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 교섭사

韓佛交涉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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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불 조약 이후 자유롭게 군인들과 담소하는 선교사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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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불 조약 이후 자유롭게 군인들과 담소하는 선교사들의 모습.


한국과 프랑스의 공식적인 교섭은 1886년 한불 수호 통상 조약(韓佛修好通商條約)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종 교를 통한 비공식적인 접촉은 그 이전부터 있어 왔다. 그 리고 중국의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일찍부터 조선이 프랑스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1235년 몽고군이 유럽 원 정을 결의한 뒤 러시아 · 폴란드 · 헝가리를 공격하자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3~1254)는 몽고 조정 에 특사를 파견하여 우의를 다졌고, 프랑스 왕 루이 9세 (1226~1270)도 두 번에 걸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 중 1254년에 몽고에 간 프랑스인 뤼브뤼크(Rubruc) 수사는 귀국 후 저술한 여행기에 조선(Kaule)에 대한 간단한 이 야기를 수록하였다. 프랑스가 선교사들을 다시 중국에 파견한 것은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1661~1722) 때로, 당시 중국에 온 예수 회원들은 지리학자, 어학자로 중국 조정에 큰 도움을 주 었다. 이들 중에는 레지스(J.B. Régis, 雷孝思) 신부와 같 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조선을 연구한 학자도 있다. 그 는 강희제가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의 편찬을 위촉 하자, 1709년에 조선과 만주의 국경을 측량한 자료와 청의 역관들이 조선에서 가져온 조선 지도를 토대로 《조 선 왕국의 지리와 역사》를 편찬하고 <조선 왕국도>(朝鮮 王國圖)를 작성하였다. 이것은 이후 예수회원 뒤알드 (J.B. Du Halde)의 《중국지》(中國志, Description gé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L'Empir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chinoise)에 수록되었으며, 프랑스의 왕실 지리학자인 당빌(D'Anvile)은 <조선 왕국도>를 바 탕으로 1735년에 <조선국도>(朝鮮圖)를 작성하였다. 이 외에 레지스와 동행하였던 자르투(Jartoux, 杜德美) 와 프리델리(Fidelli, 費隱) 신부는 조선에 선교할 희망으 로 만주 지도를 작성하였고, 또한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고빌(Gaubil, 宋君榮) 신부는 선교할 의사를 나타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100년간의 전례 논쟁과 예수회 해 산(1775) 등으로 프랑스의 포교 활동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과 프랑스의 만남〕 한국과 프랑스 양국인의 실질 적인 만남은 18세기 후반에야 이루어졌다. 1783년 아버 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간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북당(北堂)에서 프랑스 예수회원인 그랑몽(J.-J. de Grammont, 梁棟材)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은 것이 그 시 초이며, 이후 1789년과 1790년에 북경을 방문한 윤유 일(尹有-, 바오로)도 로(N.J. Raux, 羅廣祥) 신부 등 프 랑스 선교사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다가 1831년 조선 대 목구가 설정되고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조선 선교를 담당 하면서 선교사들이 직접 조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프랑스 사람으로 가장 먼저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한 선교사는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신부였다. 그는 1836년 1월에 입국하였으며, 1837년에 입국한 샤스탕 (J.H. Chastan, 鄭牙各伯) 신부, 앵베르(L.-J-M. Imbert, 范 世亨) 주교와 함께 1839년에 순교하였다. 그러나 이후 에도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은 계속되어 1845년 에는 페레올(J.-J.-J.-J.B. Ferréol, 高) 주교와 다블뤼(M.N.A. Daveluy, 安敦伊) 신부가 입국하고 이어 메스트르(J.A.Maistre, 李) 신부, 베르뇌(S.F. Berneux, 張敬一) 주교 등 이 차례로 입국하여,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 어나기 직전까지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는 12명에 달하였다. 