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음악 韓國 - 音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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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 신학교 관현악단을 지휘하는 피셔 신부.
한국 천주교회에서 불렸거나 현재 불리고 연주되는 그 레고리오 성가와 미사곡 · 모테트 · 칸타타 등 모든 교회 음악을 총칭하는 용어. 좁은 의미로는 신자들이 전례와 전례 밖의 신심 행사에서 함께 노래할 수 있는 한글 가사 의 장절(章節) 노래를 의미한다. 한국 가톨릭 음악은 천주가사(天主歌辭)에서 시작되었다. 천주가사는 한국 천주교회를 설립한 한국인 평신 도들이 우리 말과 음악으로 하느님에 대해 노래한 한국 적 · 대중적 성가였으며 적어도 선교사의 입국 전까지는 한국 천주교회의 유일한 성가로, 신자들의 개인 성화와 선교, 특히 박해 극복에 크게 기여하며 19세기 내내 창 작되고 구전되었다. 1921년부터 선교사들은 '전례의 원 활함을 위하여' 본당 단위로 한글 성가집들을 발간하였 으나, 한국의 전통 음악과 서양 가톨릭 음악의 긴장된 만 남의 결과 편찬된 프랑스 선교사들의 《죠션어성가》 (1924)와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조선어성가》(朝鮮語 聖歌, 1928)는 가사만 한글로 바꾼 서양 성가들로 채워 졌다. 이 서양식 한글 성가들은 그레고리오 성가와 함께 천주가사를 제치고 선교사 시대의 새로운 한국 가톨릭 음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42년 1월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신부가 서울 대 목구장으로 임명되면서 한국 성직자 시대가 시작된 이후 에도, 선교사들의 전례 정신과 교회 음악관은 승계 · 확 대되었다. 1948년 이문근(李文根, 요한) 신부가 펴낸 《가톨릭 성가집》은 예술적 합창 성가의 새 장을 열었으 며, 그의 합창 성가들은 1957년에 발행된 첫 통일 성가 집인 《정선 가톨릭 성가집》에 다시 수록되었다. 또한 전 국의 본당들이 경쟁적으로 성가대를 만들고 다양한 합창 성가 경연대회를 개최하는 등 한국 가톨릭 음악의 예술 적 질을 높여나갔다. 그리고 이 시기에 개최된 제2차 바 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는 지나치게 서양적인 한글 성가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촉구하며 한국 가톨릭 음악 의 토착화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음악적 경건주의, 선교 사와 서양 음악의 권위 등 여러 이유로 소극적이던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 작업은 1967년 재판된 《정선 가 톨릭 성가집》에 이문근 신부가 3편의 한글 미사곡을 발 표하면서 첫 결실을 맺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제2 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한국 가톨릭 음악이 지 나치게 서양적임을 반성하고 다양한 토착화 논의와 작업 을 거쳐 '한국적 가톨릭 음악' 을 지향하고 있다. 〔평신도 시대의 한국적 성가인 천주가사] 천주교는 사 회 개혁을 갈망하던 지식인들에 의해 학문으로서 수용되 었으나 이들이 신해박해(辛亥迫害, 1791)와 신유박해(辛 酉迫害, 1801)를 기점으로 순교하거나 교회를 떠난 후, 서민 중심으로 재편성된 교회는 더 이상 사상이나 학문이 아닌 생활 신앙으로서 서학을 재수용하였다. 이 시기에 신앙인들이 집, 약국, 서당 또는 깊은 산중에서 함께 기도 하며 부르던 천주가사는 한국 민중의 천주 신앙이 박해 속에서 발전시킨 한국적 · 대중적 성가였다. 초기 천주가 사는 호교론적이고 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1850 년대 이후부터는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가 중심이 되어 만든 성사가, 교훈가, 자탄가 등이 나타났다. 관련 악보나 문헌이 없는데다 구전의 전통마저 거의 단절된 상황이기에, '천주찬가' (天主讚歌)라고 불리던 천주가사의 음악과 연주 방식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미 한 수준이다. 그러나 녹음, 채보, 분석하는 방법으로 수 행된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천주가사는 6 · 5조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대개 4 · 4조의 규칙적인 율격을 가졌고 줄수를 제한하지 않는 개방적이고 탄력적 인 구조이며, 그 뿌리는 민요로 특히 평조보다 메나리조 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선(線)의 음악으로 다양한 장단에 따라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며, 연주는 읊 조리는 낭송(혹 경건) 양식으로 음영(吟詠)되거나 민요의 선율에 맞추어 가창되었다. 이때 민요는 전래 민요뿐 아 니라 각설이 타령 등 유흥 민요를 포괄하고, 드물게는 노 동요, 불교 성악, 창가 등 당시 음악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천주가사의 특징은, 민요나 시대의 음악들 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민요의 음계나 리듬 안에서 창 조적으로 변형시키며 자유롭게 노래하였다는 사실이다. 천주가사의 음악과 언어의 이상적 관계, 민요 내지 민요 풍의 일상적 · 한국적 노래 양식은, 그레고리오 성가와 시편창이 서양 사람들에게 그러하였듯이, 한글조차 터득 하지 못한 서민들에게 쉽게 구전되며, 그들이 하느님을 삶 가까이에서 체험하며 온 몸과 마음으로 복음적 삶을 살도록 하였다. 나아가 개인의 성화와 선교에 헌신하고 특히 1785~1886년까지 100여 년의 혹독한 박해와 천 대를 참아낼 수 있게 해 준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를 기점으로 천주가사의 교리적 내 용은 《성교 요리 문답》(聖教要理問答) 등 교구 차원의 공적인 출판물 안으로 흡수되었고, 천주가사와 그의 전 통적 가락은 《죠션어성가》의 서양식 노래들로 대체되었 다. 이때부터 천주가사의 창작과 필사본은 급격히 감소 하였다. 