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출판사 韓國 - 出版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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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렛 인쇄소(홍콩, 1895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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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자렛 인쇄소(홍콩, 1895년경). .



한국 천주교회 창설 이후 현재까지 전개되어 온 가톨 릭 출판 역사의 총체. 인쇄 형식이나 출간 책자 · 잡지 · 언론의 대내외적 의의에 따라 그 시기를 구분하기도 하 지만, 일반적으로는 교회사의 전개 과정 안에서 다음과 같이 네 시기로 구분한다. 첫째, 교회 창설 이후부터 1859년 목판 인쇄소가 설립되는 시기까지, 둘째, 1906 년 <경향신문>(京鄕新聞) 발간 이전까지, 셋째, 1945년 《경향잡지》 폐간까지, 넷째, 1946년 《경향잡지》와 <경향 신문>의 복간 이후 현재까지. 두 번째 시기는 1880년의 활판 인쇄를 기점으로 다시 구분하기도 하며, 네 번째 시 기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컴퓨터가 활발하게 보급되면서 출판사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I. 교회 창설과 필사본 서적의 유포 [교회 창설기의 필사본 서적] 1784년 말 한국 천주교 회가 창설된 이후 1859년 서울에 목판 인쇄소가 설립되 기 전까지 교회의 출판 사업은 인쇄가 아니라 개인의 필 사 활동과 전사 작업에 의해 전개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여기에는 교회 서적의 필사 유포 작업은 물론 서 한 · 천주가사 · 순교록의 필사나 전사 활동, 성화의 제 작 · 복제 작업까지 포함될 수 있으나, 성화 관련 자료는 현존하는 실체가 거의 없으므로 설명하기 어렵다. 교회의 창설 이후 서적을 필사 보급하였다는 기록은 1801년의 순교자 최창현(崔昌顯, 요한)의 전기에서 최 초로 발견된다. 역관 집안 출신인 그는 마이야(J.F.F.-M.A. de Moyriac de Mailla, 馮秉正)의 《성경광익〉(聖經廣益) 과 디아즈(E. Diaz, 陽瑪諾)의 《성경직해》(聖經直解)를 바탕으로 《성경직히광익》을 번역 편찬한 뒤 그 필사본을 널리 보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글 필사본 《성경 직히》와 <성경광익》도 이 시기에 번역 필사된 것으로 추 정된다. 또 1801년의 순교자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 티노)은 한글본 교리서 《증교요지〉(主敎要旨)를 저술하 였고, 1794년 말에 입국하여 활동한 주문모(周文謨, 야 고보) 신부는 《고히요리》, 《고히성찬》, 《성테문답》 등의 교리서와 신심서를 번역하였다. 따라서 이들 서적들도 필사본으로 제작 보급되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사학징의》(邪學懲義)에 실려 있는, 1801년 신 유박해 때 형조에 압수되어 소각된 교회 서적들의 제목 들을 살펴보면 한글 필사본이 86종, 한문본이 37종으 로, 특히 한글 필사본 서적들은 천주교회가 초기부터 한 글의 번역과 보급 활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는 의 미로 이해될 수 있다. 이들 모두 당시 신자들에 의해 번 역되거나 필사되어 유상 혹은 무상으로 널리 전파되었을 것이다. 순교자들의 옥중 서한이나 순교 행적을 담은 기 록, 즉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일기〉나 〈이도기(李道 起, 바오로)의 전기>와 같은 순교자 전기가 필사 보급된 것도 박해 초기부터였다.