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문학 韓國 - 文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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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의 <만천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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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의 <만천유고>.

서학, 즉 천주교의 전래는 18세기 조선 사회에 새롭고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는 무엇보다 세계관의 전환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유교와 불교를 통해 종교적 자세를 구축하였지만 서학을 받아들여 비로소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영혼의 세계에 눈뜸으로써 종교적 세계관을 보다 분명하게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정신사의 변화가 조선 사회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쳤는지는 그 후 100여 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가해진 박해의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에 나타난 변화의 자취는 세계관의 산물인 문학 분야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태도와 취향이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톨리시즘(Catholicism)에 입각한 천주교 신자들의 종교적 세계관이 그에 상응하는 문학적 유산을 남기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들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종교적 순교만이 아니라 문화적 선구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교회 설립 시기의 한시(漢詩) 작품〕 중국에서 유입된 한문 서학서를 통해 천주교를 알고 배우게 된 초기 신자들은 거의 사대부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평소에 즐겨 사용하던 문학 양식인 한시와 가사를 주로 선택하였다. 그러므로 겉보기에는 가톨리시즘이 수용된 후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문학 정신과 세계 인식 태도, 그리고 창작 방법 등을 보면 현저한 변화가 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승훈 : 한국 천주교회 설립의 주역 중 한 사람인 만천(蔓川)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의 한시 작품들은 사회적 몰이해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하게 한다. 몇 차례의 시련과 교회 이탈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그의 삶은 순교 여부를 떠나서 당시 신앙 선조들이 처해 있던 어두운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찾아 나아가야만 했던 고독한 영혼들의 길찾기를 보여 준다. 《만천유고》(蔓川遺稿)와 <대동시선》(大東詩選)에 실려 있는 그의 일련의 문학적 유품들은 개인적인 신앙 고백인 동시에 한 시대의 사회적 증언으로서의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하느님의 존재를 발견하고 자신의 영적 상태에 눈뜨기 시작한 이승훈은 천상의 이미지로 '달' 과 '구름' 을 노래하고 있는데, 여기서 '달' 은 광원(廣遠) 고처에서 두루 비추어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는 자로서 하느님을 암시하며(〈興南霽月), '구름' 은 단비를 뿌려 만물을 적시고 생명을 보호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암시한다(<天德歸雲〉. 그의 작품에는 특히 천주교 신자로서 동경하고 따르는 대상으로 설정된 '달' 이미지가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이미지 사용은 천주교의 수용과 함께 한국인의 정신적 지평이 확대되고 있음과 동시에 시적 상상력과 상징 체계가 그만큼 풍부하고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한편, 세상을 보는 이승훈의 눈도 이전의 문학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복하래범>(福河來帆)과 <두미호주>(斗尾呼舟)라는 시를 보면, 작가는 양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하층민인 뱃사공에게 깊은 관심과 찬사를 보내고 있다. 미천한 사공이지만 성실히 자기의 본분을 다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웃과 사회에 대한 이러한 관심과 연민의 정은 새로운 창작 기법의 발판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의로운 마음을 드러낼 종이 없다"라고 한탄한 시 <독조봉〉(獨朝峰)이나 "원컨대 내 생각 말하려 하나 구름과 나무가 해를 가리네"라고 한 <우제>(偶題)의 구절처럼, 시인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여기서 종'종' (鐘)이 억울한 사연을 아뢸 수 있는 신문고와 같은 것이라면 '나무' 와 '구름' 은 '해' , 즉 진리를 왜곡시키는 사회적 장애를 비유한 것이다.
<만천공임종시)(臺)/소臨詩)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고 순교에 가까운 시인의 최후에 대한 치열성을 담고 있다. "해는 떨어져도 하늘에 있고 물은 다해도 여전히 땅에 있네"(日落在天 水盡在地). 만천이 죽을 때 남긴 이 시는 그의 아우 치훈(致薰)이 듣고 전함으로써 오랫동안 구전되어 내려오다가 훗날 《평창 이씨 세보》(平昌李氏世譜)에 수록된 작품이라고 한다. 위 두 구절만 보더라도 그의 정신적 지향점은 가톨리시즘에 입각한 조화와 질서의 세계이며, 하느님이 다스리는 천상의 세계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정약용 : 한국 천주교회 설립 시기의 문학은 주제상 유배와 순교, 그리고 위기 상황 속에서 겪는 정신적 고뇌와 갈등, 자기 성찰,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요한, 1762~1836)의 시와 산문에는 그러한 시대적 특징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고르게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땅의 가톨릭 문학이 신유(辛酉) · 신해(辛亥) · 병오(丙午) · 기해박해(己亥迫害) 등 여러 차례 반복된 지속적인 피의 수난사를 통해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작 기법의 발견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앞서 이승훈의 시에서 나타난 변화의 양상은 다산에 이르러 뚜렷한 결실을 거두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의 시와 산문은 가톨릭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 시기 우리 문학사가 거둔 최대의 성과 중 하나로 지적된다.