이처럼 한불 관계의 첫 장을 연 선교사들의 종교 활동 은 한국과 프랑스 양국이 접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로 3명의 선교사가 처형되 자, 프랑스에서는 1846년 중국 · 인도 주둔 프랑스 함대 사령관이었던 세실(J.B.T.M. Cécille, 瑟西爾)을 보내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다. 이때 세실은 조선에서도 중국 과 맺은 황포 조약(黃埔條約) 수준의 조약을 체결하여 천주교도의 처우를 개선하려 하였지만, 선교사들을 살해 한 이유를 묻고 그에 대한 회답은 내년에 와서 받겠다는 내용의 서한만을 남기고 돌아갔다. 1847년 8월 라 피에 르(La Pierre, 拉別耳) 해군 대령이 세실이 전한 서한에 대한 회답을 받기 위해 만경(萬頃) 땅 신치도(薪峙島)에 도착하였으나 강풍과 암초로 난파하였고, 고군산도(古群 山島)에 상륙하였다가 영국의 구조선을 타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인도차이나 기지 사령관 게랭(Guérin) 소장이 1856년 7월 16일부터 2개월 동안 조선 해안을 답사하고, 러시아가 조선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프 랑스가 선수를 쳐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지만 이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반응은 없었다. 그런 가운데 1866년 병인박해로 9명의 프랑스 선교사 가 살해되었으며, 이때 조선을 탈출한 리델(F.C. Ridel, 李福明) 신부는 천진(天津)으로 가서 프랑스 극동 함대 의 로즈(P.G. Roze, 魯勢) 사령관에게 선교사의 처형 소 식을 전하고 남은 신부들과 조선인 신자들의 구출을 요 청하였다. 로즈 사령관은 이 사실을 본국의 해군성에 보 고하는 한편, 북경 주재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H. de Bellonet, 白洛內)에게도 알렸다. 그러나 당시 인도차이나 에서 반란이 일어나 로즈의 조선 원정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고, 벨로네 공사는 1866년 7월 14일 총리아문의 공 친왕(恭親王)에게 서한을 보내 프랑스 사람을 처형한 일 을 보복하기 위해 프랑스 군대가 조선을 정복하러 갈 것 이라고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이후 인도차이나에서 돌아 온 로즈는 9월에 정찰 원정을 한 후, 10월 11일에는 7 척의 군함을 이끌고 출동하여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 였다. 이때 프랑스 군인들은 무기는 물론이거니와 도자 기 · 직물 · 은괴 및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책 들을 약탈하였을 뿐 아니라 일부는 민가에 침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1월 9일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梁 憲洙)가 이끄는 조선군에게 패한 후, 프랑스군은 11월 10일 철수를 시작하여 11월 21일에는 완전히 조선 해역 을 떠났다. 한편 종교적 · 군사적인 접촉 외에 1787년에는 프랑 스 탐험선들의 함장 라 페루즈(La Pérouse)가 서양인 최 초로 울릉도를 발견하여 다쥴레(Dagelet)라 명명하였고, 1849년에는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Liancourt) 호가 처 음으로 독도를 발견하여 서양에는 리앙쿠르 암초로 알려 지기도 하였다. 〔한불 조약과 양국 관계〕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 으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미국과 통상 조약(1882)을 맺음으로써 구미 제국과도 교류를 시작하였고,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영국, 독일 등과 함께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서둘렀다. 이에 북경의 프랑스 공사 부레(Bourée)는 1882년 6월 천진의 프랑스 영사 딜롱(Dillon)을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조약 내에 금교(禁敎) 사항를 밝히라는 조 선의 요구와 딜롱이 본국 정부로부터 임명된 전권 사신 이 아니라는 점 등이 이유가 되어 협약은 성사되지 못하 였다. 1885년 북경의 코고르당(Cogordan) 공사가 전권 대신으로 임명되어 이듬해 5월 조약 체결을 위해 조선을 방문하자 회담은 재개되었으나, 이때에도 전교의 자유를 반드시 문자로 명시하자는 프랑스 측과 그럴 필요가 없 다는 조선의 입장이 맞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그 러다가 내무협판(內務協辦) 겸 외아문 장교당상(外衙門 掌交堂上)인 데니(Deny)가 '특별한 조항으로 전교의 자 유를 명시하는 대신, 이미 체결된 다른 나라의 조규를 수 정하여 전교의 자유를 암시하자' 는 타협안을 제시하였 고, 그 결과 한영 조규(韓英條規) 제9관(款)의 내용에 "가르친다는 의미"의 교회(敎誨)를 추가하고, 제4관 6항 의 내용을 수정하여 구체적인 여행 목적을 밝히지 않더 라도 호조(護照)만 있으면 내지(內地)를 여행할 수 있도 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불 조약은 1886년 5월 26일 에 타결되었고, 6월 4일 조인되었으며 1887년 5월 30 일에 비준서를 교환하였다. 