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 운동 韓國獨立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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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 보상 운동을 촉구하는 신문 기사와 국채 보상 운동을 발의했던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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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 보상 운동을 촉구하는 신문 기사와 국채 보상 운동을 발의했던 서상돈 아우구스티노.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본격화되면서 국권 회복과 자주 독립을 위해 전개된 무장 항쟁과 애국 계몽 운동을 비롯한 모든 저항 운동. 한국의 '민족 해방 운동' (民族解放運動, national liberation movement)이라고 도 할 수 있다. 〔한말 천주교의 민족 운동] 1900년대 들어서서 일제 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조선에서는 국권 회복을 위한 의 병 항쟁과 애국 계몽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러나 당시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대부분이던 한국 천주교 회는 일제가 요구한 정교 분리 요구에 순응하면서 정치 불간섭주의를 내세워, 폭력을 수반한 무장 투쟁을 원칙 적으로 반대하였다. 따라서 한말 천주교의 민족 운동은 교육 · 언론에 주된 관심을 두는 비폭력 애국 계몽 운동 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공식적인 지 침에도 불구하고 신자들 가운데 개인의 양심적 차원에서 일제에 대한 무장 투쟁 운동에 참여한 사례들도 적지 않 았다. 개항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교육 · 언론을 통한 근 대화 운동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이후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1882년 서울에 인현 서당(仁峴書堂), 1885년 원주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 를 세운 천주교회에서는 1893년 36개교, 1904년 75개 교, 1910년 124개교 등 꾸준히 학교를 설립하였다. 대 개는 초등학교였지만 여학교, 실업학교, 야학 등이 포함 되었고, 중등학교와 사범학교 설립도 준비 중이었다. 이 중에는 '보국 애인' (輔國愛人), , '국태 민안' (國泰民安) 처럼 민족주의 경향이 두드러진 교육 이념을 내세우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1908년 일제가 사립학교령을 공포 하여 민족 교육 운동을 탄압하자 천주교계 학교는 반 이 상이 폐쇄되었다. 물론 천주교회의 교육 운동이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프로테스탄트 에서 설립한 학교는 1909년 당시 800개를 상회하였고, 중등학교의 수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테스 탄트에서는 교육과 의료 사업을 병행하여 천주교회의 교 육 운동에 비하여 양적 · 질적인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도 1910년 실업학교로 승공학교(崇 工學校)를, 1911년 사범학교로 승신학교(崇信學校)를 설립하는 등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천주교의 교육 운동은 근대화와 국권 수호를 위한 애국 계몽 운동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1900년대 중반에 천주교회는 당시 사회에서 활발하 게 전개되던 언론 구국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06년 10월 창간된 주간지 <경향신문>은 교회가 "참된 개화(開化)와 거짓 개화를 분별시키고 올바른 개화의 방 향을 제시해 주기 위해" 창간한 것이었다. <경향신문>은 단순하게 신자들만을 독자층으로 하지 않고, 국민을 대 상으로 여론을 수렴하고 계몽적인 논조를 견지하였다. 특히 법률 계몽에 관심을 가져, 새로 제정된 법령들을 소 개하고 법을 통해 권익을 지켜 나가도록 선도하였다. 1907년에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신 자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대구의 신자 서상돈(徐 相燉, 아우구스티노, 1850~1913)은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은 차관을 상환하여 일제의 침략을 막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뜻을 갖고 국채 보상 운동을 발의하였다. 이 운동은 교회와 <경향신문>을 비롯한 언론의 지지를 받으 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200만 원이 넘는 금액이 모 금되었다. 