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역 서학서

漢譯西學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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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초기까지 중국에서 그리스도 신앙 선교에 종사하던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이 천주교를 전하는 한편 서양과 서양 문명을 전수하기 위하여 한문으 로 엮어 펴낸 서양과 서양 문화에 관한 서적과 저작물들. 〔저술의 동기와 목적〕 중국 선교에 나선 천주교의 서양 성직자들이 한역 서학서를 저술하여 펴낸 근본 동기는, 중국 사회가 서양 못지않은 오랜 역사와 수준 높은 독자 적 문화를 소유한 세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 방적인 선교 활동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현 지 적응주의의 선교 원칙에 따라 문화주의적인 방법과 보 유주의적(補儒主義的)인 학문 활동으로 선교에 나섰다. 그리고 중국 사회의 기존 가치 체계와 다른, 그리스도 신 앙의 가치 체계를 담은 서양과 서양 문화를 중국 사회에 소개 · 전달하면서 중국인의 의식 세계를 확대 · 변화시키 고자 하였다. 한편 그리스도 신앙을 유학(儒學)과 관계지 어 중국 사회에 침투시키려는 전교 의도를 바탕으로, 이 러한 목적 수행에 필요한 서양과 서양 문명에 관한 문제 를 한문으로 엮어서 중국 사회에 펴낸 것이다. 이와 같은 현지 적응주의적 · 현지 융합주의적인 전교 방침은 동양 선교의 현지 지도를 담당하고 있던 예수회 동양 순찰사 발리냐노(A. Valignano, 范禮安, 1538~1606) 신부의 전교 방침에 따른 것이다.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처음 시작하게 된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은 이 방침을 충 실하게 실행에 옮겨, 1601년 '중국 개교 (中國開敎)에 성공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1552~1610)를 비롯하여 많은 서양 선교 신부들이 한역 서학서를 펴냈 다. 그리고 이를 접한 중국인들의 우주관 · 세계관 및 문 화 의식이 서서히 바뀌어 마침내 유교 문화 세계인 중국 에서 천주 신앙을 수용하는 지식인들이 생겨났고, 서양 과학 기술의 선진성을 이해하게 된 중국 왕실은 실용적 차원에서 서양 문화의 일부를 수용하였다. 다시 말해 한 역 서학서와 일부 서양 문물은, 전통적 문화 세계이던 중 국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고 역사적 자극을 계속 공여하 는 등 그리스도적 이질 문화 세계를 중국에 이식하는 씨 (종자)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한역 서학서를 '한문 서양서' (漢文西洋書) 또는 '한문 서학서' (漢文西學書)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한문 서학서는 한문으로 기록된 서양 관계 서적 이라는 일반 개념을 포함한 어휘이므로, 명말 청초 중국 의 서양인 선교사가 선교사로서의 문화 의식과 전교 의 욕을 가지고 선정한 서양 학문과 서양 과학-중세 스콜 라 학문과 르네상스기의 과학 기술-을 중국 사회에 알 리기 위해 학술 서적을 번역하거나 중국 지식인들이 이 해할 수 있도록 번안(飜案)하여 한문으로 간행하였다는 역사적 특성을 나타내기에는 부적합한 호칭이다. 〔중국에서의 한역 서학서〕 최초로 한역 서학서를 펴낸 사람은 마카오(Macau)를 근거로 중국 내륙 선교에 나선 루지에리(M. Ruggieri, 羅明堅, 1543~1607) 신부로, 그는 1582년 중국 전도에 나섰으며 1584년에 한문으로 된 소책자형 천주교 교리서《천주실록)(天主實錄)을 펴냈 다. 이어 처음으로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北京)에 들어 가 만력제(萬曆帝, 1573~1620)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황 제의 묵인하에 천주교를 선교한 마테오 리치 신부는, 북 경 입성에 앞서 한문으로 작성하여 중국 사대부의 관심 을 끌었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1603년에 북경에서 공간하였다. 중사(中士, 중국 학자)와 서사(西士, 서양 학 자)의 대화 형식으로 서술된 《천주실의》는 동서 사상· 문화 · 철학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 문제를 풍부하 게 다른 것으로, 중국뿐만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 및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여러 나라에 급속하게 유포되어 큰 영 향을 미치게 된 최초의 본격적인 한역 서학서였다. 