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韓國天主教平信徒使徒職協議會

〔영〕Lay Apostolate Council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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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평협의 설립 25주년 기념식(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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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평협의 설립 25주년 기념식(1997년).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단체 가운데 하나. 서울시 중구 명동 2가 1 가톨릭 회관 5층 510호 소재. 설립 목 적은 복음적 사도 정신으로 회원 상호 간의 협력을 도모 하고 경험과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각 교구 평신도 사도 직 협의회와 단체들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데에 있다. 〔설 립〕 '평신도'를 뜻하는 라틴어 '라이쿠스' (laicus) 는 그리스어 '라이코스' (λαϊκός)에서 유래하였으며, 라 이코스는 성서에서 특별히 유다 백성을 사제들이나 관 헌들과 구분하여 지칭할 때 쓰던 '라오스' (Λαός)의 형용 사형이다. 96년경 글레멘스 1세(90/92~101?)는 이 라이 코스를 평신도라는 의미로 사용하였고, 2세기 말엽 알렉 산드리아의 글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150?~215?) 는 사제나 부제와 대비해 일반 신자를 지칭할 때 이 단어 를 사용하였다. 이후 라이쿠스와 연결되어 사용되는 단 어는 '대중' , '비전문가' , '저속한' 등의 의미를 내포하 게 되었다. 이러한 평신도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를 불식시키고 평 신도의 신분과 권리, 사명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 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였다.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 1964. 11. 21)에서는 평 신도를 '성세(聖洗)로써 그리스도와 한몸이 되고, 하느 님 백성 중에 들며, 그들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직, 왕직에 참여하여, 교회와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 백성 전체의 사명을 각자의 분수에 맞게 수행하는 신도 들' 이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 령>(Apostolicam Actuositatem, 1965. 11. 18)에서는 그리스 도 신자로 부름을 받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도직에 부름 을 받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즉 평신도들은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세속에서 누룩이 되어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하느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울러 평신도 사도 직이 한편으로는 '복음화와 인간 성화를 위하여 힘쓰 며' ,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 질서에 복음 정신을 침투시 켜 그 질서를 완성하도록 실제로 사도직을 수행' 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수행됨을 밝혔다. 이와 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와 사회 안 에서 평신도의 역할과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이 부각되 는 가운데 1967년 10월에 열린 제3차 세계 평신도 대회 에서 세계 평신도 기구의 결성이 논의되었다. 이에 따라 대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은 귀국 후 국내의 평신도 사 도직 협의회 결성을 추진하였고, 한국에서도 평신도 대 회에 참석하였던 황민성(黃旼性, 베드로) 주교, 유홍렬 (柳洪烈, 라우렌시오), 이태재(李太載, 마티아) 등을 중 심으로 전국적인 평신도 조직 결성이 추진되었다. 그 결 과 1968년 5월에 열린 주교 회의 임시 총회는 평신도 전국 연합회 구성 준비안을 승인하고 황민성 주교를 책 임 주교로 선임하였다. 