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韓國天主教正義具現全國司祭團
〔영〕Catholic Priests' Association for Justice
글자 크기
12권

1 / 2
'정의구현' 은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정의를 기초로 인간의 존엄, 인권, 민주화, 평화, 통일 등의 가치를 지향하는, 한국 천주교회 사제들이 자발적 으로 결성한 모임.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94 광장빌 딩 5층에 소재하고 있으며, 한국 천주교 주교 회의에서 정식으로 인정한 산하 단체는 아니다. 명칭의 '정의' 는 하느님의 대표적인 속성이자 예언자의 소명과 삶을 가장 잘 드러내고 압축한 핵심이며 로마서에 나타난 구원의 특징으로, 정의 구현이 사제단의 목적과 존재 이유이다. 〔설립 배경〕 교회사적 배경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는 기존의 폐쇄적 · 보수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던 교회를 깨워 시대의 징표를 읽고 새로운 눈으로 세 상을 보았다. 곧 교회 공동체는 공의회를 통해 세상을 향 한, 세상과 함께해야 할 스스로의 목적과 의무를 새롭게 깨닫고 실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도 그 구체적 실천의 다짐으 로 주교단 사목 교서를 발표하였고(1966. 5), 이어 1970 년대에는 정치 · 경제 · 사회적 부조리와 그에 대응하는 교회의 입장을 포괄적으로 표명한 '오늘의 부조리를 극 복하자' 는 <주교단 공동 교서>(1971. 11. 14)와 <주교단 공동 선언>(1972. 8. 15), 그리고 1975년 성년(聖年)을 앞두고 <사목 교서>(1974. 7. 5) 등을 발표하였다. 이와 같이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는 나름대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새삼 확인하고, 무엇보다도 그리 스도인의 사회적 책무를 깨달아 불의한 독재 정권 앞에 서 '아니오!' 를 외칠 수 있는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었다. 정치 · 사회적 배경 : 1961년 5 · 16 군사 반란을 주도 하였던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을 중심으로 경제 개발 계획이 추진되면서 도시에서는 연평균 60만 명의 이농민(離農民)이 거대한 산업 예비군으로 형성되 었다. 이들은 수출 산업의 저임금 체제를 가능하게 하는 밑받침으로 작용하였다. 수출 의존형이었던 불균형 성장 정책의 희생자들인 이들은, 근대 공업 부문에 흡수되지 못하고 완전 실업 상태 또는 반(半)실업 상태로 체류하 면서 대체로 열악한 주거 · 위생 · 교육 환경 속에서 행 상, 노점상, 일용직 노동자, 각종 수선업, 영세 서비스업 등에 종사하였으며, 그 수는 1970년 당시 총취업자의 23%를 차지하는 226만 명을 헤아렸다. 한편 집권당 내의 개헌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를 탄압하면서 국회의 본회의장이 아닌 별 관에서 늦은 밤에 공화당 단독으로 3선 개헌안을 전격적 으로 가결시킨(1969. 9. 14) 박정희는, 이를 국민투표로 확정한 뒤 제7대 대통령으로 다시 당선되었다(1971. 4. 27). 그러나 학생 시위가 계속되어 서울 일원에 위수령 이 발동되고(1971. 10. 15) 곧이어 국가 비상 사태가 선포 되었다(1971. 12. 6). 이후 '10월 유신' 을 선포하고(1972. 10. 17) 김대중(金大中, 1926~ ) 납치 사건(1973. 8. 8)에 이어 긴급 조치를 선포하는(1974. 1.8) 등 반유신 세력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설립 정신〕 현실 앞에서의 새로운 깨달음-회개와 봉 사 : 당시 한국 천주교회 사제단은 암울한 독재 정권에 항거하면서 새로운 깨달음과 회개에 이르렀는데, 특히 원주교구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주교의 피납과 구속 사건이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물론 전체 한국 천주 교회의 입장에서 노동 문제를 포함한 정치 · 사회 · 경제 등 제반 문제를 포괄적으로 진단한 <한국 주교단 공동선 언>(1967. 7),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자 탄압 사건' 에서 비롯된 <한국 주교단 성명서>(1968. 2. 9), 서울 시민회관 에서 '사회 발전과 노동 문제' 를 주제로 한 가톨릭과 프 로테스탄트 공동 주최의 노동 문제 대강연회(1969. 10. 2), 그리고 1971년 9월 28일 결성된 '크리스찬 사회 행 동 협의체' 의 활동 등에서 교회의 대사회적 관심과 표명 등은 간헐적으로 있어 왔다. 