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I. 선교사들에 의해 선도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Ⅱ. 일본인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Ⅲ. 한국인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韓國天主教會史研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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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교회사는 신학적 측면과 역사적 측면이라는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예수 그리 스도께서 친히 조직한 것이지만, 더불어 하느님과 인간 이 만나는 현실적인 조직으로서 역사적 기능을 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사 연구는 하느님의 측면을 보다 중시하는 신학적인 의식에 기반을 둔 연구와, 역사학적 의식에 치중한 연구의 두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전자 가 신학을 위한 구원사적 연구라면, 후자는 역사학을 위 한 인간사적 연구라 할 것이다. 종래의 한국 교회사 연구는 역사학적 측면에 치우친 감 이 없지 않았다. 즉 한국인의 천주 신앙 수용 문제, 교회 창설과 격심한 박해 · 금압 정책에 시달리면서도 꾸준히 발전한 과정과 순교자 현양 차원에서의 순교자 연구, 교 회와 국가와의 관계, 교회의 사회적 기여 등에 관한 연구 는 활발한 편이었으나, 순교 신심의 영성 연구나 초기 교 인의 신앙 생활의 내면적 변화, 천주 신앙 토착화의 연구, 수도회의 신심 연구 등 신학적 접근을 시도한 교회사 연 구는 부진하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성직자 · 수도자들 가운데서도 교회사 를 연구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연구 관심의 폭이 넓어지 고, 한국 천주교회사에 신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연구 도 늘어나고 있어 앞으로의 연구 성과가 기대된다.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연원에 대해서는 박해 시대 교회 당사자들의 순교사적 조사와 자신들의 교회를 해외 에 소개하기 위한 활동, 척사 벽위론자들의 위정 문헌 저 작이나 척사 문헌 집성 작업까지를 한국 교회사 연구의 차원에서 소급하여 다루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그러 한 활동은 선교적 필요에 의한 통신문 작성이나 척사 기 록의 집성 정도이기 때문에 학문적 연구 성과로 볼 수 없 다. 즉 학문 이전의 관심에서 얻어진 성과이기에, 연구사 의 입장에서는 한국 교회사 연구의 연원적 업적으로 규 정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조선 교회 사목을 담당하게 된 서양 선교사들이 선교 사목의 필요에 따라 사목 대상 인 조선과 조선 교회의 역사를 지적으로 연구하는 이른 바 '선교 사학' 에 의해 선도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에 의해 학문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물론 일제 하의 한국인이 조선 교회사 연구를 전혀 하지 않았던 것 은 아니나, 그것은 계몽사학 수준에 머물렀을 뿐이다. 한국 연구자들이 다각적 관심을 가지고, 또는 사목적 필요에 의해 한국 천주교회사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게 된 것은 8 · 15 광복 이후 '학문 연구의 주권' 이 회복되면 서였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60년을 두고 현대 사학과 신학 전공자뿐 아니라 주변 과학 연구자들이 자기 학문 과 연관되는 교회사 문제를 연구하여,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로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가 쌓였다. 연구자도 많아 지고 탐구 의식과 연구 방법도 다양해진데다 전문적 연 구의 핵심이 될 '교회사 연구소' 또한 여러 교구에 설립 되었고, 교회사를 연구하는 '학회' 도 여러 개 생겨나 각 기 나름대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학회지와 교회사 연구 성과를 담은 논문집, 전문서를 지속적으로 발간 · 유포하 여 연구 성과의 사회 기여에 이바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학계의 활발한 움직임과 더불어 그동안 다수의 가톨릭 신학대학이 설립되고, 교회사 강좌가 의무적으로 개설되 었며, 대학원 과정에서 교회사 관계 학위 논문이 늘어나 게 되어 성직자들의 한국 교회사 연구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I. 선교사들에 의해 선도된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선교사들은 사목적 필요에 의해서 선교 지역과 교회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1831년 조 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조선으로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 회 소속의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박해 정책하에서 지하 교회적 조선 교회를 사목하면서 조선과 조선 교회의 역 사, 그리고 무수히 배출되는 조선 순교자 사적에 대해 선 교적 애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조선 교회의 사정을 알고자 힘쓰는 한편, 조선 교회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자료를 수집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교 본부 와 교황청으로 송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를 토대 로, 달레(C.C. Dallet, 1829~1878) 신부가 저술한 최초의 조선 교회 통사인 《한국 천주교회사》(Histoire de I'Eglise de Corée)가 1874년 파리에서 프랑스어로 간행되었다.