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톨릭 학생 운동 韓國 - 學生運動

글자 크기
12
▲ 마닐라에서 개최된 팍스 로마나 세계 대회에 참가한 나상조 신부와 대표들(왼쪽, 1950. 12)과 대회 모습.
1 / 5

▲ 마닐라에서 개최된 팍스 로마나 세계 대회에 참가한 나상조 신부와 대표들(왼쪽, 1950. 12)과 대회 모습.


가톨릭 신자인 학생들이 학교를 비롯한 자신들의 주변 환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전개하 는 모든 활동. 가톨릭 학생 운동은 평신도 사도직의 다양한 분야 중 하나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의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Apostolicam Actuositatem)은 대부분 학생들인 청소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청소년들의 사회적 · 정치적 중요성은 날로 증대되어 가지만, 새로운 임무를 제대로 짊어질 준 비는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에서 이처럼 커지 는 청소년들의 비중이 거기에 비례하는 능동적인 사도직 활동을 요구하며, 그들의 타고난 품성 또한 그러한 사도 직 활동에 적합하다. 자기 인격에 대한 의식이 성숙함에 따라 삶에 대한 열정과 넘치는 활력으로 고유한 책임을 맡아 사회 문화 생활에서 자기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이 열정이 그리스도 정신으로 충만하고 교회의 목자들에 대 한 순종과 사랑을 갖춘다면, 참으로 풍요로운 결실을 기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들이야말로 청소년을 직접 만나는 첫 번째 사도가 되어야 하며,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 환경을 고려하여 자기 자신들 가운데에서 자기 자신 들을 통하여 사도직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청소년들 은 어른들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심을 길러야 하며, 비록 새로운 것에 이끌린다 하더라도 귀중한 전통은 마땅히 존 중되어야 한다. 어린이들에게도 어린이다운 사도직 활동 이 있다. 친구들 가운데에서 그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살 아 있는 참 증인이 되는 것이다"(12항). 그렇기에 가톨릭 학생 운동은 학생들을 직접 만나는 첫 번째 사도로써, 자 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 환경을 고려하여 자신들 가운데에 서 자신들을 통하여 사도직을 수행하는 활동이다. [기원 및 초기 활동] 한국 천주교회에서 전개된 가톨 릭 학생 운동은 1920년대에 청년 신자들이 야학 등의 교육 사업을 비롯하여 강연회와 <별> · <천주교회보> 등 을 발간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 인 활동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이 생기면서 시 작되었다. 1930년대에 같은 학교의 천주교 신자 학생들 로만 구성된 '경성제대 가톨릭 연구회' 가 조직되었다. 또한 1932년에는 서울의 종현(현 명동) 성당 구내에 있 던 가톨릭 기숙사 학생 50여 명이 신자인 기숙사 밖의 학생 10여 명과 함께 학생회를 조직하였으며, 여자 기숙 사 역시 학생회를 조직하여 피정 등을 하였다. 그리고 1937년에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학생들이 모여 '재동경 조선 가톨릭 학생회' 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의 학생회는 친목을 다지기 위한 성격이 강하였다. 가톨릭 학생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8 · 15 해방 이후인 1945년 11월 '서울 가톨릭 학생회' 가 설립 되면서부터였다. 이 단체는 가톨릭 대학생들만의 모임으 로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교 또는 전문대학에 재학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이들은 1945년 예수 성탄 대축일에 <순교자의 피>라는 연극을 명동 성 당 문화관에서 공연하였으며, 이후 성체 거동 · 성모의 밤 · 체육 대회 등을 개최하였다. 이 무렵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으나, 서울 시내의 대학교 또는 전문대학에 재학 중인 여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서울 여자 가톨릭 학 생회' 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1946년 7월부터 3개월 동 안 정규만(丁奎萬, 마르코, 1915~1981) 신부, 이계선(李 啓先, 레오, 1918~1979) 신부 등을 초청하여 '유물론' , '영혼의 존재' , '구라파 학계 동향' 등의 주제로 강연회 를 개최하는 등, 당시 여성들로서는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47년 6월 '서울대학교 가톨릭 연구 회' 가 조직되었다. 