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韓國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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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파괴된 전동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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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파괴된 전동 성당 내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무력 침공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까지 남한과 북한 사이에 발 생한 전쟁. '6 · 25 사변' 또는 '6 · 25 전쟁' 이라고도 한 다.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 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며, 여러 가지 영어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Korean War, Korean Civil War, Korean conflict) . I. 한국 전쟁에 대한 교회의 이해 〔교회의 전쟁 대응 방식〕 미국의 종교 사회학자 잉거 (J.M. Yinger, 1916~ )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의 전쟁에 대한 대응 방식은 여섯 가지 유형으로 나타났 다고 한다. 즉 십자군(crusade) 혹은 성전(聖戰, holy war), 정당한 전쟁(just war), 내키지 않는 슬픈 전쟁 (reluctant and mournful war), '이번 전쟁' 에 대한 반대, 비 폭력 저항 또는 소명인 평화주의(vocational pacifism), , 무 저항 · 등록 거부(refusal to register) · 물러나기(withdrawal) 등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과 한국 전쟁 당시 교회의 전쟁에 대한 공식적 교리는 '정당한 전쟁' 이론이었고, 현재까지도 이 입장은 고수되고 있다. 그러 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천주교의 정당한 전쟁 교리는 중요한 변화를 겪었으며, 그 결과 20세기 후반기를 거치 면서 '정당한 전쟁' 은 '내키지 않는 슬픈 전쟁' 까지 포 함하는 것으로, 나아가 부분적으로는 '이번 전쟁에 대한 반대' , '비폭력 저항' , '소명인 평화주의' 까지 포괄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그렇다면 한국 전쟁 시기에 한국 천주교회의 전쟁관(戰爭觀) 혹은 전쟁 교리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결론부 터 말하자면, 당시 한국 교회의 전쟁에 대한 입장 내지 태도는 가장 적극적인 전쟁 정당화와 참여의 유형, 즉 '십자군' 혹은 '성전' 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만 큼 당시 한국 교회의 전쟁관은 '정당한 전쟁' 이라는 전 통적이고 공식적인 견해로부터 크게 이탈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 전쟁은 당시의 한국 교회 지 도자들에 의해 '유사 종교로 간주된 공산주의와의 성전 내지 십자군 전쟁' 으로 해석되었다. 미국의 프로테스탄트 윤리학 교수인 앨런(J.L. Allen, 1928~ )에 의하면, 성전 혹은 십자군 논리의 핵심은 대 략 다음과 같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첫째, '절대 적이고 분명한 도덕적인 구별' 에 기초하여, 전쟁을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적 이 행하는 악한 행위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적 자체 를 거부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선-악 구별을 적 진영의 군인만이 아니라 적 진영의 국민 전체에게 적용한다. 둘 째, 이들은 특징적으로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목표' 를 추구한다. 특수하고 제한적인 승리가 아니라 무제한적인 승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적과의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 며 무조건 항복 혹은 적 진영 전체의 멸절(滅絶)을 추구 한다. 셋째, 전투를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 간의 투쟁으 로 볼 때,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 여 '전투의 수단도 무제한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비전 투원에 대한 의도적이고 직접적인 공격, 특정 지역이나 인구 대다수를 겨냥한 무차별 폭격이나 초토화 작전, 심 지어 민족 말살(genocide) 등의 일들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넷째, 특히 20세기에 성전 혹은 십자군 논리는 '전면전을 촉진시키는' 경향을 띤다. 어느 한편의 자원 이 '총동원' 될 뿐 아니라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사회 간접 시설을 포함하는) 적국의 '전체' 사회를 겨냥하여 무제한 적인 전쟁을 벌이게 되므로, 공격자나 피공격자 양측 모 두 극심한 인명 및 자원의 피해가 발생한다. 그러나 제1 차 세계대전(1914~1918)을 겪은 후 서구 그리스도교 교 회들에서 성전 혹은 십자군의 이념은 거의 사라졌다. 더 욱이 20세기 중반에 이르면 평화주의적 입장의 강력한 도전을 받아 종전의 '정당한 전쟁' 교리에 대대적인 수 정이 가해졌기 때문에, 성전-십자군 논리는 그 자체가 정당한 전쟁 논리와 공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충돌 하게 되었다. 〔한국 전쟁 당시 교회 지도자의 생각〕 이 시기에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당시 상황을 거의 전적으로 반공 주의의 견지에서 접근하였다. 