그러나 사제단은 지학순 주 교의 석방 운동을 통해 비로소 '옥중에 있는 청년 학생 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마태오 25, 31 이하) 이웃 과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교회의 영역 과 그 구성원에게만 눈길과 관심을 둔 것이 그리스도론 적 관점에서는 이기적 옹졸함과 외면의 죄임을 깨달은 것이다. 세상 한복판에서의 교회의 소명을 깨닫고 출애 급의 하느님, 해방자 야훼를 새롭게 체험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Gaudium et Spes, 1965. 12.7)의 가르침인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의미, 정치 현 실에 대한 윤리 도덕적 판단 등이 사제단의 길잡이였고 무엇보다 복음에 나타난 해방자 그리스도(루가 4, 18-22) 가 바로 사제단의 원형이었다. 불의 앞에 당당하게 맞서 싸운 청년 · 학생 ·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사제단은 십자 가의 역동성과 회개의 본질,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세상 한복판이 바로 전례와 기도, 그리고 영성의 현장임을 깨 달았다. 골고타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현장이 바 로 세상 한복판이며 바로 이곳이 영성과 사회적 투신의 원천임을 확인한 것이다. 세상을 찾아 세상에서 탄생하 고 세상을 껴안은 그리스도의 육화 신비가 바로 구원과 토착화의 본질이기에, 사제는 마땅히 고난의 현실과 현 장을 그리스도와 같이 온몸으로 껴안아야 할 존재임을 새삼 느끼고 바로 이것이 세상과 이웃을 위한 참 봉사임 도 확인하였다. 사제는 바로 인류와 세상 구원을 위한 봉 사자이기 때문이다. 교구의 벽을 넘어 - 의식의 변화 : 1974년 9월 26일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에 명동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 고 제1차 시국 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결성된 전 국 사제들의 모임인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은, 명 실공히 교구를 뛰어넘은 전국 사제들의 자발적인 모임이 되었다. 이는 교구의 벽을 넘어선 신선한 체험으로, 사제 단은 가장 민주적이며 복음적인 그리스도교의 자생적 원 시 공동체를 본딴 조직이다. 또한 사제단은 각계의 천주 교 사회 운동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노동 운동, 농민 운동, 학생 운동, 여성 운동, 지식인 운동, 문화 운동 등 과 연계하면서 이 운동들의 활동 공간을 크게 넓히는 계 기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제단은 민족 과 민중, 그리고 역사와 함께하는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양심적인 타종교 지도자들과의 연대 속 에서 프로테스탄트와의 일치 운동도 가능해졌다. 사제단 은 모든 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세상이 바로 교회임을 실천적으로 확인하였다. 〔설립 과정 및 활동〕 1971년 10월 5일 원주교구 원동 주교좌 성당에서는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 가 봉헌되었다. 이어 10월 7일 지학순 주교를 준비위원장 으로 하는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 위원회' 가 결성되었 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리라>는 5개 조항의 요구가 결의 되었다. 또 주교단은 1972년을 '정의와 평화의 해' 로 정 하고 1월 2일에 '평화의 날'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장기 집권 음모를 노골화하였으며, 1973년 8월 일본에서 야권 지 도자인 김대중을 납치함으로써 국민들의 비판 여론이 고 조되었다. 이러한 여론의 동향에 맞서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대통령 긴급 조치 1 · 2호를 선포하여 학생, 교수, 종교인, 변호사 등 양심적 지식인들을 체포하였고, 급기야 4월 인민혁명당 재건위와 전국 민주청년 학생 연 맹(이하 '민청학련' ) 사건을 조작하여 유신 반대를 위한 대학가 시위를 준비하던 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하 는 등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또한 같은 해 7월 6일에는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었다 는 이유로 김포공항에서 불법 납치되었다. 