초기의 가톨릭 문학은 순교와 유배로 점철된 이 시기 교회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다산이 지은 <하담의 이별〉(荷潭別)이란 시는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오른 다산이 부모님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 여기서 '하담' 은 선영(先塋)이 있는 곳이다. 이때 중형 약전(若銓, 1758~1816)은 남해 신지도로 유배되었고 삼형인 약종(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은 참수되었으며, 다산 본인은 경상도 장기를 거쳐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하느님을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가문이 정치적으로 몰락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18년 간의 긴 유배 생활을 통해서 세계와 인간의 삶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참된 시각을 갖추게 되었다.
다산의 삶과 문학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랑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강조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에서 금지된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발판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그의 시는 가족과 형제,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연민의 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예컨대, 시 <가동을 보내고〉(家僮歸)에서는 집에서 온 편지를 보며 슬픔에 잠긴 아내와 어린 자식을 그리워하고<밤〉(栗)에서는 아들이 보낸 밤을 맛보려다 말고 서글피 먼 하늘만 바라본다고 하였다. 단오날을 맞아 어린 딸 ( '손 안의 구슬' )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면서 쓴 시 <어린 딸이 그리워〉(憶幼女)라든가, 유배지인 강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섬 신지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형을 생각하면서 쓴 시 <가을날 형님을 그리며〉(秋日憶舍兄)를 보면 시인이 가족과 형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다산의 사회 · 정치 사상은 그의 인간 이해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경세론(經世論)의 핵심어인 '치' (治)의 개념은 권력을 가진 자의 지배 행위라기보다 자아 실현에 속한다. 즉 다스린다는 의미로서의 '치' 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도리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함은 곧 '치인' (治人)의 일에 해당된다. 그의 관심은 가족과 이웃에서 사회 전체로 확산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세계 인식 태도와 인간관을 그대로 보여 준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인간에 대한 사랑은 곧 하느님에 대한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 · 정치 사상은 다산의 문학적 활동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은 "세상을 근심하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곧 시(詩)라고 하고, "항상 힘없는 사람을 도와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여 가슴 아파하며 차마 버리지 않을 마음을 가져야만 비로소 시를 쓸 수 있다”(〈示兩兒〉)고 하였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시대를 아파하고 퇴폐한 습속을 통분히 여기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다. 옳은 것을 찬미하고 잘못을 풍자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려는 뜻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寄Ⅷ兒)〉)라고 하였다. 다산의 이러한 견해는 얼핏 보기에 지나치게 공리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시인의 사회적 존재 방식을 지적한 것으로 주목된다. 즉, 그의 견해를 빌면 시인도 현실에 직면함으로써 자기 시대의 절실한 문제들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보리 타작〉(打麥行)이라는 시에서는 농민의 삶과 애환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제시하고 있다. 비록 유배 상황에 있지만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서민들과 하나가 되어 노동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물 즉 대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객관적 형상화의 방법이다. 이것은 모든 문학과 예술의 기본적인 창작 원리에 속하는 것이지만, 다산은 그러한 근본 원리가 망각되거나 무너진 사회에서 그것을 재인식하고 몸소 실천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반상(班常)의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서민층을 업신여기는 낡은 관념을 벗겨내고 사물, 즉 '보리 타작' 의 흥겨운 광경을 그 자체로 관찰하여 눈에 보일 듯 선명하게 객관적 형상화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다산은 경세가로서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도 탁월한 안목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발견과 업적들은 그가 젊은 시절에 받아들인 서학과 천주교 신앙을 통해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 는 새로운 세계관 및 가치관에 힘입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웃 사람들(사회)에 대한 관심과 열정, 특히 연민의 정은 호기심을 낳고, 그것이 곧 실험 의식과 탐구 의식을 자극하고 있으며 거기서 새로운 창작 방법이 개발된 것으로 풀이된다.
