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 수호 통상 조약
韓佛修好通商條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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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권

한불 수호 조약 통상 조약문(왼쪽부터 인쇄본, 필사본 . 불어본).
1886년 6월 4일에 조인된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수호 통상 조약. 전문 13관(款)과 부속 통상장정(通商章程) , 세칙(稅則), 세칙장정(稅則章程), 선후속조(善後續條)로 구성되어 있으며, 치외법권(治外法權) 영사 재판권(領 事裁判制度), 관세의 편무적(片務的) 규정, 최혜국 조관 (最惠國條款) 등이 규정된 불평등 조약이다. 그러나 다 른 조약과는 달리 천주교의 전교(傳敎) 활동을 묵인하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어,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새로 운 전기를 맞이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조약의 체결 과정〕 한국과 프랑스는 1886년 통상 조 약을 맺음으로써 공식적인 접촉을 하게 되었지만, 종교 를 통한 비공식적인 접촉은 그 이전부터 있어 왔다. 1831년 조선 대목구(朝鮮代牧區)가 설정된 후 파리 외 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으며, 가장 먼저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는 1836년 1월 모방(P.P. Maubant, 羅伯多祿) 신 부였다. 그는 1837년에 입국한 샤스탕(J.H. Chastan, 鄭 牙各伯) 신부,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주교와 함 께 1839년에 순교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프랑스가 조선 에 접촉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1846년 8월 6일 중국· 인도 주둔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J.B.T.M. Cécille, 瑟 西爾)은 선교사 살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기 위해 충청 도 홍주 외연도(外煙島)에 나타났다. 그는 원래 조선의 대신과 면담할 예정이었으나, 선교사들을 살해한 이유를 묻고 그에 대한 회답은 내년에 와서 받겠다는 내용의 서 한만을 남겨 두고 떠났다. 이후 1847년에 라 피에르(La Pierre, 拉別耳) 해군 대령이 회답을 받기 위해 왔다가 난 파한 후 돌아갔고, 1866년 9월과 10월에는 병인박해 (丙寅迫害)를 계기로 로즈(P.G. Roze, 魯勢) 사령관이 이 끄는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공한 병인양요(丙寅洋擾) 가 발발하였다. 그 이후 별다른 접촉은 없었으나, 1876년 리델(F.C. Ridel, 李福明) 주교는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베롱 (Véron) 제독에게 조선과의 조약 추진을 건의하였고, 1878년에는 북경(北京)의 몽모랑(Montmorand) 프랑스 공사가 조선과 쉽게 조약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을 본국에 건의한 바 있었다. 또한 1880년 6월에는 푸르니에 (Fournier) 해군 대령이 3일간 부산진에 머물다가 돌아가 조선에 관한 새로운 정보와 수교 조건 등을 상세히 보고하 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이 1882년 미국과 통상 조약을 맺음으로써 구미 제국과도 교류를 시작하자, 프랑스 또한 이를 계기로 영국, 독일 등과 더불어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서둘렀다. 1882년 6월 북경의 부레(Bourée) 프랑스 공사는 천진 (天津)의 딜롱(Dillon) 영사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6월 5 일 제물포(濟物浦)에 도착한 딜롱은 마건충(馬建忠)을 만나 자신이 온 목적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당시 조선 측에서는 병인양요와 전교 문제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에, 마건충은 조약 내에 금교 (禁敎) 사항을 밝힐 것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고, 딜롱 은 조선이 미국과 맺은 내용대로 조약을 체결하기를 원 하였다. 그러나 본국 정부로부터 임명된 전권 사신도 아 닌데다 신임장도 없어 조약 체결권이 없던 딜롱은, 결국 6월 7일 마건충의 주선으로 김광집(金宏集)을 면담한 후 이튿날 조선이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할 의향이 있다 는 서한만을 갖고 텐진으로 돌아갔다. 이후 부레 공사는 8월경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조약을 체결하고자 하였으 나, 7월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하여 이 계획도 무 산되었다. 임오군란 후 조선에서 청(淸)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고종(高宗, 1863~1907)을 비롯한 개화파 관료들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세력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방도를 모색 하였다. 이에 1882년 10월 일본을 방문한 박영효(朴泳 孝, 1861~1939)와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주일 영 국 공사 파크스(Parkes)를 만나 한영 조약의 비준을 촉구 하는 한편, 주일 프랑스 공사와도 접촉하였다. 