1950년 6월 25일의 전쟁 발발 이전에도 38˚ 선과 지리산 일대에서 무력 충돌이 빈 번히 일어났고 그것이 본격적인 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 은 충분하였지만,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그런 가능성을 예견하면서 사태가 전쟁으로 발전되는 것을 막으려고 노 력한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배적인 흐름은 오히려 그 반대, 즉 전쟁을 막으려기보다는 전쟁을 준비하는 쪽 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1949년 11월 10일자 <천주교회보>는 "대한민국은 극동의 민주 보루로서 반공 전선의 제일선"인데, "우리 가톨릭은 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저 악마의 소산 공산주의에 대하여 투쟁 을 개시한 지 이미 오래"라면서, "다만 국민의 의무로서 만이 아니라 또한 가톨릭의 전우(戰友)로서 대한민국이 현재 가장 필요로 하는 비행기의 헌납 운동에 더욱 힘쓰 자" 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앞서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수장(首長)인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는 남북 통일 을 위해서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노 주교는 1949년 3월 23일 유엔 한국위원단의 초청을 받 아 한국위원단 제2 분과위원회와 협의한 후 기자단과 만 난 자리에서 '남북 통일에 대한 견해' 를 다음과 같이 피 력하였다. "한국 통일 문제는 미 · 소의 협조로 이루어져 야 할 것인데 수년간의 경험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니 다른 방법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 제국의 강화에 있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감히 종교인으로서는 원치 못할 전쟁도 필요할 것이라고 하겠다." "최악의 경우" 혹은 "종교인으로서는 원치 못할" 등의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문맥으로 볼 때 노 주교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전쟁' 은 명백히 '공격 전쟁' 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그 책임은 오로지 주도 면밀하게 전쟁을 계획한 소련과 공산 세력의 '팽창주의 적 음모' 에 전가되었다. 또 당시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한국 전쟁이 내포한 '세계전' 으로서의 성격, '사상전' 으 로서의 성격, 나아가 '종교 전쟁' 의 성격이 강조되었다. 특히 한국 전쟁이 '종교 전쟁' 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해 석은, 천주교의 입장에서 한국 전쟁이 '성전' 이요 '십자 군' 으로 간주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이 전쟁의 비극성이나 고통을 몰랐던 것은 아니 지만, 그들에게는 전쟁의 죄악적 · 악마적 측면들이 일차 적인 관심사는 아니었다. 전쟁 중에 발표된 유일한 장문 (長文)의 교구장 공동 교서인 <도덕은 모든 문화의 기 초>(1953. 4. 1)에서도 주교들은 전쟁의 비극성과 해악에 대해 거의 고발하지 않았다. 단지 "온 겨레가 비참한 전 화 속에 신음하고 있는 이때" 혹은 "고난 중에 있는 우리 나라와 우리 모든 동포들"이라는, 서두와 말미의 '의례 적인' 수사구들이 고작이었다. 그 대신 대부분의 논의는 순교자를 연상시키는 "민주주의 군인들"의 "영웅적 행 동에 대한 찬양과 격려, 그리고 학교와 가정에서의 가 톨릭 교육, 교회 신문의 보급, 가톨릭 사회 원리의 재확 인 등에 할애되었다. 전쟁이 '성전' 이라는 방식의 적극적인 해석을 얻게 되 면 상당한 '미덕' 과 '유익' 한 측면들을 갖게 마련이다. '시련' (試鍊), '정화' (淨化), '보속' (補贖) 등의 담론들 이 이런 측면들에 대한 소극적인 인정이라면, 좀 더 적극 적인 인정은 <천주교회보> 1951년 1월 14일자에 실린 '신념적 행동' 이라는 기사에서 발견된다. 이에 따르면 "전쟁은 국가 의지 혹은 이상을 관철하는 최후적 수단"이며, 신자들은 "용감히 일어서서 대한민국의 이상 달성 을 위해 싸울 책임"이 있고 그것이야말로 "참영웅적 행 위"라는 것이다. 같은 호에 게재된 '전란의 교훈' 이라는 기사 역시 전쟁의 긍정적인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전쟁 의 유익한 측면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인정한 것은 전 쟁 후 처음 발간된 <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자 에 실린 노골적인 전쟁 예찬론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거 기에서는 전쟁이 "인류를 타면(惰眠)에서 각성시키고 이 를 이끌어 진지한 건설과 진보로 향하게" 한다고 주장하 였다. 침략에 대한 방어 전쟁이라는 측면이 간혹 언급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당시 한국 교회의 전쟁관이 '정당한 전쟁' 을 넘어 대단히 공격적인 '성전-십자군' 논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음은 분명하다. 수없이 등장 하는 "반공 십자군"이나 "멸공구국의 십자군" 등의 표현 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무찌르려마, 무찌르려마, 사탄의 대열을 무찌르려마" , "싸워야지,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 라도 싸워야 한다. 공산당이 살고는 우리는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냐?" , "철저한 말살의 신념을 갖고 남보다 맹 렬히 적을 공격하라" 등 교회 공식 기관지에 등장하는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구호들은 한국 교회가 성전-십자 군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한 국 교회는 1951년 중반부터 시작된 정전 협상을 '원수 와의 타협' 으로 간주하여 시종일관 반대하였는데, 전쟁 의 '평화적인' 종결에 대한 이러한 집요하고도 지속적인 저항 역시 성전-십자군의 논리를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전쟁 당시 미국은 북한과 중국 본토에 원자 폭탄의 투 하를 심각하게 검토하였고, 1 · 4 후퇴 당시에는 월남자 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원자 폭탄 투하의 가능성에 대한 소문을 고의적으로 유포시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 국의 세균전 의혹도 널리 퍼져 있었고, 남포(南浦) 시에 서는 화학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 1951년 6월 이후 지상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져 소모전 단계로 접어들자 미군은 정전 회담을 진행시키면서도 한편으로 북한의 민 간인과 비(非)군사 시설에 대한 무차별 포격을 감행하였 으며, 무고한 양민들을 상대로 한 쌍방의 대규모 학살 사 건들도 빈발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의 공식화된 전쟁 교 리인 정당한 전쟁의 기준들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 모 든 상황 전개에 대해, 당시 한국 교회는 한마디도 언급하 지 않았다. 