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1부에는 조선의 지리· 역사 문화 · 사회 · 민속을 소개한 한국학의 개설서적 내 용인 '서설' (序說)이, 2부에는 교회의 창설과 박해와 순 교자를 중심으로 한 조선 천주교회사의 개설적인 내용이 실려 있다. 저자인 달레 신부가 조선에 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오류를 범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 책 은 오늘날까지 교회사 연구의 기본 자료로 활용되고 있 다. 우리 나라에서는 교회사가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 신부와 프랑스어 교수인 안응렬(安應烈) 교수가 공역(共 譯)하고, 학문적으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서술 사실 과 관계된 한국측 사료를 운용하여 3,389개에 달하는 방 대한 각주(脚註)를 붙여 1980년 《한국 천주교회사》(韓 國天主敎會史, 전 3권)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한말 · 일제기에 조선 선교에 종사하던 선교사들은 선 배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한 관심이 컸다. 로네(A.C. Launay, 1853~1927) 신부는 이들 의 활동을 추적하여 프랑스 본국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사》(Histoire générale de la Société des Missions Étrangères) 와 《한국에서의 프랑스 선교사들》(Les Missionire Frangais en Corée)을 간행하였다. 전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역사 서이나 조선 교회에 관한 기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후자는 조선에서 사목에 종사한 프랑스인 선교 신부들의 전기이다.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 신자들과 함께 순교한 프랑스 선교사들도 있었다.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뮈텔 (G.-C.-M. Mutel, 閔德孝) 주교는 이들의 순교 사실을 추 적 · 조사하여 1890년 시복 사업 추진을 위한 조사록을 간행하였다. 그는 관변 기록과 교회 측 기록을 섭렵하고 목격자의 증언 수집과 유적 답사를 실시하여 파악한 내용 을 교회의 공(公)기록으로 간행하였다(Documentss relatifs aux Martyrs de Corée de 1846, Hongkong, 1924 ; Documents relatif aux Martyrs de Corée de 1866, Hongkong, 1924). 이 밖에 조선 순교자의 사적 조사 기록으로는 로네 신부가 엮은 《프랑스와 한국의 순교자들(1338~1846)》(Martys Français et Coréens〔1838-1846〕 Beatifies en 1925)이 있다. 한편 1920년경부터 한국 교회에 큰 흥미를 가지고 조선 교회사와 순교사적 조사 연구에 열중한 피송(L. Pichon, 宋世興) 신부는 라틴어로 《조선성교사료》(朝鮮聖教史 料, Pro Corea Documenta, 2 vols.)를 발간하였다.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발간 50주년인 1924년, 포 뤼에(E. Foruer)에 의해 《한국 천주교회사》 요약본이라 할 수 있는 《조선, 순교자와 선교사들》(La Corée, Martyrs et Missionaires)가 출간되었고, 드브레(E.A.J. Devred, 俞世 竣) 주교가 편술한 《조선의 가톨리시즘》(La Catholicisme en Corée)(부제 : 조선 교회의 발전과 그 기원)도 간행되었다. 이 저서는 서양인이 프랑스어로 엮은 우수한 한국 천주 교회사 입문서이자 개설서로 평가되었다. 한국 교회사에 관계되는 글을 한글로 가장 많이 발표한 피송 신부는 <조선 가톨릭사의 편영(片影)>이라는 글을 《가톨릭 청 년》에 3년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전반인 1933년까지 반 세기 이 상 조선 대목구장으로 재임하며 수도 한성 일각에서 파 란만장한 우리 민족사를 생생하게 목도한 뮈텔 주교는 거의 날마다 일기를 썼으며(이 일기를 보관 중인 한국교회사 연구소는 한글 번역판인 《뮈텔 주교 일기》를 계속 간행하고 있 다), 자신과 관계되는 공 · 사의 문서와 교회사, 순교자와 관계되는 기록은 물론, 자신이 직접 조선의 관변 기록을 섭렵하여 방취한 조선의 공사의 문서 등 수만 건의 기록 물을 후세에 남겼다. 이 문서는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 에 보관되어 있으며, 통칭 <뮈텔 문서>(Mutel 文書)로 부 른다. 한글 · 중문(中文) · 일문(日文)으로 작성된 4,000 건 가까운 동문(東文) 자료는 이미 조사 · 연구되어 학계 에 보고되었으며, 귀중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수 만 건으로 추정되고 있는 서문(西文) 자료는 일부만이 정리되었지만, 곧 연구 자료로 제공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 <뮈텔 문서>는 한말기의 교회사와 근대사 연구 에 크게 활용할 수 있는 고문서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Ⅱ. 일본인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한말 · 일제 강점기에 걸쳐 선교사들에 의해 선도된 한 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사목적 필요와 순교자 현양을 의 식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한국 천주교회사 를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당시의 일본 인 연구자들이었다. 