그리고 1883년 5월에는 고종이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에게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할 의사가 있음을 시사하였다. 푸 트는 이를 미 국무성에 보고하였고, 이는 다시 주미 프랑 스 공사 모르통(Morton)을 통해 프랑스 정부에 전해졌 다. 11월에는 묄렌도르프(P.G. von Möllendorf)가 조약 체 결에 협조할 의사를 밝히기도 하였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는 1883년 봄부터 안남(安南) 문 제를 둘러싼 분쟁에 휩쓸린 상태였고, 조선에서도 1884 년 12월의 갑신정변(甲申政變), 1885년 4월의 영국 함 대의 거문도 점령 등 중대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양국의 조약 문제는 거론될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1885년 북경의 코고르당(Cogordan) 공사가 전권 대신으 로 임명되면서 비로소 조약 교섭이 시작되었다. 1886년 5월 1일 제물포에 도착한 코고르당은 5월 6 일에 상경하여, 이튿날 외아문(外衙門)의 김윤식(金允 植, 1835~1922) 독판(督辦)과 회담을 시작하였다. 하지 만 이들은 반나절 동안 선교사 보호 문제만을 논의하다 가 결말을 보지 못한 채 헤어졌고, 5월 11일에 재개된 회담에서도 시종일관 전교의 자유와 선교사의 보호 문제 에서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프랑스 측에서는 전교 의 자유를 반드시 문자로 명시하기를 요구한 반면, 조선 측에서는 전교는 금하지만 선교사를 가해하지는 않을 것 이므로 문자로 명시할 필요가 없다고 맞선 것이다. 이런 와중에 조선 정부는 조약 체결에 있어 청국의 영 향력을 배제하고자, 5월 19일에 원세개(袁世凱, 1859~ 1916)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김윤식을 경질하고 김만식 (金晩植)을 새로운 전권 대사로 임명하였으며, 21일에 는 내무협판(內務協辦) 겸 외아문 장교당상(掌交堂上) 인 데니(O.N. Denny, 1838~1900)가 협상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5월 25일에 재개된 협상에서도 전교 조항 삽입 문제가 걸림돌이 되자 코고르당 공사는 귀국을 결심하였 다가 블랑(G.-M.-J. Blanc, 白圭三) 신부의 부탁으로 다시 협상을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특별한 조항으로 전교의 자유를 명시하 는 대신, 이미 체결된 다른 나라의 조규를 수정하여 전교 의 자유를 암시하자' 는 데니의 타협안이 제시되었다. 그 리하여 한영 조규(韓英條規) 9관 2항의 내용에 '가르친 다' 는 의미의 '교회' (敎誨)를 추가하고, 4관 6항은 구체 적인 여행 목적을 밝히지 않더라도 호조(護照)만 있으면 내지(內地)를 여행할 수 있다고 수정하였다. 이로서 한 불 조약은 5월 26일 타결되었고, 조선 측에서 제기한 관 세율 문제가 해결된 후인 6월 4일 조인되었다. 그리고 1887년 5월 북경의 프랑스 참사(參事) 플랑시(Collin de Plancy)가 내한하여 외무독판으로 재기용된 김윤식과 비 준서를 교환함으로써 발효되었다. 〔조약의 내용과 의미〕 한불 조약은 한영 조약을 원형 으로 하여 약간 수정을 가한 것으로, 전문 13관과 통상 장정, 세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 제1관에는 조선 과 프랑스의 평화와 영구적인 화친에 대한 내용이 규정 되어 있고, 2관과 3관에는 영사 재판권에 대한 규정이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4관과 5관에는 개항장과 수출입 조건 및 프랑스 국민들의 상업 활동에 대한 내용이, 6관 에는 밀수 금지, 7관에는 난파선 문제, 8관에는 프랑스 군함이 항구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특별 대우 규 정이 있으며, 9관에는 양국 국민의 권리를 보증하는 가 운데 프랑스 사람은 조선의 말과 글, 법률, 예술 등을 배 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르치기 위해 조선 국내를 여행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이어 10관에는 프랑스에 대 한 최혜국 대우 규정이, 11~13관에는 조약의 개정 · 공 증 · 비준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통상장정에는 선박의 출입항, 하역, 선적, 관세, 세무 등에 관한 내용 이, 세칙에는 수출입품에 대한 세율이 규정되어 있다. 한영 조약과 달리 수정된 4관 6항과 9관 2항의 내용 은 전교의 자유와 관련된 것으로, 이를 통해 프랑스 선교 사들은 이제 호조를 발급받으면 '교회' 라는 명목으로 조 선 내에서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종교 문제 때문에 한불 조약은 구미 열강 중 어느 나라와의 조약보다 어렵고 또 늦게 체결되었지만, 이는 프랑스가 자국의 전통적인 종교 보호 정책을 조선에서도 반드시 관철시키고자 한 결과였다. 한불 조약은 저관세율, 영사 재판권, 최혜국 조관 등을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다. 그러나 중국의 협조나 간섭 없 이 프랑스와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이 주 권 국가임을 만방에 인지시켰다는 점에서 정치 외교사적 의의가 크며, 아울러 다른 나라와는 달리 전교의 자유를 묵시적으로 보장하였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 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조약이다. (→ 한불 교섭사) ※ 참고문헌 최석우, 〈韓佛條約 체결과 그 후의 양국 관계>, 《韓佛修交100年史》, 한국사연구협의회, 1986/ 이원순, 〈韓佛條約 과 宗教 自由의 문제>, 《교회사연구》 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박일근, 《韓佛條約 締結過程에 對한 研究》, 평민사, 1987. 〔方相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