극단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전쟁이라는 문제 해결책이 안고 있는 위험성들과 약점들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전쟁 중에는 물론이고 전쟁 후에도 거의 없었다. Ⅱ. 전쟁 중 교회의 활동 〔참 전〕 당시의 천주교회가 한국 전쟁을 '성스러운 전 쟁' 으로 해석하였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남한 및 유엔 측 의 전쟁 행위 전반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 와 공산군 측 에 대한 '종교적 탈(脫)정당화' 가 매우 높은 수준에서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또 그런 전쟁관이 남한 교회가 전쟁에 매우 깊숙이 개입하게 된 이데올로기적 기초로 작용하였으리라고 예측하는 것 역시 자연스런 귀결이다. 실제로 전쟁이 발발하자 교회의 최고 지도부와 공식적인 언론 매체를 통해 신자들에게 강력한 참전 명령이 하달 되었다. 교회 지도부의 이 같은 강력한 참전(參戰) 요청에 따 라, 더욱이 전쟁 발발 이후 본격적인 징집제가 시행되는 가운데 신앙심으로 무장한 대다수의 가톨릭 청년들이 적 극적으로 징집에 호응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십자군 논리의 극명한 표현으로서, 전쟁 발발 직후에는 대규모 의 독자적인 '가톨릭 부대' 를 조직하여 직접 무장 투쟁 을 전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공산군 측의 거침없는 남진으로 전세가 극도로 불리한 상황이었던 1950년 8 월, 부산 범일동 성당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던 서울과 이북 교구 출신 10여 명의 신부들은 젊은 신부와 신학 생, 청년 신자 3,000여 명을 규합하여 '가톨릭 청년 결 사대' 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었던 이 계획은 무기 공급이 어려워 결국 좌절되 었다. 만약 이 계획이 성사되었더라면, 한국 전쟁에 대한 천주교회의 대응 방식이 결정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며, 신부들이 직접 무기를 들고 연대급의 신자 군대를 지휘 하여 인민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치르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한편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던 많은 신학생들 은 학장 신부와 교회 지도층의 결의에 따라 군에 입대하 기로 결정하였다. 1950년 9월 20일 지학순, 윤광재, 김 창렬, 김옥균 등 30여 명의 신학생들은 당시 신학대학 학장이었던 정규만(丁圭萬, 마르코) 신부의 인솔하에 육 군 본부를 찾아가 일제히 자원 입대하였다. 당시 육군 본 부에서는 미군 각 사단에 한국군 3,000명씩을 파견한 후 이들의 인사 행정을 담당할 요원들을 모집하고 있었 는데, 주무 부서장이자 가톨릭 신자인 황헌친(黃憲親) 준장은 새로 입대한 신학생 대부분을 이 업무에 배속하 였다. 비록 교회 지도부와의 조직적인 유대는 없었으나, 천 주교 신자로서 격렬한 무장 투쟁을 수행하였던 유일한 사례는 구월산 일대를 거점으로 한 황해도 은율군 장련 면의 청년 신자들이었다. 장련(長連) 본당 신윤철(申允 鐵, 베드로) 신부의 권유로, 1950년 4월 말경부터 징집 을 피해 구월산에 은신해 있던 오병현, 최현각, 최치국, 정재훈 등 청년 신자 20명은 전쟁 발발 전날에 신 신부 가 체포되자 적극적인 무력 항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 다. 이 무장 집단의 이름은 '가톨릭 십자군 유격대' 였다. 이들은 유엔군의 북진이 계속되던 9월 말경 미신자를 포 함한 120여 명의 부대원을 확보하고 본격적인 유격 활 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첫번째 작전은 은율 내무서 감 찰계장 납치였으며, 1950년 10월 17일에는 유엔군이 입성하기 전에 장연읍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이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치안서장, 면장 등으로 선 출한 후 이 지방 치안과 행정을 펴 나가는 한편, 북으로 후퇴하는 노동당 간부의 체포, 인민군 패잔병들의 소탕 작전 등을 계속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중공군의 개입으 로 다시 전세가 역전된 12월 16일까지 지속되다가, 그 후로는 남한의 정규군 장교가 지휘하는 부대에 편입되어 구월산 일대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런 과정에 서 십자군 유격대 대원 13명이 전사하였다. 〔전투 지원 활동 및 선교〕 병원 봉사 활동 : 1950년 8 월 '가톨릭 청년 결사대' 를 조직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를 주도하였던 신부들은 계획을 바꾸어 후 방에서 봉사 활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우선 군 병원에서 의 의료 봉사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제5 육군 병원장 김 관수 대령과 협의하여 신부 15명, 신학생 30여 명, 샬트 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 70여 명이 무보수 봉사를 하 기로 결정하였다. 신부, 신학생, 수녀들은 제3, 5, 31 육 군 병원 등에 분산 · 배치되어, 처음에는 매일 출퇴근하 는 형태로, 나중에는 병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헌신적으 로 봉사하였다. 전상자의 치료와 간호를 주업무로 하면 서도, 상담과 교리 교육, 예비자에 대한 세례성사, 중환 자에 대한 대세 등 여러 선교 활동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봉사 활동의 선교 효과는 매우 탁월하여, 1951년 168 명, 1952년 961명, 1953년 1,030명이 세례를 받았다. 군종 제도의 출범 : 천주교회의 전쟁 지원 분야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중요한 성과를 거둔 활동은 군종제도를 통한 것이었다. 가톨릭 청년 결사대 추진과 실패, 군 병 원 봉사 등을 진행해 온 부산의 서울 대목구 신부들은 9 월 23일 부산으로 귀국한 노기남 주교에게 그간의 경과 를 보고하면서 군종 제도의 필요성을 건의하여 동의를 얻었다. 이후 노 주교, 서울 대목구의 봉희만(奉喜萬, 안 토니오) 신부, 대구 대목구의 김동한(金東漢, 가롤로) 신 부 등은 당시 미8군 연락 종군 신부를 겸하고 있던 메리 놀회의 캐롤(G. Carroll, 安) 몬시놀과 협의하여 극동사령 부와 미8군 사단 군종 참모 등 유엔군 채널과 국방장관, 국무총리 등 한국 정부 채널로 군종 제도를 추진하였다. 