마테 오 리치는 10년 후 북경에서 사망할 때까지 중국 학자들 의 도움을 받으며 종교 · 윤리 · 수학 · 과학 기술 등에 관 한 한역 서학서를 근 20권이나 저간하였다. 또한 한문 세계 지도인 〈만국여도〉(萬國輿圖)를 판각하여 중국인 들의 중화주의적 세계관에 큰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마테오 리치의 뒤를 이어 중국 전교에 나선 예수회 소 속의 선교 신부들의 소속 국적은 이탈리아 · 독일 · 프랑 스 · 포르투갈 · 오스트리아 · 헝가리 · 폴란드 등 매우 다 양하였으나, 모두 한문을 익히고 한문 서학서를 간행하 였다. 20종이 넘는 다수의, 또는 중국 사회에 각별한 영 향을 끼친 한역 서학서를 간행한 신부들도 있었다. 예수 회는 교황 특명에 의해 해산 조치가 취해진 1775년까지 170여 년간, 다양한 방면의 한역 서학서를 간행하여 중 국에 유포시켰다. 그 후 중국 전도에 나선 도미니코회 (1631), 프란치스코회(1633년 이후), 아우구스티노회 (1680년 이후)와 파리 외방전교회(1684) 등 여러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도 유익한 한역 서학서를 저간하며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당시 중국에 유포된 한역 서학서 의 총량은 400권 이상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한역 서학서는 《천주실의》나 《서학범》(西學凡)과 같이 서양 선교사가 직접 한문으로 저간한 것도 있고, 선교사들 이 구술한 내용을 중국 학자가 필술한 것도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마테오 리치가 구술하고 명말의 석학이며 천주교도였던 서광계(徐光啓, 1562~1633)가 필술한 《기하 원본》(幾何原本)과, 삼비아시(F. Sambiasi, 畢方濟, 1582~ 1649)가 구술한 것을 서광계가 기록한 《영언여작》(靈言蠡 勻)이다. 또한 불리오(L.L. Buglio, 利類思, 1606~1682)의 《초성학요》(超性學要)처럼 선교 신부가 번역한 것을 중국 학자가 윤색하여 간행한 한역 서학서도 있다. 이처럼 예수 회 선교사들의 한역 서학서 출간에 협력한 중국 석학으로 는 서광계, 이지조(李之藻), 양정균(楊廷筠), 풍응경(馮應 京), 이천경(李天經), 왕징(王徵), 한림(韓霖), 은곤(殷 袞)과 구식사(瞿式耜) 등이 유명하다. 예수회 중국 선교사들이 이처럼 많은 한역 서학서를 저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철학과 신학뿐만이 아니 라 과학 기술에도 박학하였으며, 문화적 전교 의욕과 중 국 사회에 서양 문물을 전수하려는 문화 의식이 강했기 에 가능하였던 일이었다. 예수회는 수사가 되기 전에 철 학과 신학을 의무적으로 수학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그 밖의 다른 하나의 학문을 전공하도록 교육시켜 왔기에 다양한 문화 분야에 걸쳐 학문 활동을 할 수 있었고, 특 수 기술의 전문적 능력을 갖춘 선교사들이었기에 가능하 였다는 사정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북경의 4천주당을 비 롯한 각지의 천주당에 도서관 시설이 있고, 특히 1618 년 트리겔(Trigaulus, 金尼閣) 신부가 공무로 로마에 출장 을 갔을 때 하사받은 7천여 권의 귀중 서적을 북경으로 가져와 도서관을 설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 학과 기술 관계의 한역 서학서가 저술된 것은 당시 청나 라 강희제(康熙帝, 1661~1722)의 서학 추미(追尾)와 농 업 사회에서 제왕(帝王)의 학문이던 천문 역산술에 대한 중국 왕실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한역 서학서는 크게 서학의 '기' (氣)인 과학 기술 관 계 서학서와 '이' (理)인 종교 윤리 관계의 서학서로 구 분되나, 이를 성서류, 진교변호류(眞敎辯護類), 신학 류 · 철학류, 교회사류, 역산과학류(曆算科學類)와 격언 류로 구분하기도 한다(徐宗澤 편저, 《明清間 耶蘇會士譯著提 要의 구분》). 명말 청초에 도입된 실용적인 서양 문물과 한역 서학 서는 유교적 중국 전통 사회에 신선한 문화 자극을 주어, 중국 지식인들의 우주관 · 세계관이 확대되고 관념과 이 론에 치우쳐 있던 학문을 실증과 실용의 학문으로 바꾸 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한역 서학서는 중 국 중심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고 천주교가 수용될 수 있 는 사회적 변화를 태동시켜, 유 · 불의 전통적 가치 세계 이던 중국 사회에 커다란 문화적 충격과 사회적 변화를 촉구하는 새로운 가치 체계를 담은 학문 자료가 되었다. 