이들이 한국 천주교회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였으나,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 쇼우다(小田省吾) · 다보하시 키요시(田保橋潔) · 스에마츠 카즈요시(末松保和) 등은 본래 교회사가가 아 니라 전공 학문과 연계되는 교회사 관계의 문제를 연구 하여 식민지 어용 사학 단체였던 청구학회(青丘學會)에 서 간행하던 《청구학총》(青丘學叢)에 그 결과를 발표한 것뿐이었다. 전문적으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전공한 야마구치 마사 유키(山口正之)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경성중학 교에서 교편을 잡고, 당시 조선 대목구장이던 뮈텔 주교 의 후원을 얻어 조선 교회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하여 본국으로 귀환할 때까지 15 년 동안 11편, 귀환 후 1964년 사망할 때까지 9편의 논 문을 발표하였으며, 두 권의 전문서인 《황사영 백서의 연 구》와 유고 논문집 《조선서교사)(朝鮮西教史)를 펴냈다. 그는 주로 조선인 북경 사행원과 재중(在中) 서양 선교사 와의 관계와 조선 교회 성립 문제, 초기 교회 순교자들을 연구하는 한편, 교회사 연구 자료에 대한 해제적 연구(세 스페데스 신부 서한, 구베아 주교의 서한, 황사영 <백서>, 《기해일 기》, 앵베르 주교 서한 등에 관한 연구)에 주력하였으며, 한국 천주교회사를 연구하던 일본인 학자 중 가장 돋보이는 연 구자였다. 1940년을 전후하여 아카키 진베이(赤木仁兵衛)와 이 시이 토시오(石井壽夫)의 한국 천주교회사 논문도 몇 편 발표되었으며, 부산에 거주하던 재야 연구자 구스다 오 노사부로(楠田斧三郎)의 《조선천주교소사》(朝鮮天主教 小史)는 일본인에 의한 최초의 한국 천주교사 개론서로 주목되었다. 일본 교회사 연구자인 우라가와 와사부로 (浦川和三郎) 주교는 1944년에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 사》의 순교사 내용 대부분을 초록한 《조선 순교사》(朝鮮 殉敎史)를 출간하여 이목을 끌었다. 이렇듯 일본인의 한 국 교회사 연구는 1930년을 전후하여 식민 사학계의 관 학 조선학 관계 교수들에 의해 시작되어, 일부 교회사가 와 성직자들로 이어졌으며, 평생 조선 천주교사만 연구 하던 학자도 있었다. 그러나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들의 연구는 이른바 '식민 사학적' 의식을 벗어나지 못 하였다는 한계가 있다.
Ⅲ. 한국인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현대적 연구의 태동-일제 강점기의 연구〕 이능화 (李能和, 1869~1943)는 계몽적인 근대 감각을 가지고 우 리 문화 다방면에 걸친 연구서를 10여 종이나 출간한 최 초의 한국 사학자이다. 그는 구한말 한법(韓法)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운 개화 인사로, 달레의 프랑스어판 《한국 천주교회사》를 읽고 천주교회사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 어 조선과 구미 각국과의 근대적 국교가 어떻게 열리게 되었는가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 당국의 역사 편찬 기관에 관계하고 있어 국가 기관의 옛 사료에 비교 적 자유로이 접근하여 다양한 역사 기록을 검토할 수 있 었던 그는, 교회사와 대외 교섭사의 문제를 다룬 《조선 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教及外交史)를 비롯하여 《조 선불교통사〉(朝鮮佛教通史), 《조선선교원류고》(朝鮮仙 教源流攷) 등 10여 종의 역사 연구서를 출간하여, 근대 사학으로의 길을 열어 준 계몽사가로 지목되고 있다. 《조선기독교급외교사》는 조선 후기 천주교의 수용과 박 해 문제에 관한 원사료(原史料)를 소개하면서 저자의 소 견을 첨가한 계몽적 입문서로, 후세 연구자들의 조선 천 주교회사 길잡이로 가치 있게 활용되었다. 1931년 경성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의 이름으로 출간 된 《조선천주교회약사》(朝鮮天主教會略史)는 100여 쪽 가량의 소책자이지만, 종래의 선교사가들이 한국 천주교 회의 기원을 일본 기리시탄(切支丹) 교회와 연관지어온 것과는 달리 한국인의 천주 신앙 터득과 교회 창설이 자 율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진 역사라고 서술하여 주목받은, 간추린 조선 천주교회의 통사서였다. 이 통사서의 저자 가 누구인지는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당시 청년회 연합 회 회보(會報) 발간에 관계하던 박준호(朴準鎬) · 장면 (張勉) · 김교주(金敎周) · 이의필(李義弼) 등에 의해 편 술된 것으로 추정된다(장면이 단독으로 집필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평신도 교회사 연구자인 김구정(金九鼎)은 야화나 설화 형식의 역사적 글을 《가톨릭 연구》나 《가톨 릭 조선》, <별>, <보감> 등 교회 간행물에 자주 발표하 여, 조선 천주교회 역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신자들의 계 몽적 관심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였다. 일제 강점기 한국 교회의 천주교회사 연구들이 계몽적이고 호교적인 수준 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계몽적 연구 를 닫고, 광복 후 비로소 현대 사학 방법에 의한 우리 학 자들의 교회사 연구가 가능해졌던 것이다. 〔광복 후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우리의 현대 사학 은 일제의 조선 강점기 동안 관학 기관의 일본인 학자들 이 주장하던 식민사학에 대항하는 민족사학으로 출발하 였으며, 그 저항적 특성 때문에 시작부터 일제의 간섭과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일제 말기에 이르러 서는 그러한 통제하의 연구마저 민족성 말살 정책의 일 환으로 금압되는 시련을 겪어야 하였다. 8 15 광복은 학문 연구와 국민 교육의 자주권 회복의 계기이기도 하 였으나, 광복 후 이른바 '해방 공간' 의 혼란과 뒤이은 한 국 전쟁 등으로 인해 연구가 계속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 었다. 