천주교의 군종 제도 창설을 위한 노력은 1950년 7월경 부터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프로테스탄트 측의 군 종 제도 창설 움직임과 연계되어 1950년 9월 중에 천주 교와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성결교 대표를 망라하는 '군종 제도 추진위원회' 가 조직되었다. 대통령과의 담판 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특혜 시비, 재정 지원의 어려움 등의 문제에 부딪혀 난항을 겪던 군종 제도의 창설 노력 은 각 종단에서 피복과 식량을 제외한 제반 경비를 부담 한다는 조건으로 대통령의 재가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1950년 12월 21일 군종 제도를 시행하라는 대통 령의 특별 훈령이 발표되었고, 이듬해 2월 7일 육군 본 부 인사국에 '군승과' (軍僧課)가 설치됨으로써 군종 활 동을 위한 제도적 골격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프로테스 탄트 교파들과 천주교만으로 군종 제도가 창설되고 운영 되는 현실에 비추어 '군승과' 라는 명칭이 부적합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자, 1951년 4월 14일부로 '군목과' (軍牧 課)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전쟁 직후인 1954년 1월 12 일에는 '군종 감실' 로 승격되었다. 군종 성직자들의 신 분도 창설 당시에는 '무보수 촉탁' 이었으나 1952년 6월 '유급 문관' 으로, 전쟁 후인 1954년 12월에는 '현역 장 교 로 격상되었다. 군종 제도가 정식 출범됨에 따라 1951년 2월 28일 서 울 대목구의 조인원, 임세빈, 박성춘, 김덕명, 구전회, 이계중, 김윤상, 최익철 신부와 전주교구의 이상호, 김후 성, 김이환 신부 등 11명을 포함한 32명의 가톨릭과 프 로테스탄트의 성직자들이 군종 1기생으로 입대하여 40 일간의 훈련을 거쳐 각 부대로 부임하였다. 이후 2기 7 명, 3기 3명 등의 신부들이 입대하였고, 이후 해군에서 도 군종 제도가 시행되어 1951년 8월 10일 대구 대목구 의 김동한 신부와 목사 2명이 입대하는 등 1951년에만 22명의 신부가 군종 장교로 임명되었다. 공군의 경우에 는 1952년 3월에야 군종 제도가 시행되었다. 한국 전쟁 기간 전체로는 육군에서만 총 일곱 차례에 걸쳐 45명의 신부가 군종 활동을 위해 입대하였으며, 프로테스탄트까 지 포함된 군종 성직자의 수는 1952년 11월에는 139명 에 달하였고, 1953년에는 178명까지 증가하였다. 또 전 쟁 기간 중에는 '보조 군목 제도' 라는 독특한 군종 관련 제도가 운영되었는데, 이를 통해 다수의 신학생들과 전 교회장들이 군종 후보생 시험과 소정의 교육을 거쳐 3급 8호의 문관(현역 대위 대우)으로 임관되었다. 1952년 신 학생 4명과 전교회장 4명 등 8명, 1953년에는 신학생 9 명과 전교회장 2명 등 11명이 보조 군목으로 입대하였 다. 이들은 군종 신부의 업무에서 미사와 성사 집전을 제 외한 반공 정신 교육, 인격 지도, 개인 상담 등을 하였 다. 군종 활동의 선교 효과 역시 탁월하여, 1950년에 50명이었던 군인 세례자의 수는 군종 제도가 시작된 1951년 이후 1953년까지 매년 1,500명 선으로 급증하 였고, 1954년 이후에는 연평균 200명 선을 유지하였다. 포로 수용소에서의 활동 : 전쟁이 진행되면서 영호남 지방 여러 곳에 공산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들이 속속 들어서자 메리놀회 소속의 미국인 신부들이 유엔군 문관 신분으로 각지의 포로 수용소에서 활동하기 시작하 였다. 서울 대목구 서정리 본당에서 사목하던 중 전쟁을 맞은 메리놀회의 클리어리(P.H. Cleary, 吉) 신부는 1950 년 9월 7일 도쿄에서 미군 군종 신부로 임명받고 한국으 로 돌아와 9월 27일부터 안양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제 7 사단에서 장로교의 뵈켈(H. Völkel) 목사와 한 팀을 이 루어 활동하였는데, 이후 정기적으로 인천 교외의 포로 수용소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3일에는 인천 성당의 임종국 신부를 수용소장 등 미군 장교들에 게 소개하여, 그가 수용소의 신자 포로들을 면회할 수 있 게 주선해 주었다. 아마도 이것이 외국인과 한국인 신부 최초의 포로 수용소 활동이었을 것이다. 이후 메리놀회 의 크레이그(H. Craig, 奇厚根), 페티프렌(R. Petipren), 파 디(J. V. Pardy, 巴智), 코피(J.F. Coffey), 설리반(R.F.Sullivan) 신부 등이 포로 수용소에서 활동하였다. 그리 고 1951년 4월 이후 포로들과의 의사 소통 문제 때문에 평양 대목구의 장대익(張大翼, 루도비코), 윤공희(尹恭 熙, 빅토리오),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백민관(白敏寬, 테오도로) 신부, 서울 대목구의 최석우(崔奭祐, 안드레 아) 신부, 연길 대목구의 김성환 신부 등 6명의 한국인 신부들이 메리놀회 선교사들의 보조역으로, 또는 유급 촉탁 신분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장대익 신부는 거제 도와 광주 수용소에서, 윤공희 신부와 지학순 신부는 거 제도 수용소에서, 백민관 신부는 논산 수용소에서, 최석 우 신부와 김성환 신부는 부산 수용소에서 각각 활동하 였다. 이들은 주로 반공 포로들을 대상으로 반공 교양 강 좌를 열고, 환자 포로들에게 대세를 주고, 예비자를 위한 교리 교육,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는 일 등을 하였다. 표 면적으로 보면 포로 수용소에서의 활동이 가장 혁혁한 선교 실적을 거둔 것으로 나타나는데, 1951년부터 1953년 반공 포로가 석방될 때까지 세례자는 무려 15,827명이나 되었다. 사실 포로 수용소에서의 활동을 먼저 시작한 것은 한 국인 수녀들이었다. 평양 대목구에서 활동하다 월남한 후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소속 수녀들은, 당시 크레이그 신부의 요청으로 1951년 1월부터 부산에서 여자 포로들에게 교리를 가르 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사회 복지 활동〕 직접적인 전투 참여와 전투 지원 활 동 이외에도, 한국 전쟁 시기에 한국 천주교회는 전쟁으 로 인한 희생자들, 특히 가난한 피난민과 전재민, 전상자 및 그 가족들을 위한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신생 후진국으로서 힘겨운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한국 정부가 이들을 제대로 보살핀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려 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한국 교회는 대단히 효과적 이고도 적절한 사회 복지 활동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구호 사업 : 전쟁 중 한국 교회의 사회 복지 활동을 위 한 자원은 거의 대부분 미국 천주교회, 특히 전쟁 이전부 터 한국에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던 '전국 가톨릭 복지 회' (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 NCWC) 산하 '가톨릭 구호 서비스 (Catholic Relief Service, CRS) 한국 지부라는 창구를 통해 조달되었다. 