이와 같은 교육 · 언론 운동과 국채 보상 운동을 교회 지도층에서는 근대화 운동의 일환이자 온건한 민족 운동 으로 이해하였고, 신자들 또한 이를 통하여 민족 의식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애국 계몽 운동을 탄 압하여,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들의 상당수가 폐쇄되고 <경향신문>도 1910년에 폐간되었다. 교육 · 언론 운동과는 달리, 의병 항쟁을 비롯한 무장 투쟁에 대해서 천주교회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신자들 가운데에는 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무장 독립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인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1879~1910)은 1897년 1 월 황해도 신천(信川) 청계동(淸溪洞)에서 빌렘(N.J.M. Wilhelm, 洪錫九, 1860~1938)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후 그를 도와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쳤다. 1906년 초 에는 진남포로 이사하여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 교(敦義學校)에 관여하며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할 인재 를 기르는 데 힘썼으나, 1907년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교육만으로는 기울어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고 인식하여 해외 무장 독립 투쟁에 투신하였다. 1908년 러시아령 연해주(沿海州) 지방의 블라디보스토크 (Vladivostok)에서 이범윤(李範允, 1856~1940)의 의병 부 대에서 참모증장(參謀中將)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7월 에는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경 흥(慶興) · 회령(會寧)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1909년 2월에는 동의단지회(同 議斷指會)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1909년 10월 26일, 한 국 침략의 원흉으로 지목되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하얼빈(ㅁ1爾濱)에서 사살하여 전세계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렸다. 안중근은 신앙과 조국애를 조화시켜 사상과 행동을 일치시켰다. 그의 열심한 신앙 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동료 들에게 회개를 권유하여 대세(代洗)를 베푼 일이나, 가 족들에게 장남을 신부로 키우고 천주교를 믿으라는 유언 을 남겼던 점에서 확인된다. 기도와 신앙 생활이 생활화 되어 있던 그는 열렬한 신앙인이면서 동시에 민족주의자 였다. [3 · 1 운동 전후의 독립 운동] '한일 합병' 이후 일제 는 무단 정치를 실시하면서 천주교와 프로테스탄트를 적 성국의 종교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주도하던 천주교회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아들였으며, 특히 안중근 의거를 경험한 교회 지도층은 신자들의 독 립 운동을 감시하고 제재하였다. 하지만 3 · 1 운동이 거 국적으로 전개되던 1919년 이전에도 천주교 신자들의 항일 독립 운동은 계속되었다. 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安明根, 야고보, 1879~1928)은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 하여 황해도 안악(安岳) · 신천(信川) 등지에서 군자금 을 모금하였다. 1911년 1월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빌렘 신부의 서신을 받은 뒤텔(G.C.C1M. Mutel, 閔德孝) 주교 가 총독부에 이를 고발하였고, 안명근은 체포되어 7월에 '강도 및 강도 미수죄' 로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종신 징 역형을 선고받았다. 그와 모의하였던 천주교 신자 한순 직(韓淳稷)과 원행섭(元行燮)도 징역 15년을 구형받았 다. 이 사건은 일제에 의하여 '105인 사건' 으로 날조· 확대되어, 이에 연루된 천주교 신자인 이기당(李基唐, 안토니오)은 혹독한 고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다가 1913년 석방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무장 투쟁을 준비 하였다. 그가 설립한 병학학교(兵學學校)는 생도수가 500명이 넘었다. 이에 일제가 체포령을 내리자, 그 소식 을 접한 의주 본당의 서병익(徐丙翼, , 바오로, 1881~ 1948) 신부는 1916년 10월 5일자로 그를 파문하고 이 사실을 일본 경찰과 위텔 주교에게 보고하였다. 이처럼 당시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일제에 대한 무장 투쟁이 교 회의 존립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하여 독립 운동에 참여한 신자들을 고발하거나 파문하였다. 