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교구

咸興教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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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 수도원 및 신학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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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원 수도원 및 신학교 전경


함경남도의 원산시 · 안변군 · 덕원군 · 고원군 · 문천군을 관할하는 '덕원(德源) 면속구 (免屬區, 自治修道院區, abbatia nullius)를 제외한, 함경남 · 북도 전역의 사목을 관할하는 교구. 1920년 8월 5일 경성 대목구(현 서울대교구)에서 분리 설정되어 함경남 · 북도 전역을 관할하던 '원산 대목구 가 1940년 1월 12일 덕원 면속구 와 '함흥 대목구 로 분리되었다. '함흥 대목구 는 교구 설정 후 10년이 채 못 된 1949년 5월 9일 이후 교구 관할지역 내에서 활동하던 성직자와 수도자 전원이 체포되거나 해산되어 목자 없는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1962년 3월 10일 한국 천주교회의 교계 설정과 함께 교구로 승격되었다. 〔역대 교구장〕 초대 사우어(B. Sauer, 辛上院) 보니파시오 주교(1940. 1~1950. 2), 2대 비테를리(T. Bitterli, 李聖道) 디모테오 몬시놀(1952. 5~1980. 10), 3대 이동호(李東鎬) 플라치도 아빠스(1981. 5~2005. 11), 4대 장익(張益) 요한 주교(2005. 11~현재). [교 세] 1940년에는 덕원 면속구와 함흥 대목구를 합하여 성직자 35명, 본당 12개(4+8) 공소 89개, 신자수 11,004명이었으나, 1944년에는 함흥교구만 본당 9개, 공소 31개, 신자수 5,475명에 이르렀다. 〔함흥 대목구 설정과 이후의 상황〕 서울 대목구장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주교는 1940년 5월 13일 덕원 수도원 성당에서 '덕원 면속구' 설정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사우어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착좌하였다. 이어 5월 14일 함흥 본당에서는 '함흥 대목구 설정식을 거행하였는데, 빠른 시일 내에 함흥 대목구를 한국인 감목 대리에게 맡긴다는 전제하에 덕원 면속구의 교구장인 사우어 주교가 함흥 대목구의 교구장 서리(Apostolic Administrator)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로써 '덕원 면속구 와 '함흥 대목구 는 형식상 완전히 분리되 었다. 1940년부터 일본 정부는 노골적으로 반그리스도교적인 조치를 실행하였다. 주일 미사 후 신사 참배를 강제하였고 사립학교들은 공립학교로 전환시켰으며, 교실에 걸려 있던 십자가를 제거하고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용 신단(神壇)을 세웠다. 당시 일본과 독일이 상호 우호 조약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인 선교사들조차 첩보원 혐의를 받아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하였고 여행의 자유도 제한되어 3개월마다 '거주 신청 갱신' 을 해야 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전쟁 상대국인 미국과 아일랜드 출신의 메리놀회 선교사들을 체포 · 구금하자 평양 대목구장 대리로 임명된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신부는 각 교구에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덕원 면속구와 함흥 대목구에서는 한도준(韓道俊, 마태오) · 김동철(金東哲, 마르코, 1915~1950) · 최병권(崔炳權, 마티아, 1908~1949?) 신부 등을 파견하였다. 1942년 서울 용산의 예수성심신학교와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일제의 강압으로 폐교되자 신학생들은 함흥 대목구의 덕원 신학교로 편입하였고, 이후 신학교 건물은 일제에 의해 강제 징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한을 통치하게 된 소련은 교구와 수도원에 서서히 종교적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8월 21일 수녀들과 계림 준본당으로 피난하였던 회령 본당 주임 파렌코프(W. Farrenkpf, 朴偉明, 1906~1945) 신부가 본당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회령으로 갔다가 8월 22일 소련군에 의해 피살당하였다. 