이미 제도화된 채널 이 존재하였기에 가장 신속하게 전쟁 상황에 대비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미국 천주교회의 대한(對韓) 원 조는 그 규모가 매우 컸다. 1950년 한 해 동안 미국의 민간 구호 단체들이 한국에 보내 준 전체 구호 금품 280 만 달러 가운데 200만 달러 이상이 NCWC-CRS가 보내 준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천주교회는 11월의 추 수 감사절을 전후하여 뉴욕 대교구장 스펠만(F.J. Spellman) 추기경의 주도로 한국인을 구제하기 위한 금 품, 의류, 식량 등을 희사하는 대대적인 운동을 전개하여 수천만 파운드의 구호 물자를 확보하였고, 이를 1951년 초부터 한국으로 보내 왔다. 미국 교회는 1951년 초에 다시 500만 달러 규모의 모금 운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전쟁이 시작되고 1953년 6월까지 NCWC-CRS가 보내 준 의약품과 의류의 양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1,130만 달러에 달하였으며, 1947년부터 휴전 직후인 1954년 1 월까지의 원조 총액은 무려 2,500만 달러에 상당하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 전쟁 기간 중 미국의 각종 종교 단 체들이 한국에 보낸 구호 물자의 70% 가량에 달한다. 의료 사업 : 전쟁 이전에 남한에서 규모가 큰 병원은 서울의 성모병원밖에 없었던 한국 교회는, 전쟁 중 부산 메리놀 병원과 성 분도 자선병원, 대전 성모병원을 새로 설립하여 의료 사업 분야에서도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 메리놀 수녀회의 의료진 7 명(의사 2명, 약제사 2명, 간호사 2명, 특수 기술원 1명)으로 구성된 메리놀 전교회 의료단이 입국함으로써 시작된 메 리놀 자선병원은 극빈자를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하는 한편, 구호 양곡, 구호 물자 등을 다량으로 취급,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수녀들까지 가세하여 매일 3,000 여 명에게 구호 물자를 배급하였다. 메리놀 병원은 설립 후 계속 성장하여 전쟁 직후에는 의사 7명, 간호원 13 명, 직원을 합해 총 90명이 매일 2,000~2,500명을 치 료하는 대규모 병원이 되었고, 설립 이후 1954년 10월 까지 연인원 43만 8,250명의 극빈층 환자들을 치료하는 실적을 올렸다. 성 분도 자선병원은 1951년 11월 초 천 주교 신자인 유을준(偸乙濬, 아타나시오)이 피난 중인 연길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수녀들과 협력하 여 부산시 초량동에 다다미방 하나를 빌려 환자 4인을 치료한 것으로 시작되어, 2년 후인 1953년 11월에는 건 평 500여 평, 내과, 소아과, 외과, 피부과, 산과, 부인과, 안과, 이비과(耳鼻科), 치과 등과 수술실, 병실 20여 개, 병리 실험실 등을 갖춘 종합 병원으로 발전하여, 서울로 환도하기 전의 여름철에는 매일 1,000여 명의 환자들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한편 성 분도 자선병원처럼 한국인 신자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의료 봉사 활동으로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 나 '가톨릭 의료 봉사단' 의 활약을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다. 1950년 9월 이후 북진이 계속되자 당시 성모병 원장 박병래(朴秉來, 요셉)의 주도로 '방지거 사베리오 회' (1947년 4월 결성) 회원들은 의료 봉사단을 조직하고, 노기남 주교와 캐롤 몬시놀의 후원으로 북상하여 1950 년 11월 12일부터 11월 30일까지 평양에서 진료 활동 을 펼쳤다. 이들은 평양의 한 치과 병원을 인수하여 임시 진료소로 사용하면서, 성모병원에서 제공한 의약품을 활 용하여 1,600여 명의 환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베풀었 다. 전세가 역전되어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봉사단원으로 참여하였던 성모병원 의료진은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계 속 전상자들을 치료하였다. 구라(救癩) 사업 : 전쟁 중에 천주교의 구라 사업도 본 격화되었다. 캐롤 몬시뇰이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 월 초에 서울과 인천 일대의 부랑 · 걸식하는 나환자들을 수용 · 보호하기 위해 오류동에 '성 나자로원' 을 설립한 것이 최초의 천주교 구라 사업이었고, 전쟁으로 해산된 이들은 1951년 7월 현재의 안양 성 나자로 마을로 이전 하였다. 이 밖에도 1951년에 나환자 정착촌인 '익산 농 장' 이 개원한 것을 비롯하여, 1953년 상반기 중에는 대 명원, 동혜원, 현애원 등 세 곳의 나환자 정착촌들이 개 원하였다.
Ⅲ. 교회 수호 활동 〔교회 수호 활동과 피점령지 교회의 대응〕 서울 대목 구의 교회 수호 : 전쟁이 터지자 남한 교회는 사제들에게 관할 지역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공산군에 의해 점령당하 는 와중에도 교회를 지키고 사목 활동을 계속할 책임을 부과하였다. 특히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순식간에 전장으 로 변한 서울 대목구와 춘천 지목구는 공식 혹은 비공식 적으로 사제들의 본당 잔류를 결정함으로써 교회를 수호 하고자 하는 단호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물론 이 같은 결 정은 성직자들의 희생을 늘리는 데 기여하였다. 교구장 의 부재 상태에서 전쟁을 맞은 서울 대목구는 1950년 6 월 26일 부주교인 이기준(李起俊, 토마스) 신부, 명동 본 당 주임인 장금구(莊金龜, 요한 그리소스토모) 신부, 교 구청 소속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김철규(金哲圭, 바르 나바) 신부 등이 모여 긴급 교구 참사회를 열고 다음과 같이 결정한 후, 이 방침을 시내 각 신부들에게 전달하였 다. "① 아직은 한강을 건너 피신할 길이 있으니 공산당 에게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윤형중 신부와 김철규 신부는 무조건 남하하도록 한다. ② 보좌 신부들 과 특수 사목에 종사하는 신부들은 될 수 있는 대로 피난 을 떠나도록 권유한다. ③ 본당 신부들은 직장을 사수하 고 교우들과 생사를 함께한다." 이 같은 방침은 대체로 준수되었고, 그로 인해 교회의 기능도 상당 기간 동안 지 속될 수 있었다. 예컨대 명동 성당의 경우 적어도 8월 6 일까지는 주일마다 미사가 봉헌되었으며, 가정 방문과 성사 집전을 비롯한 본당 신부의 활동도 계속되었다. 