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과 출판 활동] 신자들의 번역 · 필사 활동은 이후에도 꾸준히 지속되었으며, 아울러 1836년 초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한 뒤로는 그들이 번 역하거나 저술한 교회 서적도 필사본으로 보급되기 시작 하였다. 특히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L.J.-M.Imbert, 范世亨) 주교는 기도서인 《년규성교공과》(天主聖 敎功課)와 (년규정교십이단)(天聖教十十二端) 등을 저 술 보급하였다. 또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에는 성 이문우(李文祐, 요한)가 옥중에서 지은 <옥중데성>, 성 민극가(閔克可, 스테파노)가 지은 <삼세대의> 등의 천주가사가 필사본으로 전파되었고, 최영수(崔榮受, 필 립보)와 성 현석문(玄錫文, 가롤로) · 이재의(李在誼, 토 마스) 등이 수집 편찬한 기해박해 순교록도 《치명일기》 라는 이름으로 전사되었다. 이 순교록은 그 후 제3대 조 선 대목구장 페레올(J-J.J-J-B. Ferréol, 高) 주교가 병오박 해 순교록을 첨가하여 프랑스어로 번역하였으며, 1847년 초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부제와 메스트르(J.A. Maistre, 李) 신부가 라틴어본 《기해 · 병오 순교자들의 행적(약전)》으로 번역하여 파리로 보냈다. 그리고 천주가사와 옥중 수기(혹은 서한)들은 이후로도 꾸준히 저작 유포되었는데, 그중에는 <.향가>, <션종가>,<.심판가>, <공심판가> 등 최양업 신부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가사도 있다. 필사본 저술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제5대 조선 대목구장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주교의 순교록과 순교사 저술이다. 그는 주교 서품을 받기 1년 전인 1856년에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S.F. Berneux, 張敬 → 주교로부터 그 임무를 부여받고 본격적으로 자료 수집을 시작하여, 1858~ 1859년에 《한국 주요 순교자 약전》(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을 완성하여 파리로 보냈으며, 1859~1860년에는 《조선사 서설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 비망기》(Notes pour des I'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를 완성하였다. 다블뤼 주교의 저서들은 이후 《기 해 ·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과 함께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달레(C.C. Dallet, 1829~ 1878) 신부가 지은 《한국 천주교회사)(Histoine de I'Eglise de Corée, 파리, 1874)의 바탕이 되었다. Ⅱ. 목판 · 활판본 서적의 간행 [목판본 서적의 간행] 천주교회의 출판 활동이 본격적 으로 시작된 것은 1859년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목판 인쇄소를 설립하면서부터였다. 이 목판 인쇄소는 1864 년에 이르러 성 최형(崔炯, 베드로)의 집과 임치화(任致 禾, 요셉)의 집-훗날 전장운(全長雲, 요한)의 집으로 변경됨-두 곳으로 확대되어, 각종 교리서와 기도서는 물론 전례서 · 입문서 · 신심서 · 호교서 등이 꾸준히 간 행되었다. 그 결과 목판본 한글 서적도 활판본 한글 서적 과 함께 당시 한글 번역, 보급 활동에 일정한 역할을 하 게 되었다. 목판본 한글 서적 중에서 가장 먼저 간행된 것은 기도 서인 《턴류성교공과》였다. 이어 교리서인 《성교요리문 답》(聖敎要理問答)과 《턴당직로》(天堂直路), 《신명초힘》 (神命初行), , 《회죄직지》(悔罪直指), 《령세대의》(領洗大 義), 《성찰지략》(省察略) 등이 1864년에 간행되었으 며, 1865년에는 정약종의 《쥬교요지》, 《년규성교례규》 天主聖教教禮規) 《성교절요》(聖敎切要), 《주년첨례광익》 (周年瞻禮廣益) 등이 간행되었다. 이 목판본 서적들은 다블뤼 주교와 최양업 신부, 최형 · 전장운 등이 참여하 여 번역 간행한 것이다. 