1946년에 실시된 토지 개혁으로 건물과 대지를 제외한 모든 토지를 빼앗긴 덕원 성 베네딕도 수 도원은 이듬해에 단행된 화폐 개혁으로 더욱 큰 타격을 입었다. 그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가 되었고, 전국 각지의 신자들이 모금을 펼쳐 의연금을 지원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1949년 5월 초까지 함흥 대목구를 비롯한 북한 지역에서 형식적인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었다 〔덕원 수도원의 해산과 수난〕 1948년 12월 1일 덕원성 베네딕도 수도원의 경리 책임자인 엔크(D. Enk, 嚴光 毫, 1907~1950) 신부가 밀주 제조와 탈세' 혐의로 체포되었고, 1949년 4월 28일 인쇄소 책임자인 피셔(L. Fischer, 基, 1902~1950) 수사는 '불온물 인쇄' 혐의로 체포되었다. 또 그해 5월 9일 밤, 북한 공산당 정치 보위부는 덕원 수도원을 점령하여 사우어 주교와 로트(L. Roth, 洪泰華, 1890~1950) 원장 신부, 슐라이허(A. Schleicher, 安世明, 1906~1952) 부원장 신부, 클링사이즈(R. Klingseis, 吉世東, 1890~1950) 신부를, 11일 밤에는 신학교 학장 로머(A. Romer, 盧炳朝, 1885~1951) 신부와 수도원에 체류 중이던 독일인 신부 8명과 수사 22명, 김치호(金致鎬, 베네딕도, 1914~1950) · 김종수(金宗洙, 베르나르도, 1918~1950) · 김이식(金利植, 마르티노, 1920~1950) ·최병권 신부 등 4명의 한국인 신부를 체포하였다. 그들은 허원한 수사와 양성기에 있던 청원자와 지원자 등 총 26명의 한국인 수도자와 73명의 신학생들을 귀가시키고 수도원을 접수하여 김일성 농과대학으로 전용하였다. 함흥 대목구 내의 모든 본당에서 사목하던 신부들과 수녀들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선교 활동은 전면 중단되고, 평양 인민 교화소로 압송된 성직자와 수도자 중 8명은 유죄 판결을 받고 옥사하거나 피살되었다. 사우어 주교와 로트 원장 신부는 수도원의 책임자로서 국법을 어겼다는 혐의, 피셔 수사는 '불온물 인쇄' 혐의, 엔크 신부는 '밀주 제조와 탈세' 혐의, 영흥 본당의 주임인 슈테거(G. Steger, 全五範, 1900~1950) 신부는 해성학교 종교 시간에 무신론을 반박한 혐의, 클링사이즈 신부는 반공산주의 책자인 《인간의 영혼은 물질인가 정신인가》를 저술하였다는 혐의, 의사였던 그라하머 (J. Grahamer, 咸要燮, 1888~1950) 수사는 간호사를 구타하였다는 혐의, 운전사였던 기에게리호(G. Giegerich) 수사는 불법 운전 면허증을 소지하였다는 혐의가 유죄 판결의 이유였다. 김치호 · 김종수 · 김이식 · 최병권 · 구대준(具大浚, 가브리엘, 1912~1950) · 김봉식(金鳳植, 마오로, 1913~1950) 신부 등 6명의 한국인 신부들은 비밀리에 사살되었다. 그 외의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신부 17명, 수사 22명, 수녀 20명)들은 1949년 8월 6일 평양 인민 교화소를 떠나 자강도(慈江道) 전천군 별하면 상방리에 소재한 옥사독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그러던 중 한국 전쟁이 일어나 1950년 10월 23일에 연합군의 폭격을 피해 만포 수용소, 관문리 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1년 1월 16일 옥사독 수용소로 다시 돌아오는 약 4년 8개월간의 '죽음의 행진' 을 겪었다. 옥사독 수용소에 수용된 독일인 선교사들의 생존 가능성에 대한 소식이 유럽에 알려지자, 당시 서독의 초대 총 리인 아데나워(K. Adenauer, 1876~1967)는 직접 소련을 방문하여 이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고 마침내 1953년 11월 20일 옥사독 수용소에 갇혀 있던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평양으로 이송되어 요양을 한 후 이듬 해 1월 8일 북한 땅을 떠났다. 그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모스크바와 바르샤바를 거쳐 프랑크푸르트의 중간 수용소인 프라이란트(Friland)에 도착하였고, 1월 22일 12명의 신부와 12명의 수사, 18명의 수녀들은 서독의 괴팅겐(Götingen)에 도착하였으며, 1월 24일 문헨으로 가서 벤텔(JosephWendel) 추기경과 국가 관리들, 신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독일로 송환된 생존자는 42명으로, 평양 인민 교화소에서 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8명은 옥사하거나 피살되었으며, 옥사독 수용소와 '죽음의 행진' 으로 표현되는 피난 생활 중에 신부 5명, 수사 10명, 수녀 2명 등 총 17명은 배고픔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병고 끝에 목숨을 잃었다. 