이렇게 천주가사가 음악적으로 더 높은 차원으 로 발전하지 못하고 한국 천주교회의 독창적인 자랑거리 로 인정받지 못한 채 단절된 것은, 무엇보다 노래하는 한 국 신자들의 의식적 한계, 선교사들의 절대적 신앙관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 그 리고 개항 이후 줄곧 추구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서구 지향적 태도와 시대 낙후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박 해 속에 핀 한국의 시편' 으로 초기 한국 민중의 삶과 신 앙을 가장 진솔하게 표현한 천주가사는 내용적으로 서양 사상과 우리 문화가 만나는 구체적 공간이었고, 동시에 서양을 우리의 전통 안에 수용한 성공 사례 중의 하나였 다. 한국적 · 대중적 천주가사는 우리 음악 안에 육화되 어 널리 교창(交唱)되는 연도와 함께, 한국 가톨릭 음악 토착화의 구체적인 방향을 가장 힘 있게 제시한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성가인 천주가사는 그 종교적인 내 용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한국 근대 음악사 차원에서 더 넓게 조명되어야 한다. 〔선교사 시대의 그레고리오 성가와 서양적 한글 성가]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사 시대는 한불 수호 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허락된 1886년부터 1942년 노기남 신부 가 서울 대목구장으로 착좌하기 전까지이다. 1794년에 입국한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와 1836년부터 입국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1785 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부터 100년 넘게 지속된 박해 동 안 공개적인 사목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불 수호 통상조약 체결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 사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선교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 었다. 이 시기 파리 외방전교회의 중요한 선교 정책은 한국 인 성직자 양성이었다. 이를 위해 선교사들은 1885년 강원도 원주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 를 설립하였고, 한불 수호 통상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이 신학교를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였다. 신학교에서는 서양인 교사들이 한 국인 신학생들에게 라틴어, 철학, 신학, 그레고리오 성가 등을 가르쳤다. 그 핵심 전례 음악은 한옥 성당에 잘 어 울렸을 한국적 · 일상적 · 대중적 천주가사가 아니라, 교 회적 · 예술적 서양 음악인 그레고리오 성가와 한글 가사 의 서양 성가였다. 이처럼 한국 가톨릭 음악의 기본 틀은 선교사 시대에 신학교에서 형성되고, 여기서 배출된 한 국 성직자 시대에 이어 오늘날까지 한국 천주교회에 깊 게 정착하였다. 그레고리오 성가 : 그레고리오 성가는 중세부터 현재까 지 가톨릭 교회의 전례 음악으로, 라틴어 가사를 가진 단 성부의 선법 노래이다. 개별적인 기도 차원에서 보자면 1836년에 유 파치피코(余恒德) 신부가 정약용(丁若鏞, 요한)의 임종을 지키며 시메온의 <주여 이제 당신의 종을 놓아주소서>(Nunc dimittis servum tuum Domine)를 반복하 여 노래한 것과, 1879년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鎮) 신부가 사목 방문에서 귀가하며 <테 데움>(Te Deum)을 부른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 후 그레고리오 성가는 점차 신학교와 수녀원에서 교육되었고, 1888년에 조선 교회를 예수 성심과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는 대미사에서 최초로 장엄하게 불렸다. 이어서 뒤텔(G.C.C-M. Mutel, 閔德孝) 주교의 착좌식, 부활 성야 예식과 부활 대미사, 장례 미사 와 사도 예절, 그리고 성체 강복 등에서도 노래되었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레고리오 성가는 점차 신 자 공동체에도 폭넓게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1902년 명 동 성당의 주교 미사에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운영 하는 고아원의 원생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노래한 것에 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서울 대목구에서 1925년 그레 고리오 성가집인 《칸투스 미새》(Cantus Missae), 1932년 악보를 생략한 가사만의 《라된성가》를 발간한 것으로 보 아 그레고리오 성가는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이미 악 보 없이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일반화되었던 듯하다. 실제 로 당시의 본당 성가대들은 '종교 의식의 화려함을 더하 기 위해' 모든 주일과 대축일의 창미사와 연미사에서 그 레고리오 성가를 불렀다. 이후 그레고리오 성가는 모든 한글 성가집에 수록되었으며, 서양식 한글 성가와 함께 선교사 시대의 한국 가톨릭 음악을 대표하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자들의 능동적 전례 참여(전례 112항)를 권장하며 자국어로 미사를 집전하도록 허락하 고, 민족적 성가를 사용할 것을 권고하였다. "어떤 지방, 특히 선교 지역의 민족들은 그들의 종교 사회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유한 음악 전통을 지니고 있으므 로, 그들의 종교 의식을 형성시키고 또 그들의 특성을 예 배에 적응시키려면, ···이 음악에 정당한 평가와 더불어 알맞은 자리를 부여하여야 한다" (전례 119항). 그러나 이 공의회 정신을 곡해하여, 그레고리오 성가를 일방적으로 외면하고 서양식 한글 성가만을 중시하면 안 된다. 공의 회의 조치는 선교 지역 신자들이 신앙과 전례를 자신의 문화 안에서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생활화하기 위한 것 이지, 전통적 · 보편적 그레고리오 성가가 사라지기를 바 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의회는 미사 전례가 그레고리오 성가와 내면적으로 연결되어 발전해 왔음을 강조하며 그레고리오 성가를 교회의 전통적 · 대표적 전 례 음악으로 재천명하였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현재 《가톨릭 성가》(1985)에 한글 번안 가사와 라틴어 원문을 함께 기록한 36곡(전체 529 곡의 6.8%)만 수록되었고, 극소수의 본당 성가대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될 정도로 전례에서 거의 밀려났다. 