프랑스는 즉시 공관을 설치하지 않고 웨베르(K.I.Weber) 주한 러시아 공사에게 프랑스의 모든 사무를 위 임하였다. 그러다가 1887년 11월 플랑시(Collin de Plancy)가 정부 대표(Commissaire)의 영사(Consul)로 임명되 어 이듬해 6월 6일에 부임함으로써 공관이 설치되었다. 이후 조선 주재 외교관은 1900년 9월에 총영사로, 1901 년 4월에는 공사로 승격되었다가, 을사 보호 조약(乙巳保 護條約, 1905) 이후에는 공관이 총영사관으로 다시 격하 되었다. 한편 한국 측에서는 홍종우(洪鍾宇, 1854~?)가 1890년 12월에 법률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가 1893년 3 월까지 파리에 머물면서 <춘향전> · <심청전> 등 한국 고 전을 번역하여 한국 문화를 프랑스에 소개한 바 있고, 1900년 5월에는 이범진(李範晉, 1853~1911)이 초대 프 랑스 주재 공사로 부임하여 파리에 대한 제국 공사관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범진과 동행한 그의 아들 이위종 (李鍾, 1887~?)은 프랑스의 생 시르(Saint-Cyr) 육군 사관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한불 조약 체결 후에도 프랑스는 조선에 대하 여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관심은 거대한 상품 교역 대상인 안남(安南)과 청국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대해서는 그러한 교역 상대국으 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교의 자유와 같은 종교적 인 측면에서는 커다란 관심을 나타낸 반면 정치 · 무역 · 통상에 있어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에 반 해 조선은 부국 강병을 이룩하고 청국의 지나친 간섭에 서 벗어나 주권 독립국을 이루기 위한 협조를 적극적으 로 요청하고 기대하며 적극적으로 프랑스에 접근하였다. 그런 가운데 1895년 4월 프랑스는 중국에서 삼국간섭 (三國干涉)의 일원이 되었다. 즉 청일 전쟁의 결과 일본 이 중국으로부터 요동 반도를 할양받으려 하자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이를 저지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조선 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높아졌고, 이에 고종(高宗, 1863~1907)은 뮈텔(G.C.C-M. Mutel, 閔德孝) 주교를 통해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 속에서 프랑스가 조선을 보호해 줄 수 있는지 의논하였고, 1897년 아관 파천(俄館播遷) 후에는 프랑스 정부에 파병을 요청하려고도 하였다. 당 시 프랑스 역시 다른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철도, 광산 등 의 이권을 획득할 목적으로 조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인이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고빙되도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는 1896년 7월 경 의선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1901년 6월에는 창성의 광산 개발권을 획득하였으며, 1898년에는 우편 업무를 위해 클레망세(CIémencet)가, 1900년에는 법률 고문 크 레마지(Crémazy)가 고용되는 등 프랑스인 고문들이 활 동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 진출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선을 이해하고 또 조 선을 서양에 알리기 위해 조선의 역사, 언어, 풍습 등을 연구하고 관찰하였다. 예를 들어 1850~1860년대에 다 블뤼 주교는 《중한불사전》(中韓佛辭典)을, 푸르티에 (J.A.C. Pourthié, 申妖案) 신부는 《한중라사전》(韓中羅辭 典)을, 프티니콜라(M.A. Petitnicolas, 朴德老) 신부는 《나 한사전》(羅韓辭典)을 편찬하였고, 다블뤼 주교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비망기>(備忘記)와 조선 천주교회 사에 대한 <비망기>를 작성하여 파리로 보냈다. 그리고 리델 주교는 한국어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한불자전》(韓佛字典, 1880)과 《한어문전》 (韓語文典, 1881)을 편찬하였고, 1890년 서울 프랑스 공 관의 통역관으로 부임한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은 1894~1896년에 《조선서지》(朝鮮書誌)를 간행하였다. 이 《조선서지》는 조선의 서지 문화를 최초로 유럽에 소 개한 걸작이며, 이 외 포리(J.U. Faurie, 1901년 입국) 신부 와 타케(É.J. Taquet, 嚴宅基, 1898년 입국) 신부의 한국 식 물 연구도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함께 프 랑스는 1900년에 개최된 파리 만국 박람회에 조선이 참 가하도록 권유하여 조선을 유럽에 알리는 기회를 제공하 였고, 또 같은 해에 한불 간의 우편 협정을 체결하여 조 선의 체신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크레마지는 1904년 조 선의 형법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함으로써 조선 형법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한불 조약 이후 양국은 천주교 문제로 다시 한 번 갈등을 겪게 되었다. 