〔남한에서의 재건〕 1949년 5월 12일 덕원 수도원에서 추방된 한국인 수도자와 신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38선 이북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이들은 그곳을 찾아갈 수 있었으나 남쪽에 집이 있는 이들은 삼엄한 경계를 뚫고 군사 분계선을 넘어야 하였다. 도민증에 신분이 기재되어 있는 수사들은 여행이 쉽지 않았다. 김영근(金永根, 베다) 차부제와 임근삼(林根三, 곤라도) 수사는 평양에 숨어 지내면서 평양 인민 교화소에 갇혀 있던 사우어 주교와 수도자들의 신변 상황을 살피고, 교화소 담당 의사인 노재형 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주교에게 의약품과 성체를 전해 주었다. 하지만 이들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1950년 2월 21일 월남하여 교황 대사인 번(J.P. Byrne, 方溢恩, 1888~1950) 주교에게 북한 교회의 소식과 사우어 주교의 사망 소식을 알렸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의 슈미트(C. Schmid, 金時練, 1883~1962) 총아빠스는, 스위스 출신으로 덕원 신학교 교수였다가 미국에 체류 중인 비테를리 신부를 한국 수도 공동체의 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수사들은 휴전으로 함경도 지역 천주교회의 재건이 어려워지자 임시로 경북왜관에 정착하였다. 교황청은 1952년 5월 9일 비테를리 원장 신부를 덕원 면속구와 함흥 대목구의 교구장 서리로 임명하고 1954년에는 연길교구장 서리직까지 그에게 위임하였다. 또한 1940~1966년 사이에 서품을 받은 함흥교구와 연길교구 소속 사제들은 함흥교구와 연길교구에서의 사목 활동이 가능해지면 본래의 교구로 돌아간다는 조건으로 서울, 수원, 부산, 마산교구 등으로 이적되었다. 1981년 5월 22일부터 왜관 수도원의 2대 이동호 아빠스가 덕원 면속구 및 함흥 교구장 서리직을 함께 맡아 왔으며, 2005년 11월 21일 교황 베네딕도 16세는 덕원 면속구 교구장 서리로 왜관 수도원의 4대 이형우(李瀅禹, 시몬 베드로) 아빠스를, 함흥교구장 서리로 춘천교구장인 장익(張益, 십자가의 요한) 주교를 각각 임명하였다. (→ 덕원 면속구 ; 덕원 본당 ;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 덕원 신학교 ; 베네딕도회 ; 연길교구 ; 원산 대목구 ; 원산 본당 ; 함흥 본당) ※ 참고문헌  Schematismus Monachorum Et Fratrum Congregationis Ottiliensis O.S.B., 1940/ Frumentius Renner, Die Berufung der Benediktiner nach Korea und Manchukuo, Der Finfarmige Leuchter II, EOS Verlag, 1971/ A. Kasper . P. Berger, HWAN GAB( 還 甲), Miunsterschwarzach, 1973/ D. Drexl, hrsg., Necrologium, St. Ottilien, 2000/ Helmut Moll, Zeugen für Christus. Das deutsche Martrologium des 20. Jahrhunderts Bd. II, Schöningh, Paderbom, 2. Aufl., 2000/ 김창 문 . 정재선 편, 《한국 가톨릭 어제와 오늘》, 가톨릭 코리 아사, 1963/ 최석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왜관 성 마오로 쁠라치도 수도원 편, 《옛 등걸에 새 순이》, 분도 출판사, 1984/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편, <원산 수녀원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88/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어 자료집》,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89/ 一, 《원산 교구 연대기》,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1/ 一, 《함경도 천주교회사》, 함경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95. 〔宣智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