무엇 보다 라틴어가 난해하고 음악이 생경하여 부르기 불편하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오 성가가 전례 음악으 로서의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의 정책적 배려가 절실히 요청된다. 2005년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그레고리오 성 가집을 내고, 서울 · 대구 · 부산 · 광주교구 가톨릭 음악 원 출신들로 구성된 그레고리오 성가대가 그 활동의 폭 을 넓혀가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레고리오 성가 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교회들의 모국어 미사곡 창작에, 이문근 신부의 한글 미사곡에 그랬던 것처럼, 가톨릭 교 회의 살아 있는 유산으로서 1,5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이어져 내려온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서양식 한글 성가 : 1923년 덕원의 독일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조선어성가》를 출판하고, 1924년 파리 외 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죠션어성가》를 간행함으로써 본 격적인 '서양식 한글 성가 의 시대가 열렸다. '서양식 한 글 성가 라는 이 새 틀은 현행 《가톨릭 성가》까지, 적어 도 25개가 넘는 후속 한글 성가집들의 정신적 · 음악적 모델로 이어졌다. ① 《죠션어성가》 : 이 성가집은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신부와 비에모(M.P.P. Villemot, 禹一模) 신부가 서울 대목구용으로 펴낸, 현존하는 한국 초유의 한글 성 가집이다. 천주가사 1곡을 제외한 총 62곡의 성가들은 모두 프랑스 성가의 선율에 원문을 번안한 한글 가사, 새 로 작시한 가사, 그리고 14편의 천주가사를 그 노랫말로 대입하였다. 이 첫 한글 성가집이 이처럼 '서양식 한글 성가 의 성격을 띠는 것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 용하고 그에 적응하던 한국 근대사에서 당연한 것이었 다. 20세기 초 일본 제국주의 치하의 많은 한국 음악인 들은 한국의 근대화를 열망하며 우리 땅에 서양 음악을 심는 일을 지속하였다. 예컨대, 이성적 서양 음악과 비교 하여 우리의 전통 음악은 리듬에 바탕을 둔 화성 없이 선 율만이 있는, 발전이 정지된 고대의 음악이라고 펌하한 홍난파(洪蘭坡, 1898~1941)는 '신조선 음악' 을 주창하 여, 서양 음악으로 우리의 낙후된 음악 문화를 끌어올리 고자 하였다. 이러한 근대 정신은 오리엔탈리즘(onientalism)의 다른 표현이었다. 서양식 한글 성가집을 편찬 하여 한국 가톨릭 음악을 서양화하고자 하는 노력도 이 러한 오리엔탈리즘의 영향 아래 열정적으로 이루어졌다. 서양 성가에 대한 한국 지성인들의 높은 선호도, 민요 가 사의 부도덕하고 저속한 세속 정신, 전통 음악 자체를 한 낱 기방 음악으로 펌하시킨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 정책, 그리고 우리 민요에 대한 선교사들의 이해 부족 등도 한 국 교회의 무비판적 서양 성가 수용에 복합적으로 작용 하였다. 그러나 서양식 한글 성가는 한국이 하느님을 서 양의 문화 안에서 낯설게 만나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다양한 문화 속에서 만인과 가까이 대화하며 사랑을 전 하려는 그리스도의 구원 의지와 너무나도 다른 것이기 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의 고유 문화에 대한 존 경심 위에서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 · 대중화를 요청 한 것이다. ② 독일 선교사들의 성가집 : 1928년 원산 대목구는 자국어 성가를 허용하는 교회법에 따라 교구 내의 모든 본당과 공소에서 부를 수 있도록 《조선어성가》를 재판하 였다(초판은 《죠션어성가》보다 1년 앞선 1923년, 서울에서 출 판되었다). (죠션어성가》에서 발췌한 18곡과 독일 성가 59곡을 묶어 재판된 《조선어성가》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성가집이며, 《죠션어성가》를 매우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이후에 통일 성가집이 나올 것임을 예견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1934년 연길에서 발행된 《성가》(聖歌)는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노래를 예외적으로 2성부 합창곡으로 편곡하 였다. 2성부 합창은 화성적이고 중심 부분의 짧은 단성 부 선율과 리듬은 민요적이며, 노랫말은 천주가사이다. 성가를 한국적 선율과 서양적 화성으로 화합한 것은 한 글 성가의 토착화를 시도한 첫 예일 수 있다. 1935년경에 만들어진 회령 본당의 《성가와 속가집》 (聖歌乃谷歌集)은 독일 성가와 세속 노래, 민요 등을 포 함하고 있다. 이효상(李孝祥, 아길로, 1906~1989)이 가사 를 번역한 이 성가집은 한국 청소년들이 음악을 통해 정 서를 함양하고, 세속 노래를 통해 성가를 바르게 부르도 록 한다는 신선한 출판 목적을 갖고 있다. 1938년 덕원 에서 《가톨릭 성가》를 펴낸 피셔(W. Fischer, 陳道光) 신 부는 독일에서 음악학교를 졸업한 전문 음악가로, 그레 고리오 성가를 포함해 총 197곡의 서양식 성가 가운데 특이하게도 <호칭 기도>의 선율을 우리 말의 억양에 맞 추어 만들고, 이를 성가대와 신자 공동체가 교창(交唱) 하도록 하였다. 이 한국적 <호칭 기도>는 한국 성직자 시 대의 합창 성가집에서는 누락되었다. 프랑스적 3박자와 독일적 4박자 계열, 그리고 선법적 · 조성적이며 장조(長 調) 중심적인 한글 성가의 틀은 한국 성직자 시대의 합 창 성가들로,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다시 대 중적 개창 성가들로 전승되어 오늘날 한국 가톨릭 음악 의 서양적 성격이 정착되었다. 더 불편한 것은, 이러한 문화 종속이 그 문화 속국 내에서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 산된다는 사실이다. ③ 한글 성가집들과 천주가사 : (죠션어성가》는 한국 신자들을 위한 본격적인 성가집으로, 프랑스 성가에 한 글 가사를 붙인 것이다. 선교사들은 한국 천주교회가 선 교사 입국 이전에 이미 설립되었고, 한국인 스스로가 탁 월한 천주가사 성가를 애창하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 다. 