이후 잠시 풀 려났던 지학순 주교는 7월 23일 "유신 헌법은 무효" 라 는 양심 선언을 발표하여 재차 구속되었고, 8월 12일에 긴급 조치 1 · 4호 위반 혐의로 징역 15년, 자격 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켜 그해 9월에 이르기까지 신부들은 거의 월요일마다 각 교구를 순회하면서 모임을 갖고, 지 주교 등 구속된 민주 인사들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미사를 봉 헌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부들은 일정한 조직과 체계를 갖출 필요성을 절감하고, 또한 독재 정권에 맞서는 순교 자적 결단이 요구됨을 확인하면서 박상래(朴祥來, 야고 보) 신부를 대표로, 함세웅(咸世雄, 아우구스티노) 신부 를 총무로 선정, 원주 원동 성당에서 오랜 토론 끝에 1974년 9월 23일 사제단의 명칭을 '정의구현' 으로 확 정하였다. 그리고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인 9월 26일 명 동 성당에서 민주 회복, 구속자 석방을 위한 미사를 봉헌 하고 제1차 시국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천주교 정의구 현 전국 사제단(이하 '정의구현 사제단' )을 공식으로 출 범시켰다. 1970년대 인권 및 반유신 민주화 운동 : 정의구현 사 제단은 1974년 11월 6일 1,300여 명의 성직자, 수도 자,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주최하여 박정희 정권이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 공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비판한 제2차 시국 선언문을 발 표하였고, 종교계, 학계, 언론계 인사들이 모여 11월 27 일에 조직한 '민주 회복 국민회의' 의 결성에도 큰 역할 을 담당하였다. 1975년 2월 6일에는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 에서 민주 회복을 요구하는 제3차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였고, 2월 24일에는 시노트(J. Sinnott, 진필세) 신 부와 공동으로 <인민혁명당 사건의 진상을 공개하라>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3월 21일에는 명동 성당에서 자 유 언론 회복과 고통받는 이들과 민주 회복을 위한 인권 회복 기도회' 를 주최하였다. 1976년 3월 1일 윤보선(尹 潽善, 1897~1990), 김대중, 문익환(文益煥, 1918~1994) 목사, 신현봉(申鉉奉, 안토니오), 문정현(文正鉉, 바르톨 로메오), 함세웅 신부 등이 <민주 구국 선언문>을 발표하 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자, 명동 성당에서 3 · 1 사건 구속 사제를 위한 특별 미사를 계속 봉헌하며 유신 체제의 부 당성을 지적하였다. 1978년 5월 16일에 봉헌된 노동 자를 위한 특별 미사 에서 노동자들의 권익 보장은 민주 회복과 직결된다고 선언하였고, 1979년 6월 24일에는 <민중 복음 선언>을 발표하였다. 1980년대 민주화와 통일 운동 : 1980년 5월 30일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광주 사태에 대한 진상>을 발표하 여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실상을 대외적으로 알렸고, 1982년 4월 원주교구 최기식(崔基植, 베네딕도) 신부가 부산의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 관련자들을 은닉해 준 혐 의로 구속되자 6월에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하여 미국 문화원 사건에 대한 생각과 정권 퇴진을 촉구하였다. 1984년 1월에는 노동 탄압 중지와 통일 논 의의 활성화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9월 24 일에는 명동 성당에서 정의구현 사제단 창립 10주년 감 사 미사를 갖고 <이 사회의 인간화를 위한 선언>을 발표 하였다. 1985년 6월 8일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 를 발표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피해 보상과 미국 문화원 방화 사건의 정당한 평가를 촉구하는 한편 노동 자 구속에 대해서도 항의하였다. 1986년 8월 4일에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관련하여 '성폭행 고문 진상 규명 과 인권 회복을 위한 미사 를 봉헌하고 <이 사회의 민주 화와 인간화를 거듭 호소한다>는 제하의 성명을 발표하 였다. 1987년 1월 24일에는 박종철(朴鍾哲)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하여 <고문 살인의 종식을 위한 우리의 선 언>을 발표하여 고문 살인의 진실을 밝히고 고문 기관의 해체, 정권의 퇴진을 주장하였고, 5월 17일에는 명동 성 당에서 시국 미사를 봉헌하고 미사 중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6월 10일에 는 정권 퇴진과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조작 규탄 범국 민대회' 참가를 결의한 <우리의 기도와 선언>을 발표하 였다. 