즉 선교사들이 지방 각지에 성당 을 설립하고 전교하는 가운데 선교사와 조선의 지방 관 리, 천주교 신도들과 민간인 사이에 발생한 분쟁이 한불 간의 외교 문제로 확대되어 교안(敎案)으로 발전된 것이 다. 기록에 의하면 1886~1906년 사이에 300여 건의 교안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중 1901년의 제주 교안(濟州敎案)에서는 수백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종교적 갈등을 해 결하기 위해 1899년 교민 조약(敎民條約) 1901년 교 민 화의 약정(敎民和議約定) 1904년 선교 조약(宣敎條 約) 등이 체결되었다. 〔일제 강점기하의 한불 관계〕 1904년의 러일 전쟁에 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에 1904년 8월 22일 일제가 강요한 외국인 고용 협정에 따라 조선에 고용되었던 프랑스인들 은 모두 일본인으로 대치되었고, 이어 1905년에 체결된 을사 보호 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됨으로써 한불 간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도 단절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서 프랑스 정부는 1907년 6월 10일 일본과 협정을 맺어 러일 전쟁 결과 일본이 획득한 조선 및 만주에서의 특권 을 인정하는 대신 일본으로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 배권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한일 합방 (1910. 8. 29)을 승인(1911.6.21)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상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서는 한 국인들의 정치 활동을 묵인해 주었다. 그 결과 1906년 부터 1918년까지 많은 한인들이 상해의 프랑스 조계로 모여들었으며, 1919년 4월에는 이곳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尹奉吉, 1908~1932) 의사의 홍구 공원(虹口公園) 폭탄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측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은 임 시 정부는 같은 해 7월 1일 항주(杭州)로 이전하였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이듬해 파 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에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동료들과 함께 파리에 대표를 보내 진정서 를 제출하기로 하고 신한 청년단(新韓靑年黨)을 조직하 였다. 그리고 강화 회담에 파견할 한국 대표로 천진에 망 명 중이던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선정하였다. 1919년 2월 1일 상해를 출발한 김규식은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하여, 4월 10일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상해 에 수립되자 4월 13일자로 외무총장(外務總長) 겸 강화 회의 주(駐)파리 대표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대표 부의 명칭을 대한 민국 임시 정부 파리 위원부(委員部) 로 개칭하고 대열강 외교를 전개하였으나 파리 강화 회 의에서는 한국 문제가 거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후 에도 <자유 한국>(La Corée Libre), <한국의 독립>(L'Indépendance de la Corée) , <공보>(Le Bulletin d'information) 등 을 한국어, 프랑스어, 영어로 발행하며 프랑스 및 유럽 여론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당시 파리 위원부의 활동은 1919년 11월에 결성된 주법 한국민회(駐法韓國 民會)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들은 파리 위원부가 철수한 후에도 상해 임시 정부에 독립 운동 자금을 조달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인들의 독립 운동은 프랑스 인들에게 감명을 주어 1945년 3월에 드골(C. de Gaulle, 1890~1970) 장군의 프랑스 임시 정부는 열강 중에서 유 일하게 공식적으로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승인하였고, 이에 임시 정부는 파리 교포인 서영해(徐領海, 1902~ 1949)를 프랑스 주재 임시 정부 대표로 임명하였다. 이 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도 많은 한국인들이 프랑스에서 공부하였는데, 그중 윤을수(尹乙洙, 라우렌시오) 신부는 1939년 <조선의 유학사론>(Le Confucianisme en Corée)이 라는 논문으로 파리의 소르본(Sorbonne) 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아 최초의 박사 신부가 되었다. 〔국교 재개 이후의 교류〕 1945년 8월 광복을 맞이한 한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하고, 12월의 유 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았 다. 