1919년 3월 3일 고종(高宗, 1863~1907)의 국장을 맞 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미국 윌슨(T.W. Wilson, 1913~1921)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주창 등에 영향을 받은 비폭력 독립 운동인 3 · 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 났다. 위텔 주교와 대구 대목구의 드망즈(F. Demange, 安 世華, 1875~1938) 주교는 일본 식민지 정부에 충성하고 있는 신자들이 이 움직임에 참여하지 않으리라 확신하였 다. 그러나 신학생들이 3 · 1 운동에 참여하자 교회 지도 층의 기대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3월 5일 저녁 대구 대목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 학생 60명은 만세 운동의 소식을 듣고 운동장에 모여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독 립가' 를 불렀다. 이후 3월 8일 대구 시내의 군중 시위를 대비하여 <독립 선언문>을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학교 당국은 <독립 선언문> 등을 압수하였고, 3 월 9일에는 드망즈 주교가 신학교를 방문하여 신학생 전 원에게 무조건 순명을 요구하면서 만세 운동에 가담하는 자가 있으면 당사자를 퇴학시키고 신학교도 폐쇄할 것이 라고 위협하였다. 하지만 신학생들은 수업에 불참하고 4 월 3일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 였다. 결국 드망즈 주교는 신학교 교장의 조기 방학 건의 에 따라 5월 1일 방학 조치를 내렸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신학생들도 3월 23일 만세 시위 에 참여하였다. 이에 위텔 주교는 다음날 신학생들에게 질서를 지키라고 훈시하였고, 조국을 외면할 수 없다는 신학생들의 호소에 '하느님의 이름' 으로 만세 운동 참여 를 금지하고, 그렇지 않으면 학교를 떠나라고 하였다. 이 어진 징계 처분으로 그해 거행될 예정이었던 서품식은 무기한 연기되었고, 시위를 주도한 신학생들은 퇴학당하 였다. 만세 운동을 하기 위한 신학생들의 움직임은 4월 중순까지도 계속되었으나, 제대로 시작도 못한 상태에서 끝나고 말았다. 프랑스인 주교들은 퇴학과 신학교 폐쇄 로 위협하였으며, 이에 신학생들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서 만세 운동을 포기해야만 하였다. 소수만이 학교를 떠 났을 뿐 신학생들 대부분은 주교의 명령에 순명하였다. 일반 신자들도 각지에서 만세 시위에 가담하거나 시위 를 주도하였다. 3월 10일 해주(海州)에서는 천도교와 프로테스탄트, 불교 등과 협력하여 시위에 참가하였고, 이 시위로 해주 감옥에 수감된 자들 가운데 4명이 천주 교 신자였다. 같은 해 3월 18일 강화(江華) 장날 시위에 는 1만여 명의 군중들이 모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용순(金龍順)과 조기신(趙基信)을 비롯하여 함께 참 가한 신태윤(申泰允) 등이 천주교 신자였다. 그리고 3월 27일 고양(高陽)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고양군의 모든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독립 운동에 참가하라는 협박장을 보냈다. 또한 경기도 광주(廣州) 구산(龜山)에서는 5~6 명의 천주교 청년들이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1명은 서울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3월 27일에는 광주(廣州) 동부면(東部面) 망월리(望月里)의 천주교 신자인 구장(區長) 김교영(金敎永)이 군중을 모 아 면사무소에서 만세를 불렀다. 4월 3일에는 수원 장안 면과 우정면 시위에서 선두에 섰던 천주교 신자 이순모 (李淳模)가 체포되어 이듬해 소요 · 살인 · 방화 · 보안법 위반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또 이날 만세 운동과 관련해서 장안면에 사는 김선문(金善文) 회장 등 5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주재소에 불을 질렀으며 경찰을 살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방 면되었다. 안성(安城)에서는 김중묵이라는 천주교 신자 가 만세 운동을 지휘하여 횃불 시위를 벌였으며, 안성 본 당의 공베르(A. Gombert, 孔安國, 1875~1950) 신부는 일 본인에게 쫓기는 주민들을 성당 내에 보호하였다. 황해 도 신천에서는 4월 7일 천주교 신자인 김경두(金慶斗) 가 시위를 주도하여 체포되었는데, 법정에서 그는 나라 를 보존하는 것이 국민으로서의 의무임을 밝히며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당연한 의무이므로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였다. 은율(殷栗)에서는 보통학 교 학생들이 4월 15일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다가 주 동자들이 체포되었는데, 그 가운데 12세의 홍석종(洪錫 宗)이 천주교 신자였다. 교회에서 운영하던 인천 박문학 교(博文學校)와 대구 해성학교(海星學校) 학생들도 시 위를 벌이다 체포되었다. 지금까지 천주교 신자들이 참가한 만세 운동으로 알려 진 곳은 경북 대구(3. 5, 3. 8), 황해도 해주(3. 10) · 신천 (4. 7), 서울(3. 23), 경기도 강화(3. 18) · 광주(3. 27) ·용 인(3. 