그렇기에 한국의 현대 사학은 휴전 후에야 비로소 전통 사학의 맥을 잇는 연구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으며, 한국 교회사 연구도 이때부터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 사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어떻게 연구되었나 : 8 · 15 광복 이후 1950년대 전반 기까지 극도로 혼란스러운 사회에서도 한국 천주교회사 와 관련된 문제를 연구한 학자들이 있었다. 다만 그들이 교회사에 접근하면서 품고 있던 문제 의식은 천차만별이 었다. 조선 과학사를 전공한 홍이섭(洪以燮, 1914~1974) 은 과학사적 관심에서, 한국 사상사를 구상하던 박종홍 (朴鍾鴻, 1903~1976)은 사상사적 접근을, 개신교사 연구 자인 김양선(金良善, 1907~1970)은 교회 문화사적 접근 을, 유학 사상을 연구하는 이상은(李相殷)은 유학자의 입장에서, 역사학자인 한우근(韓㳓劤), 1915~1999)은 조 선 후기 사회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 연구와 관계 되는 교회사 문제에만 접근한 것이다. 특히 홍이섭은 조 선 서학사 연구에 도움이 될 연구 자료와 연구 문제에 대 한 선도적 글을 여러 편 발표하여 뒤이은 교회사가들의 새 연구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들과 달리 국내 최초로 한국 교회사를 전공하여 근 40년을 한결같이 한 국 교회사만을 연구해 온 연구자로 유홍렬(柳洪烈)이 있 다. 그는 1962년에 1,000여 쪽에 걸친 《한국 천주교회 사》를 출간하였다. 한말 이래 교회사를 연구한 선교사와 일제 시대 일본인 연구자 및 이능화를 비롯한 한국 교회 사의 계몽적 연구와 그 밖의 여러 선행 연구를 두루 소화 하고, 그 자신이 해방 전후부터 연구한 교회사 연구 결과 를 기초로 하여 엮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개설서였다. 이 는 한국학자로서, 또한 교회사 연구를 전공하는 연구자 에 의해 편술된 최초의 한국 천주교회 통사서로, 한국 교 회사 연구의 한 획을 그은 일이었다. 민족 해방에 힘입어 성직자와 평신도 연구자들에 의한 연구 활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주재용(朱在用, 바오 로) ·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와 김구정 등은 여러 교 회 출판물에 한국 교회사에 대한 글을 자주 발표하여 신 자들의 교회사 상식과 순교자 현양열을 진작하는 데 기 여하였다. 주재용 신부가 발간한 《천주사상(天主思想)과 제사문제(祭祀問題)》는 이후 조상 제사 문제와 천주교 신앙 문제의 선구적 연구로 주목받았으며, 《천주교회사 의 옹위(擁衛)》는 교회사 연구자들이 소홀하게 다른 사 료 운용에 날카로운 경고를 발하는 논설을 담은 저서로 관심을 받았다. 김구정은 1960년대에 《성웅 김대건전》 을 간행하여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인 김대건 연구를 선 도하였다.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의 창립 으로 새로운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즉 한국 천주교회 사 현대적 연구의 제2기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이때의 교회사 연구의 특성은, 일제 치하에서는 접근할 수 없었 던 다양한 국내 사료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개인 연 구만이 아니라 학회 · 연구소 등을 통한 집체적 공동 연 구가 활발해지고, 기성의 중진 연구자와 더불어 국내외 에서 교육받고 훈련된 신진 학자들이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와 사회, 교회와 정치, 교회와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쳐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교회사와 교회 문화에 대 한 연구 논문과 간행물이 양산되었다. 1964년에 창설된 한국교회사연구소는 당시 유럽에서 교회사를 전공하고 귀국하여 가톨릭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최석우 신부가 주 변 인물과 숙의하고 교회 당국의 협조를 얻어 한국 최초 로 건립한 교회사 연구소로, 한국의 교회사와 교회 문화 의 학문적 연구만이 아니라 연구 활동의 지원, 연구 자료 의 수집 · 집성 · 보장(保藏) 및 연구, 연구물의 간행 홍 보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교회 당국은 한말 · 일제 강 점기의 교회 문서들과 당시 뮈텔 주교가 휘집한 대량의 문서, 그리고 그의 일기를 연구소로 이관 조치하여 교회 사 연구소의 출범을 후원하였다. 출범 첫 사업으로 이관 받은 뮈텔 주교의 자료를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편 연구소는 <뮈텔 문서> 가운데 일부인 동문 사료를 분 석 · 연구하여 학계에 발표하였다. 뒤이어 <뮈텔 문서>를 한국 사학계에서 한국 교회사 연구와 한국 근대사 연구 의 학문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학계에 소개하는 한편, <뮈텔 문서>와 《뮈텔 주교 일기》를 순차적으로 한글로 번역하여 연구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정리 판독하고 연구 간행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각종 서양 언어로 작 성되어 있으며 그 양이 방대한 구문(歐文) 사료는 정 리 · 번역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일부는 교 회사 연구소의 간행물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으나 그 작 업이 완결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하다. 