이 연구회는 서울대학교 재학생을 중 심으로 활동하였으나,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1902~ 1984) 주교와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1903~1979) 신부 및 장면(張勉, 요한, 1899~1966) 등 당시 교회 내 중견 인사들이 명예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었다. 또 서울 시내 각 학교의 가톨릭 학생회가 이 연구회의 산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대학생 연합회와 유 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가톨릭 교리 연구와 토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는데, '가톨릭 인간의 신 앙' , '가톨릭 세계관의 특이성' 등을 주제로 회원들의 발 표회와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학술 잡지인 《가톨릭 문화》 를 3호까지 발간하였다. 한편 당시 학생회들은 서울 시내의 제한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회원 중복 가입과 회원 경쟁이 라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49년 10월 '서울 가톨릭 학생회' 와 '서울대학교 가톨릭 연구회' , 그리고 '서울 여자 가톨릭 학생회' 는 '서울 가톨릭 학생회' 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학생 들은 흩어졌고, 학생회의 활동 역시 침체되었다. 그러던 중 부산으로 피난간 학생 신자들과 그곳의 학생 신자들 이 학생회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을 시작하였고, 그 결 실로 1953년 2월 '대한 가톨릭 학생회' 가 설립되었다. 이 학생회는 전쟁 중에 결성되었기 때문에 많은 회원을 확보하지는 못하였지만, 전국의 학생 신자들에게 가톨릭 학생회의 존재 자체를 알렸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가톨릭 대학생 활동] 재설립과 활동 : 1953년 7월 한 국 전쟁이 끝나자 '대한 가톨릭 학생회' 의 회원 대다수 를 차지하던 서울 학생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그해 10월 '대한 가톨릭 학생회 서울교구 연합회' 를 조직하 였다. 그리고 주교단으로부터 전국 기구가 설립될 때까 지 한국 가톨릭 학생 운동을 대표한다는 인준을 받았다. 이어 1954년 3월에는 노기남 주교의 재가를 얻어 국제 가톨릭 학생 운동 기구인 '팍스 로마나 (Pax Romana)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또 같은 해 10월에 '대한 가톨릭 학생 총연합회' (이하 총연)의 설립 총회 겸 제1차 전국 대회를 거행하고(6~8일), 총재에 노기남 주교, 지 도 신부에는 조인원(趙仁元, 빈천시오, 1907~1978) 신부 가 추대되었다. 이어 노기남 주교를 대리해 최덕홍(崔德 弘, 요한, 1902~1954) 주교가 총연의 설립을 선포하였다 (9일). 12월에는 광주교구에 연합회가 설립되었고, 이듬 해 7 · 8 · 9월에는 대구 · 전주 · 대전교구에, 1956년 1 월에는 춘천교구에 연합회가 설립됨으로써, 총연은 전국 적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1953년 4월과 12월에는 고려 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문리과에 학생회가 설립되었으며, 1955년부터 각 대학별 가톨릭 학생회도 본격적으로 설 립되기 시작하였다. 총연은 1954년 이후 매년 1회씩 각 지방을 순회하며 전국 대회를 개최하였고, 1956년 12월 에는 비정기적으로 <학생시보>를 창간하여 약 2년간 발행하였다. 그러나 1957년 후반기부터 이듬해 전반기까 지 총연 임원진의 사퇴가 빈번해지면서, 가톨릭 학생 운 동은 약 1년간 정체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1958년에 서울교구 연합회 회장이 사임하면서 서울교구 연합회가 붕괴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한 사람이 1958년 7월 지도 신부로 부임한 나상조(羅相朝, 아우구스티노) 신부 였다. 그는 그해 9월부터 매년 새남터에서 순교 복자 행 사를 거행하는 동시에 피정과 교리 경시 대회를 지속적 으로 거행해 총연의 신심 활동을 강화하였다. 또한 1959년 5월에는 서울교구 연합회를 재설립하였고, 전국 대회를 하나의 대규모 행사로 발전시키는 등 총연에 활 기를 불어넣었다. 그렇지만 이 무렵의 학생회는 신심을 위한 행사를 주된 활동으로 하는 교회 내 보조 협의체로 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발전과 침체 : 가톨릭 학생 운동의 성격이 사회 참여적 으로 변한 것은 1960년 4 · 19 혁명을 통해서였다. 