그래서 14편의 천주가사를 노랫말로 사용하고, 천주 가사 1곡을 악보와 함께 실었다. <오묘호다>(25번)가 그 것이다. 14편의 천주가사를 노랫말로 수용한 것은 무엇 보다 천주가사가 탁월한 복음적 · 윤리적 내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한국 신자들의 문 화적 충격을 덜어 주기 위한 선교사들의 사려 깊은 사목 정책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천주가사 1곡만을 채보 · 수록한 것은, 서양 성 가가 천주가사보다 뛰어나다는 확신 때문일 수도 있지만 천주가사가 서울 대목구 차원에서 공인받지 못하였음을 뜻하기도 한다. 결국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유일한 한국 적 · 대중적 성가의 전통은 (죠션어성가》에서 크게 왜곡 되었다. 1928년 대구 남산동 본당의 델랑드(L. Deslandes, 南大 榮) 신부가 출판한 《공교 성가집》에 악보 없는 천주가사 2편(23, 42번)이 수록되었고, 같은 해 원산 대목구에서 출판한 《조선어성가)에 3편(46, 57, 58번)이 수록된 사실 은 매우 흥미롭다. 이들 성가집에 천주가사가 수록된 이 유는, 천주가사를 통해 한국 신자들이 선조들의 순교 정 신을 기리고 본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이 천주가 사는 《죠션어성가》 출판 후에도 얼마 동안 새로운 서양 식 한글 성가와 함께 교회 안팎에서 불렸다. 어쩌면 천주 가사가 당시의 한국 신자들에게는 너무 친숙하였고, 또 그들이 악보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불필요하 다고 여겨져 악보화 작업을 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천주가사 <오묘후다>는 8분의 6박자의, 곧 '자장 ~자 장~" 하는 옛 자장가 리듬(혹 아낙네의 리듬)과 민요적 5 음계 선율로 짜여졌으며, 후렴의 '파' 와 마침음 도' 는 드문 예외이다(이는 아마도 천주가사가 신민요를 만나면서 변 화한 것인 듯하다). 이 곡은 《죠션어성가》에 악보와 함께 수록 · 전승된 유일한 천주가사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 며, <오묘하다 성체대례>라는 제호로 1938년 발행된 베 네딕도회의 《가톨릭 성가》(115번)에까지 수록되었다. 그 러나 1948년 출판된 합창용 《가톨릭 성가집》에서 아무 런 언급 없이 슬로바키아 찬가로 대체되었다. 노랫말도 7절에서 4절로 축약 · 변형된 것으로 보아, 이 무렵부터 천주가사의 전통이 단절되기 시작한 듯하다. 이러한 상 황은 1985년에 현행 《가톨릭 성가》가 출판될 때까지 지 속되었다. 〔한국 성직자 시대의 예술적 합창 성가] 한국 성직자 시대는 1942년 노기남 신부가 서울 대목구장으로 착좌 한 때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된 1962년까지로 함축된다. 이 시기 한국 천주교회는 과거의 친일파 세력 들과 이승만 대통령의 친미 반공 정책 아래에서 반민 족 · 반전통 행위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기회를 갖지 못 하였기에, 선교사 시대의 서양식 한글 성가도 무비판적 으로 승계되었다. 1948년 이문근 신부가 펴낸 《가톨릭 성가집》은 본격 적인 혼성 합창 성가의 새 시대를 열며 한국 가톨릭 음악 을 예술의 차원으로 들어올렸다. 합창 성가는 《죠션어성 가》의 1932년 재판에 수록된 5곡의 성가 후렴을(34, 59, 61, 64, 66번), 1934년 간행된 《성가》의 아침 기도와 저 녁 기도 노래(40~44쪽)를 2성부 합창으로 편곡하면서 출발하였다. 천주가사를 노랫말로 사용한 뒷곡은 짧은 단성부 중간 부분을 한국적 선율과 리듬으로, 합창을 화 성적으로 대조시키며 흥미 있는 토착화를 시도하였다. 합창 성가 시대가 열리자 본당마다 성가대가 갖춰지고 전문 지휘자와 반주자도 등장하여 성가대가 주일과 특히 대축일의 전례 음악을 거의 독점하였으며, 본당 혹은 교 구 단위의 합창 경연 대회도 자주 열렸다. 당시의 한 보고 서를 살펴보면 명동과 중림동(지휘 조선주), 그리고 혜화 동 성당(지휘 최병철)이 뜨거운 경합을 벌였다고 한다. 그 러나 전례가 성가대 중심으로 봉헌되면서, 신자들의 전례 참여의 폭은 '보고 듣기만 하는' 쪽으로 크게 줄었다. 첫 한국 가톨릭 음악인 이문근 신부 : 이문근 신부는 1935년 동성상업학교 을조(소신학교) 3학년 때에 보댕(J.Bodin, 邊若瑟) 신부로부터 오르간과 기초 화성학을 배 우고, 용산 신학교에서 그레고리오 성가와 프랑스 성가 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발발 후 덕원 신학교로 전학하여 독일 음악을 익혔다. 1944년 사제 서품 후 명 동 성당의 보좌 신부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 서울 가톨 릭 합창단의 부단장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용산 신학교 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1948년 처음으로 펴낸 혼성 합 창곡용 《가톨릭 성가집》에 <복자 찬가>, <피에 펠리카 네>(Pie Felicane), <라우다테 도미눔〉(Laudate Dominum) 을 발표하였다. 그의 독창적인 라틴어 음절 구분법과 발 음의 한글 표기법은 현행 성가집에도 차용되고 있다. 이문근 신부는 1949년 로마의 교황청 음악대학에 입 학한 후 1955년 작곡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는 특히 교회선법에 의한 작곡 방식에 정통하였다. 귀국 후에는 가톨릭 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그레고리오 성 가와 전례학, 오르간을 가르쳤고, 1955년부터 서울대학 교, 1963년부터 한양대학교 음악 대학에도 출강하여 화 성학 등을 강의하였다. 1957년에는 첫 통일 성가집인 《정선 가톨릭 성가집》의 편찬을 맡아 자신의 <성녀 소화 데레사>,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 노래>, 그리고 4곡으로 구성된 <혼배 미사곡〉(부록)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이 성 가집의 1966년도 재판에는 <병인 순교 복자 노래>와 <어린이를 위한 미사곡>을 포함한 한글 미사곡 3곡을 추 가하였다. 이 미사곡들은 교회선법과 우리 전통 음악의 특성을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 화를 위한 본격적인 첫 시도로서 오늘날 긍정적인 평가 를 받고 있다. 