로 연결하는 우리 농촌 살리기 운동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가톨릭 농민회는 현재 20세기 농민 운동의 성과와 한계 및 과제를 극복 · 수행하며 21세기의 새로운 농민 운동을 전개하고자 한다. 21세기 농촌과 농업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WTO(세계 무역 기구) 후속 협상 문제와 환경 · 종(種)의 파괴의 심각성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회는 이러한 문제점들의 해결 및 수준 높은 생명 공동체 운동의 전개를 위하여 지역 대학이나 동식물 관련 연구소 및 기관들과 협력하여 토종 종자를 육성 · 보급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한국형 영양 공급 모델을 개발하여 건강한 식단을 정착시켜야 하며, 중국 · 일본 · 러시아 연해주 · 몽골과 동북아 생명 공동체 연대(네트워크)를 구축하여 WTO 등 반생명적 세계화를 극복하는 한편, 동북아 지역의 생명 보전 · 민중 간의 교역 · 관광 · 과학 기술 교류 등 구제적(救濟的)인 계(契)를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 (⇦ 가톨릭 농민 운동 ; 가톨릭 농민회 ; → 가톨릭 사회 운동 ; 농민 사목)
※ 참고문헌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 천주교 농촌 공소 실태조사 연구 보고서》, 분도출판사, 1984/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 평화위원회 편, 《해방 신학의 이해》,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 평화 위원회, 1984/ 농민 교리서 편찬위원회, 《해방하시는 하느님》, 분도출판사, 1987/ 한국가톨릭농민회 편, 《한국 가톨릭 농민회 30년사》, 한국가톨릭농민회, 1999. [鄭聖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