<여름날 술을 마시며〉(夏日對酒)는 잘못된 신분 제도 때문에 인간의 기본권마저 박탈당한 서민층의 비애와 사회적 한계를 폭로한 사회시이며, <고양이>(猫奴行)는 아전( '고양이' )이 쥐( '도둑' )와 한통속이 되어 힘없는 백성 ( '남산골 늙은이' )을 괴롭히는 당시의 세태를 고발한 우화시이다. 다산의 시에서는 이렇게 서민층, 특히 폭정과 가난으로 생존의 위협을 받는 극빈자들의 모습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 주어야 한다”(〈鈸琳津農歌〉)는 신념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그는 굳이 하느님 또는 신앙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웃(즉 인간)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묵묵히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해 시기의 천주가사(天主歌辭)〕 천주교 신자들이 겪은 박해기의 체험은 한시 이외에도 가사를 통해 생생하게 제시되었다. 특히 천주가사는 서민층에서 가장 사랑받았을 뿐 아니라 선교의 도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 시기 교회 내부에서는 가사 형식으로 노래된 가톨릭 신앙시를 '천당 노래' 라든가 '천당 강론' , '사주구령가 (事主救靈歌)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렀으나, 최근에는 한국 문학사의 시가(詩歌) 갈래에 따라 '천주가사'라는 명칭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문학적 가치나 깊이로 보면 천주가사는 한시에 미칠 수 없으나, 우리 문학사의 전개 과정에 비추어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양식이 시대의 변화를 대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신앙 체험을 우리의 말과 의식으로 토착화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천주가사의 역사적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18세기 말 조선 후기 사회에서 형성된 가톨릭 문학의 장르 체계는 한시에서 가사로 그 주류가 바뀌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천주' 를 알고 전한다는 그리스도교의 선교 정신에 힘입은 것으로 해석된다.
천주가사의 효시를 이룬 작품으로는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와 <십계명가>(十誡歌)를 들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오랫동안 구전되다가 이승훈의 문집 《만천유고》에 수록되었다.
<천주공경가> : 4 · 4조 4음보격으로 17구에 불과한 짧은 노래이나, 신앙 체험을 담고 있는 최초의 가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두에서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네말솜 드러보쇼 지본에는 어른있고 노라에난 임군있네 네몸에는 령혼있고 후놀에난 턴쥬있네"라고 하면서 작가는 천주교를 통하여 비로소 하느님의 존재를 발견하고 영혼이 눈떴음을 고백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신앙 체험은 중국에서 발간된 리치(M. Ricci, 利瑪竇, 1552~1610)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비롯한 한문 서학서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그것이 한글과 율조(律調)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적 신앙 체험을 한시(漢詩)라는 고급 시가 형식이 아니라 가사라는 대중적 시가 형식을 택하여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신앙 체험을 모든 사람들( '세상 벗님' )과 나누어 갖고자 하는 선교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시비마쇼"라는 구절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는 점으로 보아, 새로운 종교의 수용을 거부 또는 제약하는 사회적 한계도 반영하고 있다.
