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 보상 운동
國債報償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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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경향신문> 논설에 게재된 국채 보상론.
1907년에서 1908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권 회복 운동의 하나. 1894년 청일 전쟁(淸日戰爭) 이후 일 본은 1906년까지 조선에 차관 공세를 펴 경제적 예속을 획책하였으며, 특히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韓日協約) 이 체결된 뒤에는 차관 공세를 더욱 노골화하여 네 차례 에 걸쳐 1,150만 원의 차관을 공여함으로써 조선의 경 제를 식민지화하려 하였다. 이에 1907년부터 전국적으 로 경제적 독립을 위해 국민의 성금으로 차관을 갚자〔國 債報償〕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운동은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 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墩)의 단연(斷煙)을 통한 모금 운동으로 시작되어 곧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각 언론사와 일반 자생 단체들도 여기에 자발적으로 참 여하였다. 이때 양기탁(梁起鐸)과 베델(E.T. Bethell, 裵 說)이 이끄는 대한 매일 신보사(大韓每日新報社)에서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은 개화기의 지도층 인사들은 물론 지방의 유림들, 노동 자 · 기생 · 백정 등 하층민에게까지 퍼져 나가 1907년 4 월과 12월 사이에 특히 많은 의연금이 모금되었다. 그러 나 운동 자체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져 통일된 역량을 이 끌어낼 수 있는 단체가 없었던 데다가 일본 통감부(統監 府)의 획책과 방해 책동이 심하여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그 동안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본래 이 운동을 시작한 서상돈(아우구스티 노)은 대구 본당 초기의 신자로 본당 정착에 노력해 왔 고, 동시에 일찍부터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 공동회 (萬民共同會)의 간부로 조선의 자주 · 자강 운동에 앞장 서 온 사람이었다. 이후 그는 국채 보상 운동을 주도하면 서 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이 운동에 동참할 것을 적극 권 장하였다. 특히 <경향신문>(京鄉新聞)에서는 1907년 4 월 12일자의 논설에서 이 운동을 대대적으로 홍보한 뒤 전국의 신자들로부터 의연금을 모금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명단을 일일이 신문에 게재하였다. 그 결과 시간이 지 나면서 점차 이 운동은 전국 교회로 번져 가게 되었으며, 1908년까지 많은 신자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08년 7월경 운동 자체가 좌절되면서 교회 안 에서 일던 모금 활동도 중지되고 말았다. ※ 참고문헌 〈京鄕新聞〉/ 李松姬, 〈韓末 國債報償運動에 關한 研究究>, 《梨大史苑》 제15집, 1978/ 대구대교구사 편찬위원회, 《大邱 本堂百年史》, 대건출판사, 1986. 〔車基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