이와 같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서 활발한 활동을 전 개하던 정의구현 사제단은 1980년대 후반에 민족 화해 와 통일 운동에도 매진하였다. 1988년 7월 4일 <민족의 하나됨을 위하여, 우리의 기도와 선언>을 발표하여 통일 논의의 활성화, 한반도의 평화, 통일과 민주는 하나 등을 주장하였고, 11월 28일에는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통일 문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1989년 6월 6일에는 임진각에서 3,000여 명의 각 교구 신자들이 참석한 가 운데 '통일 염원 미사' 를 봉헌하였고, 같은 시각 평양 장 충(長忠) 성당에서는 6월 5일에 방북한 문규현(文奎鉉, 바오로) 신부가 북측의 교우들과 함께 통일 지향 미사를 봉헌하였다. 같은 해 7월 22일 정의구현 사제단은 서울 가톨릭 회관에서 기자 회견을 갖고, 전국 대학생 대표자 협의회 대표로 평양 축전에 참가하려고 방북한 임수경 (수산나)과의 동행 귀환을 위해 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파견했음을 공표하였다. 그로 인해 남국현(南國鉉, 요 한) 신부 등 3명의 사제들이 구속되었고 8월 15일 문규 현 신부도 임수경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한 즉시 구 속되었다. 같은 해 8월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서명 운 동을 시작하였고, 1990년 1월과 11월에 통일 문제 워크 숍을 개최하였다. 1990년대 이후 남북 교류, 환경 · 시민 사회 운동 : 정 의구현 사제단은 1991년 4월 30일 강경대 타살 사건과 관련하여 <한 젊은이의 죽음을 부른 폭력에 분노한다>는 제하의 성명을 발표하고 '국가보안법 철폐와 백골단 해 체' 등을 요구하며 단식 기도로 맞섰다. 7월 21일에는 '세상에 빛을 비추는 공동체' 라는 뜻의 주간 소식지 <빛 두레>를 창간하였다. 1993년 7월에는 프로테스탄트, 불 교, 원불교 등의 종교인들과 함께 '민족의 화해와 통일 을 위한 종교인 협의회' 를 창립하였고, 8월에는 사제단 부설로 빛두레 출판사를 설립하였다. 1994년 9월에는 명동 성당에서 사제단 창립 20주년 기념 미사와 기념 행 사를 개최하고, <우리 사회의 인간화를 위한 기도와 선 언>을 발표하였다. 1995년 11월에는 <5 · 18 특별법 제 정 촉구와 정치권의 도덕성 회복을 위하여>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평가를 촉구하고 정치권의 부정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1997년 4월부터 5 월까지를 북널 동포 돕기 1차 모금 기간으로 선정하여 하루 한 끼 찬밥 먹기 운동, 여가 및 유흥비의 십일조 운 동, 사제 쌀 10가마 보내기 운동 등을 전개하였고, 8월 에는 민주화 실천 가족 운동 협의회와 공동 주관으로 양 심수 석방 캠페인에 참여하였다. 1999년 7월 12일에는 국가 보안법 폐지를 위한 천주교 연대 기구 결성식을 가 졌고, 10월에는 '99통일 염원 한겨레 성찬제' 를 봉헌하 는 등 창립 25주년 기념 행사를 거행하였다. 정의구현 사제단은 2000년 6월 시민 단체들과 함께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 지위 협정(SOFA) 전면 개정과 매 향리 사격장 폐쇄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10 월에는 '남북 공동 선언 실현을 위한 한겨레 성찬제' 라 는 주제로 전국 각 교구의 사제 · 수도자 · 평신도 500여 명이 모여 남북 공동 선언 이행을 위한 성명서와 통일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생활 실천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북한의 조선 가톨릭 교 협회와 함께 안중근(安重根, 토마스, 1879~1910) 의 사 하얼빈 거사 90주기 남북 공동 기념 행사를 거행하였 다. 2002년 7월에는 미군 장갑차에 무참히 희생된 효 순 · 미선 양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천주교의 여러 단체들과 함께 기자 회견을 갖고, 형사 재판 관할권 이양 과 SOFA 전면 개정 촉구를 위한 시국 미사를 여러 신자 들과 함께 봉헌하였다. 2003년 3월에 이라크 전쟁 중단을 촉구하며 '전쟁 중 단 · 파병 반대 1차 평화 미사 를 봉헌하였고, 10월에는 송두율(宋斗律, 1944~ ) 교수 사건에 대한 종교인 기자 회견을 주도하였으며, 11월에는 '김현희 KAL 858기 사 건 진상 규명을 위한 천주교 신부 115인 선언' 을 이끌었 다. 2004년 4월에는 열차 폭발 사고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북한의 용천 주민을 돕기 위한 성금 모금 행사를 마 련하였다. 