4 · 19 혁명이 일어나자 총연 소속 학생들과 지도 신부는 혁명 다음날에 위문 활동을, 그리고 5월에는 4 · 19 혁명 사상자에게 구호금을 전달하였다. 이를 계기로 학생들의 관심은 본당에서 학교로 자연스럽게 옮겨졌고, 조직 활 동 역시 소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방식으로 변하였다. 한 편 경제가 점차 안정되기 시작하던 1960년대에 들어서 서 대학과 중고등학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아울 러 국제 가톨릭 학생 운동의 흐름도 청년과 청소년을 분 리 · 활동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에 한국에서도 대학생 과 중고등학생 활동을 분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961년 5월 서울교구 중고등학생 연합회가 총연 대학부 에서 분리 · 설립되었다. 같은 해 7월에는 중고등학생 제 1차 전국 대회가 총연 전국 대회와 함께 광주에서 개최 되었다. 이때 '대한 가톨릭 의학회' 와 '대한 가톨릭 약학 회' 가 조직되어, 이후 공동 의료 봉사 활동을 펼쳤다. 이 무렵 총연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논의되 고 있던 교회 일치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래 서 1964년에 그리스도교의 재일치' (에큐메니칼 운동)를 전국 대회 주제로 선정하였고, 1965년 4월에는 대구대 교구 연합회에서 프로테스탄트와 합동으로 에큐메니칼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해 11월 총연에서 는 월간 를 창간하여 약 1년간 발간하였다. 한편 1966년도 한국 주교 회의에서는 1967년도부터 총연의 재정을 보조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1967년 9 월에는 명륜동의 가톨릭 학생 회관으로 총연 사무실을 이전시켰으며, 1968년 3월에는 가톨릭 학생 운동을 지 원하고 이끌기 위해 월간지인 《팍스》(Pax)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해 가던 총연은, 1969년 4월 학생회의 재정 문제로 나상조 신부와 마찰 을 빚다가 총연과 서울대교구 연합회 회장단이 일제히 사표를 제출하고, 지도 신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맥노튼(W. McNaughton, 羅吉模) 총재 주교가 총연과 연합회 회장단의 사표를 수리하고 나상조 신부의 사표를 반려함으로써 해결되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학생회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크게 손상되었다. 그런 가운데 1969년 7월에 개최된 전국 대회에서는 회 칙을 개정하여 총연 임원단을 폐지하고, 그 기능을 유급 의 사무 직원이 상주하는 사무처가 담당토록 하였다. 이 에 따라 총연 회장단은 전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역할 만 하게 되었고, 총연의 실제 업무는 사무처 직원과 지도 신부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처럼 내부 문제가 수습될 즈음, 1969년 10월 《곽 스》에 삼선 개헌의 부당성에 대한 논문과 기사가 게재됨 으로써 정부 당국의 내사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은 김수 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의 중재로 무사히 해결되었 으나, 이후 정부에 대한 성토가 이어져 이듬해 4월에는 프로테스탄트 교직자 및 학생들과 함께 '부활과 4월 혁 명' 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하고 삼선 개헌 반대 가 두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1970년 11월에는 분신한 노 동자 전태일(全泰壹, 1948~1970)의 추도식을 거행하면 서 노동 3권의 확립을 주장하였다. 이어 1971년 9월에 는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J.O.C)와 함께 '크리스찬 사회 행동 협의체' 를 결성하여 사회 정의 구현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프로테스탄트 학생회와 합동으로 청계천에 살고 있던 100여 가구의 철거민을 경기도 고양군 원당 면으로 이주시키는 사회 활동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72년 초 사무국에서 학생 측의 동의 없이 '크리스찬 문화 운동' 을 후원한 문제로 지도 신부단과 학생회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정진석(鄭鎭 奭 니콜라오) 총재 주교는 8월에 기존의 총연을 해체하 였다. 그리고 교구 연합회 회장들로 총연을 구성하여 이 들이 교대로 총연 회장직을 맡는 '회장단 제도 를 채택 하였다. 그러나 이 '회장단 제도 는 과거 총연 회장단과 성격이 전혀 다르고 상설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 총연의 해체를 의미하였다. 