그러나 《죠션어성가》로부터 악보로 이어 져 온 천주가사 <오묘후다>와 《가톨릭 성가》(1938)에 기 보된 <호칭 기도> 등 한국적 · 민요적 성가를 자신이 펴 내거나 책임 편찬한 성가집들에서 누락시킴으로써, 한국 적 성가 전통의 전승을 포기하고 첫 한국 가톨릭 작곡가 로 더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 한글 미사곡들은 한국 신자 공동체와 뒤따르는 많은 작곡가들에게 지속적으로 수용 되었으며, 새로운 한국적 · 대중적 성가와 한국적 · 예술 적 미사곡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한국 가톨릭 음악 토착 화 논의와 시도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현대 화를 위한 적응과 쇄신(Aggiomamento) 및 신자들의 능 동적 전례 참여(actuosa participatio populi)를 강조하였다. 이 공의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와 교황 비오 10세(1903~1914)의 자의 교서 <트라 레 솔리치투디니> (Tra le sollecitudini, 1903. 11. 22)에 담긴 하느님 중심적 음 악관과 음악 규정들을 <전례 헌장>(Sacrosanctum Concilium)으로 보완하며 가톨릭 음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 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1965년에 우리 말로 미사를 집 전하는 것을 승인받고, 1969년에 한글로 된 《미사 통상 문》을 간행하면서 한국어 미사 전례의 새 시대를 열었다. 공의회 정신과 한국어 미사 전례에 따라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가 절실히 요청되는 상황에서, 한국 천주 교회는 1957년의 《정선 가톨릭 성가집》부터 1995년의 《청소년 성가》까지 다양한 성가집들을 출판하며 점차 한 국 작곡가들이 작곡한 성가수를 늘렸다. 복음(생활)적 《가톨릭 공동체의 성가집》(1975)에 실린 창작 성가는 총 550곡 중 168곡이며, 현행 《가톨릭 성가》의 창작 성가 는 528곡 중 250곡에 달한다. 한국 작곡가들도 16명에 서 25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제 한국 작곡가들의 창작 성 가가 한글 성가집의 중심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 제는 그 성가의 성격이다.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는 1981년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 대회를 기 점으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행사와 교 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의 한국 순교 복자 103 위 시성식, 그리고 1989년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한 교 황과 함께 제44차 서울 세계 성체 대회를 거행하는 과정 에서 하나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호응하여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성직자 및 평신도 작곡가들은 다양한 한 글 미사곡과 시편 성가들을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 나 이에 대한 학문적 논의는 매우 미미한 실정이다.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 시도들 : 한글 미사곡과 시 편 성가(詩篇聖歌)는 한국 가톨릭 음악의 대표적 토착화 시도들이다.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전례 음악으로, 라틴어 전례 시대를 주도하던 그레고리오 성 가와 예술적 라틴어 합창 미사곡을 대신하였다. 1966년 절두산 순교성지 미사에서, 이문근 신부는 신자들의 개 창을 위한 한글 미사곡을 발표하였다. <자비송>, <대영광 송〉, 〈거룩하시도다〉,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구성된 이 첫 한글 미사곡은 신자 공동체와 성가대가 교창(交唱)하 도록 작곡되었다. <전례 헌장>의 정신에 따라 한국적 선 율을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법과 자연스럽게 융합시킨 이 한국적 미사곡은 한국 가톨릭 음악의 새로운 전통으로 전승되었다. 이 개창용 한글 미사곡은 성가를 오직 '는 는 것' 으로 알고 침묵을 강요당해 온 합창 성가 시대의 한국 신자들에게, 성가는 '함께 부르는 것' 이고 '세 번 기도하는 것' 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심어 주며 적극적인 전례 참여를 유도하였다. ① 한글 미사곡 : 현행 《가톨릭 성가》(1997, 초판 1985) 는 이문근(3곡), 손상오, 김대붕의 한글 미사곡을 수록하 였고, 《청소년 성가》(1999, 초판 1996)는 원선오, 강수근, 김정식, 신상옥, 김선호의 한글 미사곡을 싣고 있다. 그 리고 낱곡으로 발표되거나 인터넷에 올려진 이종철, 서 행자, 윤용선, 임석수 등의 한글 미사곡은 현재 40여 곡이 넘는다. 여기에 《가톨릭 성가》 에 수록된 이문근의 혼인 미사 곡, 김대붕과 최병철의 위령 미 사곡이 추가될 수 있다. 이문 근, 손상오, 이종철, 강수근, 윤 용선, 신상옥, 김정식은 각각 2 ~3곡을 작곡하였으며, 대부분 현행 새 미사 전례문이 확정 · 발표된 1996년부터 2001년 사 이에 발표되었다. 미사곡 작곡 가는 평신도가 15명, 성직자가 13명으로 집계되어서, 지난 선 교사 시대나 공의회 이전의 한 국 성직자 시대에 비해 평신도 음악가의 활약상이 크게 신장되었음을 보여 준다. 평신도와 성직자가 선의의 창작 경쟁을 벌이는 것은, 한국 가톨릭 음악 의 미래가 밝다는 증거이다.특기해야 할 것은 국악 미사곡의 출현이다. 1973년 장고가 울리는 임남훈 수녀의 미사곡을 시작으로 1987년 국악 을 전공한 예수 고난회 강수근 신부의 국악 미사곡, 그리 고 이병욱, 김종국, 정덕희의 국악 미사곡 등이 뒤를 이 었으며, 5음 음계와 국악 리듬에 기초한 국악풍의 미사 곡이 서행자, 이종철, 윤용선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국 악 미사곡과 국악풍의 미사곡은 한국 가톨릭 음악 토착 화의 실질적 · 구체적 시도들이다. 음악은 그 주체인 인 간과 함께 역사적 생장물로서 직접적으로 역사적 전통에 연결되기 때문에 매우 소중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가 과거의 음악 유산의 단순 이동이나 '번역' 의 단계를 넘어서,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지금 여기의 우리의 것' 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어야 함도 분명하다. ② 한글 시편 성가 :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 작업 은 임남훈, 최병철, 손상오의 한글 시편 성가 창작으로 이어졌다. 