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타리파

〔라 · 영〕Cathari · 〔그〕Kathar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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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중엽 이후 동방으로부터 전래되어 서방의 여러 나라에 퍼져 한동안 번성하였던 새로운 마니교적 이단자들. 그들을 마니교도(Manichaei)로 부른 것은 가톨릭 측의 반대파들 내지는 동시대인들이었고, 이단자들은 그들 자신을 윤리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순결하다고 하여 '순수파' 로 불렀다. 순수를 뜻하는 '카타로이' (Katharoi)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이다.
〔기원과 발전〕 발칸 반도에서 보고밀파(Bogomili)로 알려진, 이원론(二原論)적이고 금욕주의적인 이 이단은 상인들, 특히 십자군의 기사들을 통해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에 급속히 전파되었는데,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서 추종자들을 많이 얻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남쪽에 그 교도들이 제일 많았는데, 여기서 그들은 알비파(AIbigenses)로 불렸다. 12세기 말까지 카르카손느(Carcassonne), 툴루즈(Toulouse) 알비(AIbi), 아쟝(Agen) 등 4개의 교회와 4명의 가타리파 주교가 있었다. 프랑스 북부에도 침입하였으나 교도가 소수였고 주교도 한 명뿐이었다. 그 다음으로 가타리파가 많았던 곳은 북이탈리아였는데, 여기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파타리니파(Patareni)로 불렸다. 6개의 교회와 6명의 주교가 있었는데 그중 콘코레소(Concorreso)가 가장 컸었다. 가타리파의 최고 기관은 공의회였는데, 이 회의가 이미 1167년생 펠릭스 드 카라망(St. Felix de Caraman)에서 열려 이원론을 공식 신조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 공의회에 동방에서 니체타스(Nicetas)라는 가타리파 주교가 참석했었다.
〔교리와 조직〕 교리의 골격은 보고밀파의 이원론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후에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다. 강 경파는 절대적인 이원론자들로서 선과 악의 두 원리의 존재를 인정하고, 선의 원리에서는 천사와 영혼들의 영적인 세계가, 악의 원리에서는 물질 세계가 나온다고 주장하며 두 개의 원리를 대립시켰다. 그러므로 물질 세계는 그 창조주처럼 근본적으로 악한 것이다. 반면 온건적 이원론자들은 물질 세계를 지배하는 악의 원리를 악신(惡神)으로까지 보지는 않았다. 이원론은 나중에(1167) 교리로 결정되기까지 처음에는 윤리 생활에서만 실천되었다. 물질은 악신이 만들어낸 것이고 따라서 영혼도 육체 안에 감금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가타리파에게는 영혼을 이러한 물질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최고의 이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물질이나 육체와 관련된 것이라면 결혼, 성교, 육식 등 모든 것을 무조건 배척하고 죄악시하였다. 그 결과 가타리파는 사회의 기반까지 위협하게 되었으므로 교회와 국가가 다 함께 그들을 공격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만이 '그리스도교 인' 이라고 자처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를 '하느님의 교회' 로, 가톨릭 교회는 사탄의 회당이라고 비난하고, 가톨릭의 성사도 부인하였다.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구원 방법을 계시하려 왔지만 그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간이 구원되는 것은 아니고 가타리파에 입교하여 완전한 금욕을 통해 물질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구원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가타리파에 의하면 그들의 교회는 '콘솔라멘툼' (con-solamentum)을 받은 자들만으로 구성된다. 콘솔라멘툼은 그들의 유일한 성사로서, 성령 세례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톨릭의 물 세례를 거부하였다. 콘솔라멘툼은 물질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이고 구원의 확실한 방법이다. 그것을 받으면 '완전자' (perfecti)가 되고 그때부터 엄격한 가난과 금욕의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완전자가 되려면 오랜 시련 기간이 요구되었으므로 대다수는 소위 단순한 '신자' (credentes)로 머물러야 하였다. 그들은 죽을 때에 가서야 콘솔라멘툼을 받을 수 있는데 그때까지는 일정한 윤리 규정 없이 다만 그들의 신앙을 따라 구원을 믿으며 생활하면 되었다. 가타리파 교회는 주교와 부제로 구성된 교계 제도였다. 교회마다 주교와 부제가 있었고 주교는 2명의 보좌(Fillius maior et minor)를 거느리고 있었다. 주교와 부제는 의식과 전례를 주재하고 특히 안수로 콘솔라멘툼을 집전하였다. 의식과 전례에는 초기 가톨릭적 요소가 많이 침투되어 있었다. 이렇게 교계 제도와 전례가 중시됨에 따라 처음의 복음적 가난의 요구가 후퇴하게 되었다.
〔소멸과 의의〕 가타리파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복음적 순회 설교와 엄격한 생활은 선의의많은 신도들을 감격시키고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추종자들은 가난한 농부들이거나 직공들이었으며 귀족들도 있었다. 그들은 세금을 안 내도 되고, 때에 따라서는 교회 재산도 약탈할 수 있다는 이점에서 가타리파에 들어갔다. 이러한 이점과 '완전자' 들의 모범적인 생활은 도처에서 가타리파의 급증을 초래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를 위기에 처하게 하였다. 로마 교회는 처음에 설교나 수도자의 파견 등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교회로 돌아오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성과가 없자 십자군의 파견이란 무력에 호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실패로 돌아가자 종교 재판의 이단 심문 방법으로 그들을 사정없이 추적하였으나 그것도 많은 세월이 요구되었다. 한편 종교 재판보다는 도미니코회와·프란치스코회 같은 탁발 수도회에서 대안(代案)으로 제시한 청빈 정신과 청빈 생활이 더욱 효과적인 방법으로 작용하였다. 동시에 가타리파 자체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점점 침체되어 가면서 전반적인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어쨌든 가타리파는 13세기 말에 거의 소멸되었다.
중세 초기, 교회 안에서 사목상의 많은 결함이 나타나는 한편 교회가 복음적 가난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개혁가들의 외침이 점점 커졌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가타리파들은 복음적 가난과 엄격한 금욕 생활로 대답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였다. 실제로 그들은 많은 공감을 얻으면서 영적 부흥의 자극제 구실도 하였다. 로마 교회도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세계관을 신조로 정의하고(구약의 해석, 스콜라학)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견지(청빈, 평신도 사도직, 탁발 수도회)에서 사목에 헌신하도록 하면서 교회를 이중적으로 방어하는 동시에 긍정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되자 가타리파는 더 이상 그 존재 이유를 잃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 카타리파)

※ 참고문헌  R. Nelli, Écritures cathares, Textes originaux traduits et commentés, Paris, 1959/ S. Savini, Il catarismo italiano ed i suoi vescovi, Fi., 1958/ J. Guirand, Histoire de l'Inquisition au Moyen Age, t. 1. Paris, 1935/ É. Griffe, Cathares, Catholicisme/ -, Albigeois, Catholicisme. 〔崔奭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