황 주교는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 회(CCK) 사무국장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신부와 유홍 렬 등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결 성 준비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창립 총회를 앞두고 각 교 구장에게 소속 교구 평신도 대표 1명씩을, 전국 단체 지 도 신부들에게는 단체 대표 1명씩을 총회에 참석시켜 주 도록 요청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68년 7월 23일, 원 주교구를 제외한 11개 교구의 평신도 대표와 8개 단체 대표, 단체 지도 신부를 포함한 성직자 6명 등 총 27명 이 참가한 가운데 대전 대흥동 본당 강당에서 한국 가톨 릭 평신도 사도직 중앙 협의회(현 한국 가톨릭 평신도 사도 직 협의회)의 창립 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에서는 황민 성 주교를 총재, 김남수 신부를 지도 신부, 유홍렬을 초 대 회장으로 선출하였으며, 10월에 열린 주교 회의에서 인준을 받고 교황청 평신도 평의회에 결성 사실을 통보 함으로써 한국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중앙 협의회(이하 '한국 평협' )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활 동〕 출범 후 한국 평협이 첫 번째로 관여한 행사는 1968년 10월 6일의 시복식을 축하하기 위하여, 10월 3 일부터 열흘 동안 진행된 '병인년 순교자 24위 시복 경축 행사 였다. 평협에서는 주교단에 전국적 규모의 경축 행 사를 건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홍렬 회장이 집행부 부위 원장에 임명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1968년 10월 주교 회의에서는 평협의 인준과 동시에 대림 첫 주일을 '평신도 사도직의 날' 로 정하였다. 이에 따라 12월 1일 '제1회 평신도 사도직의 날' 행사가 서 울, 대구, 대전 등 6개 교구의 81개 본당에서 열렸다. 하 지만 1969년 10월에 열린 주교 회의에서는 대림 첫 주 일이 교회력(敎會曆)의 첫날이므로 평신도의 날로 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1970년부터 평신도 사 도직의 날을 연중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 왕 대축일 전 주일로 변경하였다. 모든 교구에 평협을 결성하는 일과 전국의 신자들에게 평신도 사도직 운동을 계몽하는 일에 매진하던 한국 평 협은 국제 교류에도 관심을 가졌다. 1970년 7월에는 유 홍렬 회장 등이 일본 동경(東京)에서 개최된 그리스도 교 아시아 개발 회의' 에 참석하였고, 이것을 준비하는 과 정에서 한국 기독교 협의회 대표들과 함께 '한국 교회와 사회 발전' 이라는 주제로 5월에 합동 회의를 개최하였 다. 여기서 양 교회는 한국의 사회 개발과 정의 · 평화를 위해 하나로 뭉쳐 적극적으로 일할 것을 다짐하는 5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1971년 2월에는 함께 '사회 개발 · 평화 한국위원회' (Sodepax Korea Committee)를 결 성하였다. 한편 평협에서는 순교자 현양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 서서, 한국 교회 창설 200주년이 되는 1984년 이전에 복자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시성과 신유박해 (辛酉迫害, 1801) 순교자들의 시복을 달성하는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1971년 8월에는 김대건 신부에 대한 시성 운동을 주교 회의에 건의하였고, 9월 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등과 함 께 김대건 신부 시성 촉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75년 11월에는 교회사학자, 교회법학자 및 평신도 지 도자들을 중심으로 순교자 시성 운동 자문위원회를 구성 하였으며, 12월에는 시성 · 시복식 발기 준비위원 모임 을 개최하였다. 이에 앞서 1974년 7월에는 평신도 교육 교재인 《생활하는 신앙인》을 출판하였고, 1975년 2월에 는 평협 중앙 사무국을 충무로 2가에 있는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 건물에서 동선동 2가에 있는 서울대교구 꾸 르실료 회관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1976년 6월에는 평신도 재교육을 개선하기 위해 피정 교재 《화해와 쇄신 을 위한 크리스찬 생활》을 출판하였고, 8월에는 본격적 인 출판 사업을 위해 자체 출판사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6월에는 회보인 <평협>(平協)이 창간되었으나 2호(1978. 1)까지만 발행되었고, 1978년 8월에는 평신도들의 의식 계발과 평신도 사도직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기 위해 제1 회 신앙대학 강좌를 개설하였다. 1982년 12월에는 제1회 전국 여성 문제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평신도 운동과 관련해서 여성의 자발적인 참여 문제를 논의하였고, 1983년 1월에는 사랑의 실천, 정의 의 구현 및 인류 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양심적으로 이바 지한 인사들을 선발하여 제1회 가톨릭 대상 시상식을 거 행하였다. 