특히 손상오는 1987년 3년 주기의 주일과 축 일(고유) 미사를 위한 《시편 성가》(분도 출판사, 1987)를 출판하였다. 이들의 시편 성가는 5음계를 사용하고 전통 적 라틴어 시편 성가의 기본 구조를 단순화하고, 낭송음 을 3~5개로 늘리거나 2~3부의 합창으로 확대 편성하 는 등 구조적으로 비교적 자유롭다는 특성을 가진다. 이 것은 본격적인 첫 한국적 시편 성가들이라는 점에서, 그 리고 이러한 시도들이 새로운 한국적 시편 성가를 위한 탁월한 재료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 밖에 현재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 시도는 복음 성가, 칸타타, 마당놀이(명동성당무 연구회의 <예수전>, 1983) 판소리(이 용배의 <김안드레아>, 1985)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다양한 방법으로 수행되고 있다. 토착화 방법은 무엇보다 '한국 적인 것' 의 포괄성에 힘입어 다양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 방안 : 현재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는 크게 세 가지로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한국 가톨릭 음악이 일차적으로 가톨릭적일 것을 주장하 는 음악적 보수주의이고, 두 번째는 한국적일 것을 강조 하는 음악적 민족주의이다. 이 두 길은 한국을 생각한다 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세 번째는 신자 공동체가 다 같이 즐겁게 부르는 것을 제일 먼저 생각하는 음악적 대중주 의이다. 기존의 토착화 시도들, 특히 한글 미사곡들을 양 식적으로 분석할 때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 세 가지 노선 을 설명하면, 첫 번째는 '성스러움, 보편성, 그리고 예술 성' 이라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전례 음악관 안에서 그 레고리오 성가와 한국 음악을 접목시켰다. 두 번째 노선 은 '말씀' 을 한국의 전통 음악 안으로 직접 수용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노선은 서양 음악이 한국 근대 이후 이미 우리 음악이 되었음을 선언하며, 현재의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서양 음악 언어로 '말씀' 을 노래한다. 이처럼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현실적으로 이 세 가지 노선은 가까이 존재하며 서로의 지향성을 공유 하는 관계이다.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가 양식의 문 제를 비껴가며 논의될 수는 없지만, 결코 양식만의 문제 는 아니기 때문이다. 토착화는 특정 양식을 선택하는 작 곡가의 정신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의식의 문제이다. 음악 양식은 시간 속에서 변하는 미적 가치에 따라 지속 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적' 가톨릭 음악이 '완성된 어떤 것' 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끝 없이 영원히 완성을 지향하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는 우리의 전통 음악과 서양 음악을 공동 자산으로, 주체적으로 창작하고 수용 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여기서 주체적이라 함은, 토착화 작업이 전통 음악과 서양 음악을 적당히 혼합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음악을 만들고 오늘 그것을 즐기는 우리 민 족의 음악적 심성에 뿌리를 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의 음악 문화에 대한 깊이 있고 포괄적인 해석과 함 께 통일을 대비한 북한 음악의 연구도 절실히 필요하다.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 논의들 : 한국 가톨릭 음악 의 토착화 논의는 1967년 가톨릭 신자인 김진균(金晉 均) 교수의 <개신교 성가의 토착화 논의>로 거론되었고, 1973년 이문근 신부와 성두영 교수에 의하여 교회 안에 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과 103위 시성식을 전후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 당위성이나 그 방법론과 지향점에 대한 소신이 없었으며, 이렇다 할 학문적 연구 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논의 따로 창작 따로' 가 바 로 오늘 한국 가톨릭 음악 토착화 작업의 현주소이다. 여 기서 잠시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 개념을 정리해 보 자면, 일반적으로 토착화란 타문화가 우리 문화 토양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우리가 결코 되 돌릴 수 없는 옛날을 지향하며, 그것이 내포한 복고적 성 격 때문에 폐쇄적이고, 돌아가고자 하는 옛날이 언제인 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다. 진정한 토착화 는 오늘을 사는 우리와 급변하는 사회, 문화 전반을 고려 해야 한다. 즉 토착화는 현재를 인정하는 미래 지향적인 개념인 '한국화' 로 대체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는 당위성보다 방법 론의 문제로 이해된다. 가톨릭 음악이 본질적으로 토착 화의 대상임과 동시에 토착화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먼저 한국 가톨릭 교회가 무교의 기초 아래 유교 및 불교와 상보적 관련을 맺으며 발전해 왔음을 확 인하고, 이러한 우리의 전통적인 종교 음악들과 한국인 의 종교 심성에 대한 연구를 전제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 가톨릭 음악은 '말씀' 이 어떻게 한국인의 생활 문화 안 에 육화되어 복음화에 기여하는지, 즉 복음이 한국인의 정신과 마음에 침투하는 데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야 한다. 