<십계명가> : <천주공경가>가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몰이해에 대응하기 위해서 제작된 것이라면 <십계명가>는 신앙 생활의 근본 원리로 제시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작품이 천주가사의 효시를 이루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초기 교회에서는 주님의 기도(天主經)와 성모송[聖母經〕, 십계명(十誡命)을 가장 중요한 경문과 계율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신자들은 십계명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비로소 천주교 신자가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천주교 신자로 생활하는 것을 '수계한다' 고 하였다. 그러나 경문이 모두 한문 원음으로 되어 있었기에 학식이 높지 않은 일반 신자들이 암송하거나 그 의미를 터득하기가 매우 불편하였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십계명을 한글로 풀어 쓰고 외우기 쉽도록 가사체 리듬으로 노래를 지은 것이다. 즉 천주가사는 교리서의 기능을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선교를 위한 매체로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십계명가>는 십계명의 제1 계명부터 차례로 제시하며, 무교와 미신뿐 아니라 유교의 제사와 신주(神主)까지도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유교와 천주교 사이에 윤리적 마찰과 갈등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이 박해의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주교가 우리 민족의 문화 속에 서서히 뿌리 내리고 있음 또한 보여 준다. 가령, "인간금슈 초목문물 그아버지 턴쥬일세 부모효도 알고지면 편쥬공경 올고지고"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한 분이므로 부모(더 나가서는 임금까지 포함해서)에게보다 더 효도하고 충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 사회의 전통 정신으로 존중되어 온 충효의 관념이 가톨리시즘의 수용과 함께 한국인의 의식 내부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사향가> : 4 · 4조 4음보격으로 426구에 달하는 긴 노래다. 어떤 가첩에는 "제이위 사양가"라 하여 최양업 (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작품이라고 간접적으로 암시하지만, 이러한 기록은 구전에 의한 것이므로 신빙성이 희박하다. "어화 벗님네야 우리 본향 초조가세 동서남북 \times 1 팔방 어나곳지 본향인고"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본향이 하느님 나라임을 밝히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영혼 삼사(三司) · 육신 오관(五管) · 삼혼 분별(三魂分別) · 신마 유분(神魔有分) · 사원행(四元行) 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427~348/347)과 아리스토텔레스(Annstates, 기원전 384/383~322/321)의 철학 사상부터 아우구스티노(Augustius Hipponensis, 354~430),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25~1274)의 신학 사상까지 수용하여 알기 쉽게 풀어쓰고 있다. 그리고 주요 내용을 전개할 때에는 문답 형식을 빌어 일반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이본(異本)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사랑을 받고 애송된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옥중데성>과 <삼세대의> : <사향가>와 함께 이 시기의 신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을 꼽는다면 이문우(李文祐, 요한, 1809~1840)의 <옥중데성>과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 1787~1840)의 <삼세대의>를 들 수 있다.
<옥중데성>은 4 · 4조 4음보 65구로 된 짧은 노래다. 내용상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단락에서는 마음을 다하여 주를 섬기고 죽음을 예비하였다가 천상(天上) 과거(科擧)에 급제할 것을 노래하고, 둘째 단락에서는 죽음의 승리를 노래하였다. 결사에 해당하는 셋째 단락에서는 사주구령(事主救靈)을 위해 순교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시적 화자는 순교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구하게 된 것을 어떻게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세고(世苦)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순교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서는 영혼과 육체의 싸움에서 영혼이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영육간의 갈등 속에서 죽음을 통해 영혼의 승리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노래는 한국 문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즉, 이질적인 종교로 탄압받아 온 천 주교회의 신앙이 이 땅의 말과 의식 속에 육화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세대의>는 4 · 4조 4음보격 287구에 달하는 긴 노래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이 노래는 삼세(三世), 즉 하느님의 나라(天堂)와 현세와 지옥이 지니는 근본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아무리 현세의 고통이 극심할지라도 위주구령(爲主求靈)으로 천당에 들어가 영생을 얻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노래는 경세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하지만 박해와 순교라는 당시의 처절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어떠한 외부적 압력이나 유혹에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 신앙인들의 정신적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옥중데성>과 <삼세대의>는 모두 1840년 박해 때 옥중에서 제작된 것으로, 이 시기 순교의 길을 걸어간 천주교 신자들의 정신적 열성과 위주구령의 갈망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죽음으로 신앙(즉 진리)의 승리를 보여 준 이 시기 신자들은 이 노래들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재확인하고 신앙 공동체의 내적 결속력을 축적하면서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박해의 폭풍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이 가사 작품들은 천주교 교리서인 동시에 선교의 매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일반 문학사 및 정신사에 있어서도 우리 민족이 그 이전에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의 존재 방식을 구현한 것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기타 : 박해 시기의 천주가사 작품으로는 위에서 언급 된 가사 외에도 <천당강론>, <지옥강론>, <십계강론>,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와 <신덕가>, <망덕가), <애덕가>의 향주삼덕가, <영세>, <견진>, <고해>, <성체>, <종부>, <신품>, <혼배> 등의 7성사가와 형식이 똑같은 <칠극>, <제성>, <행선>, <애덕> 등의 노래가 있다. 이 노래들은 대부분 작가와 제작 연대를 확인하기 힘들다. 박해로 말미암아 원본은 유실된 채 전사(轉寫)되거나 구전으로 전승되어 그 기원 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이 또한 박해의 한 상처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 땅의 가톨릭 문학은 공포와 죽음의 체험을 통해서 얻은 소중한 문화 유산인 것이다.