교회사 연구소가 설립되자 교회사가와 교회사 전공 연 구자들은 연구소를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연구 집회를 열 며 공동 연구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논문 발표, 세 미나 · 사료 윤독회 · 교회사 집담회 등을 통해 교회사의 집체적 연구에 힘쓰는 한편 사료 전시회 · 교회사 강좌· 교회사 공개 대학 등을 개최하여 시민 및 공부하는 학생 들의 한국 교회에 대한 계몽과 연구를 유도하기도 하였 다. 한편 연구가 축적되면서 귀중한 연구 성과를 월간으 로 간행되는 연구소 소보(所報)인 월간지 《교회와 역사》 로 펴내는 한편 《교회사연구》(敎會史研究)도 해마다 두 권씩 발간하고 있다. 정기 간행물과 더불어 '연구 자료 집' . '연구총서' · '기념 논총' · '교회사 논저' · '교회 사 연구총서' · '교구사 자료집' 등의 이름으로 연구 성 과를 집록하여 근 400종을 출판하였다. 또한 세계적으 로 수집한 사료나, 국내에서 수집한 귀중 자료를 휘집하 여 사료집으로 펴내는 한편 전문적인 연구 단행본을 계 속 간행하여 교계와 학계에 기여하였다. 이로써 한국교 회사연구소는 교회사 연구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연구 조직이자 새로운 교회사 연구자를 키워내는 기관의 역할 을 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는 40년의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독립된 법인체 연구소로 법적 지위를 굳히고, 서울대교구의 특수 사목 기관이면서도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적 교회사 연구소로 성장하였다. 설립자로서 40년 동안 연구소와 함께해 온 최석우 몬시놀은 다국 언어로 된 원사료와 국내 사료를 두루 활용하며 한국 교회 전(全) 시대에 걸친 연구에 몰 두하여 논문과 논설을 계속 발표하였고, 20여 종의 교회 사 전문 연구서를 출간한 한국 교회사 연구의 공로자이 며 원로이다. 교회사 연구소와 더불어 교회사가의 길을 걸어 온 이 원순(李元淳)은 본래 조선 서학사(朝鮮西學史)를 연구 하던 사학자였으나, 서학의 정신적 측면인 그리스도 가 치 체계의 조선 후기 사회 정착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게 되어 교회사 연구에 나섰다. 그는 사상사적 접근과 문화 론적인 연구 의식을 가지고 조선 후기 사회에서의 한역 서학서의 도입과 전통 지식인들의 서학서 검토 및 유교 지식인들의 보유론적인 천주 신앙의 수용, 신앙 공동체 의 형성, 초창기 교회의 내적 문제를 연구하였다. 교회사 전공자는 아니나 교회사 문제를 전공 학문과 관련지어 연구하는 금장태(琴章泰, 한국 유학사) · 하성래(河聲來, 한국 국어학사) · 박성래(朴星來, 한국 과학사) · 노길명(盧 吉明, 한국 사회학) 등은 교회 창설 전후의 문제를 자기 학문의 입장에서 연구해 왔다. 이들보다 다소 늦게 교회 사가로 두각을 나타내는 조광(趙班)은 광복 후 세대로, 교회사 연구로 국내에서 학위를 획득한 교회사가였다. 그는 여타의 신진 연구자와 같이 교회사에 대해 새로운 문제 의식을 가지고 다양한 문제를 연구하는 한편 젊은 연구자들을 이끌며 교회사 연구에 헌신하여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내놓았다. 또 보다 활발한 연구를 유도하기 위해 '연구 사료집' 을 여러 형태로 펴내면서 교회사 연구에 계속 공헌하고 있는 교회사 연구자이다. 한편 대학원 교 육이 점차 활발해짐에 따라 교회사를 전공하고 학위를 얻은 후 교회사가로 활동하는 연구자들이 계속 배출되고 있다. 프랑스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학위를 얻고 귀국한 김옥 희(金玉姬) 수녀는 한국 교회 최초의 여성 교회사 연구 자로,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 교인들의 신앙 수용 문제와 여성 신앙인들을 주로 연구하며 여성 수도자들의 교회사 연구의 길을 터놓았다. 이 밖에도 건축 공학의 김정신 (金正新), 서지학 연구자 배현숙(裵賢淑), 지리학 연구 자 노정식(盧禎植), 정치 사상적 접근을 시도하는 홍순 호(洪淳鎬) · 박광용(朴光用), 실학과의 문제를 추구하 는 이이화(李離和), 지방사 향토사적인 연구자 주명준 (朱明俊)과 재야의 지방 교회사 순교자 연구에 진력하는 윤광선(尹光宣) · 마백락(馬伯樂) · 김진용(金鎭龍) 등의 연구 성과도 주목된다. 1981년의 조선 대목구 창설 150주년이나 1984년의 조선 교회 창설 200주년, 103위 순교 성인 시성식 등을 계기로 교회 내는 물론 국내외에서 한국 천주교회를 주 목하게 되었고, 이는 그 역사를 성찰하는 연구가 활발해 지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교회 당국은 교회사 연구가 보 다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당부하고 나섰으며, 신자들 이 우리 교회의 역사와 순교자의 사적을 공부하도록 촉 구하였다. 이러한 교회사적 변화를 배경으로 한국인에 의한 한국 교회사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제3기 연구 단 계' 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제3기 연구 단계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 교회사 연구 조직의 다극화이다. 교구 중심의 교회사와 순교자 연구를 위해 전주교구의 호남교회사연구소, 대구 대교구의 영남교회사연구소, 부산교구의 부산교회사연 구소, 청주교구의 양업교회사연구소, 수원교구의 수원교 회사연구소 등이 순차적으로 창립된 것이다. 일찍이 변 기영(卞基榮, 베드로) 신부가 건립한 한국교회창립사연 구소도 활동하고 있으며, 오기선 신부에 의해 성지(聖 地) 연구원이 생겨나 각기 특색 있는 연구 활동을 추진 하게 되었다. 둘째,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위치가 더욱 공고해지고 그 연구 활동을 통한 교회와 사회 기여도가 제고되었다. 대 학 부설의 연구소로 출발한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사단 법 인체에 이어 재단 법인체로 성장하며 독립된 학문 연구 소로의 법제적 체제 강화 조치가 취해졌다. 