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청년 운동 韓國 - 青年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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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지역 가톨릭 청년 운동을 이끌던 명도회의 회관(왼쪽). 명도회 취주 악단 단원들과 이를 지도하던 무세 신부(대구, 19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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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지역 가톨릭 청년 운동을 이끌던 명도회의 회관(왼쪽). 명도회 취주 악단 단원들과 이를 지도하던 무세 신부(대구, 1915년)


한국 천주교회의 청년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기 위해 각 개인의 신앙 성숙과 사목 활동 지원 및 선교와 봉사를 목적으로 교회 안팎에서 수행하는 활동. [청년회 설립과 일제 시대의 활동] 한국 가톨릭 청년 운동의 기원은 1900년대 초부터 문맹 퇴치가 시급함을 인식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진 학교 설립과 관련되어 있 다. 이러한 학교들은 현대적인 학문을 배운 청년들을 양 성하는 동시에 선교에 일익을 담당하였고 그로 인해 청 년 신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1907년 황해도의 신천 본 당에서는 신자 청년들이 '일신회' (日新會)를 결성하여 애국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4년에는 종현(현 명 동) 본당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종현 청년회' 가 결성 되고, 이어 약현(현 중림동) 본당에서도 1920년 9월 교 우 동지회' (1922년 6월 약현 청년회로 개편)가 조직되었다. 1919년 3 · 1 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청년 운동이 일어 났고, 천주교회에서도 '가톨릭 운동' (Catholic action)의 일환으로 각 본당에 청년회가 조직되었다. 이에 서울 대 목구에서는 효율적으로 청년 운동을 전개하도록 하기 위 해 교구 차원에서 청년회를 통합하기로 결정하여, 1922 년 6월 서울 대목구 소속 17개 본당, 1,038명을 회원으 로 하는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 연합회' 가 발족되었다. 이 연합회의 지도 신부로는 당시 종현 본당의 보좌 신부 로 청년 활동과 교육 사업을 담당하고 있던 크렘프(H.J.JM. Krempff, 慶元善, 1882~1946) 신부가 임명되었다. 이 후 연합회는 서울 · 평양 · 진남포 등을 순회하며 신앙을 주제로 하는 강연회와 연극 공연 등을 하였고, 1925년 서울에 홍수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수재민 돕기 모금 운 동을 전개하는 등 사회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 다. 그리고 1927년 7월에는 '문화 창달 · 생활 개선 · 종 교 도덕의 보급을 통해 경성교구 가톨릭 청년들의 문 화 · 종교 활동을 활성화한다' 는 목적으로 월간지 <별>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당시 청년회 회장인 박준호(朴準 鎬)와 임원들이 편집을 담당하다가 1931년 이후에는 장 면(張勉, 요한), 정지용(鄭芝溶, 프란치스코), 장발(張 勃, 루도비코), 이순석(李順石, 바오로), 조종국(趙鍾國, 마르코) 등 청년 지식인들이 참여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1931년 조선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 천주공교회 약사》를 발행하는 한편, 수적으로 증 가하는 성직자와 신자들의 불편을 덜어 주고 궁극적으로 는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구할 수 있다는 취지하에 기념 병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모금 운동만으로는 자 금을 마련할 수 없어, 결국 서울 대목구에서 기념 병원 설립을 결정, 1936년 5월 '성모병원' 이 개원하였다. 한편 대구 지역에서는 1909년 4월 계산동 본당에서 남자 청년들 간의 상호 친목과 교리 연구를 통한 자기 수 련을 목적으로 '성립 학우회' (聖立學友會)가 조직되었 다. 그러다가 1910년 계산동 본당의 남자 신자들을 대 상으로 '명도회' (明道會)가 조직되었고, 이 단체가 1911년 대구 대목구 설립에 맞추어 '조선 남방 천주공 교 명도회' 라는 교구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이 단체는 대목구 내의 남자 신자들을 총망라하는 조직이었기에, 성립 학우회 또한 여기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청년 신자들의 참석률은 하락하였다. 왜냐하면 노소(老 少) 간의 엄격한 예절과 규율로 인해 청년들이 중 · 장년 신자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을 불편해 하였기 때문이었 다. 이에 계산동 본당에서는 청년들만의 모임 결성에 대 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결과 1912년 성립 학우회 소속 회원 30여 명이 모여 '해성 체육단' 을 발족하였다. 