[박해 시기의 산문들〕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 초기부터 당시의 문학적 관습에 따라 수상록과 신앙 고백, 탄원서, 옥중 서간과 수기, 전기, 참회록, 묘지명 등 다양한 표현 형식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산문들은 시가에 못지않게 박해 시기의 신앙 체험을 직접적이고 생생하게 제시하였다. 이 산문들이 박해와 순교의 기록이요 증언이었다는 점에서 교회사적으로도 물론 소중하지만, 한국 문학사의 전개 과정에서 가톨리시즘의 수용을 통해 새 시대의 장을 열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수상록 : 정약종의 (주교요지》(主敎要旨)는 교회사적으로는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교리서이자, 문학적으로는 가톨리시즘에 입각한 최초의 수상록이다. 한문 서학서를 통해 교리를 받아들인 저자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 신앙 체험과 성찰에 바탕을 두고 이 책을 저술하였다.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1775~1801)이 <백서〉(帛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중국에서 이미 발간된 "성교의 여러 가지 저술에서 인용하고, 자기의 의견을 보태서, 아주 쉽고 분명하게 해설하여, 어리석은 부녀자나 어린 아이들이라도 책을 펴 보기만 하면 환히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훗날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이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써서 조정의 반대파들까지 놀라게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글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부당성을 주장한 한국 최초의 호교서로 유명하지만, 문학적으로 볼 때 자신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한 탁월한 산문 문장으로 주목된다. 이기경(李基慶, 1756~1819)은 "고문제법이 단연코 심히 노숙한 면이 많으니 그 혈당 친족 중 학문에 매우 유식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라고 칭찬하면서 <상재상서>를 원문 그대로 《벽위편》(闢衛編)에 남기고 있다. 이들 부자(父子)의 저술은 근대 수필의 선편을 이룬 것으로 주목 할 가치가 있다.
옥중 서간과 수기 : 이 시기에는 옥중 서간과 수기들이 많이 쓰여졌다. 현전하는 옥중 서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1782~1801)가 <1801년 9월 27일(양력 11월 3일)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와 <1801년 11월에 두 언니(친언니와 올케 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누갈다초남이일거남민)에는 이 밖에도 오빠인 이경도(李景陶, 가롤로, 1780~1801)의 <1801년 12월 25일(양력 1802년 1월 28일)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와 막내 동생 이경언(李景彥, 바오로, 1790~ 1827)이 전주 옥중에서 순교하기 직전에 쓴 <1827년 5월 14일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1827년 5월 15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 <1927년 5월 25일 명도회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 등 3통과 옥중 수기 <경히년 니봐로 일괴>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부 집안의 옥중 서간도 유명하다. 둘째 종조부인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 ?~1816)이 1815년 을해박해로 체포된 후 대구 옥중에서 쓴 <형에게 보낸 편지> 2통, <교우 이씨와 유씨에게 보낸 편지> 1통이 있으며, 김대건 신부 본인의 서간 역시 남아 있다. 특히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마지막 회유문' 으로 잘 알려진 <1846년 8월 말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는 원본이 없지만 1885년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1853~1922) 신부가 필사한 사본이 있다. 라틴어로 씌여진 김대건 신부의 서간 원본은 파리 외방전교회 고문서고에 소장되어 있다가 한국 천주교회로 이관되었으며, 현재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1759~1791)의 <죄인지출일과(罪人持忠日記))와 이태권(李太權, 베드로, 1781~1839) · 신태보(申太甫, 베드로, ?~1839)의 옥중 수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순교자들의 옥중 수기를 기초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순교 전기들도 있다. 이에 속하는 것으로는, 우선 정산 장터에서 순교한 이도기(李道起, 바오로, 1743~1798), 해미 순교자 박취득(朴取得, 라우렌시오, ?~1799)과 이보현(李步玄, 프란치스코, 1773~1799), 인언민(印彥敏, 마르티노, 1737~1799), 홍주 순교자 방 프란치스코(方, ?~1798), 청주의 첫 순교자 원시보(야고보, 1730~1799), 박보록(朴甫錄, 바오로, ?~1827), 박사의(朴士儀, 안드레아, ?~1839), 최해성(崔海成, 요한, 1811~1839), 임군집(林君執, 요셉, 1803~1846) 등의 전기도 그 내용으로 볼 때 옥중 수기나 서간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 같다.