춘천 지목구의 교회 수호 : 서울 대목구와 같은 공식적 인 결정은 없었지만, 춘천 지목구의 신부들도 거의 유사 한 행동을 보여 주었다. 전쟁이 발발한 직후 미군사고문 단의 한 요원이 퀸란(T. Quinlan, 具仁蘭) 지목구장과 캐 나반(F. Canavan, 孫) 신부를 원주로 철수시키려 하였으 나 이들은 잔류를 고집하였고, 7월 2일 주일 미사 도중 에 체포당하였다. 소양로 본당의 콜리어(A. Collier, 高) 신부, 묵호 본당의 레일리(P. Reilly, 羅) 신부, 삼척 본당 의 매긴(J. Maginn, 陳) 신부, 홍천 본당의 크로스비(P. Crosbie, 조선희) 신부 등 춘천 지목구를 맡고 있던 골롬 반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도 피난의 기회를 뿌리치고 본당 잔류를 고집하였다. 이 때문에 콜리어, 매긴, 레일 리 신부가 총살당하였고, 크로스비 신부 역시 체포당하 였다. 이 같은 교회의 단호한 결의는 이후에도 전국적으 로 확대된 형태로 계속 유지되었다. 1952년 3월 12~14일까지 대구 남산동 주교관에서 전쟁 발발 후 처 음 열린 연차 전국 교구장회의는 그 결의 사항 중 하나로 "전쟁과 공산군의 침입 시에 있어 복음과 교회 정신에 따라 본당 신부는 관하(管下) 신자가 잔류하고 있는 한 일정한 주검(죽음)의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들과 함께 남 아 있어야 한다" 라고 결정하였던 것이다. 신자 보호 활동 : 교회를 지키고 신자들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은 피난지의 평신도에게서도 발견된다. 가장 대표 적인 움직임은 대구 지역 가톨릭 청년들의 '천주교 의용 대(義勇隊)' 결성 및 활동이었다. 이들은 국방부 정훈 국 장의 양해 아래 의용대를 조직하여, 피난민 구호 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거리에서 함부로 징용 · 징발하는 당국 의 횡포로부터 청장년 교우들을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하 였다. 전주 지목구 내 부안, 완주, 진안군 등지에서 전개 되었던 '천주교 자치 방위대' 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특 히 전주 전동 본당의 청년들은 지하 조직을 만들어, 전주 형무소에 구금되어 있는 김현배(金賢培, 바르톨로메오) 지목구장과 교구 신부들을 구출하려 하였다. 교회 차원 의 신자 구호 활동도 활발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대구 대 목구는 주교관 안에 피난민 접수처를 설치하고, 교우 증 명서를 발급해 주어 교회 기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교구청뿐만 아니라 대구 대목구 내 모든 본 당들에서도 다른 교구 신자들의 등록을 받아 이들을 돕 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후퇴할 당시, 북 한 지역 신자들의 피난을 도와 준 활동 역시 교회와 신자 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활 동은 메리놀회 소속인 두 신부, 즉 평양의 캐롤 몬시뇰과 흥남의 클리어리 신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평양 대목구 장 서리로 임명받아 1950년 10월 28일 클리어리 신부 등과 함께 평양에 온 캐롤 몬시뇰은, 12월 2일 평양을 떠날 때까지 적극적으로 신자들의 피난을 주선하였다. 그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소속 수녀 17명에게 영 어와 한국어로 된 신원 보증서를 써 주어 남하하는 데 미 군의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주선함과 동시에, 그 자신이 평양을 떠나던 날인 2일에도 전날 밤을 새워 2,000여 매의 신원 보증서를 만들어 신자들의 남하를 도와 주었 다. 당시 대동강교의 출입이 작전상 군 당국에 의해 통제 되고 있었기에, 캐롤 몬시뇰의 신원 보증서를 가진 신자 들은 비교적 어려움 없이 안전하게 남하할 수 있었다. 또 한 중공군의 진격 소식이 퍼지자 클리어리 신부는 1950 년 12월 4일부터 함흥에서 배로 피신할 신자들에게 '안 전 통행증' 을 발급해 주었다. 그는 12월 12일 흥남으로 이동한 후에도 가톨릭 신자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이자 통 행증으로 쓰일 용지에 무수히 서명하였고, 12월 13일 이후 12월 17일에 흥남 부두를 떠나기까지 신자들을 수 송할 배편을 찾는 한편, 함흥과 흥남 지역의 신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철수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순교 신심 운동과 성모 신심 운동〕 한국 전쟁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 관련하여 또 하나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 은 신심 운동 측면이다. 한국 전쟁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 들은 순교 신심과 성모 신심을 더욱 강화하였고, 거기에 매달렸다. 이 신심 운동들은 당면한 전쟁과 깊이 결부되 어 있었으므로, 강력한 반공주의적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었다. 우선 공산주의의 궁극적 패배와 멸망을 약속한 파티마 성모의 메시지는 공산주의와의 전투에서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도와 주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유지시키는 사회 심리적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매 괴구슬에 승리가 있다! 더 많은 기도의 거탄(巨彈)을 전 선에!" 등의 표어들이 교회 신문을 장식하였다. 마찬가 지로 전석재(全碩在, 이냐시오) 신부는 "파티마의 경고 를 상기하자"며 신자들에게 "세계적이고 전 민족적이며 전 교회적"인 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희생과 기도의 거탄을 전선에" 보내자고 권고하였다. 1951년 1월 14 일자 <천주교회보>는 미국 네세타에서의 성모 발현설을 보도하면서, 이를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법(法) 없는 행 동으로 전세계가 3차전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요즈음 파 티마에서 인류에게 권고하신 바를 다시 독촉"하는 것이 라고 해석하였다. 한편 주로 치유의 사회 심리적 기능을 발휘한 '루르드의 성모' 와 관련된 신심 운동도 고조되었 는데, 루르드 성모에 대한 신심은 전쟁으로 인해 심리 적 · 육체적으로 극심한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 위로와 회 복의 메시지를 주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전쟁 중에는 반공 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띤 성모 신심 운동이 대중적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순교 신심은 전투 참여와 살인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 게 도와 줌과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 을 보상 하는 사회 심리적 기능을 주로 발휘하였을 것이다. 