정의구현 사제단 창립 30주년이 되는 2004년 8월에는 30주년 기념 통일 기원 미사와 금강산 평화 기 행을 가졌고(8.23~27), 10월에는 창립 30주년 기념 행사 와 시노트 신부의 인민혁명당 사건 증언록 《1975년 4월 9일》 출판 기념회를 거행하였다. 한편 2005년 5월에는 기독교 회관에서 사제단이 주축이 되어 '유신의 심장' 을 쏜 김재규(金載圭, 1926~1980) 장군 25주기 추도식을 개 최하였다. 〔의 의〕 신앙의 증거와 친교 : 정의구현 사제단은 창립 25주년을 맞아 1999년 10월 5일 <사제의 고백과 다짐 을 발표하였다. 이는 사제단의 정체성을 공고히 표명하 고 앞으로의 지속적 실천을 밝히는 신앙고백 선언이었 다. 그 실천적인 골자는 민족의 일치와 화해, 정치 · 경 제 · 사회 · 문화 등 모든 면에서 공동선의 실현, 반(反) 민중적 종교 · 정치 이데올로기의 거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해방, 모든 양심인과 연대한 정의와 평화, 자유 와 평등의 실현 등이다. 신앙의 증거와 친교란 복음의 그 리스도를 철저하게 따르겠다는 다짐이다. 이는 사제들도 그리스도가 살았던 방식대로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며 사회 · 정치 · 경제 ·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하느님과 인 간의 불가분의 관계를 인지하고, 인간과 세상에 충실함 이 바로 하느님에게 충실함이라는 그리스도의 육화와 봉 사의 본질을 바로 '오늘 이곳, 이 땅에서' 재현하자는 다 짐이며 선언이다. 교회와 사회 : 하느님의 구세사는 인간의 삶 한가운데 서 이루어진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이집트에서의 노 예 생활, 바빌론 유배 상황의 재현임을 깨닫고 인간의 자 유와 존엄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과 체험임 을 자각하여야 한다. 사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야훼 하 느님을 체험한 것은 바로 오늘 억압과 불의, 착취와 차 별, 분단과 종속이라는 인간의 구체적인 상황과 조건에 서 하느님을 새롭게 체험하는 새로운 영성, 신학 운동의 길잡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사제단은 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과 더불어 성실한 삶을 지 향하며, 동시에 교회 공동체의 제도의 한계성을 넘어서 세상과 함께 세상 한복판에서 모든 이들과 손을 잡고 하 느님 나라의 외연성을 보편적 · 우주적으로 확대하면서 고통받고 있는 작은 이웃들의 벗이 되고 있다. 세상이 바 로 교회의 자리이며 발판이기 때문이다. 포용과 개방 : 1974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의 구현 사제단은 현실에 투신하면서 첫째, '민중과 함께, 역사와 함께' 하는 연대의 삶을 확인하여 하느님 백성으 로서의 교회 공동체라는 보편적 가치를 확인하였다. 둘 째, 프로테스탄트 형제 자매들과의 일치 그리고 불교, 원 불교 등 타종교와의 연대를 통해 교회 일치 운동과 타종 교와의 대화와 유대를 튼튼히 하였고 셋째, 학생, 교수, 노동자, 법조인, 문인, 언론인, 도시 빈민, 여성 등 여러 분야와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손잡고 일해 왔다. 또 한 불의에 맞서 정의를 실천하고 인간다운 삶을 이룩함 으로써 시민 단체와의 연대성 그리고 특히 비정부단체 (NGO)와의 상호 관계를 통해 인간화 실현과 실천이 바 로 복음화의 지름길, 아니 복음화 자체임을 확인하였다. 1970~1980년대 이후 많은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가 톨릭 교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정의구현 사제단은 이와 같이 사회적 투신을 통해 하느 님의 업적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많 은 남녀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과 선의의 모든 사람들이 정의구현 사제단과 함께 뜻을 같이하고 격려했기에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하였다. (⇦ 한국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 단 ; → 가톨릭 사회 운동) ※ 참고문헌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창립 25주년 기념 자료집》,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 1999/ 지학순 정의평화기 금 편, 《그이는 나무를 심었다》, 공동선, 2000/ -, 《한국천주교 의 위상》, 분도출판사, 1985/ 함세웅, 《멍에와 십자가》, 빛두레, 1993/ 함세웅 외, 《70~80년대 민주화운동의 증언 - 암흑 속의 횃 불》 1~8,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 1996~2004. 〔咸世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