이처럼 전해지는 것보다 더 많은 옥중 서간과 수기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1818~1866) 주교가 수집하여 보관해 두었던 집에 1863년 봄 화재가 나서 대부분 소실된 것 같다. 따라서 이경언의 수기를 제외하고는 프랑스어 번역뿐이다. 그러나 체포 당시의 상황이나 옥중에서의 수난, 순교에 대한 열정과 교리에 대한 믿음은 물론 가족이나 교우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어, 박해 시대 신자들의 문학 작품이요 신앙 고백서로 당시의 순교 신앙과 교회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묘지명 : 정약용의 묘지명은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것과 타인의 생애를 기록한 것으로 대별할 수 있다. 자신의 생애와 사상 및 업적을 전기 형식으로 자세하게 기록한<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은 자서전에 해당하는 것인데, 전기적 사실은 물론 당시의 학풍(學風)과 문풍(文風), 시대적 질곡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타인의 생애를 다룬 것으로는 권철신(權哲身) · 이가환(李家煥) · 이기양(李基讓) · 오석충(吳錫忠) · 윤지범(尹持範) · 윤지눌(尹持訥) · 이유수(李儒修) · 윤서유(尹書有) 등 남인계 실학파 문사들에 관한 묘지명과 다산 집안의 어른 및 자손들의 묘지명이 있다. 그중에서도 집안 사람들에 관한 묘지명은 고난의 길을 걸어간 혈육들의 비애와 억울한 죽음에 대한 글들이어서 다산의 애듯한 인간미를 느끼게 해 준다. 특히 <선중씨 정약전 묘지명>(先中氏丁若銓墓誌銘)은 신유박해 이후 형제가 함께 겪어야만 했던 험난한 시대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서, 자신의 묘지명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다산의 이 묘지명은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형제이면서 지기(知己)이기도 했던 중형을 잃은 슬픔과 함께 탄압의 한 시대를 기록한 고발 문학이자 역사의 증언이기도 하다.
[개화기의 문학] 1886년 한불 조약을 계기로 100여 년에 걸친 천주교 박해 정책은 끝났으나 유학적 · 보수적인 당시 사회의 관습 때문에 실제로 박해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눈뜨지 못한 지방 관리들이나 폐쇄적 유학자들에 의해 제주 교안(1901)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박해가 지속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시작하자, 각지에 성당이 건축되고 성가를 목청껏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순교자들이 뿌린 피가 신앙의 씨앗이 되어 교우들의 가슴 속에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바로 근대적 체제를 갖춘 저널리즘의 등장이다. 1906년에 주간지 <경향신문>(京鄉新聞)이 창간되고, 그 부록으로 발행되던 〈보감〉(寶鑑)은 1911년 《경향잡지》(京鄉雜誌)로 변경되어 현재 한국 잡지사상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보감> 제1호의 '논설' 은 "강후고 약호 인민의 분별을 말홀진대 참기화로 훈 나라흔 강후고 참기화를 치@지 못한 나라흔 약@니"라 하여 개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천주교의 수용이 단순히 종교적인 선교 활동에 그치지 않고 신문화의 이식과 민중 계몽에 선구적 일익을 담당하였음을 알려 준다.
개화기의 천주가사 작품은 필사본 40여 편, 그리고 <경향신문>과 <경향잡지> 게재분을 합하여 모두 120여 편에 이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충효가>(忠孝歌)와 <성당가>(聖歌), <자신책가>(自身責歌) 등을 들 수 있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천주가사는 박해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밝고 기쁨에 찬 신앙 체험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이 한국의 전통 사상 속에 합쳐지고 있음이 드러난다. 예컨대 김기호(金起浩, 요한, 1824~1903)의 <성당가>를 보면 '편쥬 계신 곳 을 성당이라 하고, 그 성당을 '하늘의 성당' 과 '지상의 성당' , '마음의 성당' 등으로 나누고 있다. 이 노래에서 지향하고 있는 성당은 하느님의 나라이다. 시적 화자는 "여러분은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마태 4, 17)라고 한 예수의 말씀을 토대로 '하늘의 성당' 을 더없이 찬란한 빛과 구원의 공간으로서 동경하고 있다. 그곳은 온갖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하나의 성이요 궁전이며, 베드로와 바오로 등 열두 제자가 이 성의 기둥으로 받치고 있다. 성모 마리아와 양부(養父)인 요셉도 있고, 천사들이 향을 피우며 열을 지어 서 있는 이 지극히 높고 거룩한 성당(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모든 성인과 성녀들이 하느님의 뜻으로 기뻐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시적 화자는 그러므로 "주모(主母) 신성 희락하니 우리 또한 들어갈까"하고 경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처럼 순교의 피로 얼룩진 박해 시대의 작품들과는 달리 밝고 희망에 찬 주제가 제시되고 있는 반면, 박해 시대의 시가와 산문에서 느낄 수 있었던 정신의 치열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일제 시대의 가톨릭 문학] 1920년대의 신문학 운동과 함께 이 땅의 가톨릭 문학도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었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이 <아기의 기도 (1)>과 <명령> 등의 시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 체험을 현대 자유시 형식으로 노래하였으며, 박종화(朴鐘和, 1901~1981)는 가톨릭 순교사를 다른 소설《여명(黎明)》(개벽) 1925. 