전쟁 발발 이후의 첫 번째 <천주교회보>에서부터 "양을 위해 희생된 거룩한 목자들-순직의 주교 신부와 전재 교회" 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전쟁 초기에 납치 혹은 희생된 성직자들을 소개하면서 "피 뿌려 가르치신 그 정신 받들 자!" 라는 부르짖음이 울려 나오고 있다. 또 1952년 6월 5일자 <천주교회보>에는 "우리의 교회가 이번 적화(赤 禍)로 인하여 받은 수난의 정도는 과거 기해, 병인년간 의 군란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 라는 전제하에 교회의 수난 역사를 편찬하겠다는 계획이 공시되었다.
IV. 전쟁으로 인한 교회의 손실 〔인적 · 물적 손실과 복구〕 한국 전쟁은 무엇보다 전쟁 특유의 파괴성으로 교회와 신자들에게 엄청난 인적 · 물 적 손실을 가져왔다. 한국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발발한 가장 대규모의 전쟁으로, 남북한에서 300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고, 불구가 된 사람, 가족과 헤어진 사 람, 고향을 잃은 사람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당시 우 리 민족이 갖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생산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나아가 수많은 교회 시설들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성직자들과 수도자, 신자들이 희생되었다. 북한 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남한 지역에서도 본당을 지키라 는 교구장의 지시에 성실히 따른 많은 성직자들이 수난 을 당하였다. 박해 시대 이래 이처럼 많은 희생자를 삼켜 버린 사건은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표 1>은 전쟁 의 직전과 발발 이후 공산당 측에 체포되거나 처형된 성 직자와 수도자, 신학생들의 분포를 지역별로 집계한 것 이다. 이 <표 1>에 확연히 나타나듯이, 인적 희생은 북한과 피점령지에 집중되어 있다. 38° 선 이북의 덕원 · 함흥 대 목구와 평양 대목구, 서울 대목구와 춘천 지목구 북쪽 지 방의 피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서울 대목구와 춘 천 지목구, 대전 지목구 신부들의 경우 본당을 지키라는 교구의 방침 내지 본당 신부들의 의지 때문에 희생이 컸 다. 반면 직접적인 전투가 적었고 비교적 짧은 시기만 점 령당한 광주 지목구와 전주 지목구는 상대적으로 적고, 유일한 미점령지였던 대구 대목구의 인적 피해는 전무하 다. 수사들의 경우 피해자 전원이 외국인이었고, 수녀들 도 외국인의 피해가 특히 컸다. 신부의 경우 외국인과 한 국인이 거의 반반씩이나, 평양 대목구와 서울 대목구에 서 한국인 신부의 손실은 대단히 컸다. 외국인 희생자의 국적을 살펴보면, 압도적으로 독일계의 희생이 컸고, 아 일랜드계와 프랑스계 신부들도 비교적 큰 손실을 입었 다. 반면 미국계 신부들의 희생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인적 손실의 '규모' 못지않게 중시해야 할 점은 손실의 '질' 이다. 즉 지도급 인사들의 대규모 손 실이 문제인 것이다. 주교 혹은 교구장급만 해도, 남한 지역에서 교황 대사 번(J.P. Byrne, 方溢恩) 주교, 광주 지 목구장 브렌난(P. Brennan, 安) 신부 등이, 그리고 북한 및 연길 지역의 대목구장 전원이 전쟁을 전후하여 희생 당하였다. 즉 연길 대목구의 브레허(T. Breher, 白化東) 주교, 함흥 대목구의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 평 양 대목구의 홍용호 주교 등이다. 1950년 7월 말에 이 르러 인민군은 경상도를 제외한 남한 지역의 90%를 장 악하였는데, 납북 혹은 처형 등으로 인한 인적 손실은 대 부분 6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의 약 두 달 반 사이에 일 어났다. 남한 지역에서 체포되어 납북된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 자들은 일단 서울로 집결하였다가 7월 19일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평양에서 조사를 받은 후 9월 6일 평양을 떠나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였는데, 평양에서 만 포, 다시 고산과 초산, 중강진을 거쳐 11월 7일부터 이 듬해 3월 30일까지 '하창리 수용소 에 수감되었다. 한 편 전쟁 이전부터 이른바 '옥사독 수용소 에 수감되어 있던 덕원과 함흥 대목구 성직자 · 수도자들도 10월 23 일부터 북행을 시작하여, 만포와 관문리의 수용소를 거 쳐 이듬해 1월 17일 다시 옥사독 수용소로 돌아온 후 1954년 1월 8일까지 그곳에 억류되었다. 1950년 9월 부터 이듬해 1월까지 계속된 이 두 가지의 고난스런 이 동 과정을 이름하여 '죽음의 행진' 이라고 부른다. 최초 의 대규모 검거로 원산 인민 교화소와 평양 인민 교화소 에 수감된 때부터 고국으로 귀환하기까지 4년 8개월간 의 기나긴 수난 과정에서 덕원과 함흥 대목구의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 24명이 사망하였고, 겨우 죽음을 면한 42명만이 생환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들만큼 전쟁의 비 극성과 부조리, 공포를 뼈저리게 체험한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교회의 물적 손실과 시설의 파괴도 엄청났다. 교회가 전쟁 중 입은 물적 피해는 낙동강 전선을 축으로 한 격전 지 인근 지대, 그리고 1950년 6월 말부터 9월 말까지의 석 달 동안 유엔군의 공중 폭격이 가해진 38° 선 이남 피 점령지를 비롯하여 38° 선 이북의 전 지역, 그리고 전선 이 이동되면서 일시적으로 전투 지역이 된 지역들에 집 중되었다. 대부분 대구 대목구 관할 지역이던 낙동강 전 선 주변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던 시기에 경상남북 도의 31개 본당 중 공산군에 점령당한 본당은 21개였 고, 이 가운데 교전으로 파괴 혹은 소실된 본당이 11곳 에 달하였다. 1950년 6월 말부터 9월 말까지 38° 선 이 남 피점령지와 일시적으로 전투 지역이 되었던 지역에서 도 물적 피해가 속출하였다. 건물은 그런대로 보존되었 으나 성물과 비품, 가재도구 등을 약탈당한 곳은 교황 사 절관, 명동 주교관과 주교좌 성당 등 이루 헤아릴 수 없 을 정도였다. 