이후 '회장단 제도' 는 그다지 활발 한 활동을 하지 못한 채 유명무실한 제도로 남게 되었다. 총연의 해체를 전후하여 원주 교구의 부정부패 추방 운동(1971. 10), 박정희의 유신 체제 등장(1972. 10), 지 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 납치(1974. 7) 등 일련의 사 건들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톨릭 학생들 은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조직이 있 어야 한다는 판단하에, 1975년 2월 과천 성모 영보 수 녀원에서 3년 만에 전국 대회를 개최하며 총연의 부활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지도 신부단이 2년 만에 모임을 갖고 주교 회의에서 반대하는 연합회 체제가 아 닌 협의제 체제로 학생회를 구성할 것과 '대한 가톨릭 학생 전국 협의회' 라는 이름을 권고하였다. 이에 학생들 은 자율권이 최대한 보장된다는 조건하에 이 권고를 받 아들였는데, 실제로는 학생들의 독자적인 결정권 없이 지도 신부단과 총재 주교의 결정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 다는 점에서 교회와 학생들 간의 마찰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대한 가톨릭 학생 전국 협의회' 는 출범 첫 활동 으로 1975년 '전국 성지 순례' 를 실시하여 전국 13개 교구 연합회를 신앙 안에서 일체화시켰다. 또한 1978년 의 성지 순례부터는 1박 2일간 연합 심포지엄을 개최하 면서 사회 참여를 위한 이념을 형성시켰다.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일반 학생 운동 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사회적 · 정치적인 문제에 더욱 빈 번히 참여하였고, 이로 인해 교회와의 마찰도 더욱 커졌 다. 결국 1984년 '대한 가톨릭 학생 전국 협의회' 는 해 체되고, 그 대안으로 '대한 가톨릭 학생 총연맹' 이 결성 되었다. 하지만 이 단체도 얼마 뒤 활동을 중단하면서 전 국 단위의 가톨릭 학생 운동은 침체기에 빠졌다. 새로운 발전의 모색 : 1987년 11월 '전국 가톨릭대 학생 협의회 준비위원회' 가 결성되었다. 이는 6월 항쟁 을 경험하면서 가톨릭 학생 운동 역시 정체성을 확립하 는 동시에 대중화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고해지면서 가 능해졌다. 그러나 '전국 가톨릭 대학생 협의회' (이하 전 가대협)는 계속되는 교회와의 마찰로 인해 한국 주교 회 의의 인준을 받을 수 없었고, 결국 1992년 10월에야 발 족하였다. 그러나 학생 운동의 침체로 전가대협은 각 지 방 연합회와의 연계가 어려워졌고, 총회와 여름 · 겨울 대회, 범민족 대회 등과 같은 행사를 개최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1999년부터는 집행부조차 결성 하지 못한 채, 임시 체제인 대표자 협의회(중앙 상임위원 회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가대협은 2000년 6월 한국 프로테 스탄트 학생회 총연맹, 한국 대학생 불교 연합회, 원불교 전국 대학생 협의회 등과 함께 '한국 종교 대학생 연합회' 를 발족하였다. 하지만 집행부가 결성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전가대협의 활동은 부진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 라 지방 대학생 연합회는 각 단위별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 중고등학생 활동] 8· 15 해방 이후 가톨릭 학생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에는 학생수가 많지 않았던 탓에 대학부와 중고등부가 활동하였다. 그러나 한국 전쟁에 의한 피해가 복구됨에 따라 경제 또한 안정 되었고, 중고등부 학생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59년 12월 서석곤을 비롯한 총연 학생 3명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팍스 로마나 세계 대회에 참석하였는 데, 이들은 이 대회에서 대학생과 중고등부 활동 분리라 는 세계적인 흐름을 알게 되었다. 이에 1960년 7월에 개최된 전국 대의원 대회에서 중고등부 대표들은 자신들 만의 독자적인 연합회 결성을 주장하였고, 총연에서는 중고등부 분리를 계획하였다. 학생수가 가장 많은 서울 교구에서 중고등부를 대학부 연합회에서 분리하기로 결 정하였고, 1961년 5월 나상조 신부를 초대 신부로 하는 서울교구 중고등학생 연합회가 설립되었다. 