아울러 다블뤼 주교의 《한한불 자전》(韓漢佛字典)과 《동국역대》(東國歷代), 배론 신학 교 교장 푸르티에(J.A.C. Pourthie, 申) 신부의 《조선어연 구》(朝鮮語研究)와 <한한라자전>(韓漢羅字典), , 프티니 콜라(M.A. Petitnicolas, 朴) 신부의 《나한사전》(羅韓辭典) 등도 편찬되었으나 아쉽게도 1866년 병인박해 때 소실 되고 말았다. [성서 활판소의 설립과 출판 활동] 박해 이후 출판 사 업이 재개된 것은 만주에서였다. 박해 때 중국으로 피신 하였다가 1869년 제6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리델 (F.C. Ridel, 李福明) 주교가 조선 재입국을 기다리는 동 안 상해와 만주 등지에서 다른 선교사들과 최지혁(崔智 赫, 요한), 김여경(프란치스코), 권치문(타대오) 등 한국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불자전》(韓佛字典)과 <한어문 전》(韓語文典) 편찬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 두 사전의 편 찬 사업은 코스트(E.J.G. Coste, 高宜善) 신부에게 위임되 었고, 그가 일본 요코하마(橫浜)의 레비(Lévy) 인쇄소에 서 1880년과 1881년에 《한불자전》과 《한어문전》을 활 판으로 간행함으로써 한국 가톨릭 출판 사업은 목판에서 활판으로 변경되었다. 코스트 신부는 이때부터 최지혁이 만든 활자와 새로 구입한 활자들을 가지고 조선교구 인쇄소를 설립하고자 노력한 결과 1881년에는 마침내 '요코하마 인쇄소' 를 설립하였고, 그해에 《신명초힘》과 《년류성교공과》 활판 본을 간행하였다. 이어 이듬해 2월에는 인쇄소를 나가사 키(長崎)로 이전하여 '성서 활판소 라 명명하였다. 바로 전해에 리델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일본 활동 중심 지였던 나카사키를 방문하여 조선 대목구의 대표부격인 기구를 설립한 바 있었다. 이어 코스트 신부는 성서 활판 소에 한글 자모를 추가로 만들어 비치하고, 《년류성교공 과》(4권, 1886년 간행본으로 추정됨)의 간행에 착수하는 한 편 《성찰기략》(1882), 《진교절요》(즉 성교절요, 1883) <성교감략》(2책 1883), 《령세대의》(1883) <회죄직지> (1883), 《년당직로》(1884) 《주년첨례광익》(4권, 1884) 《성교백문답》(1884), <성교요리문답》(1886) 등을 차례로 간행하였다. 코스트 신부는 1885년 11월 8일 서울에 도착한 후 인 쇄소 이전 준비를 시작하여,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 자 제7대 조선 대목구장 블랑(G.-M.J. Blanc, 白圭三) 주 교의 허락을 얻어 나가사키에 있던 성서 활판소를 서울 정동(貞洞)에 위치한 교구 경리 푸아넬(V.L. Poisnel, 朴 道行) 신부의 거처(별채, 현 이화여중 앞)로 이전하였다. 이를 계기로 가톨릭 출판 활동은 활기를 띄게 되어, 《성 상경》(1886) 《경모성월》(1887), 《성요셉성월》(1887), 《류교요지》(1887), 《년규정교예규》(1887) 등 이전에 목 판본으로 간행되었던 교회 서적 대부분을 활판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정동의 성서 활판소는 1888년 10월 명동(현 명동 주교 관 북쪽)의 2층 목조 인쇄소 건물로 이전하였다. 《상데진 리》(1891), <성경직히》(9권, 1892~1896), 《일과절요》 (1897)를 비롯하여 교리서 · 신심 묵상서 · 성인전 · 전례 서 등 신앙 자유기의 교회 서적들이 간행된 곳이 바로 이 명동 성서 활판소였으며,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순교록 《치명일거》와 《기히일기》도 각각 1895년과 1905년에 이곳에서 간행되었다. 한편 홍콩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 회 극동 대표부의 나자렛 인쇄소(Imprimerie de Nazareth) 에서는 1887년에 블랑 주교에 의해 정하상(丁夏祥, 바 오로)의 <상재상서》(上宰相書)가, 1891년에는 《나선소 사전》(羅鮮小辭典)이 간행되었다. : Ⅲ. 출판 활동의 성장과 시련 (경향신문 · 경향잡지와 천주교회보 발간] 1906년 10 월 19일, 교회에서는 종교 기관지가 아니라 대외적인 시 사 주간지의 성격이 강한 <경향신문>(京鄉新聞)을 창간 하였다. 