이후 해성 체육단은 정구장을 만들어 체육 활동을 장려 하면서, 청년들의 교리 지식 함양을 위한 교리 강습회와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20년에는 근로 청소년 을 위한 '해성여자야학' 을 운영하는 등 지역 사회 발전 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활발하게 활동 영역을 넓혀가던 해성 체육단은 1920년 12월 조직 개편과 동시에 명칭도 '해성 청년회' 로 개칭하였다. 하지만 대목구장인 드망즈 (F. Demange, 安世華) 주교의 지시에 따라 해성 청년회는 다시 명도회에 통합되었다가, 명도회가 1924년 7월에 해체되자 옛 간부들이 주축이 되어 '남방 천주 공교 청 년회' 를 결성하고 사회 · 교육 · 출판 사업을 목표로 활동 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일환으로 1927년 4월에 대구 대목구 내의 교회 소식을 알리고 교회 발전을 위한 의견 교환을 설립 취지로 하는 월간지 <천주교회보>를 창간하였다. 이후 대목구에서 지목구들이 분리 · 설립되면서 지역 청년회는 계속 결성되었다. 물론 지목구 차원의 청년회 나 청년 연합회가 설립된 것은 아니었고, 지목구 내 중심 본당의 청년회가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특히 평양의 관 후리 본당은 1932년 이후 청년회 차원에서 강연회를 자 주 개최하여 평양 일대에 천주교를 널리 소개하였다. 한편 전국 주교 회의에서는 1931년 조선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전국 가톨릭 청년 연합회' 의 결성을 추진하였으나, 전국 연합회가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단체들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 다는 드망즈 주교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1933년 주교 회의에서는 청년회의 역량을 집중시키기 위해, 서 울과 대구의 청년 연합회가 발행하던 월간지 <천주교회 보>와 <별>을 1933년 4월과 5월에 각각 폐간하고 6월부 터 전국을 아우르는 《가톨릭 청년》을 창간하기로 결정하 였다. 이러한 결정 배경에는 당시까지 한국 교회 안에서 전개되었던 가톨릭 운동과 관련된 선교 방침을 일원화하 려는 목적과 청년들의 신심 함양에 도움을 주고 사회 계 몽과 민족 문화의 발전에 보탬이 되려는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본연의 목적은 이듬해인 1934년에 평양 지목구에서 《가톨릭 연구 강좌》를 창간 · 발간함으로써 곧 퇴색되었다. 결국 청년 신자들의 자발적인 발의와 참여로 시작된 문화 출판 활동은 주교 회의의 개입으로 오히려 활기를 잃게 되었다. 물론 이 당시부터 조선 총독부의 언론 탄압 이 강화되는 등 외부 요인이 작용된 탓도 있다. 또한 당 시 한국 천주교회 입장에서는 천주교 신자들, 특히 청년 신자들의 교회 외부 활동으로 일본 총독부와 교회 간에 마찰이 발생하면 교회가 피해를 입을 것이라 판단하여, 청년들이 민족 문제보다는 신심 함양에 주력하도록 유도 하려 한 탓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청년 활동도 1937년 중일 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다수의 청년 들이 징집되면서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의 활동] 한국 가톨릭 청년 운동은 1945년 의 8 · 15 해방 이후 재개되었다. 1946년 7월 서울 대목 구 청년 연합회는 해방 후 첫 정기 총회를 개최하였고, 8 월에는 여자 청년 연합회가 결성되어 1948년 10월 남녀 청년 연합회 공동 주최로 체육 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대구 대목구에서는 남방 천주공교 청년회를 대신하여 1946년 5월 대구 시내 5개 본당 청년회가 연합하여 대 구 가톨릭 청년회' 를 결성하여 <경향신문>의 지사 운영, 연합 체육 대회 개최 등의 활동을 펼쳤치다가, 1948년 9월 '대구 대목구 가톨릭 청년 연합회' 가 결성됨으로써 이에 흡수되었다. 이 연합회는 1949년 4월 <천주교회 보>를 복간하고 인쇄소까지 운영하였으나, 한국 전쟁과 재정난이 겹치면서 1951년 5월 교구에 경영권을 인계하 였다. 한편 서울 대목구와 대구 대목구의 두 청년 연합회는 <천주교회보>를 통하여 꾸준히 전국 가톨릭 청년 연합회 의 결성을 추진하였으나, 1949년 8월 '대한 천주교 총연 맹' 이 결성되면서 그 뜻이 무산되었다. 이어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청년회의 활동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휴전 협정이 맺어진 후 전쟁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 은 상황에서 의식주의 해결이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에 신자 청년들이 함께 모여 활동할 수 있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청년회가 구성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각 본당별로 주일학교 및 야학 등을 설립하여 교회 재건 사업에 적극 적으로 참여하고 본당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노력하 는 청년들도 있었다. 