27) · 수원(4. 3) · 안성 · 인천 등지이다. 5월 말까 지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체포된 천주교 신자는 원산, 신 의주, 평양, 해주, 공주, 대구 등 7개 도시에서 모두 53 명이었으나, 3 · 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투옥된 전체 수 감자 9,000여 명 중 고작 0.59%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천주교 신자들의 3 · 1 운동 참여가 저조하였던 것 은 위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구조적인 제도와, 교회 가 현실 문제에 참여하는 것은 영성 생활을 저해한다고 이해한 이원론적인 신앙 구조가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인 주교들은 신자들이 만세 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다행스럽고 자랑스럽게 여길 정도였다. 이는 그들 이 한국의 독립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여 일본의 식 민 지배를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는 당시 인천(현 답동) 본당의 주임이었던 드뇌(E. Deneux, 全學俊, 1873~1947) 신부가 3 · 1 운동 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을 기록한 보고서에서 잘 나타난 다. 신자들은 크게 독립을 위해서 당장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적극파로 그 수와 영향력이 적은 자들, 무관심하 거나 아예 체념한 사람들 그리고 교회와 본당의 명예를 위해 최소한 몇 명이라도 시위에 참가해야 한다는 부류 로 대부분의 신자들 등 세 부류로 나뉘었다. 본당 차원의 보고일 뿐이지만, 당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 는 증언이다.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 중,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일어난 3 · 13 만세 운동은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정오에 울린 성당의 종소리를 신 호로 1만 명 이상의 군중들이 용정 시내에 모여서 '독립 축하회' 라는 이름의 독립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천주교 회 회장인 김영학(金永學)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자, 군중들은 '대한 독립 만세' 를 외쳤다. 축하회가 끝나자 군중은 대한 독립을 외치며 시가 행진을 시작하였으며 중국 경찰의 발포로 17명이 사망하였다. 교우촌인 대교 동(大敎洞)의 교향학교(敎鄉學校) 학생들도 만세 운동 에 참여하였으며, 3월 16일에는 장백현(長白縣)의 천주 교 신자 30여 명이 압록강 대안에 있는 혜산의 일본 경 찰서를 습격하였다. (1920년대 간도에서의 무장 투쟁] 국내외에서 천주 교 신자들의 독립 운동은 극히 저조하였다. 엄격한 교계 제도를 유지하며 천주교회를 주도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 사들이 독립 운동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상황에서, 신자 들의 독립 운동 참여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총장 명의로 1919년 10월 15일에 통 유 (通諭) 제1호 <천주교 동포여>가 발표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전 한족이 다 일어나 피를 흘리고 자유 를 부르짖을 때에 어찌하여 삼십만 명 천주교 동포의 소 리가 없나뇨. ··천주교의 동포가 언제까지든지 가만히 있다 하면 이천만 대한 민족은 여러분을 일인보다 더 가 증한 적으로 알 것이다"라고 하며 임시 정부에서는 천주 교인의 반일 궐기와 저항을 촉구하였다. 간도 지역에서는 천주교인의 독립 운동이 보다 적극적 으로 이루어졌다.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천주교회도 활발한 교육 활동을 전개하였을 뿐 아니라, 무장 투쟁 단 체들이 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 · 1 운 동 이후 간도 지역의 무장 투쟁 단체 소속 인원의 3분의 2가 종교인들이었다. 따라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천주교 신자들 역시 무장 투쟁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널리 알려진 것이 '대한의민단' (大韓義民團)이었다. 방 우룡(方雨龍)이 대표이고 '의민회' 라고도 불린 이 단체 는 일제의 보고에 따르면 1920년 3월 23일 연길현 다조 구(茶條溝)에서 창설되었다. 방우룡은 1914년 연길에서 천주교 학교를 운영하였 고, 1919년 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하는 조직으 로 구춘선(具春先, 1857~1944)이 회장인 '재간도대한민 회' (在間島大韓民會)의 의사원(議事員)으로 활동하였 다. 