1)을 발표하였다. 1933년 6월부터 서울 대목구 산하 가톨릭 청년사에서 종교 · 교양 월간지로 발간하기 시작한 《가톨릭 청년》은 명실공히 한국 가톨릭 문학의 현대화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잡지의 편집진으로 참여한 이동구(李東九, 베네딕도, 1904~1943)와 정지용(鄭芝溶, 프란치스코, 1902~1950)은 이런 점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겠다. 이동구는 평론 <가톨닉은 문학을 엇더케 취급할가>(《가톨릭 청년》 창간호)에서 동시대의 세계 문학 경향을 소개하는 한편, 가톨릭 문학의 좌표를 탐색하였으며, 정지용은 《가톨릭 청년》에 <임종>, <별>, <은혜>, <갈닐네아 바다> 등 일련의 신앙시를 발표하였다. 이 시기의 한국 시단에서 가장 주목할 현상은 바로 이러한 신앙 시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유학 기간에 영미 이미지즘(imgism)을 수용한 정지용이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시의 세계를 개척하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겠다. 18세기 말 초기 신자들에 의해 시도된 가톨릭 문학이 마침내 이 땅에서 견고한 토양을 닦아 활짝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정지용은 시 <다른 한울>(《가톨릭 청년》 1934. 2)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안었으나 그의 안에서 나의 呼吸이 절로 달도다. 물과 聖神으로 다시 낳은 이후 나의 날은 날로 새로운 太陽이로세! 뭇사람과 소란한 世代에서 그가 다맛 내게 하신 일을 진히리라! 미리 가지지 안엇던 세상이어니 이제 새삼 기다리지 안으련다. 령혼은 불과 사랑으로! 육신은 한낫 고로움. 보이는 한울은 나의 무덤을 덥흘뿐. 그의 옷자락이 나의 五官에 사모치지 안엇으나 그의 그늘로 나의 다른 한울을 삼으리라." 여기에서 "그는 주님을 가리킨다. "그의 안에서 나의 호흡이 절로 달도다" 라든가 "그의 그늘로 나의 다른 한울을 삼으리라"는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물과 성신으로 다시 낳은 이후") 시인의 신앙 체험이 내부에서 깊숙이 우러나오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일제 말기에 활동한 사제 작가로는 황해도 은율 본당의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1889~1950) 신부가 있다. 그의 소설 <은화>(隱花)는 박해를 주제로 한 미완성 역사 소설이다. 기해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1939년 1월부터 1950년 6월까지 《경향잡지》에 연재된 이 소설은 1950년 6월 윤의병 신부가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연재가 중단되었다. 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이 소설은 1866년 병인박해를 소재로 한 것으로서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교우들의 신앙과 생활 모습 그리고 순교를 다루고 있으며, 박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고난을 이겨내고 신앙을 증거하려는 교우들의 삶과 애환을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은 1977년 은율 출신 이계중(李啓重, 요한) 신부가 자비로 출판하였다가 1986년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재판을 발행한 이래 판을 거듭하고 있다. 순교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이 큰 만큼 순교 소설에 대한 반응도 큰 것으로 보인다. 비록 미완성으로 끝나긴 하였지만 순교 소설의 좋은 예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선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1945년 광복 전후에 활동한 사제 시인으로는 최민순(崔玟順, 요한, 1912~1975) 신부와 하한주(河漢珠, 요셉, 1909~1984) 신부가 있다. 최민순의 <두메꽃>은 사제의 삶과 지향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준 작품이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 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민요풍의 소박한 언어로 담담하게 노래하면서 모든 것을 주님께 돌려드림으로써 정신적 자유를 획득하고 있는 최민순 신부의 내면 세계를 함축적으로 간단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비움과 겸손의 미덕을 노래한 시조 작품 <낙엽송>(落葉松)에서는 "낙엽송 네 그루가 나란히 곧게 서서 하늘로 치오르다 서로 같이 말라간다. 스스로 낮고자 했던들 하나라도 살 것을"이라 하여 예수의 육화와 그 의미를 돌이켜보게 한다.