그리고 1983년 7월에는 믿음의 사회 건설을 위한 신뢰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특히 1985년 9월 에는 이 운동을 학문적으로 정립시키기 위해 '인간 회복 을 위하여' 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심 어 주기 위해 1986년 8월과 10월에 각각 공의회 문헌 연수회를 실시하였다. 1986년 11월 중앙 사무국을 가톨릭 회관(명동 소재)으 로 이전한 한국 평협은, 이듬해 평협의 기능을 축소하려 는 주교단의 방침과 이를 반대하는 평협 임원들 간의 의 견이 대립되면서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결과 1987년 3월에 열린 주교 회의에서는 새로운 회칙이 마 련될 때까지 한국 평협의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지시켰 다. 하지만 1988년 5월에 1984년도 회칙을 중심으로 하되 한국 평협이 중앙 집권적이 아닌 각 교구 평협과 단 체들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협의체의 성격을 갖는다는 개 정 회칙이 만들어지면서 활동이 다시 정상화되었다.1990년대 들어 평협은 1983년부터 추진해 온 신뢰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내 탓이오'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가을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사회 운동으로 확산되 어 많은 호응을 얻었으며, 이를 계기로 평협의 존재가 새 롭게 인식되었다. 1992년 8월에는 아시아 주교 회의 연 합회(FABC)와 함께 '평신도의 교회 생활 참여' 라는 주 제로 제3차 동아시아 평신도 회의를 수원교구 아론의 집 에서 개최하였고, 1994년 9월에는 교황청 평신도 평의 회, 아시아 주교 회의 연합회와 공동으로 첫 번째 아시 아 평신도 회의' 를 개최하는 등 연이어 국제 대회를 유 치함으로써 세계 각국의 평신도 사도직 단체와의 교류를 확대하였다. 이에 앞서 1992년부터는 '우리 상품 쓰기 운동' 을 전 개하는 가운데, 우리 농산물 먹기 · 우리 공산품 애용 등 의 실천 방안을 소개하고 권장함으로써 신자들의 생활 양식을 크게 변화시켰고, 1996년에는 '제자리 찾기 운 동' 을 주창하여 평신도로서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며 반 성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북한 선교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져서, 1998년 4 월에는 남북 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민족 화해 특별위원 회를 신설하였으며, 5월에는 류덕희(柳悳熙, 모세) 회장 이 처음으로 한국 평신도 공식 기구 대표 자격으로 북한 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평협의 발전 방향 모색' 을 주제로 전국 평협 창립 30주년 기념 세미 나를 개최하였고, 1999년 6월에는 대희년 맞이 평신도 대회에 앞서 '묵주기도 1억 단 바치기 운동' 을 전개하였 으며, 10월에는 '대희년 맞이 평신도 대회' 를 갖고 평 신도 선언문' 을 발표하는 등 새로운 세기의 사도직 운동 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아울러 대희년인 2000년 5월에 는 각 평신도 단체들과의 사귐 · 섬김 · 나눔의 한마당을 마련하였고, 10월에는 15개 교구 대표와 25개 전국 단 체가 참석한 가운데 '대희년 평신도 대회' 를 개최하였 다. 그리고 2001년 5월에는 '새천년 민족의 일치를 위 한 민족 화해 토론회' 를 개최하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논의하였고, 2004년 7 월에는 정 · 관계 및 시민 사회 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3 대 가족 사랑 실천 운동' 을 전개하였다. 2005년 현재 한국 평협은 생명 문화 건설의 중심인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세상' 운 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대학생 사목을 위한 세미나를 계 획하는 등 대학생들을 위한 효율적인 사목 방안 마련에 노력하고 있다. (→ 가톨릭 대상 ;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운동 ; 평신도 ; 평신도 사도직) ※ 참고문헌  <가톨릭신문> 2001년 6월 10일자 · 2004년 7월 25 일자 2005년 6월 5일자/ 《경향잡지》 1200호(1968. 3)/ 《제2차 바 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1978/ 《韓國 天主敎 平協 二十年史》, 韓國 天主教 平信徒 使徒職 協議會, 1988/ 《韓國 天主敎 平協 三十年史》, 韓國 天主敎 平信徒使徒職協議會, 1999. 〔梁仁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