피점령 기간이 비교적 길었고 전선의 이동 이 잦아 전투 지역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 았던 서울, 경기, 인천 등 서울 대목구 관할 지역과 춘천 지목구 관할의 강원도 지방에 물적 피해가 집중되었다. 그러나 국군과 유엔군 측이 38° 선 이남 지역을 수복한 1950년 10월 이후에는 주로 북한 지역의 교회 시설이 파괴된 데 반해, 남한에서는 비교적 활발한 복구 운동이 시작되었다. 교회 시설의 파괴 그리고 전쟁을 계기로 쇄도하는 새 신자들로 인해, 성당을 신축하거나 증축해야 할 필요성 은 종전(終戰) 이전부터 급박하게 대두되었다. 1952년 3월 12일부터 사흘 동안 대구 남산동 주교관에서 전쟁 후 처음 열린 전국 교구장회의는 그 첫 번째 결의 사항으 로 '전란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교회 건물과 사업은 재침 (再侵)의 위험이 없는 지방에서는 가급적 수복(修復)할 것' 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대략 이 무렵부터 본당의 신축과 증축, 복구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손실된 시 설물을 복구할 자체 능력은 거의 고갈되었기 때문에 외 부의 원조, 특히 미국과 미군의 원조가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서 당시 신자들이 보여 준 성당 복구와 신축의 노력은 감동적일 정도로 열성적이었 다. 남한 지역의 경우 1953년 이전에 전쟁으로 파괴된 성당의 복구가 절반 이상 진행되었으며, 늦어도 1954년 까지는 대부분 완료되었다. 〔북한 교회의 수난과 소멸〕 한국 전쟁 직전부터 북한 지역의 주교와 신부들은 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하였으며, 한국인 수도자들은 전쟁 이전에 모두 해산당하였다. 그들 이 겪은 희생과 고통은 남한과 견주기 어려울 정도였다. 1950년 6월 24일까지 북한에 남아 사목 활동을 하던 신 부는 모두 11명이었는데, 전쟁 발발과 함께 모두 일제 검 속에 걸려 그 이후 아무도 사목 일선으로 돌아오지 못하 였다. 따라서 북한 지역의 교회들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적어도 교계 제도상으로는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또 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남한 으로 이동함으로써 북한 교회의 공동화(空洞化)가 가속 화되었다. 더욱이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남북한 교회 와 신자 간의 교류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북한 지역의 교회 건물들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유엔군의 무차별적인 공중 폭격으로 북한은 사실상 폐허로 변하였고, 성당 등 교회 시설도 예외가 아 니었다. 그러나 1950년 10월 28일부터 12월 18일까지 평양 인근 지역과 함흥 및 흥남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였 던 클리어리 신부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대다수의 성당 들은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성당 11곳의 피해 상황을 조사하였는데, 이 가운데 완전히 소실 혹은 파괴된 성당은 안주 성당과 함 흥 본당뿐이었다. 따라서 1950년 말까지만 하더라도 비 교적 잘 보존되어 있던 북한 지역의 교회 시설들은, 전선 이 교착 상태에 빠진 1951년 6월부터 휴전 협정이 맺어 지는 1953년 7월까지의 약 2년 사이에 철저하게 파괴 혹은 소실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육이오 동란 ; 죽음 의 행진 ; → 골롬반 외방선교회 ; 군종교구 ; 노기남 ; 덕원 면속구 ; 스펠만 ; 전쟁 ; 침묵의 교회 ; 평양교구 ; 함흥교구) ※ 참고문헌  강인철, 《전쟁과 종교》,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3/ 강정구, 《분단과 전쟁의 한국 현대사》, 역사비평사, 1996/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I》, 천주교 전주교구, 1998/ 노길명, <1950년 대 한국 사회 변동과 명동 성당>, 《민족사와 명동 성당》,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 교회, 2001/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편찬위원회 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분 도출판사, 1983/ 원주교구 30년사 편찬위원회 편, 《원주교구 30년 사》, 천주교 원주교구, 1996/ 유홍렬, <한국 천주교회 약사>, 《한국 천주교 연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56/ 육군 군종사 편집위 원회, 《육군 군종사》, 육군본부, 1975/ 육사 본당 30년사 편찬위원 회 편, 《씨앗이 열매로》, 천주교 육사 교회, 1990/ 윤광선, <6 · 25 와 격전지 대구 신자들>, 《교회와 역사》 108호(1984. 6)/ 윤선자, <공덕종>, 《교회와 역사》193호(1991. 6)/ 장금구, <6 · 25 사변 체험 기(1), 《교회와 역사》 8호(1976. 6)/ 조광, <6 · 25 전쟁과 한국 교 회>, 《교회와 역사》 171호(1989. 8)/ 조셉 L. 알렌, 김흥규 역, 《기 독 교인은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대한기독교서회, 1993/ 최시룡, <현대 한국 천주교회와 구라 사업의 전개>,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한국 교회사 논문집 간행위원회 편,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한국 교회사 논문집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패트릭 H. 클리어리, 최정오 역, 《흥남 부두의 군종 신부》, 한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1991/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 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 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한국사목연구소 편,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 찰과 전망 2 : 해방 공간과 한국 전쟁을 중 심으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위원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J. Milton Yinger, The Scientific Study ofReligion, New York, Macmillan, 1970. 〔姜仁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