그리고 이런 변화에 즉응하여 연구소의 기구가 개편 · 확대되고 전임 연구원제가 확충되는 한편, 편찬실을 신설하여 연구 성 과의 간행과 연구 자료의 편찬 공급 활동을 확대하고, 국 내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교회사 연구 사료 수집을 추 진하고 교회사 연구를 위한 전문 도서관을 확충하였다. 심포지엄 · 세미나 · 연구 발표회 등 학술 행사를 주도하 고 《교회와 역사》를 월간으로 발행하는 한편, 연구소의 학술지 《교회사연구》를 펴내고 있다. 이 밖에 '한국 교회 사 연구 자료집' , '교구사 자료집' , '본당사 자료집' , '교구장 문서 및 일기' , 성직자 저술 및 관계 도서, 성직 자 서한집과 연구 총서 등 중요 관계서 100여 권을 간행 하였으며, 월간으로 발행되는 《교회와 역사》는 교계와 사회에 한국 교회사에 대한 관심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공헌을 하였다. 연구소가 이처럼 핵심 연구 조직으로 발 전함에 따라,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교회사 연구자로 자리를 굳혀 전문 교회사 연구자로 자란 연구원들, 즉 차 기진(車基眞), 서종태(徐鍾泰), 원재연(元濟淵) 방상근 (方相根), 장정란(張貞蘭), , 윤선자(尹善子) 등이 교회사 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셋째, 교회사 연구를 주목적으로 한 연구 조직은 아니 나 교계와 학계의 사회 과학자, 신학자, 철학자들이 모여 조직한 여러 학회 조직, 즉 가톨릭 사회과학 연구회, 한 국신학연구소, 한국 가톨릭 철학회나 한국 가톨릭 문화 학회 등이 한국 교회사 관계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연구하여 교회사 연구에 기여하는 사례가 늘 어나게 되었다. 이들의 연구는 교회사 이해의 폭을 넓혀 주고 학제적(學際的)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특히 교회 내의 인사들이 설립한 가톨릭 사회과학 연구 회, 1999년 10월에 조광 교수 등이 발기인이 되어 조직 한 한국 가톨릭 문화학회는 한국 교회사와 연관되는 문 제를 자주 다루어 교회사 연구에 기여한 바가 컸다. 근래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사상사학회도 천주 교 문제에 각별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우수한 연구 결과를 산출하고 있어 주 목받고 있다. 넷째, 교회사 연구 인력이 대폭적으로 증가하고, 연구 주제가 매우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대학원 교육이 확충 되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교회사에 접근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학위 취득자가 증가하였다. 신학교 교수들 가 운데서도 국내외에서 한국 교회사를 연구하고 학위를 취 득한 성직자가 증가하였다(최기복〔崔基福〕, 김성태〔金聲泰〕, 윤민구〔尹敏求〕, 장동하〔張東河〕, 전수홍〔全壽弘〕, 여진천〔呂珍 千〕, 한건〔韓健〕, 이석재〔李錫載〕 신부 등). 이들은 계속하여 한국 교회사를 연구하거나 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다섯째, 한국 가톨릭의 학문 연구자와 문화인들의 총 화적 노력으로 《한국가톨릭대사전》이 간행되었다. 교회 사 연구소는 한국 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학술회의와 심포지엄 · 세미나 등을 주최하는 동시에, 긴 세월을 두고 평가될 기념 사업으로 한국 교회사상 초유 의 《한국가톨릭대사전》 간행을 추진하였다. 당시 한국 천주교회에 대사전을 제작할 정도로 전문적인 인력이 있 는가 하는 우려의 소리도 있었으나, 교회 내의 지적 능력 을 총동원하여 본권과 부록 그리고 후에 보완 작업으로 간행된 보유편 3권으로 된 《한국가톨릭대사전》을 펴낼 수 있었다(1985). 이 사전은 비단 한국에 관한 항목만이 아니라 세계 교회에 관한 내용도 상당수 수록하고 있어, 외국의 가톨릭 사전과는 편집 내용이 다른 한국만의 독 특한 가톨릭 대사전이었다. 비록 부록과 보유록을 가진 단권의 사전이었으나 한국 가톨릭 교회의 문화적 역량의 향상과 인재력 성장을 인식시켜 준 문화 사업 성과로 평 가된 단권물 대사전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사연구소는 단권의 대사전에 만족하지 않고 전 12권으로 편간될, 문자 그대로의 《한국가톨 릭대사전》의 간행을 기획하고 1993년부터 매년 한 권씩 간행 · 배포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정신 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정부의 전적인 지원하 에 다년간에 걸쳐 편찬 간행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버금가는 대사전으로 한국 교회사만이 아니라 세계 교회 사 사전을 합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간행 과 정에 여러 어려움도 많았으나, 교계는 물론 학계의 주목 을 받으며 2006년 초에 완간되었다. 《한국가톨릭대사 전》 편찬은 그동안 방대하게 축적된 교회사 · 교회 문화 에 대한 연구 업적과, 수많은 항목을 다룰 수 있는 전문 적 연구자가 있음으로써 가능한 일이기에, 한국 가톨릭 교회의 문화적 역량을 과시하는 귀한 결과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대사전은 교회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사회적 저변 확대에 기여할 것이며, 연구자에게도 편의를 제공 해 줌으로써 교회사 · 교회 문화 연구가 보다 촉진될 것 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섯째, 연구 인력과 연구 조직 증가, 교계와 정부의 연구 지원 강화, 연구 시설의 확충과 자료의 자유로운 접 촉 등으로 노장 연구자는 물론 신진 소장 연구자들의 개 인적인 연구와 학제적인 공동 연구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런 사정은 이 시기에 발표되는 연구 논문의 수가 해마 다 늘어나고 연구자들이 다루는 연구 문제가 다양해졌으 며, 연구 수준이 종래에 비할 수 없이 향상되고 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귀한 연구 사료를 소개 연구한 '자료 집' 도 여러 형태로 간행되었다. 