발행인 겸 편집인은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신부였고, 발행소는 명동 성서 활판소였다. 그러나 <경 향신문>이 창간 4년 2개월 만인 1910년 12월 30일 총 독부의 탄압에 의하여 제220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자, 교회에서는 교리 · 교회사에 관한 지식과 함께 사회 생활 에 필요한 지식을 담은 <경향신문>의 별지 부록 <보감> (寶鑑)을 격주간 종교 잡지인 《경향잡지》로 변경하여 1911년 1월 15일부터 발간하고 동시에 기존 활판소의 명칭도 '경향잡지사' 로 개칭하였다. 이후 《경향잡지》는 순수 종교 잡지를 표방하면서 신자 재교육과 계몽 활동 에서 큰 역할을 하였으며, 문예 작품과 독자 투고 등을 통해 가톨릭 문화의 보급에도 일조를 하였다. 1933년 이후 《경향잡지》는 조선어학회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맞추어 내용을 편찬하였다. 1927년에는 민족 문화 운동, 민족 언론 기관의 설립 과 민족지 창간 등에 자극을 받아 가톨릭 운동(Catholic Action)을 주도해 가던 대구와 서울의 두 단체에 의해 교 회 신문이 발간되었다. 먼저 대구에서 남방 천주 공교 청 년회(南方天主公教青年會) 명의로 가톨릭 운동의 계몽 과 확대를 표방한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 <가톨릭신 문>의 전신)를 1927년 4월 1일에 창간하였다. 이어 1924년 9월부터 <연합 청년회보〉(聯合靑年會報)를 발 간해 오던 서울의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에서도 1927년 7월 10일에 <별>을 창간하여 가톨릭 문화 활동 에 기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도 한글 번역과 출판 활동은 계속되었다. 1906년부터는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뒤텔(G.C.-M.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도 아래 신약 4복음서 중심의 성서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손성재(孫聖載, 야고보) · 홍병철(洪秉喆, 루가) 신부가 마태오 복음을 번역하였으며,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신부가 나머지 복음서의 번역과 전체 각주 작업을 담당하였다. 이 4복 음서는 위텔 주교와 한기근 신부의 교열 작업을 거쳐 1910년 말에 《스~성경)(四史聖經)이라는 이름으로 간 행됨으로써 한국 교회 창설 이래 사용되어 오던 《성경직 히》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후 1922년에 한기근 신부는 《종도행전》(사도 행전)도 번역 출간하였다. 또한 1910년 에 한기근 신부가 프랑스어 원본을 한글로 번역한 뒤 설 명을 첨부한 《요리강령》이 간행되어 예비 신자와 아동들 을 위한 교리서로 널리 이용되었으며, 1925년에는 르 장드르(L.-G.A.A. Le Gendre, 崔昌根) 신부를 중심으로 저 술된 한글본 《천주교 요리》(대문답)가 발간됨으로써 1864년 이래 오랫동안 이용되어 온 <성교요리문답>을 대신하게 되었다. 교구의 사목 규칙과 행정 제도 등에 관한 기본 지침을 수록한 교회 지도서들도 발간되었다. 먼저 대구 대목구 에서는 1914년에 라틴어본 《대구교구 지도서》(1912년 6 월 프랑스어본 및 라틴어본으로 반포)를 간행하였고, 서울 대 목구에서도 1923년에 라틴어본 《서울교구 지도서》를 간 행하였다. 《서울교구 지도서》는 드브레(E.A.J. Devred, 俞 世俊) 주교가 기초한 원본을 검토 수정하여 전년도 9월 에 반포한 것이다. 이 지도서들은 그 후 1932년 9월에 발간된 《한국 천주교 공용 지도서》(Directorim Commune Missionum Coreae)로 통합되었는데, 모두 홍콩(香港)의 나자렛 인쇄소에서 간행되었다. 