프랑스도 이때 찬성표를 던져 한국을 승인하였고, 이 듬해인 1949년 1월에 공사 대리 코스틸레스(Costillès)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2월 15일부터 공식적인 외교 업무 가 개시되었으며, 4월에는 옛 공사관 자리에 공사관을 마련하였다. 이에 한국도 공진항(孔鎭恒)을 프랑스 주재 공사로 임명하고 파리에 한국 공사관을 개설하였다. 국교를 재개한 이듬해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는 1950년 7월 7일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유엔 상임 이 사국으로서 한국 파병을 결의하였고, 7월 22일에는 한 국전 참전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전사 262 명, 부상 1,008명, 실종 7명의 손실을 입었다. 당시 참 전 용사 중 350명은 1955년 9월 10일, 한국 전쟁 참전 용사회(Association Frangaise des Anciens Combattants à la Guerre de Corèe)를 발족시켜 한국과 프랑스의 유대 강화 에 노력하였다. 1958년 10월 프랑스 제5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10월 10일 양국은 외교관의 지위를 공사급에서 대사급으로 승격시켜 외교 관계를 강화하였다. 그 결과 교류가 활발 해져 한국은 1959년부터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상표 협력 협정(1961), 관세 협정 (1963) , 특허권 상호 보호 협정(1963), 문화 및 기술 협 력 협정(1968) 등 양국의 경제 협력을 위한 제반 조치들 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1960년대 이후 한국은 외교적인 측면에서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을 아프리카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4년 프랑스가 대만 과 국교를 단절하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한 것, 1965년 프랑스의 정책과 달리 한국이 월남에 파병한 사 실, 그리고 1968년 드골이 파리에 북한의 통상 사무소 를 설치하도록 한 것 등이 한불 관계의 장애 요소로 작용 하였다. 한편 1969년의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과 1971년에서 1975년 사이에 주한 미군을 철수하겠다는 발표가 있자, 한국 정부의 대외 정책에도 변화가 생겨 기 존의 미국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변 외교를 전개하기 시 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프랑스와의 관계도 강화되어, 1973년 5월에 김종필(金鍾泌)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하 는 등 1970년대 초부터 양국 정치인들의 교환 방문이 증가하였고, 경제 부문에 있어서도 1973년에서 1980년 사이에 교역이 8배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81년 프랑스에 사회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의 승인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자 양국 관계는 악 화되었다. 그러다가 1983년 미얀마 랑군 폭파 사건이 발생하여 세계 여론이 남한에 유리해졌고, 또 1985년 파비우스(Fabius) 수상이 서울을 방문함으로써 양국 관 계는 다시 개선되었다. 이어 1986년에는 전두환(全斗 煥) 대통령이 대한 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랑 스를 방문하였고, 1989년에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파리를 방문하였으며, 1993년에는 프랑스의 미테랑(F. Mitterrand) 대통령이 방한하였다. 그런 가운데 1992년 부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 의 반환 문제가 제기되어 양국 간 반환 협상이 추진되던 중, 2001년 7월 민간 대표단이 국내 고문서와의 맞교환 을 합의하였으나 국내 학계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 다. 이에 한국 정부에서는 2006년부터 정부 차원에서 새로이 반환 협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2004년 12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을 계기로 양국은 '포괄적인 동반자 관계' 속에서 경제 · 문화 · 과학적인 교류를 늘려가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양국 관계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한불 수교 120주년이 되는 2006년 한 해 동안 기념 행사를 갖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2006년 3월부터 12월까지 한 국과 프랑스에서 동시에 다양한 문화 행사들이 개최될 예정이다. (→ 한불 수호 통상 조약) ※ 참고문헌  《韓佛修交100年史》, 한국사연구협의회, 1986/ 《교 회사연구》 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韓佛外交史》, 평민사, 1987.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