또한 주일학교 교사회와 성가대 등 의 단체에 속하여 신심 · 전례 · 교육 및 기타 봉사 활동 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한국 가톨릭 청년 운동은 일제 시 대 말기 이후 계속 침체일 수밖에 없었다. (1960~1970년대 활동] 1950년대 후반 한국 가톨 릭 노동 청년회(J.O.C.)가 설립되면서 가톨릭 청년 운동 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58년 1월 서울대 학병원의 간호사인 박명자(마리아)로부터 비롯된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는 그해 6월 박성종(朴成鍾, 프란치 스코) 신부가 지도 신부로 선임되면서 기틀을 마련하였 다. 이어 11월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설립자인 카르딘 (Joseph Cardijn, 1882~1967) 몬시놀이 내한하여 가톨릭 노동 청년회의 깃발과 배지를 수여함으로써 한국 지부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이듬해 6월 빈민촌 무료 진료를 시작으로 대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각 본당별로 한국 가톨릭 노동청년회의 단위 모임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60년 7월에는 서울에 전국 본부가 설치되었고, 1961 년 11월에는 주교 회의에서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 정식 인준을 받았다. 이렇게 설립된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는 설립 직후부터 공장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력하였다. 각 회사나 공장 단위로 한국 가톨릭 노동 청 년회의 단위 모임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그 회사의 노동 조합 결성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강화도 심도 직물 섬 유 노조 사건(1968. 1)을 비롯하여 박신정 사건(1970. 12), 천 요셉 산업 재해 사건(1971. 11), 한국 모방 퇴직 금 체불 사건(1972. 9), 삼립 식품 사건(1973. 3) 등에서 노동 조건 및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하여 구체적인 활동을 하였다. 1964년 10월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산하 농촌 청 년회가 신설되면서 농촌 지역에서의 가톨릭 청년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농촌 청년회는 농촌 실정에 맞는 활동을 중점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1966년 8월 한 국 가톨릭 농촌 청년회(J.A.C.)로 독립하였으며, 개량· 개선 · 협동 등을 강조하며 농촌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 러나 미국의 잉여 농산물 문제, 독점 자본의 문제 등과 같은 농민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본격적인 조직 운동 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971년 '선진국 농업의 생산 과잉과 한국 농업' 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농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 듬해 3월에는 '한국 가톨릭 농민회' 를 정식 출범시키면 서 농촌 지역에서 청년들의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80년대 이후 활동] 1960~1970년대의 가톨릭 청 년 운동은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와 한국 가톨릭 농촌 청년회 등의 전국 단체를 중심으로 사회 정의 실현과 인 권 운동에 적극 참여하며 발전하였다. 1980년대에는 1970년대 말 각 본당별로 결성된 청년 단체들의 다양한 활동 방향을 정립하고,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가 톨릭 청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교구별, 본당별로 청 년 연합회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각각의 청년 연합 회를 중심으로 가톨릭 청년 운동이 펼쳐졌다. 1980년 9 월 발족한 지 5년 만에 교구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은 부 산 교구 청년 연합회를 비롯하여 각 교구별로 교구 청년 연합회가 결성되었으며, 이들은 교회 쇄신 운동 및 민주 화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는 한 국을 방문하여 장충 체육관에서 '젊은이들과의 만남' 행 사를 가졌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비롯하여 본당에서 활동하는 청년들과 노동 청년들, 타종교의 청년 및 일반 학생 6천여 명이 참석한 이 행사에서 교황은 급격히 변 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가치관의 혼돈으로 방황하는 젊 은이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희망의 새 세계를 열 것을 역설하였다. 