한편 회장들을 위한 지 도서로는 1913년 대구교구에서 간행한 <회장의 본분》 (대구교구 회장 지도서)과 1923년 르 장드르 신부가 저술 하여 서울의 경향잡지사에서 간행한 《회장직분》이 있다. 1912년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한국인 성직자 들을 위한 잡지 《타벨라》(Tabella SS. Cordis Jesu, 예수 성심 지)를 등사판으로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잡지는 1914년에 중단되었다가 1919년에 복간되었으며, 1924 년부터는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발행되다가 1937년 6 월 이후에 폐간되었다. 또 1924년과 1925년에는 위텔 주교가 편찬한 프랑스어본 기해 · 병오 순교자들의 행적 및 병인 순교자들의 행적이 나자렛 인쇄소에서 각각 간 행되었고, 1924년에는 드브레 주교의 프랑스어본 《한국 의 천주교》가 같은 인쇄소에서 간행되었다. 이 무렵부터 일반 교회 서적들은 서울과 대구보다는 베네딕도회가 활동하던 원산 대목구에서 활발히 간행되 기 시작하였다. 베네딕도회에서는 서울에서 함경도 덕원 으로 이전한 직후인 1927년부터 인쇄소 설립에 착수하 였고, 1930년대 초부터는 서적 간행을 시작하였다. 인 쇄소 책임자는 피셔(L. Fischer, 裵 수사였고, 교정은 수 도원장 로트(L. Roth, 洪泰華) 신부와 신학교의 한국인 교사가 담당하였다. 덕원에서의 첫 결실은 1933년에 아 펠만(B. Appelmann, 裵 신부가 교회 전례에서 가장 긴요 한 미사 통상문에 해설을 곁들여 저술한 한글본 《미사 규식》이었다. 이후 덕원 인쇄소는 서울의 경향잡지사와 함께 교회 출판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에 앞서 베네딕도회의 로머(A. Romer, 盧炳朝) 신부는 1930년 이전에 문법서 《조선어 교본》을, 랍(K. Rapp, 朴)과 아펠만 신부는 1932년 가을부터 한글 미사 경본 들을 등사판으로 배포하였으며, 아펠만 신부는 다음해 9 월 《소미사 경본》(한글본 경문 수록)을 간행하였다. 또 로 트 신부는 1932년에 수도자용 한글 《미사 통상문》을, 다 음해에는 쇼트(Schott) 신부의 《미사 경문》 한글 역본을 등사판으로 간행하였다. [가톨릭 청년 발간과 경향잡지 폐간] 1933년 3월 6 일, 한국의 5개 교구 대표들은 서울 명동에서 개최된 연 례 회의에서 가톨릭 운동에 대해 심의한 뒤, 전국 5교구 출판부위원회를 구성하고 서울의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전국 가톨릭 운 동의 통일을 위해서는 우선 출판물을 통일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결과 <천주교회보>는 73호를 끝으 로, <별>은 71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1933년 6월 10일 에는 《가톨릭 청년(靑年)》이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올 바른 교리 이해와 호교론을 바탕으로 한 신심 함양에 목 적을 두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반 사상 · 철학 · 역사· 문학 · 의학 · 과학 · 상식 등 다양한 내용을 게재함으로 써 신자 계몽과 민족 문화의 발전에도 일정한 기여를 하 였다. 그러나 《가톨릭 청년》이 표방한 가톨릭 운동의 일 치를 위한 역할은 1934년 1월 평양 지목구에서 《가톨릭 연구 · 강좌(研究講座)》(후에 가톨릭 연구, 가톨릭 조선으로 개칭됨)를 창간하고, 1936년 봄 연길 지목구에서 소년 · 소녀들을 위한 《가톨릭 소년》을 발간하면서 상실될 수밖 에 없었다. 게다가 총독부에서 《가톨릭 청년》의 내용을 철저하게 검열함에 따라 결국 창간 3년 6개월 만인 1936년 12월호(제4권 12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당시 원산과 연길 지목구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신 자들의 능동적인 미사 참여와 전례 토착화를 위해 '미사 경본과 성무일도의 한글화' 를 추진하고 있었다. 동시에 연길의 랍과 아펠만 신부, 원산의 로트 신부는 미사 경본 의 한글 번역과 사용법 교수에 꾸준히 노력하였고, 그 결 과 로트 신부는 마침내 1936년에 신자들을 위한 한글본 《미사 경본》(약 1천 쪽)을 간행하였다. 