다년간 교회사를 연구해 온 성과가 쌓이자 그 연구 성과를 토대로 개인의 연구서 를 간행하거나, 개인의 논문을 묶어 출판하는 연구 논문 집 등의 출간이 늘어나 단행본 전문 연구서와 논문집이 해마다 10종 가까이 출간되고 있다. 이 시기에 또 주목할 점은 외국인 연구자들 또한 한국 교회사 관계의 논문을 발표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인 스 즈키 노부아키(鈴木信昭) 교수가 한국 교회사 관계의 문 제를 연구하여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미국인 베 이커(K. Baker) 교수가 실학 연구에 관련된 논문을 발표 하였다. 한편 일본 예수회 소속의 루이즈 메디나(J.G.Luiz de Medina) 신부는 '조선 천주교회 임란 기원설' 을 발표하여 격한 논쟁을 불러왔다. 조선 교회 임란설은 과 거 일본 기리시탄사를 연구하는 선교사가들이 주장하던 것으로, 사료 운용과 감정 이입의 문제로 신빙성이 없는 무리설이다. 일본에 강제 납치당한, 이른바 조선인 부로 (俘虜)의 상당수가 기리시탄 신앙을 수용한 것은 사실이 지만, 그들의 신앙 생활은 교정(敎政)상 일본 기리시탄 교회의 문제이지 조선 교회 창설의 선행적인 존재로 규정 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은 그들이 한 국 천주교회의 기원을 이룬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사 연구의 현재 : 8 · 15 광복으로 학문 연구의 자 주권이 회복된 후부터 오늘날까지 60년에 걸친 연구로 한국 천주교회사 관계의 많은 문제가 밝혀졌다. 조선에 앞서 일본이나 중국에 먼저 자리를 차지한 여러 선교 조 직이 한반도에 선교 공작을 추진하고자 한 것은 사실이 었으나 이러한 노력들은 모두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한 반도의 천주 신앙은 조선 후기의 전통적 지식인들이 학 문 활동을 통해 신앙을 깨우치고 자율적으로 천주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신앙 실천 생활을 시작하게 됨으로써 개교(開敎)된 것임이 확인되었다. 조선 후기 사회의 유학 을 배경으로 한 지식인들이 천주 신앙을 접할 수 있었던 정보 자료는 조선이 해마다 중국에 파견하는 사대 사행 원들에 의해 조선에 들어온 '한역 서학서' 였으며, 조선으 로 유전된 초기의 한역 서학서가 어떤 것이었는가도 파 악할 수 있었다. 그 한역 서학서, 천주교서를 가까이 한 조선 후기 사회 지식인에 관한 사례 연구를 통해, 사상사 와 문화론적인 측면에서 조선 후기 사회의 전통 지식인 들의 보유론적 천(天) 신앙의 깨우침이 선유(先儒)의 천 사상과 한역 서학서의 천주와의 접합적 이해를 통해 이 루어졌음이 밝혀졌다. 당시 성리학을 넘어설 '실' (實)의 유학을 탐구하기 위해 고유(古儒)의 경서(經書)를 깊이 있게 검토하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역 서학서를 학문적으로 검토하던 일부의 실학적 유교 지식인들의 신 문화 수용의 한 모습으로 천주교가 조선 후기 사회에 자 리를 차지하게 된 과정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 교회 창립사의 특성을 규정지을 수 있었다. 조선 교회는 조선 후기 사회의 전통 지식인들의 실학 적 학문 활동을 통해 보유론적인 가치 의식을 가지고 천 주 신앙을 깨우쳐 자율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고 신앙을 실천하기 시작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리스도 사도 전승의 교회로서의 인적 조건인 성직제가 없었던데다 보유론적이고 영합주의적인 문화 의식에 터 전하였다는 한계를 가진 교회였다. 그러나 조상 제사 문 제로 발발된 진산 사건(珍山事件) 이후 참 그리스도 사상 에 터전한 천주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었고, 끊임없이 성 직자 영입 운동을 벌여 마침내 주문모(周文謀, 바오로) 신부를 모시게 됨으로써 이러한 한계성은 완전히 극복되 어 사도 전승 이래의 가톨릭 교회와 일치를 이룬 한국의 천주교회가 되었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발전 과정도 연 구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초창기에는 양반 지식 중심 교 회에서 출발하였으나 박해가 거듭되는 가운데 보유론적 으로 천주 신앙을 수용하였던 양반 신자들이 대부분 빠 져나가고, 남아 있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심산 협곡으 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고 살아가게 되었다. 따라 서 신앙을 가진 양반들은 더 이상 양반의 지체를 유지할 수도 없었고, 세도 정치의 토색에 시달리던 향촌 사회인 들이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천주 신앙의 대중화가 진행되었음을 사회 과학적 방법에 의한 연구로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1세기나 계속되는 박해의 역사 적 배경과 원인을 사상적 · 사회적 · 정치적으로 추적하여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수백 년간 조선 사회를 엄습한 여 러 박해의 전개를 추적하여 개별적 특성을 규명하였으 며, 박해로 발생한 순교자들의 순교 사적과 순교 영성에 관한 연구도 활발하였다. 한편 꾸준한 성직자 영입 운동 을 통해 조선 대목구가 설정된 사정, 그후 조선 교회 선 교와 사목을 위임받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과 박해에 희생된 프랑스인 순교자들의 사적이 연구되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한 조선 교회의 자구적 활동과, 이를 빙자한 서구 식민 세력 국가의 통상 요구로 인해 양요 (洋擾)라는 무력 충돌이 일어났으며, 이것이 박해를 심 화시키고 더 많은 순교자를 양산하였음도 연구되었다. 