다행히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천주가 사와 연도 등 한국 가톨릭 음악 토착화의 뿌리와 지향해 야 할 방향을 제시하려는 깊이 있는 연구물들이 나오고 있다. 1967년 김진균 교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음악의 토 착화가, 16세기 초에 독일 민요를 교회 안에 수용하여 새로운 독일 성가를 만든 루터(M. Luther, 1483~1546)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한 나라의 민요는 교회 음악을 포함하면서 그 나라 음악 일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며, 한국도 예외일 수는 없다고 하였다. 끝 으로 그는 오늘의 한국 프로테스탄트는 잘못된 형식주의 에 빠져 루터의 정신은 버리고 그의 성가만을 성스러운 노래로 수용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한국 가톨릭 음악에도 적용될 수 있다. 1973년 《경향잡지》에 게재된 토착화 논의에서 이문근 신부는 맹목적으로 새로 운 것만을 추구하려는 자세를 경계하며 선 원칙, 후 토 착화' 를 주창하였다. 그는 교황 비오 10세가 언급한 거 룩함(聖性), 예술성, 보편성을 가톨릭 음악의 세 원칙으 로 제시하며, 교회 음악의 토착화는 상당한 세월을 필요 로 하는 사업인 만큼 너무 서두르거나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한편, 성두영 교수는 토착화가 로마 중심의 음악 전통에서 출발해야 함을 내세우며 성가의 빠른 토착화를 기대하였다. 1988년의 토착화 심포지엄 에서 차인현(車仁鉉, 알로이시오) 신부는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는 과거의 형태를 그대로 현재로 옮겨오는 것도 또는 그 반대도 아니라며, 현실을 무시한 과거 지향 적 토착화나 과거를 무시한 현실 안주 모두 바람직한 토 착화 작업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토착화를 혁명이 아 닌 쇄신으로, 그래서 역사 안에서의 선별(選別) 작업이 자 정화(淨化) 작업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는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거 룩함을 내세우면서, 그 필요성을 역설하며 이 작업이 단 계적으로, 가능하다면 다른 학문과 연계해서 지속되어야 하고, 특히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은 역사 안에서 늘 변하기 때문에 이것이 절대적 규범일 수는 없다. 토착화는 그리스도가 모든 백성의 문화 안에서 그들의 언어로 대화하며 구원한다는 보편적 구원론에서 비롯된 다.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는 하느님을 우리의 일상 에서 우리의 음악으로 찬미하고 편안한 신뢰 속에서 그 의 말씀을 듣는 문화적 구원을 지향한다. 이 음악은 말 씀' 처럼 본질적으로 토착화의 대상이다. 토착화는 지금 의 한국 가톨릭 음악이 너무나 서양적이라는 사실과 한 국 교회가 전통 음악의 무속성(巫俗性), 저속성, 비과학 성, 전례 부적합성 등을 부각시킴으로써 서양 가톨릭 음 악의 위대함을 강조해 온 사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서양 음악을 근원적으로 반 대하거나 우리 음악의 우월함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 렇기에 한국 가톨릭 음악의 토착화는 전통적 음악 유산 을 가려내어 서양 음악과 공동의 재료로 사용하여, 거룩 하고 예술적이며 한국적이고 보편적인 가톨릭 음악을 창 조하는 고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이 고된 작업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이 길이 바로 전통 문화의 복음적 승화를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토착화된 '한국적 가 톨릭 음악' 은 먼저 한국인 신자 공동체에게 신명나는 삶 을 살게 하고 구원의 생명력이 넘쳐나도록 보장할 것이 며, 세계의 가톨릭 음악을 더 풍요롭게 하는 데 크게 기 여할 것이다. (⇨ 가톨릭 음악, 한국의 ; 종교 음악 ; → 《가톨릭 성가》 ; 《가톨릭 성가집》 ; 국악 미사 ; 그레고리 오 성가 ; 이문근 ; 이효상 ; 전례 음악 ; <조선어성가> ; 천주가사 ; 피셔, 볼프람) ※ 참고문헌 <전례 음악 발전의 새 이정표>, <가톨릭신문>, 1984. 3. 18/ 강민주, <그레고리안 성가가 한국 가톨릭 음악 창작에 미친 영향-이문근의 Missa Ordinarium을 중심으로>, 계명대 석 사 학위 논문, 1993/ 강영애, <구전되는 천주가사의 음악적 특징>, <예술논집> 3, 전남대학교, 1999/ 一, <한국 천주교 장례 노래(煉 禱)에 관한 연구>, 한양대 박사 학위 논문, 2005/ 〈죠션어성가〉, 《교 회와 역사》 67(1981. 3), p. 1/ <천 주가사>, <교회 와 역사》 66(1981. 2),p. 1/ 김건정, <교회 전례 음악》, 가톨릭 출판사, 1987/ 김 대붕, <한국 천주교회의 성가집에 관한 고찰 : 1945년 이후>, 《한 국 교회사 논문집》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pp. 635~648/ 김수 정, <천주가사의 음악적 특성>, 《음악과 민족》 29, 민족음악학회, 2005/ 一, ,〈조선어성가집(1924)에 대한 분석 연구>, <한국 근현 대 100년 속의 가톨릭 교회》 상, 가톨릭출판사, 2003/ 김영진, <한 국 교회 음악의 기반을 다진 교회 음악가 이문근 신부>, 《교회와 역사》 184(1990. 9)/ 김은주, <한국 가톨릭 전례 음악의 토착화 연 구-이문근의 Missa Ordinarium 2번을 중심으로>, 효성가톨릭대 석사 학위 논문, 1996/ 김응균, <성음악을 통한 신자들의 영적 진 보에 관한 방안 연구>, 수원가톨릭대 석사 학위 논문, 1998/ 김종 성, <복음화 활동에 있어서 노래의 역할에 관한 연구- '한국 가 톨릭 노래 문화 운동' 을 위한 시론>, 수원가톨릭대 석사 학위 논 문, 1995/ 김지연, <가톨릭 음악과 개신교 음악에 대한 비교 연구 -우리 나라의 예배 의식용 음악을 중심으로>, 연세대 교육대학 원 석사 학위 논문, 1994/ 김진균, <교회 음악의 현실과 전망>, <가 톨릭 시보> 1974(915 · 917호) 一, <기독교 찬송가가 한국 음악 문화에 미친 영향>, <동서문화> 1, 1976/ 一, <한국 교회와 음악>, <사목> 38(1975. 3)/ 김진소, <천주가사의 기원과 역사>, 《교회와 역사》 20(1977), p. 31 남궁요열, <양악의 도입과 (Franz〕엑케르트 의 활동>, 《교회와 역사》 86(1982), p. 31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 1, 한길 사, 1995/ 요셉 라칭 거, <전례와 교회 음악>, 《사 목》 113(1987. 