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마당 본당

蛤蟆塘本堂

글자 크기
12

연길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만주 간도성 연길현 북합 마당 대방자(滿洲 間島省 延吉縣 北蛤蟆塘 大房子) 소 재. 1930년에 설립되었다가 1946년에 폐쇄되었다. 주 보는 성모 영보(聖母領報) 〔교 세〕 1936년 590명. 〔역 대 신부〕 쾨스틀러(B. Köstler, 高) 보니파시오(1930~ 1946)합마당 대방자 지역은 산림 지대로 조선인들이 드문 곳이었으나, 점차 농토가 개발됨에 따라 이주자들이 증 가하였다. 이에 이곳에 정착하는 천주교 신자들도 점차 많아지자, 1927년 베네딕도회의 랍(K. Rapp, 朴) 신부는 본당 설립을 계획하고 강당을 세웠다. 그리고 1930년에 초대 주임으로 쾨스틀러 신부가 부임하면서 합마당 본당 이 설립되었다. 쾨스틀러 신부는 본당 설립 이듬해인 1931년 서양식 벽돌 성당을 완공하여 12월 13일 연길 지목구장 브레허(T. Breher, 白) 신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식을 거행하였고, 교육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해성 학교(海星學校)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그는 1932년 7월 비적에게 납치되었다가 풀려났고, 1933년에는 본당이 비적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등 전교 활동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합마당 본당은 1934년에 관할 공소인 백초구(百草溝) 공소를 준본당으 로 승격 · 분리하였고, 1936년에는 간도 천주교 전래 40 주년을 기념하여 <최후 승리>라는 성탄극을 공연하고 본 당 및 공소 신자들의 제등 행렬을 실시하였다. 합마당 본당은 설립 6년 만인 1936년에 공소 5개소, 신자수 59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였고, 해성학교도 교원 3명에 학생 104명을 수용하는 학교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군청 소재지인 백초구로 신자들 이 이주하면서 신자수가 감소하자, 쾨스틀러 신부는 본 당을 백초구로 이전하기로 계획하고 부지를 매입하였으 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무산되었다. 전 쟁이 끝난 후인 1946년에는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당을 비롯한 모든 교회 재산을 몰수당하고 본당마저 폐쇄되었다. 쾨스틀러 신부는 1946년 5월, 다른 선교사 들과 함께 중국 공산당에 의해 연길 감옥을 거쳐 두만강 인근에 위치한 남평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가혹한 수용소 생활로 영양 실조에 걸려 두도구(頭道溝)로 나와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1947년 3월 25일 선 종하였다. (→ 연길교구) ※ 참고문헌  《한국가톨릭대사전》 5권, p. 3233 · 9권, pp. 6134~ 6142/ 《경향잡지》 724호(1931. 12) · 845호(1937. 1)/ 《가톨릭 研究》 3권 9호(1936. 9)/ 《가톨릭 青年》 4권 10호(1936. 10)/ 《은혜의 60 년》,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 1995. 〔梁仁誠〕