실제로 신앙의 자유는 평화적인 외교 절충에 의해, 비록 외교적 약정이 미비하고 오랫동안 지속된 박해의 관행 등으로 교안(敎案) 문제가 일어났지만 그러한 과도기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구현된 것이었다. 100년간의 박해 시대의 교회, 천주 신앙이 조선 봉건 사회 부식과 현대화 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는가 또는 반대로 한국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체계로 작용했는가의 상반되는 견해는 전자 의 의미가 보다 크다는 방향으로 정리되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하의 한국 교회사의 문제와 해방 후 한반도 내의 교회사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로, 손이 미치지 못하 고 있다. 일제 강점기 한국 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으며, 광복 후 한국 전쟁 당시의 한국 교회사와 희생자 들에 대한 사실 파악 역시 미흡하다. 교회 문화에 대한 천착적 연구도 필요하고 정의 사회 운동, 가톨릭 노동 운 동도 더 연구되어야 한다. 각종 신심 활동에 관해서도 학 문적 차원에서의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역사학 측면 의 교회사 연구의 성과에 비해, 신학적 측면의 한국 교회 사 연구는 극히 부진하였다. 역사 과학에 의한 연구 못지 않게 종교학과 신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연구도 활발해야 하고, 동시에 역사 과학 · 사회 과학과의 학제적 연구가 활발해져야 한국인의 천주 신앙의 참습을 파악할 수 있 을 것이다. 광복 후 50년에 걸쳐 증대한 한국학적 관심과 교회사 적 관심을 통해 종래 접근이 어려웠던 귀중한 사료를 섭 렵하고, 현대적 연구로 축적된 연구 성과를 집성하여 새 로운 차원의 '한국 천주교회사의 통사서' 가 새로 저간되 어, 한국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사회적으로 정착시 켜야 한다. 국내외의 원사료 활용에 의한 연구를 진전시 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의 인식 수준을 넘어서고, 주로 국내 사료를 통한 연구의 집성 대계화로 꾸며진 유 홍렬의 '한국교회통사서' 를 넘어설 제3의 한국 천주교 회사의 결정판이 조기에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현대 한국의 교회사 연구의 앞날은 밝다. 왜냐하면 첫 째, 교회사 연구를 위한 연구소와 학회 조직이 다수 설 립 · 개설되어 귀한 연구 성과를 펴내고 있으며, 전공 학 문을 달리하는 연구자들이 뜻을 모아 한국 교회사의 특 정 문제를 연구하기 위한 집체적 조직을 이루고 공동 연 구를 진행하여 새로운 연구 성과를 창출하는 활동이 큰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좋은 예가 '한국 근현대 가톨릭 연구단' 의 연구 활동이다. 이러한 집체적 연구는 앞으로도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둘째는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해외 사료 수입을 계획적으로 추진 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연구 자료만이 아니라 한국 교회 와 관계가 있었던 여러 선교 단체, 즉 파리 외방전교회, 베네딕도회, 골롬반회, 메리놀회 등의 관계 원사료가 상 당량 축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해외 사료는 다국 어로 작성된 원사료이기에 현대인들이 읽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려운 사전 작업이 필요하지만, 한국 교 회사 연구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연구 자료로 기대되고 있다. 한편 한국 순교자 현양회는 순교사적 연구 자료로 국내외 관계 자료의 국역 간행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여 20여 권의 자료집을 완간하였고, 호남교회사연구소나 서강대학교 사학과도 교회사 연구 자료의 국역 간행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종래의 연구는 국내 사료와 일부 관계 외국인들의 기록 에 의해 운영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 여러 선교 조직의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연구가 진행되면서 한국 천주교 회사 연구는 제4기 연구 단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고, 종 래의 연구와 새로운 연구가 종합 체계화될 때 한국 천주 교회사의 결정판이라 할 통사서가 탄생될 수 있다고 믿기 에 앞으로의 연구가 더욱 기대되는 바이다. 한국 교회사 연구는 국내외의 연구 자료를 모두 활용하는 것으로, 학 제적 검토를 위해 집체적 협동 연구가 활발해져야 할 것 이다. (→ 달레 ; 한국교회사연구소 ; 《한국 천주교회사》) ※ 참고문헌 차기진 · 윤선자 · 조광 · 강인철, <한국 천주교회 사 연구 회고와 전망>, 《 최석우 신부 수품 50주년 기념논총 제2 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李元淳, 〈韓國天主敎會史 研究 小 史〉, 《韓國教會史論叢 : 崔奭祐 神父 華甲紀念》, 한국교회사연구 소, 1982/ 琴章泰, 〈旣在研究史 分析-天主敎〉, 《韓國宗教研究史 및 研究方法》,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4/ 金壽泰, 〈日人 의 한국천주교회사 연구- 1996년까지의 연구를 중심으로>, 《부 산교회사연구보》 9, 부산교회사연구소, 1996/ 趙珖, 《韓國天主教 會史 論著의 整理》, 현암사, 1997. 〔李元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