이에 앞서 1934년 과 1935년에는 한글본 《주일 미사 경본》과 《성인 미사 경본》, 그리고 <봉재 때의 미사 경본》도 각각 간행하였다. 덕원 인쇄소에서는 1935년에 브란들(Brand, 張仁德) 신부의 《일본어 회화 초보》가, 다음해에는 로트 신부의 한독(韓獨) 문법서인 《조선어 문법》과 담(F. Damm, 卓世 榮) 신부의 《아해의 미사》가 간행되었다. 그리고 1938 년에는 슐라이허(A. Schleicher, 安世明) 신부의 교양 서 적인 《어느 것이 참된 종교인가?》와 피셔(W. Fisher, 陳 道光) 신부의 한글 성가인 《가톨릭 성가》가 간행되었으 며, 이를 전후로 성사 지도서, 성무일도서, 일반 신자들 을 위한 《십이단》, 《요리 문답》, 《노인 문답》, 《소아 문 답》 등이 꾸준히 간행되었다. 덕원 신학교의 학생들이 1933년부터 편집 발간한 《신우》(神友)도 1939년 폐간 때까지 덕원 인쇄소에서 간행되었다. 이 무렵 슐라이허 신부는 신약성서의 남은 서간들과 묵시록을 번역한 뒤, 최병권(崔炳權, 마티아) 신부와 로 트 신부 등의 교정과 교열을 거쳐 1941년에 출간하였 다. 그에 앞서 베네딕도회에서는 《소년 성서》(1925)와 에그너(R. Egner) 신부의 《어린이의 성서》(1940)를 발간 하였다. 차일라이스(V. Zeileis, 徐相烈) 신부와 퀴겔겐(K.Kiigelgen, 具傑根) 신부가 번역한 <합본 복음서》도 같은 해에 간행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슈테거(G, Steger, 全五 範) 신부가 저술한 《교리 강의》(전 3권) 제1권이 간행되 었다. 한편 경성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에서는 1931년에 《조선 천주 공교회 약사》를 발간하였으며, 약현 천주교 청년회에서는 《천주교회 약현 지방사》를 발간하였다. 이 어 1934년에는 교리서 편찬을 위한 전국 5교구위원회에 서 《천주교 요리》를 확대 편찬한 《천주교 요리 문답》을 한국 천주교 공식 교리서로 간행하였다. 193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교회의 출판 활동은 총독부의 조직적인 탄압에 의해 침체되어 갔다. 모든 신 문 · 잡지들은 이른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서 두에 게재해야만 하였고, 황국화 정책을 옹호하는 글들 을 수록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교회는 그 동안의 태도를 바꾸어 신사 참배는 종교적인 것이 아니 므로 신자들이 의식에 참여해도 좋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일제 당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경향잡지》 를 제외한 모든 정기 간행물들을 폐간하였다. 1936년 12월 《가톨릭 청년》이 폐간된 데 이어 다음해에는 《타벨 라》가, 1938년에는 평양 지목구의 《가톨릭 조선》이, 1940년에는 연길 대목구의 《가톨릭 소년》이 차례로 폐 간되었다. 월간 · 격월간으로 축소 발행되던 《경향잡지》 도 제39권 976호(1945년 5월 15일)를 마지막으로 폐간 되고 말았다. 이로써 출판 활동을 통해 진행되어 오던 천 주교회의 문화 운동은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IV. 광복 이후의 변모와 출판 활동의 의의 〔출판 활동의 확대〕 광복 이후인 1946년 8월 1일 《경 향잡지》가 복간된 것을 시작으로, 교회의 출판 활동은 재 개되었다. 10월 6일에는 <경향신문>이 창간(사장 : 양기섭 〔梁基涉, 베드로] 신부)되었고, 이듬해 4월에는 《가톨릭 청 년》이, 1949년 4월 1일에는 <천주교회보>가 복간(제74 호)되었다(1953년 <가톨릭 신보>, 1954년 <가톨릭 시보>, 1980년 <가톨릭신문>으로 개칭됨). 이 중에서 <경향신문>은 1957년 4월에 폐간되었다가 1960년 4월 23일자로 복 간되었고, 1963년 5월에는 가톨릭 재단에서 분리 독립 되었다. 또 《경향잡지》는 1959년 7월 1일(제51권 7호)부 터 그 발행권이 서울 대목구에서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 회로 이관되었다. 