9)/ 민덕효 편, 《죠션어 성가집》, 경성부명치정천주당, 19241 박기현, <전례성가의 작곡자론>, <신학 전망》 64(1984, 봄) 一, <전례 성가의 토착화>, 《신학 전망》 63( 1983, 겨울) 一, <한국 가톨릭 교회 음악의 문제점>, 《신학 전망》 31(1975)/ 박혜숙, <한국 가톨릭 성가의 현황에 대한 고찰>, 이화여대 교육대학원 석 사 학위 논문, 1986/ 손상오, <교황들의 문헌에 비추어 본 성음악 의 현실적 문제점들(vols. 1~3)>, <신학 전망》 51(1980, 겨울) . 53(1981, 여 름) 一, 1례와 전례 음악>, <가톨릭 시보> 1975(974 회 -, <현 전례와 전례 음악>, <사목> 49(1977. 1)/ 신화철, <대 중적 교회음악의 이해와 수용 종교 개혁 이후를 중심으로>, 감 리교신대 석사 학위 논문, 1993/ 오숙영, 〈天主敎 聖歌 歌詞考一 특히 최도마 신부의 聖歌를 중심으로>, 숙명여대 석사 학위 논문, 1971/ 유정숙, <한국 가톨릭 성가집의 변천에 관한 연구>, 숙명여 대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1987/ 이 문근 · 성두영, <교회 음악 의 토착화에 대한 찬반>, 《경 향잡지》 65(1973. 4), pp. 20~321 -, <과연 쟈스 음악이 교회 음악에 들어올 것인가?>, 《가톨릭청년》, 1967. 6, 가톨릭청년사, Pp. 12~18/ 一, <교회 음악(총25회)>, 《가 톨릭청년》, 1956. 4~1958. 41 -, <교회 음악의 토착화에 대하여>, 《경 향잡지》, 1973. 4, PP. 22~271 -, <그레고리오 성가의 리듬 고>, 《Alma Mater》, 1948, p. 58/ 一, <내가 걷고 있는 한국 성음악 의 길>, <가톨릭청년>, 1967. 8, 가톨릭청년사, PP. 16~241 -, <오 라또리오의 기원>, 《Alma Mater》, 1965, pp. 8~13/ 一, <이복영(요 셉) 신부의 발자취>, <교회와 역사》 10(1976. 7), 한국교회사연구소 1 一, <조용한 시간을>, 《독서신문》, 1973. 10. 281 -, 〈좋은 음 악과 어려운 음악>, 《Angelus》, 1949. 9, 서 울가톨릭합창단, pp. 4~51 -, <대위법 교재 : 음악대학용》 등사본, 연도 미상/ 이상준, <한 국 가톨릭 성가의 시대적 배경에 관한 연구>, 경희대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1983/ 이연자, (Palestrina의 Missa Papae Marcelli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교회 음악의 이상에 대한 연구>, 성신여대 석 사 학위 논문, 1993/ 임성재 발행, 《부산가톨릭 합창단 20년사 1982~2002》, 동아인업, 2002/ 임정희, <가톨릭 성가에 다른 가사 연 구-이문근 곡 287 · 289 · 292장을 중심으로>, 대구 가톨릭대 석 사 학위 논문, 2004/ 장상연, <그레고리오 성가에 표기된 클리비스 분석 - 바티칸판과 수사본과의 비교 연구>, 건국대 석사 학위 논 문, 2000/ 장안숙, <한국 가톨릭 성가의 역사적 변천에 관한 연구>, <한국 교회사 논문집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전례음악 분과 위원회, <통일 성가집을 위한 작곡가 선정 기준 설정>, <가톨릭신 문>, 1982. 7. 11/ 전미정, <대구 가톨릭 교회 음악의 변천사-제2 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과 이후>, 경북대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 논 문, 1991/ 전정임, <가톨릭 교회 음악가 이문근 연구>, 《음악과 민 족> 29, 민족음악학회, 2005/ 조광, <노래에 담긴 믿음 천주가사>, 《경 향잡지》, 1983. 1/ 조선우, <(한국 가톨릭) 교회 음악의 한국화 논의>, 《한국 가톨릭,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사상연구소, 1997, pp. 342~370/ -, <한국 가톨릭 성가의 어제와 오늘>, 《한국음악 사학보》 14, 한국음악사학회, 1995/ 조선우 · 최필선 편, 《한국 가 톨릭 교회음악 사료집》 1, 부산가톨릭 음악원, 1994/ 조선우 · 최 필선 · 주은경 편, 《한국 가톨릭 교회음악 사료집》 2, 부산가톨릭 음악원, 1996/ 조성현, <한국 가톨릭 교회 성가대가 사회 음악 교 육에 미치는 영 향┯서울대교구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한양 대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2002/ 조형숙, <한국 가톨릭 음악 의 토착화 방안 -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한국 가톨릭 음악에 미 친 영향>, 계명대교육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1985/ 차인현, <이문 근 신부의 생애와 음악>, 《한국 교회사 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pp. 549~579/ -, <한국 교회 성음악의 길을 연 이문근 요한 신부>, 《경 향잡지》, 1990. 12, pp. 56~59/ 一, <가톨릭 음악>, 《가 톨릭 사전》, 1985, pp. 30~33/ -, <교회 음악의 토착화>, <사목> 115(1988. 1)/ 一, 《그레고리오 성가》, 가톨릭대학 출판부, 1991/ -, <전례시 부적 당한 성가>, 《경 향잡지》, 1985. 41 -, <전례 음악의 토착화>, <가톨릭신문> 1364(1983. 7. 17)/ -, <조선 교구 와 전례 음악>, <새벽>, 1981. 71 -, <한국 가톨릭과 성음악>, <가 톨릭신문> 1577(1987. 10. 25)/ -, <한국 가톨릭 음악>, 《가톨릭 사전》, 1985, PP. 1251~1253/ -, 《한국 천주교회와 성가》, 가톨릭 출판사, 1991/ 一, <한국에서의 프랑스 교회 음악과 성가의 수 용>, <교회사 연구》 5,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Pp. 96~151/ -, <한국 천주교회의 성가와 성가집>, 《한국 교회사 논문집》 1, 한국 교회사연구소, 1984/ 최종민, <천주교 연도의 음악구조 연구-구 연도를 중심으로>, 《음악과 민족》 27, 2004/ 최필선, <초기 한국 가 톨릭 교회의 민족 교회 음악>, 《음악과 민족》 4, 1992/ -, <초기 한국 가톨릭 교회음악 연구- 경상도내 구전 천주가사를 중심으 로>, 동아대 석사 학위 논문, 1989/ 허윤석, <한국 천주교 喪祭禮 문화의 토착화>, 천주교 한마음운동본부 심포지엄, 2002/ 홍민자, <덕원 가톨릭 성가(1938)>, 《교회와 역사》 86( 1982. 9), p. 1/ -, <천주가사의 교회 음악적 의의>, <교회와 역사》 86(1982. 9)/ 홍선 희, <가톨릭 통일 성가집의 발행 과정에 관한 연구>, 숙명여대 석 사 학위 논문, 1987/ 황홍구, <예배 음악의 신학적 요청과 그 대응 에 대한 연구>, 감리교신대 석사 학위 논문, 1993. 〔趙善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