한편 각 교구별로 중고등부를 빠른 시일 내에 분리하기 위해서는, 중고등학생 전국 대의원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1961년 7월에 개최된 총연 제7 차 전국 대회 기간 동안 중고등부 대표자들도 참석하여 제1차 중고등부 대의원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는 중고등학생 운동의 독자성을 주제로, 아직 조직을 갖 추지 못한 지역에 조직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방안에 관 해 집중적으로 토론이 이루어졌고, 총연과 같은 전국적인 조직 결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대한 가톨릭 중고등학생 전국 연합회' 를 조직하여 다른 지역의 중고등 학생 연합회 결성을 후원하였으며, 곧 대구를 시작으로 각 지역별로 연합회가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대한 가톨릭 중고등학생 전국 연합회는 각 연합 회별로 체육 대회와 프로테스탄트 학생회와의 좌담회 , 웅변 대회 및 교리 경시 대회 등의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중고등학생 연합회를 지도하던 총연 대학부가 해 체되면서 대한 가톨릭 중고등학생 전국 연합회는 점차 본당 주일학교와 학교로 흡수되어, 1970년대 중반 이후 부터는 자체적인 활동보다는 본당 주일학교와 학교 단위 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58년 2월 이경재(李庚宰, 알렉산데르) 신부에 의해 설립된 학교 연합회 레지오 마리애는 학생 운동 차 원에서 교구의 예산 지원과 지도를 받으면서 더욱 활성 화되었다. 그리하여 중 · 고등학교 단위로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고, 1983년 3월 학교 레지오 마리애는 '파티마 의 성모 꼬미시움' 으로 승격되었다. 대한 가톨릭 중고등 학생 연합회는 1978년 "국제 가톨릭 학생 연합회"(nternational Young Catholic Students)에 정식 가입하였고, 1984년 1월에는 연합회 활동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협 조자회가 발족되었다. 1998년 2월에 학생 연합회와 학교 레지오마리애 등이 대한 가톨릭 중 · 고등학교 연합회로 통합 운영되기 시작 하였다. 이어 1999년 3월 학생들의 복음화 독려와 가톨 릭 문화를 통한 복음의 진리 교육을 목적으로 청소년 문 화 연구회(C.A)를 설립하였다. 이는 제7차 교육 과정에 서 중시되고 있는 학교 C.A 활동 가운데 가톨릭반을 구 성 · 운영함으로써, 학교 및 학생들의 복음화를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전 망] 현재 한국 사회에서 학생 운동은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상황이다. 사회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였 던 가톨릭 대학생들 역시 미래를 향한 발전 방향을 분명 하게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동안 사회적인 문제 에만 관심을 가지고 신앙인으로서의 성숙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주의 와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있으며, 심각한 청년 실업으로 인해 가톨릭 대학생 운동을 전개하기에 현실적인 어려움 이 있다. 중고등학생 역시 대학 진학이라는 입시 경쟁에 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은 가톨릭 학생 운동의 전망을 밝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가톨릭 대학생들은 자신들만의 전국적인 단위의 단체 결성에만 고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각 교 구 역시 그들이 교회의 미래이며, 사목의 협조자이고, 동 시에 선교의 제일선에 서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 다. 이를 그들에게 인식시키고 행동으로 드러나도록 하 기 위해서는, 교회가 그들이 그리스도 정신으로 충만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중고등학생들을 위해서는 학교 인근의 지역 본당과 연대하여, 학생들을 위한 신앙 교육 방법이나 자료를 지속적으로 개발 · 보급 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하여 학생들이 교회를 외면하지 않고 신앙과 사회 참여를 조화시키도록 도와야 할 것이 다. (V 가톨릭 학생 운동 ; →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 가톨릭 중고등학생 연합회) ※ 참고문헌  김영근, <현대 한국천주교회와 가톨릭 학생운동>, (한국교회사논문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한국 가톨릭 노동 청년회 25년사》, 분도출판사, 1986/ 신 의식, <서울대교구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교회와 역사》 208호 (1992. 9), 한국교회사연구소/ 나상조 외, <한국 가톨릭 학생 운동 사》, 가톨릭 학생 운동사 편찬위원회, 1995/ 문규현,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 천주교회사》 Ⅱ, 빛두레, 1994 . [金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