또한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싸우는 과정에서 불의를 불의로, 폭력을 폭력으로, 악을 악으로 대항하려는 자가당착에 빠지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한편 1980년대 후반부터 철거 지역 내의 청년 신자들 이 일반 사회 운동과 연계하여 도시 빈민 운동을 전개하 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는 급속하게 변하였고, 이로 인하여 대부분의 정치적인 성향을 지닌 사회 운동들이 침체기를 맞는 대신 환경과 통일 운동들 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는 가톨릭 청년 운동도 마찬가 지여서, 198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던 정치적 성향 의 교구별 · 본당별 청년 연합회들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동시에 새로운 청년 모임은 여러 활동 단체들의 세부 모 임으로 변하면서 자체적인 청년 단체의 설립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2001년 통일 운동 분야에서 전 국 연합체인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가톨릭 청년 학생 연대' 가 발족하는 등 2000년대에 들어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2006년 현재 이 단체에는 가톨릭 청년 포럼, 평화를 여는 가톨릭 청년, 새날의 희망 가톨 릭 청년, 가톨릭 청년 연대 및 광주 · 원주 · 춘천 지역의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가 소속되어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편 청년들의 심신 활동 중 가장 활성화된 것은 가 톨릭 청년 성서 모임' 이다. 이 모임은 "말씀으로 함께 모 인 젊은이들의 교회"를 건설하여 젊은이들의 복음화와 선교를 이루며 이를 통하여 교회를 젊게 쇄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먼저 공부한 평신도 봉사자와 함께 6~7 명이 소모임을 결성하여 성서 공부를 하는 방식으로 성 서에 대한 집중과 이해를 높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 모임은 각 본당과 대학으로 확산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 고 있다. 또한 1998년 1월에 시작한 '예수살이 운동' 은 가톨릭 청년 의식화 교육을 모체로 출범하였다. '소비 사회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라는 질문으 로 시작된 이 공동체 운동은 청년들이 신앙 고백을 쇄신 하는 '배동 교육' 을 거쳐 복음적 인생관과 공동체 세계 관으로 살아가도록 돕고 있다. [전 망] 현재 각 본당별 청년 모임 및 청년 운동의 활 동 상황은 과거에 비하여 매우 저조한 편이다. 아울러 각 교구 교육국에서 담당하고 있는 청년 사목도 본당별 네트워크 형성과 청년 연합회 활동의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지만, 청년층의 교회 이탈이 증가하여 큰 성 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교회 이탈은 청년들의 개인주의화, 사회 문제와 이웃에 대한 무관심 화, 탈정치화 및 탈공동체화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 만 교회가 청년들의 현실적인 관심과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점 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청년 실업과 같은 청년층의 당면 문제에 교회가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 서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젊은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도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 에서는 청년을 청년 운동의 대상으로만 간주할 것이 아 니라, 그 주체로 인정하여야 한다. 이를 통해서만이 한 국의 가톨릭 청년 운동이 침체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이며, 청년층의 교회 이탈 역시 막을 수 있을 것이다. (V 가톨릭 청년 운동 ; → <가톨릭 신문> ;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 ; <별> ;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 한국 가 톨릭 학생 운동) ※ 참고문헌  윤광선, <청년 운동의 어제>, 《빛》 3호, 1983년 7월/ 〈가톨릭신문〉, 1984년 5월 13일자/ 최석우, <가톨릭 청년 운동>, 《경 향잡지》 80권 7호(1988. 7), pp. 92~951 약현 성당 100주년사 편 찬위원회, <약현 본당 100년사(1891~1991))》, 천주교 중림동 교회, 1992/ 심상태, <가톨릭 청년 운동의 신학적 근거>, <사목> 136호 (1990. 5), pp. 107~114/ 김민수, <가톨릭 청년 운동과 청년 사목>, 《경 향잡지》 87권 5호(1995. 5), pp. 22~271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 《말씀의 방》 153호(2005. 11). [金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