시조 시인 하한주 신부도 사제로서 가난과 겸손의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성서에 나타난 사건들을 찬미하는가 하면, 한국의 순교지를 순례하며 찬양하는 노래를 많이 남겼다. "인간에 내리신 후도 언제나 성자시라 주당(主堂)에 드릴 까닭 있기야 하랴마는 임에게 바치는 그 정성 못내 갸특하시다"(〈예수 헌당>). 이 시조는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에 가서 하느님께 바친 것을 노래하고 있다.
비록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김현승(金顯承, 1913~1975), 윤동주(尹東柱, 1917~1945), 박두진(朴斗鎭, 1916~1998), 박목월(朴木月, 1916~1978) 등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국적 토착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특히 김현승의 시 <가을의 기도>와 <눈물>, 윤동주의 시 <서시>와 같은 작품들은 한 시대의 문학적 유산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가을의 기도〉는 "오직 한 사람"(즉 예수)을 생각하며 영적 구원으로서의 "열매"를 거두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단적으로 투명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시 <눈물> 또한 "눈물"의 상징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회의 삶과 영적 정화의 태도를 노래한 것으로서 사랑받는 작품이다.
[해방 후의 가톨릭 문학] 광복 후 문단에서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보인 가톨릭 시인으로는 구상(具常, 세례자 요한, 1919~2004), 김남조(金南祚, 마리아 막달레나, 1927~ ) , 홍윤숙(洪允淑, 데레사, 1925~ ), 성찬경(成贊慶, 요한, 1930~ ) 등이 있으며, 가톨릭 작가로는 한무숙(韓戊淑, 글라라, 1918~1993), 박경리(朴景利, 1927~ ), 최인호(崔仁浩, 베드로, 1945~ ) 박완서(朴婉緒, 정혜 엘리사벳, 1931~ ) 등이 있다. 그리고 가톨릭 문인 단체들이 지역별로 많이 결성되어 그 산하에 속한 회원들만 해도 상당수에 이른다. 2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 가톨릭 교회는 마침내 우리 민족의 정신사 속에서 새로운 전통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활동하는 가톨릭 시인과 작가들이 많다고 하여 가톨릭 문학 작품이 많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가톨리시즘이 반영된 작품이 많은 것도 아니다. 작품별로 구분한다면 시 작품은 비교적 많고 또 현재도 많이 저작되고 있지만 소설은 거의 없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또한, 가톨릭 작가들의 대표작으로는 가톨리시즘이 반영되지 않은 작품이 거론되기 일쑤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가톨릭 문학이 과연 현재 이 땅에서 꽃피우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따라서 앞으로의 과제는 작가들 스스로 문학과 신앙의 관계를 보다 튼튼히 재정립하고, 박해 시대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안이한 소재주의에서 탈피하여 문학 곧 영성의 언어 공간으로 확장해 나가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시와 소설 등 창작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비평 분야에 있어서도 가톨리시즘에 입각한 새로운 문학적 좌표를 설정함으로써, 인간 구원이라는 가톨릭 문학의 성격과 방향을 점검하는 데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V 가톨릭 문학, 한국의 ; → 《만천유고》 ; 《사주 구령가》 ; <사향가> ; <상재상서> ; 옥중 서간, 한국 천주교회에서의 ; 옥중 수기 ; 윤의병 ; 이승훈 ; 정약용 ; <주교요지> ; 천주가사 ; 최민순 ; 하한주)
※ 참고문헌  김진소, <천주가사의 연구>,《교회사연구》 3,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하성래, 《천주가사 연구》, 성 황석두루가서원, 1985/ 김영수 편, 《천주가사 자료집》,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2000/ 김세계, <이승훈의 한시 연구>, 한남대 대학원 석사 논문, 1992/ 송재소 역, 《다산 시선》, 창작과 비평사, 1981/ 박석무 역, 《다산 산문선》, 창작과 비평사,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순교자와 증거자들》,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성 김대건 안드레 가신부의 서 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金時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