이 시기에 간행된 중요한 단행본으로 는 주교 회의 차원에서 간행된 《가톨릭 교리서》(1967)를 비롯하여 유홍렬(柳洪烈)의 《조선 천주교회사》(상, 1949), 《갈멜 수녀들의 납치기》(1954) 《개종실기(改宗 實記)》(195) , 《한국 천주교 연감》(1956) 등이 있다. 근대 이후 한국 천주교의 출판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 을 하던 경향잡지사는 1958년 11월 16일 그 이름을 가 톨릭 출판사' 로 개칭 등록하였으며, 1979년 8월 27일 에는 현재의 중림동 사옥을 마련하여 이전하였다. 동 출 판사에서는 1960년 1월 아동 문학지인 《가톨릭 소년》 (1972년 《소년》으로 개칭)을 창간하였으며, 1971년에는 기존의 《가톨릭 청년》을 사회 계몽지인 《창조》로 바꾸어 발행하다가 다음해에 폐간하였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는 다양한 새 출판 사업체들이 설 립되었다. 우선 1962년 5월 7일에는 왜관 베네딕도 수 도회에서 '분도출판사 를 설립한 뒤 교회와 사상에 관련 된 서적들을 출판하기 시작하였고, 성 바오로 수녀회에 서도 같은 해 '성 바오로 출판사' 를 설립한 뒤 《가정의 복음서》를 발간하는 등 본격적으로 교회 출판 사업에 참 여하였다. 이 시기에 간행된 단행본으로는 주재용(朱在 用, 바오로) 신부의 《선유의 천주 사상과 제사 문제> (1958),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1962) 등이 있다. 또 1968년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함께 조직한 '성 서 번역 공동위원회' 에서는 1971년에 《공동 번역 신약 성서》를, 1977년에는 《공동 번역 성서》를 번역 간행하 였다. 1970년대 이후로는 한국 사회의 출판 활동과 마찬가 지로 교회의 출판 활동도 눈에 띄게 활성화되었다. 교회 관련 서적을 간행하는 출판사와 기관들이 연이어 설립되었고, 1977년 5월에는 가 톨릭 출판사,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 성 바오로 출판사, 분도출판사와 개인 등 이 가입된 '가톨릭 신문 출판 협의회' 가 출범하였다. 그러면서 성서와 일반 신학, 신자들의 신앙 생활을 위한 다양한 교리 서나 신심 묵상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등 신앙인의 주요 관심 분야, 교 회의 본질과 변모 상황은 물론 철학과 교 회 윤리를 다룬 전문 서적, 한국 교회사 관련 서적 등으로까지 출판 활동이 확대 되었다. 동시에 각종 정기 간행물, 연구 논문집과 연구서들도 자유롭게 간행되었 다. 특히 주교 회의에서는 1972년에 새 로 편찬한 《가톨릭 기도서》를 간행하고, 1983년에는 그 수정판과 《가톨릭 교리 서》의 수정판을 발간하였으며, 1984년에 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사업의 하나로 광주 가톨릭대학 전망 편집부에서 《성서 신학 사전》을 발간하고, 1985년에는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한국가톨릭대사전)을 간행하였다(1994년부 터 새 (한국가톨릭대사전)으로 확대 간행). 월간 《성서와 함 께》와 《생활성서》가 발간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컴퓨터가 폭넓게 보급되자 가톨 릭 출판 활동에도 일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전산 시 스템이 도입되고 인쇄 방식이 현대화되면서 출판 활동이 쉽고 다양해졌으며, 이는 교회 출판물이 질적 · 양적으로 성장하는 전환점이 된 동시에 출판 활동이 영상 사업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교회 출판 활동의 의의] 한국 가톨릭의 출판 활동은 교회 창설과 박해기의 필사 · 번역본 간행으로 시작되어 목판본 · 활판본 시대를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서적을 통한 신자들의 교리 교육과 신심 함 양 운동, 선교 활동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정착과 복음의 확대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초기 