〔조선에서의 한역 서학서〕 중국 사회에 유포되던 한역 서학서는 한자 문화권 내의 각국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조선에 한역 서학서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 로, 1603년 중국에 사행하였던 이광정(李光庭, 1552~ 1627)이나, 1631년 진주사로 중국에 다녀온 정두원(鄭 斗源, 1581~?), 1644년 북경에서의 볼모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 등이 여러 종류 의 서양 문물과 한역 세계 지도와 한역 서학서를 도입한 것이 그 선도적 사례로 알려져 있다. 한역 서학서 도입의 주역은 명 · 청 시대 해마다 파견 되었던 사대 사행(事大使行)의 관계자들이었다. 사대 사 행원들은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공무를 집행하는 한편 문화적 호기심과 관광을 목적으로 천주당(天主堂)이나 흠천감(欽天監) 등 서양 선교사들의 거처를 방문하여 교 류를 가지며 서양 문물과 한역 서학서를 받아, 또는 친지 인 중국학자들로부터 한역 서학서를 구해 본국으로 돌아 왔다. 이처럼 한역 서학서는 정조대에 들어 천주교를 금 압하면서 중국으로부터의 사서(邪書) 도입을 금지하는 조치가 취해지기까지 거의 2세기에 걸쳐 조용하게 조선 으로 유입되었다. 비교적 초기에 도입된 한역 서학서는 《천주실의》, 《칠극》(七克), 《교우론》(交友論) , 《기인십 편》(奇人十篇), 《영언여작》, 《변학유독》(辨學遺牘), 《진 도자증》(眞道自證) 《성세추요》(盛世芻蕘) 등의 천주교 서와 《기하원본》, 《치력연기》(治曆緣起), 《천문략》(天門 略), 《혼개통한도설)(軍蓋通憲圖說), 《동문산지》(同文算 指) 등의 역산 기술서, 그리고 《서학범》(西學凡), 《기기 도설》(機器圖說), 《태서수법》(泰西水法), 《원경설》(遠鏡 說) 등의 과학 기술서와 《곤여만국전람도》坤與萬國全 覽圖), 《양의현람도》(兩儀玄覽圖) 등의 한역 세계 지도 및 《직방외기》(職方外紀)나 《서방요기》(西方要紀) 등의 지리서이다. 천문 역산술과 관계되는 기술관, 대륙 문화에 관심이 컸던 북학론자 및 실학적 깨우침을 품게 되었던 재야의 실학적 지식인들은 이러한 한역 서학서에 문화적 호기심 과 학문적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관심이 이어져 18세기 중반 실학자 이익(李瀷, 1681~1763)을 중심으로 한 이른 바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이 한역 서학서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게 되어 조선 서학' 의 학문 세계가 열린 것이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나 정약용(丁若鏞, 1762~ 1836)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서학서에 대한 관심은 일 부 지식인들 사이에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서학을 전면 배격하자거나 과학과 기술 은 수긍할 수 있으나 서양의 종교와 윤리설은 배격하여 야 한다는 주장과, 반대로 서학을 전면적으로 수용 실천 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성호학파의 일부 소장 학자들은 보유론적으로 천주 신앙을 깨우치고 이를 수 용 · 실천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천주 신앙을 실천하는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다. 한편 서학의 천문 역산술 도입 을 주장하던 관상감 책임자 김육(金墳, 1580~1658)과 관 계 기술관들의 노력으로 1653년에는 시헌력(時憲曆)이 채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싹이 움트던 조선 서 학은 이(理, 종교와 윤리 사상)와 기(器, 과학과 기술의 실 용)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강행된 천주교 금압 정책 에 따라 채 자라지도 못하고 삼제되었다. (⇦ 서학서 ; → 《경세금서》 ; 《고려주증》 ; 《고려치명사략》 ; 《기인십 편》 ; 《기하원본》 ; 《만물진원》 ; <묵상지장> ; 바뇨니 ; <발원요리> ; 《변학유독》 ; 《변혹치언》 ; 《서학범》 ; 서학 사상 ; 《성경광익》 ; 《성경직해》 ; 《성교감략》 ; 《성교리 증》 ; 《성교명징》 ; 《성교사규》 ; 《성교요리》 ; 《성교절 요》 ; 《성교천설》 ; 《성교통고》 ; 《성년광익》 ; 《성모 성 월》 ; 《성모 행실》 ; 《성세추요》 ; 《성 요셉 성월》 ; 《성체 요리》 ; 《수난시말》 ; 《수진일과》 ; 알레니) ※ 참고문헌  李元淳, 〈明清來 漢譯西學書의 韓國思想史적 의 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 1986/ 裴賢淑, <조선에 전래된 천주 교 서적>, 《한국천주교회창실 200주년기념 한국교회사논문집》 1, 1984/ 徐宗澤 편저, 《明清孟耶蘇會士譯著提要》, 대만 중화서국 인 행, 중화민국 47년. 〔李元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