이 단체는 1919년 8월 간도의 연길(延吉) · 화룡(和 龍) · 왕정(汪淸) 등 3개 현의 한국인들을 포괄하고 있었 으므로, 방우룡을 지도자로 한 간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 들은 3 · 1 운동 이후 '재간도대한민회' 산하에서 독립 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의민단은 바로 이러한 교민 사회의 분위기에 힘입어 1920년대 전반기 에 천주교 신자 중심의 독립 무장 단체로 조직되었으며, 단체의 재정은 헌금으로 충당되었다. 조직은 단장 · 부단 장 · 외교부장 · 선전부장 · 통신부장 · 재정부장 · 경위부 장 · 교육부(서부지부장 겸) 등이었고, 방우룡 · 김연군(金 演君) · 허영진(許英振) · 정임현(鄭任賢) · 한일준(韓一 俊) · 석해일(石海-) · 차일선(車-善) · 현철(玄哲) 등 이 직책을 맡았다. 의민단에 참여한 군인수는 최대 200 명에 달하였다. 의민단은 1920년 7월 북간도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 여 동도독군부(東道督軍府)를 창설할 때 대한독립군과 함께 제2 대대(대대장 방우룡)로 편성되어 연길현 숭례향 (崇禮鄉) 명월구(明月溝)에 주둔하였고, 소명월구에 있 던 방우룡의 집과 천주교회의 건물을 군사령부로 사용하 였다. 또한 같은 시기에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고자 대한 국민회, 대한독립군과 연합하여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였 으나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국 기병 100여 명의 공격을 받아 폐교되었다(1920. 9) . 1920년 9월 의민단은 대한신민단 · 대한광복단 · 대한 국민회 등과 더불어 '북로사령부' (北路司令部)를 구성 하여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부대 산하에는 홍범 도(洪範圖, 1868~1943),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최 진동(崔振東, ?~1945) 등이 연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로 미루어 보아 북로사령부에 소속된 천주교 신자 무장 독립군들은 1920년 10월 홍범도, 김좌진 등이 이끈 청 산리 전투(青山里戰鬪)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또한 청산 리 전투 중에 북로사령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감독 을 받는 민정 기관으로 총판부(總辦府)를 설치하였는데, 의민단 지도부도 연길, 화룡, 돈화(敦化), 액목(額穆)을 관장하는 '간북남부총판부' (墾北南部總辦府)에 관여하 였다. 다만 의민단 병력은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의 추격 으로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과 행동을 같이하 다가 1921년 6월에 발생한 '자유시 참변' 을 겪었을 것 으로 짐작된다. 그 후 의민단의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잔여 인원은 대한독립군단이나 '북간도국민 회' (北間島國民會)에 편입된 듯하나, 1923년 국민 대표 회의에 대한의민회 대표 윤지순(尹智淳)이 참여한 것으 로 미루어 명맥은 유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는 1920년 이른바 '경신참변' (庚申慘變)을 일으켜 한국인 무차별 학살을 감행하였다.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 살된 한국인만 해도 3,469명으로, 3~4개월에 걸친 학 살로 희생된 수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천주 교 신자들의 희생도 적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 5일부터 11월 23일 사이에 일본군은 연길의 교우촌인 대교동(大 敎洞)에서 43인을 학살하고 6인을 강간하였으며, 훈춘 (琿春)의 금당촌(金塘村)에서는 10 인이 학살되고 가옥 70채가 소각되 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천주교 신자들의 독립 운동] 1919년 3 · 1 운동 직후 4월 중국 상해(上海)에 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정부에서는 천주교의 국 제성에 주목하고 천주교회와의 연계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래서 파리 위원부가 제작한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읽은 교황 베네 덕도 15세(1914~192)로부터 독립 을 기원하며 "한국 교회의 총애하는 자녀들이 받는 핍박에 대하여 우 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의 생애를 누리기를 천주께 기구"한다는 내용 의 서한을 받았다. 또한 임시 정부 파리 위원부는 빌렘 신부의 도움을 받아 파리 강화 회의 에 '한국 독립 청원서' 를 제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 수립된 이후,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安定根, 치릴로, 1885~ 1949)과 안공근(安恭根, 요한, 1889~?)은 천주교 및 프랑 스 조계와의 연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안정근 은 1920년 5월 임시 정부 특파위원으로 북간도에 파견 되었고, 임시 정부의 외곽 단체인 대한 적십자사 부회장 등을 맡았다. 