교회의 지도층 신자 들이나 후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 서적을 번역 · 집필하고 이를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 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최 양업 신부가 천주가사를 지어 보급한 일도 같은 맥락에 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박해기의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 구하고 베르뇌 주교가 서울에 목판 인쇄소를 설립하였다 는 사실, 리델 주교가 조선에 재입국하기도 전에 미래를 예상하고 먼저 교회 서적 출판을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서적의 중요성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알게 해 준다.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출판 간행된 한글본 교회 서적은 그 시대의 한글 보급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출판 활동은 한국의 인쇄 · 출 판 · 언론의 발전에도 기여를 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유럽 문화의 이식과 한국 근대 문화의 발전에서도 일정 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아울러 교회 출판 사는 지난날의 교회상을 이해하고, 신자들의 신앙과 사 회관, 교회의 문화 활동과 신학 사조를 파악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선교사들의 출판 활동이 성서 활판소와 경향잡지사, 가톨릭 출판사로 이 어지고,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베네딕도회의 출판 활 동이 분도출판사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사의 흐 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이다. (⇨ 가톨릭 출 판사, 한국의) ※ 참고문헌  《사학징의》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 중 . 하,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 1980/ 《가톨릭 사전》 <가톨릭신문> 《가톨릭 청년》 <경 향신문>/ 《경향 잡지》 《위텔 주교 일기》 Adelhard Kaspar O.S.B, HWAN GAB( 還 甲), Miunsterschwarzach, 1973/ 프로멘시우스 레너, <원산교구사>, <교회 와 역사》 59호(1980. 7)/ 崔奭祐, 〈韓國敎會 敎理書의 變遷 史〉, 《韓國敎會史의 探究》,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李元淳, 韓 國天主教會史研究小史〉, 《韓國敎會史論叢》,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吳世完, <한국에서의 프랑스 선교사들의 출판 . 언론 활동>, 《교회사연구》 5집, 1987/ 車基眞, <가톨릭청년과 교회 언론>, 《교 회와 역사》 161호(1988. 10)/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 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5/ 차기진, <일제의 종교 정 책>, <한국사> 51, 국사편찬위원회, 2000/ 李裕林, <한국 천 주교회의 출판 활동>,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2000/ 하성 래, <한국 천주교회의 한글 번역 활동>,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2000/ 李鎔結, <한국 천주교회의 성서 운동>,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2000. 〔車基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