안공근은 1921년 4월 임시 정부 외무차장 으로 모스크바(Moskva)에 특사로 파견되었으며, 1930 년대 이후 한국 독립당, 한인 애국단, 한국 국민당 등에 서 김구(金九, 1876~1949)를 도와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 다. 그리고 1923년 천주교 대표로 국민 대표 대회에 참 석하였던 곽연성(郭然盛, 요셉)은 한국노병회(韓國勞兵 會)에서 활동하였으며, 1925년 길림(吉林)의 독립 운동 단체의 임원을 맡았다. 천주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만주 독립 운동 단체에 직접 관여하였던 안학만(安學滿, 루 가, 1889~1944) 신부처럼 성직자가 독립 운동에 참여하 는 사례도 있었다. 국내에서 임시 정부와 관련된 독립 운동에 성직자와 신자들이 참여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1886~1969) 신부는 1919년 말 신자의 권유로 임시 정부의 군자금 모집과 관련된 적십자 운동에 관여 하였으나, 위텔 주교의 제재를 받고 그에 순명하여 활동 을 그만두었다. 임시 정부와 연계된 신자 중에는 프랑스 인 주교에게 접근하여 독립 운동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 고자 하던 이들도 있었다. 황해도 장연 본당의 장규섭 (張奎燮) 등은 1920년 7월 임시 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사리원 본당의 한도영(韓道英)이나 안악 본당의 최익형 (崔益馨) 등은 군자금 모집 건으로 체포되었다. 이처럼 임시 정부의 활동에 참여한 한국인 신자들은 정교 분리 원칙을 내세우며 독립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한 교회의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신앙인이 면서 동시에 민족 의식을 지니고, 대죄의 위협을 받으면 서도 독립 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교계 제 도상의 문제나 성속 이원론(聖俗二元論)과 외국인 선교 사들의 의견을 충실히 따르던 신자들의 호응을 불러일으 키지 못하였다. <천주교 동포여>라는 통유문이 발표된 것도 그러한 사정을 보여 주는 일이었다. 이렇게 한국 천 주교회는 독립 운동선상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1930년대 이후 독립 운동] 3 · 1 운동 이후 간도 지 역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던 민족주의적 무장 투쟁은 1930년대에도 계속되었으나, 종교적인 배경과는 무관하 게 전개되었다. 특히 1920년대 중반 이후 국내외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반종교 운동이 힘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인들의 독립 운동은 개별적으로 이 루어졌다. 더욱이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는 신사 참 배(神社參拜)를 강요하였고, 천주교회는 1936년 일본 주재 교황 대사의 훈령에 따라 이를 용인하였다. 일부 성 직자나 신자들이 저항하였지만 곧 약화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들의 독립 운동 참여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1941년 12월 제주도에서 선교하던 아일랜드 출 신의 골롬반회 소속 선교사 3인과 제주 본당과 서귀포 본당의 한국인 신자 32명이 체포되어, 선교사 전원과 신 자 9명이 실형을 선고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도슨(P.Dawson, 孫, 1905~1989) · 스위니(J.A. Sweeney, 徐, 1909~1980) · 라이언(T.D. Ryan, 羅, 1907~1971) 신부는 유언비어 유포, 천황 모독, 전쟁 비협조 등의 죄목이었으 며, 하성구(河成九) · 이응범(李應範) 등 신자들은 선교 사들에게 군사상 비밀을 누설하여 적국을 이롭게 하고 천황을 모독하였으며 내선 일체를 부인하여 한국 독립을 언급하였다는 죄목이었다. 이는 일제가 제주도를 전략상 중요하게 인식하였음을 알려 주는 사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의 전황과 일본 패망을 소망하는 천주교 인들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는 독립 운동 ; → <경향신문> ; 삼일 운 동 ; 서상돈 ; 안공근 ; 안명근 ; 안악 사건 ; 안정근 ; 안 중근 ; 안학만 ; 윤예원 ; 한국 가톨릭 교육 사업 ) ※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宗教運動史天主教〉 《韓國現代文 化史大系》 IV,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0/ 一, <일제하 한국 천주교회의 독립 운동>, 《敎會史研究》 11, 1996/ 趙珖 < 日 帝侵略 期 天主教徒의 民族獨立運動〉, 《司牧》 42, 1975/ -, <일제하 무 장 독립 투쟁과 조선 천주교회>, 《敎會史研究》 11, 1996/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 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 -, <대한민 국 임시 정부와 종교계의 관계>, 《한국독립 운동사연구》 17, 2001. [崔起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